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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채근담과 장자, 노자를 이야기하다가 이번 주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로 시작합니다.
별 뜻은 없습니다. 추석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들어와 그냥 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무엇이고 그의 변형, 즉 사이비가 무엇인지에 대해 써놓은 책입니다.
더 이상 회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에 아직 저의 관심이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세상이 갈수록 더 빈부의 차가 커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경쟁의 장은 넓어만 가서 나의 또래도 나의 지역사회도 나의 나라도 아닌 세계 전체를 경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누구나 생각하듯, 너무나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현실의 꽁무니를 좇아가다가도, 늘 생각 저 편에는 이러다 '공멸'하지는 않을까 저으기 걱정되는 면이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귀를 기울인다면야 이 모든 고민과 걱정들이 한낱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분석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서는 다양한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쓰레기통 속에서 이미 용도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꿈틀대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이상의 실현을 바라는 이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상이란 다름 아닌 차별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상'이라고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온갖 잡사상과 뒤범벅시켜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 심지어, 이 책에서 말하는 온갖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차별없는 세상을 만드는 주체는, 오로지 노동계급밖에 없으며,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장악하여 계급을 철폐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온갖 수식어를 빼고 핵심만 말하면,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이론, 그것도 국제적 혁명 이론"입니다.
여기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저'의 간극은 벌어집니다. 물론 제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공부하며 그들의 이상과 나의 이상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했던 적이 있기는 했으나,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물구나무 선 나의 '의지'뿐이였음을 알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고. 이 말을 기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이상, 저는 그 말에 일말의 토도 달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한 진실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 역시 저의 현 존재로부터 의식이 규정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식 계급 분류에 의하면 저는 쁘띠부르주아지에 해당됩니다. 쁘띠부르주아지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소상점주나 그 밖의 다른 소고용주로 이루어진 '구'쁘띠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급료를 받는 고용인들로 이루어진 '신'중간계급, 노동조합 등 노동운동 관료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들의 경우 농민까지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쁘띠부르주아지의 혼성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혼성 이데올로기' 즉,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저한 부르주아지의 사상도 아닌 '혼성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한때 호기롭게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믿던 적이 있었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저와 같은 이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씁쓸하지만, 그 행간의 뜻을 읽자면, 그 말에 십분 동의하고 인정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이들 집단(=쁘띠부르주아지)은 한데 어우러져 프롤레타리아를 '포위하고' 있고(그들은 날마다 부르주아지보다 프롤레타리아와 훨씬 더 긴밀한 접촉을 갖는다)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역사는 쁘띠부르주아지의 혼성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라고 한 것입니다.
시간에 쫓기어 책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래에 따로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어설프게라도 결론부터 써야겠습니다.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형편을 보면 가진 이도 있고 갖지 못한 이도 있는데, 어찌 나만 홀로 다 가지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자기의 심정을 보더라도 도리에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는데, 어찌 사람이 다 도리에 맞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남과 나를 견주어서 다스려 나간다면, 이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편리한 방법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어찌 나만 홀로 다 가지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과 국가의 차원으로 옮기면, 자본주의에서는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충고일 것입니다. 이른바 중산층이 붕괴되고 사회 계층이 양극단으로 심하게 분화되고 있는 현실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러지 못한 것이 있어,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든 집단적 문제해결을 위한 집단(계층,계급) 간의 대립이 있어왔고, 그 정도가 심했던 상황을 '항쟁' 또는 '혁명'이라 불러왔습니다. 그 대립의 씨앗은, 대다수가 마르크스주의를 용도 폐기 선언한 현실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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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혼성 이데올로기'식 결론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어떻게든 계급 간의 대립과 투쟁을 사전에 막고자 함이니까요. 어떤 식의 혁명이든, 혁명의 속성상, 그것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힘 없는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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