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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의 만족감+1%의 당혹감=별셋 -_-;;;
"99%의 만족감+1%의 당혹감=별셋 -_-;;;" 내용보기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아마, 저자인 몰리뉴 교수는 이렇게 답하고 싶으셨나보다. '그것은 바로 트로츠키주의이다.' 저자가 고전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속하느냐 않느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로 보느냐. 그리하여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되도록 하느냐,'이다. 이러한 기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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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 아마, 저자인 몰리뉴 교수는 이렇게 답하고 싶으셨나보다. '그것은 바로 트로츠키주의이다.'

저자가 고전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속하느냐 않느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 노동자를 변혁의 주체로 보느냐. 그리하여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되도록 하느냐,'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저자는 흔히들 마르크스주의의 한 지류로 꼽히는 카우츠키주의나 스탈린주의, 그리고 제3세계 민족주의를 '알고보면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것'으로 논증해낸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의 분석과 비판에 대해 토를 달 생각은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상당부분 동감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속하는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카우츠키주의건 스탈린주의건 제3세계 민족주의건 애초 취지는 자본에 대한 저항과 변혁이었고, 어찌되었건 조금이라도 더 진보적이고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의 미약한 사회경제적 토대나 지도자의 스타일, 혹은 체제 내재적 모순은 그러한 '주의'들을 막말로 '망'하게 만들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들의 실수 또한 마르크스주의 전통 하에서 검토되고 비판되는 것, 그러한 성찰과 반성이야말로 조금 더 나은 마르크스주의를 만들기 위한 생산적인 작업이 아닐까. 스탈린주의가, 일국사회주의가 알고보면 국가자본주의라는 저자의 지적에 당연히 동의하지만, 그러한 스탈린주의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는 이미 저자가 고전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속하는 사람으로 꼽은 레닌의 신경제정책에 노정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분석과 비판, 혹은 반성은 빼놓은 채 여러 다른 맑스주의계열의 사상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언술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일까. 그 어느 책보다도 짧은 내용 속에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점을 효과적으로, 알기쉽게, 잘 지적하고 비판해 낸 이 책은 나에게 99%만족을 줬지만, 저자의 작업이 썩 '생산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라는 1%의 실망감? 혹은 당혹감? 때문에 나에게 책을 읽은 후 만족감보다는 찜찜함의 기억을 더 오래 남겨준 듯 싶다.
j***8 2006.03.09. 신고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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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쓰레기통에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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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채근담과 장자, 노자를 이야기하다가 이번 주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로 시작합니다. 별 뜻은 없습니다. 추석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들어와 그냥 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무엇이고 그의 변형, 즉 사이비가 무엇인지에 대해 써놓은 책입니다. 더 이상 회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에 아직 저의 관심이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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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채근담과 장자, 노자를 이야기하다가 이번 주는 느닷없이 마르크스주의로 시작합니다. 별 뜻은 없습니다. 추석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들어와 그냥 샀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무엇이고 그의 변형, 즉 사이비가 무엇인지에 대해 써놓은 책입니다. 더 이상 회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에 아직 저의 관심이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세상이 갈수록 더 빈부의 차가 커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경쟁의 장은 넓어만 가서 나의 또래도 나의 지역사회도 나의 나라도 아닌 세계 전체를 경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은, 누구나 생각하듯, 너무나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현실의 꽁무니를 좇아가다가도, 늘 생각 저 편에는 이러다 '공멸'하지는 않을까 저으기 걱정되는 면이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귀를 기울인다면야 이 모든 고민과 걱정들이 한낱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떤 식으로든 분석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서는 다양한 틀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쓰레기통 속에서 이미 용도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꿈틀대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이상의 실현을 바라는 이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상이란 다름 아닌 차별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사상'이라고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온갖 잡사상과 뒤범벅시켜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 심지어, 이 책에서 말하는 온갖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차별없는 세상을 만드는 주체는, 오로지 노동계급밖에 없으며, 프롤레타리아가 정권을 장악하여 계급을 철폐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온갖 수식어를 빼고 핵심만 말하면,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이론, 그것도 국제적 혁명 이론"입니다. 여기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저'의 간극은 벌어집니다. 물론 제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공부하며 그들의 이상과 나의 이상을 일치시키고자 노력했던 적이 있기는 했으나,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물구나무 선 나의 '의지'뿐이였음을 알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고. 이 말을 기계적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이상, 저는 그 말에 일말의 토도 달지 않습니다. 이는 분명한 진실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 역시 저의 현 존재로부터 의식이 규정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식 계급 분류에 의하면 저는 쁘띠부르주아지에 해당됩니다. 쁘띠부르주아지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소상점주나 그 밖의 다른 소고용주로 이루어진 '구'쁘띠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급료를 받는 고용인들로 이루어진 '신'중간계급, 노동조합 등 노동운동 관료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들의 경우 농민까지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는 쁘띠부르주아지의 혼성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혼성 이데올로기' 즉,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저한 부르주아지의 사상도 아닌 '혼성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한때 호기롭게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믿던 적이 있었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저와 같은 이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합니다. 씁쓸하지만, 그 행간의 뜻을 읽자면, 그 말에 십분 동의하고 인정합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이들 집단(=쁘띠부르주아지)은 한데 어우러져 프롤레타리아를 '포위하고' 있고(그들은 날마다 부르주아지보다 프롤레타리아와 훨씬 더 긴밀한 접촉을 갖는다)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역사는 쁘띠부르주아지의 혼성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라고 한 것입니다. 시간에 쫓기어 책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아래에 따로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어설프게라도 결론부터 써야겠습니다.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형편을 보면 가진 이도 있고 갖지 못한 이도 있는데, 어찌 나만 홀로 다 가지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자기의 심정을 보더라도 도리에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는데, 어찌 사람이 다 도리에 맞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남과 나를 견주어서 다스려 나간다면, 이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편리한 방법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어찌 나만 홀로 다 가지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과 국가의 차원으로 옮기면, 자본주의에서는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충고일 것입니다. 이른바 중산층이 붕괴되고 사회 계층이 양극단으로 심하게 분화되고 있는 현실만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러지 못한 것이 있어, 역사적으로 어느 시기든 집단적 문제해결을 위한 집단(계층,계급) 간의 대립이 있어왔고, 그 정도가 심했던 상황을 '항쟁' 또는 '혁명'이라 불러왔습니다. 그 대립의 씨앗은, 대다수가 마르크스주의를 용도 폐기 선언한 현실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혼성 이데올로기'식 결론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어떻게든 계급 간의 대립과 투쟁을 사전에 막고자 함이니까요. 어떤 식의 혁명이든, 혁명의 속성상, 그것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힘 없는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테니까요.
n******8 2005.11.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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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말하기가 애매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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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편협한 책" 난 이 책을 이렇게 말 하고 싶다. 이 책을 도데체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부터 난 난감하다. 물론, 2부는 굉장히 공감하는 부분이 많지만, 1부에서는 글쎄...? 별로 공감 할 수 없는 내용으로 채워진, 그야말로 "편협한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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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편협한 책" 난 이 책을 이렇게 말 하고 싶다.


이 책을 도데체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부터 난 난감하다.


물론, 2부는 굉장히 공감하는 부분이 많지만,


1부에서는 글쎄...?


별로 공감 할 수 없는 내용으로 채워진, 그야말로 "편협한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q******b 2008.05.14. 신고 공감 0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