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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동행同行하다.【욕망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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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나에게 '듣보잡'이었다. 저서의 제목은 낯이 익었지만 저자의 이름만 듣고서는 연세가 지긋하신 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동글동글 귀엽게도 생기신 젊은 교수님이셨다. 도대체 어떤 탈선의 내공(?)을 나에게 전해줄지 제목만으로도 눈에서 불꽃이 화르르 솟구쳤지만 사실, 읽기까지는 평탄치 않았다. 인문서의 양념을 뿌려놨지만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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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나에게 '듣보잡'이었다. 저서의 제목은 낯이 익었지만 저자의 이름만 듣고서는 연세가 지긋하신 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동글동글 귀엽게도 생기신 젊은 교수님이셨다. 도대체 어떤 탈선의 내공(?)을 나에게 전해줄지 제목만으로도 눈에서 불꽃이 화르르 솟구쳤지만 사실, 읽기까지는 평탄치 않았다. 인문서의 양념을 뿌려놨지만 실은 에세이라는 걸 알고서야 손에 잡을 용기가 생겼다. 그 속에서 나는 저자의 말(고백)을 경청하며 마음껏 유영하며 쑥쑥 자라나는 30대 독자가 되어 있었다. 이 고백서는 저자의 고백임과 동시에 우리의 고백이며 이 글(리뷰)은 나의 고백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숨쉬고 있는 사회를 들여다본다.

방관자(일탈자)와 맹수(사냥꾼) 사이에서 쉼 없이 길을 잃는 우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흔히 동물의 왕국처럼 정글로 비유하곤 한다. 약육강식의 위계질서가 철저히 구축돼 있는 동물의 세계, 그야말로 강자는 약자 위에 군림하고 약자는 언제나 벌벌 기기만 하는 세계. 인간의 세계 역시 다르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하고 싸워야 하고 그러다 보면 승패가 나뉜다. 그리고 이는 단기전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는 장기전이다. 우리 세대도, 그다음 세대도, 거치고 또 거쳐나가야 할 맹수가 도사리는 정글의 한복판이 지금 여기,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다. 정글과 다름없는 사회에서는 색色과 계戒의 경계에 있는 인간군상은 아주 뚜렷하다. 색을 인정하면 손가락질받는걸 감수해야 하고 반대로 전형적인 계의 삶을 살고 있으면 너도나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렇게 따르는 추종자들도 진정 계의 삶을 사는 이들일까. 아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모범적인-겉으로 보기에는- 계의 삶을 사는 이를 따르는 신도들처럼 광적으로 열광하는 추종자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탈선을 행하는 일탈자와 이들을 해하려는 사냥꾼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이다.

 

 

네 욕망을 인정해!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나는 색과 계의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일까. 나는 좋고 싫음이 워낙에 분명하기에 좋아하는 것도 드물다(?). 그리고 한번 깊게 빠졌다가 헤어나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주시하지, 다른 것에는 일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라 스스로 과한 욕심은-이것저것 다 욕심내는- 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나 역시 계의 삶을 사는 청렴한 사람처럼 보이길 원하는 색을 덮어쓴 인간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한 번씩 듣는 이야기지만 학창시절에는 친구들이 꽤 자주 묻곤 했다. '너는, 라이벌 없어?' 같은 말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누구를 지칭해 라이벌이라고 느껴 본 적은 살아오면서 딱히 없었던 거 같다. 그저 치열하게 나 자신과의 싸움만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명목하에 주위를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는 거다. 라이벌이라고 갖다 붙이기가 우습고 민망스러운 일이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나는 주위 사람 모두와 나라는 공식에 익숙해져 있었던 거 같다. 의식하고 경계하는 단 하나의 경쟁자는 없지만 대신 절대다수와 나라는 이를테면 승산 없는 1:100 같은 맨손박치기???? 하핫~

 

내 욕망이 본디 내 것이 아닌, 남들의 욕망의 흐름에 힘입어 발돋움했다고 말하는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모방 욕망이라는 욕망의 정의 앞에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난 원래부터 내가 이렇게 욕망에 진득하게 발 들여놓은 인간인 줄 알았지 뭔가. 결국, 남들과는 다르게 살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나도 수없는 모방 욕망 앞에서 발목 잡혀서 살아온 꼴이다. 그리고 그런 모방 욕망 앞에서 남들의 이목, 시선이 두려워 억제하기만 하면서 살아오다가 한 번씩 주체할 수 없는 욕구불만으로 펑펑 터져버리고 마는 모습을 보아왔으니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말대로 욕망이랑 친구 먹을 수밖에.

 

 

계戒같은 인간:규범에 발목 잡히다.

 

딱히 고상한척하고 앉아있는 건 아니지만, '아니에요~'하면서 속으로는 '사실은 맞거든!!! 그래, 그게 바로 내 뜻이야!!!' 라고 칼을 갈고 있지는 않았던지, 그런 때는 없었는지 생각한다. 그렇게 따져보자면 나도 아닌척하고 앉아있는 욕망의 화신,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욕망 덩어리의 또 다른 하나라는 거다. 하지만 이를 까놓고 인정하지 못하는 건 김두식 교수도 언급 하셨다시피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지나치게 규범화되는 삶도 문제(?)겠지만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게 탈선한 삶이 더 문제시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니던가. 여전히 우리는 '시선'이 무섭다. 아무리 '네 안의 욕망을 인정해!'라고 말해도 돌팔매질이 은근 아니, 대놓고 두렵고 무서운 건 사실이다.

 

나는 스스럼없이 ‘보수적인 편이라...’ 같은 말을 한다. 누가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아버지 자식 아니랄까 봐 그것까지 똑 닮았다. 그래서 가끔은 나 자신도 규칙이나 규범에 얽매여 있는 나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랄 때도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규칙을 잘 지키는 인간이었나? 이렇게 틀에 박힌 고지식한 사람이었나? 같은 판단 앞에서, 이 정도면 꽤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당위성을 부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남들을 의식한,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굴레를 선사 받기 위한 나의 위장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예를 들면 나는 누가 아주 살짝 성적인 주제를 꺼내려고만 해도 ‘우~~’하고 야유를 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하지만 또 여자들과 동성보다 더 친하다고 자부하는 몇몇 남자친구들과는 꽤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기도 하는 어떻게 보면 참 이중적인 타입이다. 그래서 <색,계>라는 영화도 예술성이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외설적인 성행위만 머리 위에 둥둥 떠다녀서 지레 피하곤 했었다. 남성들이 야동을 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겉으로는 뱉어내면서 또 내 남자친구가 보는 건 나의 계의 기준에 용납이 안 되는. 이러니 피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있으니. 그러니까 나 역시 고상한 체하고 앉아서 속으로는 속물근성에 차있는 지적 스노비즘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낱 인간일 뿐이다. 속물근성 앞에서 나, 너 그 누구도-최소한 나는!-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도시는 잘 모르겠지만 시골에서는 누구 집 누구가 어떤 옷차림을 하고 어른한테 어떻게 했더라 같은 말이 은근히 더 빨리 돌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옷차림도 괜히 신경 쓰이고 늦은 시각 집으로 들어올 때는 괜히 종종걸음친다. 예전에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20대 초 한창 놀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는 부어라 마셔라, 친구들과 한창 어울리는 시절이 아니던가.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엉덩이 털고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 2~3시에 들어오는 때가 꽤 됐었다. 그랬더니 이웃에 사는 동네 어른이 아버지께 한 말씀 하셨나 보다. "그 집 딸은 그 늦은 시각까지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이상한 데라도 다니는 거 아니야?" 같은 은근 노골적인 시선과 함께 행실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는 거다. 나는 기가 차고 코가 막혔지만 보란 듯이 더 늦게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부모님의 체면 아닌 체면을 생각해서 한동안은 9시 이전에 부리나케 귀가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바로 남을 의식하는 시선과 남이 나를, 우리 집을 바라보고 단정 짓는 규범과 시선 앞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내 가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결국은 규범적인-여자의 귀가 시간 같은- 사회 속에서 사는 보수적인 동네주민의 규범 앞에서 아버지와 나는 함락된 것이다.

 

규범은 목적이라기 보다는 수단입니다. 우리 삶을 풀요롭게 하기 위해 규볌이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가 규범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닙니다.-268p

 

 

 

 

뻔한 세상 속에서 나 자신 바로 보기

괜찮아. 나는 계속해서 자라고 있어!!

 

이러쿵저러쿵해도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바로 아는 것이다. 뻔하다 해도 할 수 없다. 세상은 원래 뻔하게 돌아가는 곳이니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속담이 날로 먹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바로 아는 것-즉 내 안의 욕망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남들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과도한 경쟁과 욕심과 시샘은 결국은 더한 불순한 경쟁을 낳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나 자신을 바로 볼 줄 알고 더불어 내실을 튼튼하게 구축하는 것, 이는 다시 말해 ‘나는 이런 사람인데,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당신의 자유지, 나는 크게 상관 안 해’ 같은 조금은 뻔뻔함 속의 당당함 같은 것. 세상이라는 곳은 그저 살아가기에도 힘에 부치는데 남들의 이목까지 일일이 신경 쓰려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정보화 시대에 맞게 발 빠르게 성장한 인터넷의 마녀사냥과 그에 따른 많은 자살만 봐도 알 수 있다. 잘나도 욕먹고 못나도 욕먹는 세상이다. 잘나면 잘난 대로 시기하고 못나면 넌 왜 그렇게 못나 처먹었니 하고 공개적으로 돌을 던진다. 이런 세상에 일일이 대응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힘에 부친다. 그럴 바에는 그냥 과감히 무시하고 내 세상을 살아가는 게 덜 상처받고 덜 아픈 길이다.

 

  

정치인들이, 그리고 우리 입으로 우리를 일컬을때 자주 쓰는 말이 '냄비근성'에 그득 차 있는 국민이라는 말이다. 양은 냄비의 그것처럼 금방 가열되고 금방 식어버리는 것을 비유한 이 말만큼 우리의 욕망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 보이는 표현도 없는 거 같다. 문제가 터지면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 죽기 살기로 덤비다가 해결되기도 전에 나 몰라라 해산해 버리는 인내심과 집념의 부족, 이는 자신의 주체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쉽게 휩쓸릴 일이 아니다. 저자가 언급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몇몇 스캔들은 나 역시 곁눈으로 흘끔거리며 뒤에서 열심히 검색러쉬를 해댔던 기사들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한번 옛 추억(?)을 떠올리며 책을 읽다 말고 또 열심히 검색을 해대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남들 앞에서는 잘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하면서 누구보다 가십과 스캔들에 민감한 그대, 인간일지어다.  

 

내 욕망을 직시함과 동시에 냄비 끓듯이 누구에게 휩쓸리며 무턱대고 아니라고만 외치는 게 아닌 소신과 주체성을 가진 냉정하게 사안을 직시하며 나로 거듭나는 것부터가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발점이 아닌가 한다. 이를테면 내 안에 '천하무적 원더우먼이 숨 쉰다'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그와 같은 자신감을 가진다면 어떨까? 슈퍼맨과 원더우먼은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짠~하고 나타나 해결사 노릇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남들의 시선을 압도하지 절대 압도당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들이야말로 본질적으로는 천하무적이니까. 악당들에게 당할지라도 소신만큼은 굽히지 않는 그들이다. 타당성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런 생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 어떨까? 누가 뭐라 하든, 어떤 일이 닥치든 스스로 해결 해 나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의지로 점철된 희망적 소신. 그렇다면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장애물이 앞에 놓인다 해도 자신의 삶을 씩씩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의지가 생겨나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난 대부분이 '그래, 욕망을 인정하고 편하게 살자!' 같은 획일화 된 귀결로 의견을 모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임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남들과 다르게 추구하는 주체적인 내 삶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한다. 김두식 교수는 욕망을 인정해라 라고 말하면서도 참말로 조심스럽고 소심하고 바른(?) 분이라는 걸 책 내용 곳곳에서(사인에서도!) 알 수 있다. 경계선을 넘어가는 건 도전이다. 넘지 못함에 포기하고 차라리 넓히려는 건 중용中庸의 자세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 나는 김두식 교수님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인생이란, 드넓은 정글 속 고독한 하이에나처럼 끝없는 욕망을 갈구하고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다. 그러니까 욕망이랑 친구 먹고 네 길을 걸어가는 거야. 뚜벅뚜벅.

 

 



w*****8 2012.06.22. 신고 공감 19 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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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인정하고 나면, 인생은 더 아름다워진다. ^^
"욕망을 인정하고 나면, 인생은 더 아름다워진다. ^^" 내용보기
『색, 계』 영화는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영화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드신이라는 입소문으로 호기심으로 보았던 영화였지만,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랑을 보며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열망을 꿈꾸게 하는 그런 영화였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베드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자는 그 영
"욕망을 인정하고 나면, 인생은 더 아름다워진다. ^^" 내용보기

, 영화는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영화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드신이라는 입소문으로 호기심으로 보았던 영화였지만,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랑을 보며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열망을 꿈꾸게 하는 그런 영화였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베드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자는 그 영화를 스무 번 넘게 보았다고 한다. 난 다섯 번 밖에 안봤는데...)

 

욕망하면 왠지 어감에서부터 터부시되는 느낌이 들듯이 단지 사회적으로 억눌려있는 부분때문에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욕망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욕망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오로지 타자를 위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욕망은 타고난 본능이나 충동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도 늘 뭔가를 강렬하게 욕망하는데 그 욕망은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욕망은 다른 사람의 욕망을 흉내낸 것입니다. -p49

 

이 책은 창비 인터넷 블로그 창문에서 6개월가량 , 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다. 제목 때문에 영화 , 가 떠올랐는데 우리가 욕망하고 있는 것들에 관한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내고 있어 책 자체는 무척 재미있다. 그러나 이 책을 재미로만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더 강한 메시지가 있다. 화두는 욕망이지만, 우리 사회의 규범에 대한 건전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인문정신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에 만연한 학벌지상주의와 중년 남자들의 숨겨진 욕망과 사회규범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건전한 사고를 방해하는 감정들을 분석하여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바로 보게 한다. 저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을 바로 보지 못하면, 중년이 되어서 불륜을 저지르는 일탈자가 되거나 욕망을 숨긴 채 희생양에 돌을 던지는 사냥꾼이 된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일탈하는 사람들과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사실 욕망에 관해서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일란성쌍둥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대표적인사건이 신정아 사건과 상하이 스캔들이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야심을 잘 찾아내는 사람은 대개 그 자신이 동일한 야심을 지닌 경우가 많다는 유난히 남의 욕망이 눈에 잘 들어올 때는 먼저 자기 내면을 조용히 돌아볼 필요가 있지요. p38

 

상하이 스캔들이나 신정아 사건들을 통해 중년 남자의 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있다외국영화나 소설을 읽을 때 성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외국인들에 비해 한국인들의 성은 억압적인데다 드러낼 수 없는 욕망으로 치부되고는 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저자는 한참 나이에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를 공부로 소비한 채 보내고 성장하게 되어서는 자신의 내면에 성장하지 못한 소년이 중년 남자들에게 존재한다고 한다.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 ‘에너지이기도 하며 ,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드가 말하는 이드(id)“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p89

 

결국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하이 사건이나 신정아 사건은 언젠가 떨어야할 지랄이라는 실탄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 마음이 다 자라지 않은 내면의 소년이 욕망이라는 에 뒤늦게 이끌리게 되어 일어난 사건이며, ‘의 세계에서 살던 소년이 색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면서 겉잡을 수 없이 빨려들게 된 일탈인 셈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 또한 이런 욕망 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일탈하는 사람들과 이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욕망에 관해서는 같은 유전자를 가졌으므로 누구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일상에서 자기 내면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과 남에게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나역시도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욕망이라는 색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계의 경계선, 이것은 영화 색 계 를 보면 두 간극이  명징하게 다가온다.색에 속한 여주인공과 계에 속한 남주인공의 사랑은 위에 말한 두가지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서로 다른 경계의 주인공 둘이 색과 계의 경계가 흐트러졌을 때 남자는 욕망에 몸을 던졌다가 다시 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과는 달리 여자는 사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마도 여자는 사랑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한 편에 속하기 때문이 아닐까 )

 

인생이란, 규범으로 촘촘히 짜인 바둑판 위를 조심스럽게 한 발 짝씩 내딛는 것 같은 하루하루입니다.

 

교회를 어렸을 때부터 다녔는데 책에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실 종교인이지만, 뿌리깊은 근본주의적인 사고욕망이 자랄 수록 불안과 우울을 남기기도 한다. 쉽게 말하면, 규범이라는 것이 인식하지 않을 때는 느껴지지 않지만, 규범에 길들여지면 그 규범에 나를 맞추지 않으면 곧 불안해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규범을 잘 지켜야만 한다는 강한 억압감과 책임감에 길들여지다보니 마치 착한여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것처럼 좋은 일이 생기면 내가 착하게 살아서 그렇다는 생각을,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착하지 않았기때문에 생긴 일로 치부해버리는 비논리적이고도 무척 단순한 프레임에 나를 가두어놓고는 했다. 그러나 저자는 규범을 의심할 줄 모르고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고 한다. 욕망의 존재나 가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욕망을 부인하고 억압하면서 계속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 더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 시작은 황당하게도 저자가 제일 두려워하는 듣보잡으로 시작한 책이었는데 읽다보니 저자의 다른 책도 궁금해진다.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고백하기가 쉽지 않음을 이해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과 더불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 타래씩 풀어놓지만, 결국은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과 소통하며 사회와 공존을 모색하는 인문정신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에 의해 씌여진 페르소나를 벗고 내면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잘 다독이며, 이웃과 사랑의 연대를 이룰 때 리얼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한 꿈이 되지 않을까? 꿈틀대는 욕망을 다스리는 법

 

욕망아, 네가 또 숨 쉴 곳을 찾는 구나. 꼭 그래야만 한다면 ....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렴



YES마니아 : 플래티넘 k********2 2012.05.26. 신고 공감 17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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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의 규범을 허물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계의 규범을 허물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내용보기
부족함이 많아 궁색함이 몸에 익어서인지 불편하여도 그다지 불편한 줄 모르고 결핍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지내던 아동기에 만난 선생님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했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은 학교가 전부라고 여겼던 시절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수업을 듣고 선생님 심부름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때부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멋모르고 선
"계의 규범을 허물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내용보기

  부족함이 많아 궁색함이 몸에 익어서인지 불편하여도 그다지 불편한 줄 모르고 결핍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지내던 아동기에 만난 선생님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했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은 학교가 전부라고 여겼던 시절 머루처럼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수업을 듣고 선생님 심부름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때부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멋모르고 선생님과 친하고 싶었던 소녀의 바람은 어느 새 꿈을 이뤄 아이들과 함께 만나 생활하며 그들과 고락을 나누는 교사로 늘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자리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불쑥 내뱉고 마는 불만 한 마디에도 신경이 자꾸만 쓰이는 것은 아이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은 욕망이 커서일 것이다.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잘 선택했다고 여기며 다양한 영역을 알려 주고 미지의 공간을 찾아 안내하는 일을 즐기고 있지만 교사라는 직업이 내포하는 벽에 갇혀 도덕적인 윤리의식에 스스로를 가둘 때가 많다. 선생이기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행동해서도 안 되고 약자를 배려하며 자신의 감정을 삭이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스스로의 욕망을 가둔 채 살아왔다. '욕망해도 괜찮아'에서는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지 않은 저자로만 여겼던 이의 경계를 허물게 한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영민했던 저자와는 달리 정해진 궤도를 걷기보다는 틀을 깨부수고 자신만의 길을 창조해 간 형과 자신을 대비하며 글을 쓴 대목은 친근함으로 다가와 교수직에 종사하는 이들과의 거리감을 허문다. 한 부모 밑에 났지만 각기 다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형제들을 보며 어른들은 자식 겉 낳았지 속은 낳지 않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내는 경우를 목도할 때가 있다. 기존의 계를 허물고 여러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 자연 과학 영역에서 입지를 굳히는 학자의 모습은 계에서 부정적으로 보았던 점을 스스로 긍정적인 시너지를 불러 온 점은 방황하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지금껏 성문(城門)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저자의 말대로 계를 지키는 일이 불편할 때도 있지만 그 경계를 따랐을 때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말에 공감하며 안전핀을 뽑을 용기가 부족하였기에 기존의 계를 지키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중심부로 자리하는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한 가족들은 경계선을 넘지 않음으로써 안정적인 가정이 유지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어 우회적인 욕망을 꿈꾸는 일도 제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에서는 씁쓸해지고 만다. 조금 달라진 모습을 금세 알아차리고 마는 주변인들의 눈치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이들은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욕망을 가라앉히려고만 한다. 이솝 우화 속 당나귀가 사자 가죽을 뒤집어쓰고 기생해 가는 것처럼 가면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중첩되어 음울함을 더한다. 한 세대를 이끄는 표준적인 가정의 어머니는 가족이 따라야 할 규범을 만들어 왔으면서도 실정에 맞게 규범을 바꾸지도 못한 채 규범의 화신처럼 살아오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목소리를 유예하며 지난한 삶을 이었다.

 

 

 

  계로 무장한 선을 넘지 말고 기존의 질서를 따르며 살아가는 일이 기반 사회를 더욱 공고히 하는 토대를 마련해 줄 것이라 권하는 계(戒)에서 비껴나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살아가는 일을 동경할 뿐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모범생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거나 모범생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성적의 노예로 전락하여 다른 영역은 사장해 두고 수험서를 파고들며 창의성을 말살하여 성적과 괴리되는 사회성을 방증하는 이들에게 서글픈 우리들의 자화상을 읽어낼 수 있다.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며 지내는 이들에게 성경 구절은 금과옥조처럼 따르고 지켜야 하는 선이다. 기독교인으로 생활하는 저자가 동성애자로 불이익을 당한 고메즈 목사의 강연에 귀 기울임으로써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진짜인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반문하는 물음을 통해 몸과 마음의 소통이 갖는 의미를 파헤쳤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수단은 여럿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말과 글로 상대와 교감하며 지내는 일이 갖는 파장이 크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SNS문자나 메일, 블로그를 통해 교감을 나누다 몸까지 소통함으로써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가 흔한 시대에 살을 섞는 일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현상은 불륜, 스캔들 등의 일탈로 지탄받게 된다. 결혼 제도의 계에서 색(色)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일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여 불명예스러운 일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주변인들의 관심이 증폭되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남의 욕망을 엿보고 결과에 촉각을 세우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관찰하고 탐닉하려는 움직임을 주시해야 한다고 말하며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고 살아야 할지 바로 아는 일부터 시작해야 함을 역설했다.

 

 

 

  정년이 보장되는 직에 종사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잇는 부부를 보면서 많은 이들은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말하여 무색해질 때가 종종 있다. 겉으로 보기에 안정적이고 걱정 없이 보이는 중년의 부부이지만 서로 살아 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 고독감에 젖어 지내는 경우마저도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고 마는 현실에 내면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살기보다는 멋진 페르소나로 속내를 숨기며 살아낼 때가 많다. 지금의 궤도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비상하고 싶은 욕망을 거두고 기득권 계층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안정적인 삶을 따라왔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중년이라는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멍에를 벗어던지고 가짜인 채로 살아왔던 자신을 내려놓고 이제는 자신이 바라는 색깔을 찾아 규범을 허무는 일부터 시작할 차례다. 무모한 도전을 서슴지 않는 특별함으로 제 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랐던 통념을 깨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추구하며 본질적 물음에 답을 내리고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이로 자리하고 싶다.

n*****9 2012.06.17. 신고 공감 14 댓글 19
리뷰 총점 종이책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욕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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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때까지의 내 별명은 “착실 과장” 이었다. 장남이라는 직위(?)가 주는 부담감과 집안의 기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신앙생활의 영향인지 난 나를 중심으로 아주 굵은 선을 쳐놓고 그 안에서만 머물렀다. 아니 선이라기보다는 높다란 콘크리트 블록으로 담을 둘렀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나만의 개똥철학으로 그어진 그 선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꾸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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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의 내 별명은 착실 과장이었다. 장남이라는 직위(?)가 주는 부담감과 집안의 기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신앙생활의 영향인지 난 나를 중심으로 아주 굵은 선을 쳐놓고 그 안에서만 머물렀다. 아니 선이라기보다는 높다란 콘크리트 블록으로 담을 둘렀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나만의 개똥철학으로 그어진 그 선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철저히 그 선에 의지해 그 안에 머물렀다. 그래서 인지 그저 공부 잘하는 내성적이고, 착실한 학생과 아들이 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러한 기존의 틀에 변화가 온 것은 질풍노도의 시대라 불리는 고 2때부터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난 키가 작은 축에 들었다. 키대로 배치한 자리에 의해 작은 애들과 어울렸고, 다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탈을 꿈꾸지 않아도 그들과 어울려 지내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스스로 두른 콘크리트 블록 밖으로 나올 일도 없었다. 한데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이러한 구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키가 크기를 애타게 소원한 때문인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난 1년 동안 키가 무려20cm가 자랐다. 한번 맞추면 3년을 입는다는 교복바지가 칠부바지가 되는 통에 2번이나 새로 맞출 만큼 키가 컸다. 반에서 1,2위를 다툴 정도의 키가 되니, 교실에서의 좌석배치도 가장 뒷좌석으로 배정되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되는 급우들과 나란히 앉아서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다. 속된말로 침 좀 뱉고 다니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기존의 내 방식으로는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행동들을 친구들은 익숙하게 했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나도 같은 행동을 해야 했다. 문제는 그때 부터였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한번 벗어난 틀은 그동안 세상적인 규율로 봉인했다고 생각한 욕구들을 봇물 터지듯 터지게 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글쓴이의 책에서 애기한 지랄총량의 법칙이 아니라, “욕망 증폭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다. 1년 동안 지랄 총량을 다 소진하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의, , 주에 관계된 기본적인 욕구와 식욕, 성욕, 수면욕을 가진다. 이러한 기본적 욕망은 욕구라고 불러야 옳다. 욕구와 욕망은 무엇인가의 부족함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욕구와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실천하도록 하는 강한 힘이다. 욕구가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욕망은 밖으로부터 흘러들어와 나를 휘어 감고는 어디론가 이끈다. 그래서 욕망은 사회적이다. 우리는 흔히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을 비인간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욕망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무엇인가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타인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그 시선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 삶,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것이다. 타인과 어울려 살고자 하는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감추게 만든다. 감추어진 욕망은 기본 욕구의 충족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요구할 때 정체를 드러낸다. 갖고 있는 것 이상을 바라고 가질 수 없는 것마저 갈구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며, 이것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또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억누르고 봉인하면 이 욕구는 욕망으로 변질하여 증폭한다.

 

 

  이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글쓴이는 다양한 사회적인 예를 들어 욕망을 잠재시켰을 때 발생하는 사건들을 다양한 예로 들어 설명한다. 신정아와 변양균 사건을 통해 소년소녀시대의 억눌려진 욕망이 중년이 되어 어떻게 발현되는지 보여준다. 소년시대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글쓴이의 억눌러진 욕망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 카메라를 통해 발현되었음도 애기한다. 나도 글쓴이처럼 욕망의 변천과정을 겪으며, 카메라를 사기위해 수 천 만원의 대출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마치 내 이야기를 듣는 듯 한 착각에 빠졌다. 글쓴이와 나는 소년시절을 거친 중년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때 해소되지 못한 소년의 열정은 동일한 곳으로 발산되었던 것이다. 글쓴이의 표현대로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글쓴이가 예로 든 ,를 전체는 세 번을, 부분 부분은 여러 번을 봤다. 하지만 억눌러진 욕망인 색의 변형에서 오는 보이어리즘(관음증)의 대리만족을 위한 살의 향연에만 집중했지, 영화를 통해 감독이 애기하고자 하는 색과 계의 관계는  보지 못했다. 이처럼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있는 소년은 지랄 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다. 이는 당연히 색(),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공인들의 스캔들에 모두들 그렇게 열광하며 온갖 악플들로 맹렬한 공격을 가하는 것도 풀지 못한 색의 발현이다. ‘나도 색을 억누르고 사는데 너까지 게 감히하는 일종의 배 아픔의 소산이다. 글쓴이는 사()자 가족vs 사자가죽(Lion’s Skin)을 통해 중산층의 일반가정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변형을, 글쓴이 자신과 형의 정 반대되는 성격을 통해 색이라 표현하는 욕망과 계로 표현되는 선에 대해서 애기한다. 선 이라는 게 그리 절대적이지 않다고 말이다. 글쓴이는 ,라는 영화를 통해 탕 웨이를 만난 후 스스로의 기준으로 그은 선()안에서 안주하던 자신이 그 선의 울타리를 조금씩 넓혀가면서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솔직해졌음을 고백한다. 그동안 자신을 가두었던, 그리고 스스로 갇혀 있던 그 선을 벗어나 하고 싶은 애기, 쓰고 싶은 글의 영역을 조금씩 넓힘으로서 역설적으로 스스로 욕망을 제재 할 수 있었음을 애기한다.

 

  색과 계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로 자신이 선정한 기준이다. 세상적인 도덕의 룰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이다. 우리의 욕망의 한계를 어디까지 선정하느냐는 것은 나의 기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진짜 자신을 찾는 것, 그리고 나를 아는 것이 그 시작이다. 석가모니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 세상에 모든 것 중에 나 혼자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기준은 곧 나라는 애기이다. 세상에 나가 없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 남의 말이나 판단이 아니라, 나만이 알고 있는 진짜 나의 생각과 기준이 색()과 계()를 결정한다. 세상적인 기준은 아니다.

 

  욕망해도 괜찮기 위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타인과 관련된 부분이다. 단지 그 자신만 관련되는 부분에서는 그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그 자신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는 그 개인이 주권자이다.는 말은 무엇이 범죄인지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형법상의 기준이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욕망해도 괜찮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우리는 자기 내면의 욕구에 충실하려는 색과 남에게 보이기 위해 그럴 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려는 계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리곤 자신의 포장을 위해 욕망을 봉인한다. 봉인된 욕망은 언젠가 풀리게 된다. 소년 소녀시대에 억눌린 욕망이 대체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해소된다고 해도 근본적인 욕망은 해결되지 않는다. 잠시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을 뿐. 욕망의 봉인이 오래 가면 오래 갈수록, 마치 목마름에 바닷물을 마시면 그 목마름이 더 심해지는 것처럼, 그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하는 간절함은 더 커지게 된다. 그러니 욕망해야 한다. 욕망함으로 그 욕망에 대한 갈구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평시적인 욕구가 욕망으로 변질되어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릇된 욕망으로의 변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집에 혼자 있을 땐 옷을 입지 않는다. 실오라가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로 지낸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시라. 나만의 공간에서라도 세상의 규범을 벗어버리고 원초적인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다. 그 자유는 색이다. 세상적인 규범인 계에 갇혀 풀어 헤쳐지지 못한 욕망인 색을 표출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한 색의 공간이 있기에 이 더운 여름날에도 슈트 정장에 긴팔 와이셔츠로 대변되는 계의 세상을 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욕망해도 괜찮은 가장 큰 이유는 세상적인 계를 지키기 위해 색을 다스리는 또 다른 방법은 아닐까? 봉인된 욕망이 다른 형상으로 증폭되어 분출되기 전에 우리를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욕망의 이름으로 분출되는 색을 통해 계를 지킬 수 있는 방법 말이다.

 

 

 

 

 



h*****o 2012.06.21. 신고 공감 13 댓글 29
리뷰 총점 종이책
욕망해도 괜찮아 - 내 내면의 욕망 되돌아 보기..
"욕망해도 괜찮아 - 내 내면의 욕망 되돌아 보기.." 내용보기
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어떠세요? 뭔가 좀 좋지 않은 느낌을 주지 않나요? 사전적인 정의는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일 뿐인데,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욕망이라는 것을 안 좋은 쪽으로 기술하고 있는 많은 미디어 매체들의 영향일 수도 있고, 사실 긍정적인 쪽에는 좋은 의미의 단어들. 예컨대 바람, 소망, 희망 등의 단어들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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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어떠세요? 뭔가 좀 좋지 않은 느낌을 주지 않나요? 사전적인 정의는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일 뿐인데, 굉장히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욕망이라는 것을 안 좋은 쪽으로 기술하고 있는 많은 미디어 매체들의 영향일 수도 있고, 사실 긍정적인 쪽에는 좋은 의미의 단어들. 예컨대 바람, 소망, 희망 등의 단어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욕망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니, 제 욕망에 대해서 한번 말해봐야겠지요.


저는 욕망 덩어리인지라 수 많은 욕망이 있겠지만, 지금은 글을 쓰고 있으니 글에 대한 욕망을 얘기해 볼까 합니다. 대부분 그럴 것이라 믿지만, 전 글을 잘 쓰고 싶습니다. 누가 봐도 감탄사가 나올만한 글을 쓰고 싶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건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는 문제는 아니더군요. 어떤 교육적인 면도 분명히 기반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감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독창성,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관찰력, 그것을 글로 환상적으로 표현해 내는 능력들이 필요하죠. 저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 쓴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제 '욕망'이지요. '글 쓰는 능력은 부족한데 잘 쓴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나는 글을 너무 못 쓴다', '글력이 너무 부족하다'를 반복해서 전하는 겁니다. 알게 모르게 듣는 분들은 무의식적으로 '얘는 글 못 써'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막상 읽었을 때 '이전 정말 아니지'라는 정도가 아니면, '그래도 잘 쓰셨네요~'라는 반응이 오는 것입니다. 저 혼자만의 착각이라구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튼 저는 본능적으로 기대치를 낮춤으로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그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쁜 것일까요? '나만 이런 건가?'라고 되물어 보지만, 제가 본 경우도 수도 없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실제로도 이런 전략은 나름 효율적입니다. 소개팅을 예로 들어보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녀가 만나면 당연히 첫 모습과 느낌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마련입니다. 이 때 주선자의 말이 중요한데, 무턱대고 '멋있다'와 '이쁘다'를 남발하게 되면 사람의 기대치가 머리 꼭대기로 가게 되잖아요. 이런 경우 막상 만났을 때 실망할 확률이 더 높죠. 반대로 '그냥 뭐 평범해, 무지 착해' 라는 정도의 기대치를 가지고 나갔다가 소위 '대박'을 외치는 경우는 참 많이 봤습니다. 영화나 공연 같은 것들을 보기 전에도 별로라고 했던 작품들이 생각 외로 재미 있으면 즐거운 느낌으로 나오고, 재미있다고 했던 작품들이 별 볼일 없으면 진짜 우울한 기분으로 나오게 되지 않던가요?


뭐 이리 구구절절이 쓰나 싶지만, 욕망이라는 것에 대해 적다 보니 그렇게 됩니다. 남들에게는 숨기고 싶었던 무엇인가를 적어내려니,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고 내 생각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일반적인 마인드의 사람이라고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욕망'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타인에게 비추자니 조금은 부끄럽고, 그것을 누르자니 내가 괴로운 것임에... 훌훌 털자고 뱉어내면서도 말이 주절주절 많아지는......


그런데 말이죠. 진짜 저만 그런 것은 아닌가 봐요. 이 책을 보고 나서 깜짝 놀랐거든요. 

'사.람.의. 욕.망.에.대.해.' 


<욕망해도 괜찮아>라는 제목의 책. 드디어 봤습니다. <불편해도 괜찮아>를 보고 느낌이 좋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책이 저를 부르더군요. 이 책은 이 시대에 숨어 있는 '욕망'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흥미로울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불편한 책이 될 겁니다. 내 속을 다 까 뒤집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전 어떻냐구요?.... 전 후자였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욕망 덩어리니까요..


글의 특성상 수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욕망'이라는 것이 워낙 다양한 파트에서 발생을 하니 당연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내용은 깊이 빠져들어 공감을 하게 될 것이고, 어떤 내용은 남을 엿보는 듯한 묘한 느낌으로 보게 되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 제가 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가 조금은 부끄러웠던 문구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가 하면 '부탁'이고 남이 하면 '청탁'이 됩니다. 누가 청탁을 하거나 받았다고 보도되면, 우리는 그 한 사람이 마치 악마라도 되는 것처럼 맹비난합니다. 내가 숨기고 싶은 모든 어두운 면을 그 한 사람에게 투영하여 돌을 던집니다. 희생양에게 손을 얹어 우리 모두의 죄를 전가한 후, 그 희생양의 멱을 따고 불태우는 제사과정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를 잡음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얻습니다.                                                                          - P.67 -

책의 내용은 과거 '신 정아 스캔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관음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지요. 일단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다양한 이슈를 만들어 냅니다. 심한 경우 '신상털기'로 확대되고, 관련 내용의 진실성 여부와는 별개로 타인의 시선에 의해 여론이 결정됩니다. 수 많은 연예인 관련 사건들도 그런 것들의 일종이니까요. 나도 사실 깨끗한 것은 별로 없는데, 유명한 사람들이 하니 내 속에 담긴 찝찝함을 그쪽으로 던져 버리는.... 네.. 특정 사건에서는 저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겁니다. 사건과 대상에 대해서 욕을 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선 관심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타인에게 전이하고자 하는 욕망.. 부끄럽더군요.


이번에는 굉장히 공감했던 문구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저처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지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기로 결심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한 귀퉁이에 약간의 여유공간을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중략)

세상에서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꼽아봐야 열 손가락을 채우기도 어렵습니다. 그 차가운 진실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 P.108 -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기 위한 조언입니다. 저자 스스로가 어떤 주장을 펼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니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의견의 다양성들. 그로 인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방도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타인을 많이 의식하는 편인지라, 이런 메세지들은 공감이 되더군요. 책의 내용이 조금은 비밀스러운 얘기들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풀어놓는 형식이다 보니 여러 가지 주제, 메세지에 대해 반복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학벌 문제에 대한 욕망. 대한민국 중년들의 사랑에 대한 욕망.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망. 물질적인 부로 평가되는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 본능에 충실한 '색'과 규범에 충실한 '계'에 대한 욕망. 욕망과 규범을 나누는 기준과 잣대에 대한 내용들은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일 것입니다.


조금 안타까운 점은, 제가 <불편해도 괜찮아>를 읽으며 가졌던 좋은 감정들이, 이 책을 보면서 조금 퇴색되었다는 점인데요. 저자 스스로도 말했듯 모든 사람들에게 욕먹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책 전체에서 너무 드러납니다. 별로 욕할 만한 것도 아닌데, 자꾸 스스로의 생각을 깎아 내리면서 기대치를 낮추고 있으니, '그럼 도대체 나는 왜 이 책을 보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었죠. 


그러니, 제발 부탁하건대, 이번 글에서 무슨 교휸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대단한 결론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막힌 반전, 그런거 없습니다. 보나마나 제가 속한 계층,계급의 한계만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 될 겁니다. 그러자고 쓰는 글이니까 비판받는다고 제가 억울해할 일도 없습니다. 이 글은 그냥 저의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웃집 아저씨일뿐이고요.                                                                                           - P.132 -


이런 의미가 담긴 문구들이 한두 번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가니 조금 짜증이 나더군요. 각자가 처한 환경에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내면서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망'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책임감이 결여된 모습으로 보여서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으면 저자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내비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요?


이런 비판적인 생각이 듦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바라보는 제 느낌은 긍정적입니다. 비슷한 사고의 흐름이 반복되는 것과 함께 조금은 적나라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도 내뱉고 싶었던 말들을 쏟는 '욕망'의 표출로 바라보면 충분히 이해 갑니다. 게다가 진짜로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만 담아두었던 생각이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나를 돌아보고 솔직하게 표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 벌어진 행동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 '욕망'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까요. 제 글에 대한 욕망은 어떤가요. 책 제목처럼 누군가 제게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말씀 드릴게요. '욕망해도 괜찮아~~'라고...




d******4 2012.09.23. 신고 공감 11 댓글 31
리뷰 총점 종이책
일생 동안 떠는 ‘지랄’의 총량은 같다. 차라리 욕망을 인정하자.
"일생 동안 떠는 ‘지랄’의 총량은 같다. 차라리 욕망을 인정하자." 내용보기
한때, 중년들의 일탈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그런 일탈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에 비해서 언론이나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를 않을 뿐이다. 지금도 각종 조사에 따르면 중년남자나 여자의 30-40퍼센트는 배우자 이외의 이성(異性)과 교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들을 두고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욕망을
"일생 동안 떠는 ‘지랄’의 총량은 같다. 차라리 욕망을 인정하자." 내용보기

한때, 중년들의 일탈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은 그런 일탈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에 비해서 언론이나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를 않을 뿐이다. 지금도 각종 조사에 따르면 중년남자나 여자의 30-40퍼센트는 배우자 이외의 이성(異性)과 교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들을 두고서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욕망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 (앗싸~)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 욕망(慾望)의 사전적 의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와는 조금은 동떨어진 느낌이다. 이런 욕망을 달리 말하면 소망, 야망, 희망, 욕구 등과도 일맥 상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희망, 야망, 소망이라고 말하면 어딘지 모르게 긍정적이고, 또 우리가 그것을 표출해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반면, 욕망이라고 하면 억누르고 감춰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욕망은 극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코 남들은 눈치채지 못해야 하는 것, 나의 내면 속에 은밀하게 나만이 알 수 있도록 감춰둬야 하는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20-30대를 정신 없이 산 사람들, 중년이 되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다. 그러다 낙엽이 떨어지는걸 보거나, 문득 내가 살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까닭 없는 물음이 생각나면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러한 허무감은 일탈에 빠지게 만든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중년들 대부분이 이러한 일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어려서부터 강한 규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억눌린 채로 정리되지 못한 열정이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문득 저자가 그의 다른 작품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말한 지랄총량의 법칙이 생각난다. 어차피 한 사람이 일생 동안 떨어야 할 지랄의 총량은 같기 때문에, 소년, 소녀 때 지닌 열망을 제대로 분출하지 못한 사람은, 중년이 되어서라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지랄을 떨어야 하기 때문에 일탈을 꿈꾸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탈이라는 것도 근본적인 원인은 몸에 대한 억압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때때로 일탈을 꿈꾼다. 아니 일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일탈에 대해 느끼는 묘한 기대감과 흥분 못지않게, 그것들을 금지하는 계율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계율이 주는 압박이 일탈을 행하지 못하고, 마음속의 욕망으로 자리잡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런 욕망을 다른 누가 알세라, 내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욕망을 남이 알아채는 순간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방의 감추어진 욕망을 알아본다는 것은 자신도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욕망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욕망덩어리 임을 먼저 인정하고, 남을 바라본다면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볼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또한 우리의 욕망을 억제의 대상으로만 볼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분출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삶은 진정성을 가질것 이라며, 저자 자신의 욕망에 대해 고백한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많은 스캔들을 접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스캔들을 들으면서 그들을 맹렬하게 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스캔들은 권력, 학벌, 섹스와 같이 모두가 욕망하지만, 쉽게 가지지 못하는 것들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을 제때 건강하게 분출되지 못한 욕망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욕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중년이 되어서 일탈을 하게 되고, 또는 남들의 스캔들에 돌을 던지는 사냥꾼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탈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똑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오히려 더욱 맹렬하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 욕망이 들통날까 바 두려워하는 사람이란다. 그러한 스캔들은 때때로 희생양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우리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자고 한다.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한 욕망과 화해하고 살살 달래면서 공존하라고 강조한다. 그것만이 욕망으로 인해 일탈을 하고, 그 일탈로 인하여 쓰러지는 일을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우리사회가 고백에 인색한 사회라고 말한다.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의 고백에 귀를 기울인다면 희생양 메커니즘을 깰수 있다면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규범에 대해 의심해 보자고 한다. 의심이 없는 사회의 종착역은 아노미, 즉 규범의 몰락이기 때문이다. 규범에 대한 의심은 쓸데없는 규범들이 사라지게 하고, 꼭 지켜야할 규범에게는 힘을 더해준다. 의심이야 말로 규범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토대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통해서 욕망을 고백한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욕망과 관련된 사회현상을 분석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욕망을 부인하고, 억압하면서 계속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 붙이는 것보다, 욕망과 조심스럽게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안전한 길이자, 건강한 길임을 말하고 있다.

 

책을 읽고서 내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 욕망은 어떨까? 회사에서, 아니면 어떤 모임에서 혹 무엇인가를 불특정 다수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망은 없었을까? 나의 은근한 자랑이 상대방에게 먹혀 들기를 원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어릴 때 억눌렀던 열정이 욕망이 되어, 내 가슴속 깊이 음습하게 자리잡고 있지는 않을까? 이제 나도 내 욕망을 들여다 보고 싶다. 그리고 어떤 때는 야망이 되어 나타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일탈을 꿈꾸게도 만들었던 그 욕망을 인정해야겠다. 고백까지는 아니래도..



k*****1 2012.05.24. 신고 공감 11 댓글 21
리뷰 총점 종이책
인생 뭐 있어? 욕망해도... 괜찮은거야
"인생 뭐 있어? 욕망해도... 괜찮은거야" 내용보기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이와 3학년인 작은아이에게 마흔 초반의 엄마는 이야기 한다. 너무 모범생일 필요도, 너무 반듯할 필요도, 너무 정석일 필요도 없다고... 무슨 엄마가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이만큼 인생을 살아보니 모범생처럼 피곤한 인생은 없는 것 같다.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반듯한 모범생이 인생전반에 모범생일까? 그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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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큰 아이와 3학년인 작은아이에게 마흔 초반의 엄마는 이야기 한다. 너무 모범생일 필요도, 너무 반듯할 필요도, 너무 정석일 필요도 없다고... 무슨 엄마가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이만큼 인생을 살아보니 모범생처럼 피곤한 인생은 없는 것 같다.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사회생활에서건 반듯한 모범생이 인생전반에 모범생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학창시절 나는... 모범생과 좀 논다는 날라리(?)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생활을 했다. 모범생의 타이틀을 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내 얄팍한 잔머리 덕분이었다. 당시 학교라는 곳은 공부를 잘하면 약간의 날라리 짓(?) 정도는 살포시 눈감아 주는 시스템이었다고 할까? 학교에서는 공부 좀 하는 모범생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면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는 (당시 나는 교복 자율화 세대여서 교복을 입지 않았다. 자율복과 함께 무스와 스프레이로 한껏 멋을 부렸고, 앞머리를 닭 벼슬처럼 높이 올렸다. 그건 나의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옷이며 머리가 자유로운 영혼이 되곤 했다. 공부 시간엔 라디오에 보낼 엽서 사연을 생각하느라 다양한 상상력 놀이를 했고, 하교 길에 같은 버스를 타게 될 이웃 학교 남학생의 시선을 받기 위해 고분 분투하는(당시는 중학교도 남자 학교, 여자 학교였다. 지금 중학교는 대부분 남녀 공학이지만) 그렇고 그런 여학생이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건 모범생과 날라리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고, 그 보이지 않는 선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기도, 부러워하기도, 시샘하기도 했다. 모범생 입장에선 자신이 가진 특권(선생님의 편애, 선생님의 시선, 선생님의 기대 등)을 빼앗길 수 없으면서도 노는 친구들의 자유로운 행동은, 욕(?)을 하면서도 해보고 싶은 무언의 욕망이 존재했다. 또한 노는 친구들은 노는 친구대로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우등생의 타이틀이 야속하지만 부럽고, 짜증스럽지만 거머쥐고 싶은 동경의 욕망이 분명 존재했다. 그 당시에는 절대 좁혀지지 않을 갭들이 어떤 친구는 결혼으로, 어떤 친구는 사업으로, 어떤 친구는 죽자 살자 달려든 공부로 다양한 인생의 빛깔을 자랑하지만 나는 안다. 성공한 친구들은 그 성공을 표현하고 싶어서, 남편 잘 만난 친구는 그 영광(?)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한다는 사실을...

 

나에겐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늘 1등을 했던 친구가 있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했으며, 마음씨도 착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친구는 늘 다른 친구들 보다 자신이 앞서야 하고, 다른 친구들보다는 조금 나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크자 바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 사업을 시작 하자 비로소 자신이 자신다워졌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당당했고, 그때서야 웃음다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짧은 준비 기간과 자신만만함이 친구에게 먹구름으로 다가왔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친구는 한꺼번에 무너졌고, 많이 아파했다. 그때 친구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반듯한 선 안에서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처럼 쉬운 일과 재미없는 일은 없어. 때론 치열하게 싸워보고, 때론 일탈도 해 봐야지 마음의 탑이 견고 할 텐데... 노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어.. 한심한 것들.. 하지만 한심한 것은 그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걸 알았어. 치열하게 세상과 싸워보고 실패도 거칠해 해봤어야 하는데.. 나는 늘 모범생 선 안에서만 자란 온실 속 화초란 걸 알았어. 누가 누구에게 한심한 인생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공감하고 박수를 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내 남편과 같은 중년 남성들의 애환 같은 게 느껴져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에 문화센터에서 만난 할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남자아이들에게 사춘기는 치열하면 할수록 좋아. 나중에 나이 먹어 40대, 50대, 60대에 그 지랄 같은 사춘기가 오는 사람들이 있어. 그럼 부인이 미쳐. 그때 오는 사춘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러니 사춘기 아이들에게 더욱 치열하게, 더욱 맹렬하게, 더욱 미치게 폭발하듯 보내라고 해. 그래야 만 해. 아이들에게 착한 누구의 아들, 착한 누구의 딸을 강요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거야.”

 

책에선 말한다. 제때 불태우지 못한 소년의 열정이 중년의 아저씨들을 ‘색’으로 물들이게 된다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신정아와 변양균 똥 아저씨의 러브스토리가 되고, 상하이 스캔들이 생기는 것이고 여자를 보면 지분거리게 되는 거라고... 그게 어디 남자들의 욕망뿐이겠는가? 예뻐야 하고 날씬해야 하는 여자들의 욕망, 남의 아이보다 공부 잘해야 하는 엄마들의 욕망.... 무수한 욕망들이 이 사회에선 존재한다. 하지만 점잖은 얼굴로, 혹은 쿨한 얼굴로 그 욕망들을 보이지 않게 포장하고 감추곤 한다. 그렇게 포장되고 감춘 욕망들이 뒷골목 어디선가 음흉하게 미소 짓는다. 뒷골목 어딘가에서 누군가도 욕망을 배출 하지만 나만 아니면, 나만 걸리지 않으면 나는 선한 얼굴의 그대로 신사, 숙녀가 되는 세상.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우리도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훨씬 인간답지 않을까?

 

모두 9꼭지를 가지고 다양하지만 재미있고, 공감하지만 조금은 얄미운 작가의 자기자랑(?)을 신나게 읽었다. 작가 김두식 교수는 중산층이라는 계층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는데 어쩜 그는 대부분의 우리보다 그래도 선택 받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에게 넘보지 못할 선이 존재하듯 우리에게도 넘보지 못할 선이 있다. 김두식 교수에게 넘보지 못할 선은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은 재벌 2세 같은 사람이지만 또 일반적인 소시민에게 판사, 검사, 의사 또한 넘보지 못한 선일 수 있다. 중산층이라는 재산적 여유가 확보해준 시간이 공부할 기회를 주었고, 중산층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비슷한 직업을 가진 중산층 친구들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들은 그 선 안에서 만들어진 중산층이 되었음을 인정 한다. 그런 인생을 살면서 그는 선을 넘으라고 한다. 그래야 인생이 즐거워진다고...

 

나도 아이들에게 말한다. 공부를 놓지 않으면서 그 선 밖으로 언제든지 나올 준비를 하라고. 아니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한 쪽 발을 담그고 언제든지 다른 쪽으로 튈 수 있는 숨통을 마련해 놓으라고. 그래야 뒤에서 다른 욕망을 채우려 발버둥치지 않을 테니까.. 대한민국에서 중년으로 혹은 청년으로 살아가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한다. 그때.. 사춘기고 청춘이고 그때... 부모님의 기대 어쩌구에 목숨 걸지 않았다면,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욕망했다면 지금 더욱 행복했을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 선을 넘어 유쾌한 내가 되어보자. 인생 뭐 있어?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k*****3 2012.06.22. 신고 공감 10 댓글 27
리뷰 총점 종이책
아직도 색,계 사이에서 망설이다 [욕망해도 괜찮아]
"아직도 색,계 사이에서 망설이다 [욕망해도 괜찮아]" 내용보기
가출을 꿈꾼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박을 꿈꾼 적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만큼은 엄격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방침에 흔쾌히 따라가셨던 어머니 덕에 외박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1박2일로 가는 수련회나 스카우트 활동도 보내기 싫어하시던 아버지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고2였던 제가 외박을 허락해달라고 전화를 드렸을 때 얼마나 큰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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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꿈꾼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박을 꿈꾼 적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만큼은 엄격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방침에 흔쾌히 따라가셨던 어머니 덕에 외박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 1박2일로 가는 수련회나 스카우트 활동도 보내기 싫어하시던 아버지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고2였던 제가 외박을 허락해달라고 전화를 드렸을 때 얼마나 큰 불호령이 떨어졌을지 상상이 되나요? 아버지의 불호령에 과연 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건너 듣기로는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속을 꽤나 썩히며 젊은 날을 방탕하게 보내셨다던데, 그러다보니 당시의 아버지 세대에 비하면 상당히 늦게 장가를 든 편이라고 하는데(30세에 결혼하셨어요) 아버지는 지금껏 굉장히 바르게 살아오신 분처럼 저희를 엄격하게 대하셨지요.(물론 결혼을 결심하신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바른 생활 사나이셨습니다. 끔직히도요.) 아버지의 바람대로 우리 삼남매는 어디 가서 예의 없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나름 바르게 자라는 듯 했습니다. 공부 등 특별히 못하는 것도 없었고 학창 시절 내내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은 달고 다녔으니 말씀은 않으셨지만 아마도 아버지 속으로 흐뭇~~해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일탈을 동경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 몰래 놀 수 있을까. 범생이라는 타이틀은 유지하면서 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춘기가 되면 확실히 용기도 커지나 봅니다. 거짓말만 하면 눈동자가 흔들리고 다른 사람과 시선도 못맞추는 제가 조금씩 거짓말을 해가며 중학생 때부터 또래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자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와 집에서는 범생의 이미지를 실축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철저히 조심스럽게 말이죠. 남녀 또래들과 어울리고 가끔 술도 먹고, 친구집에서 야한 비디오를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어른들의 눈에서는 아무리 감추려해도 다 보이나봅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아버지의 관리가 들어왔으니까요. 결국 저는 아버지가 정해놓은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 숨통만 트일 정도로 그 경계를 넘나들 뿐이었지요.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모습을 통해 과감히 경계를 넘어 서지 못하는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낄낄대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저자처럼 종교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정도의 환경도 아니었지만 결국 저자 김두식 교수와 마찬가지로 규범의 틀을 뛰어 넘으면서까지 일탈을 해보지는 못했으니까요. 욕망(色)과 규범(戒)의 경계에서 늘 망설이다 결국 규범을 선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틈 속에서 숨은 좀 막힐지라도 저 역시 그 계를 뛰어넘을 용기는 부족했던 것이지요. 세상의 때가 묻을수록 더욱 자신의 욕망을 교묘히 감춘 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적당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균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나 자신을 감추고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도 위선 떨지 말라며 냉소를 보낼 때도 많았습니다. 더구나 직업상의 이유로 더욱 자신의 본심을 감춰야 할 때는 구역질이 솟습니다. 언제부턴가 교사라는 직업도 웬만하면 밝히지 않습니다. 교사는 이러이러 해야 한다 또는 이러이러 할 것이다 라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규정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행동의 제약과 생각의 표출을 막게 하는 심리적인 장애물이 되었으니까요. 


가장 난감할 때는 아이들을 대할 때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아이들과 사춘기 시절의 나와  ‘동일시’(261p) 할 때가 있습니다. 파(派)를 결성해서 남자아이들과 어울렸던 학창 시절을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더구나 남녀공학이었기에 남자아이들의 심리를 잘 알았던 제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 아이들이 지금 어떤 감정이고, 선생과 학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돌아서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하고 다니고, 뒤에서는 얼마나 호박씨를 많이 까는지 대충 알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규정과 규범이 우선시 되는 학교라는 조직에서의 선생(나)은 그 경험을 모른 척 하며 아이들을 코너로 몰아세울 때가 많습니다. ‘이래야 되지 않겠니? 저래야 되지 않겠니?’ 따위의 선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아이들도 겉으로는 ‘예’‘예’하며 알아듣는 척 하지만 그건 지금 이 자리를 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대답일 뿐이지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선생은 남들 보기에 형식상의 모양새는 갖추었기에 돌려보냅니다. 아이도, 선생도 서로 다른 방어책으로 위선을 떤 것이지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 104면에서 저자가 던진 한 문장이 저의  머리를 쟁~하고 때립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저자가 학창시절 겪은 사건이었으니 학생의 입장에서 표현한 의문입니다. 저는 반대로, “과연 나는 이 많은 아이들을 모두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이들이 좋긴 하지만 모든 아이들을 좋은 건 아닙니다. 하물며 제가 사랑‘씩’이나 하는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렇다고 이제까지의 교직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만의 교육관과 사명감마저 무너지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이 물음에 멈칫 한 것은, 나 스스로, 그리고 사람들이 바라는 교사상의 기준 때문이었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은 무엇보다 ‘아이들을 사랑해야한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교육’이라는 목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뿐만 아니라 인성 교육까지 교사의 역할로 돌리는 우리 사회의 규범적 시선 때문입니다.(기본적인 인성은 학교 교육으로 변화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가 교사가 된 이유는 환경적 탓(시골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제게 가장 매력적인 직업은 교사밖에 경험하지 못했으니까요.)도 있지만, 그리고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다라는 환상도 분명 있었지만, 제 속을 더 까발려 놓고 진짜 이유를 묻는다면 ‘여자의 직장 중 교사만큼 좋은 직장이 없다’던 부모님의 말씀에 본능적으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여교사라면 설문조사에서 늘 신붓감 1,2위를 다투고 공무원 신분이니 철밥통인데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안팎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직업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을테니까요. 스스로의 입으로 차마 그 말을 뱉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가르친다는 재미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 순수하고 젊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 위에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살고 싶었던 욕망이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방금  ‘~모르겠습니다’ 라는 서술어를 맺는 것을 보니 여전히 저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계(戒)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고 마네요. 이 책 38면에 등장하는 ‘굴절된 욕망’이라는 표현이 지금 상황에서 정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욕망이 직선으로 달려가지 않고 어딘가에서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지고, 숨겨지고 또 숨겨지다 보니, 원형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자, 어떻습니까, 저자의 정확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드나요? 자기의 ‘욕망에 정직할수록 욕망이 굴절될 여지가 적다’(41p)는 저자의 지적이 저에게 팍팍 와 닿습니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욕망을 왜 자꾸 감추고 숨기고 있을까요. 오히려 욕망을 드러낸 사람에게 도덕의 기준과 인성의 완성도를 들이대며 속물적인 인간으로 하향 평가하는 집단적 심리에 문제는 없을까요. 심하면 마녀사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죠.  색에 충실한 사람을 관음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저자 김두식 교수의 커밍아웃 덕분에 저의 시선이 좀 묽어지고 순해진 듯합니다. 규범은 따르라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이 우선이지 규범이 우선이 아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어딘가 라는 생각에 오랜만의 책 읽기가 감사합니다. 그의 삶과 생활이 접목된 ‘욕망’에 대한 분석들이 독자로 하여금 학자 김두식이 아니라 인간 김두식으로 바라보게 만들었고 그 시선을 나에게 돌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를 포위하고 있던 '엘리뜨' 김두식 '교수'로 보게 한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경계를 넘어서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겁내는 소심한 아저씨를 보게 됩니다. 소심하고 겁많은 아저씨의 커밍아웃을 통해 묘한 동질감과 쾌감을 느낍니다. 아니 안도감까지 드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풉.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움츠려들어 어깨 통증에 시달리던 제가 이제 좀 등을 곧게 펴고 평화로운 미소를 한 얼굴로 제 삶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김두식표 힐링캠프'라도 다녀온 듯 영적으로 풍성해진 기분입니다. 일종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는 표시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계를 넘어설 용기는  없지만  ‘홀로 서는 용기’와 ‘고백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남과 다를 수 있는 용기’는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책 한 권 읽고 이렇게 홀가분할 수 있다니요! ! 하하하! 김두식 아저씨는 글을 쓰면서 치유했다는데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참, 서두에 저의 첫 외박(공식 학교 행사를 제외한) 시도에 대한 결과를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제가 어떤 선택을 했냐면요...... 




외박을 선택했습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밤이라서였는지, 저는 아버지께 자고 가겠노라 통보해버리고 정말 외박을 했습니다. 앗, 엉뚱한 상상은 마시구요. ㅎㅎ 좋아하는 선생님 자취방에서 잤답니다. 그때 불쑥 솟아나던 용기가 다시 생겨날 수 있을까요? 그건 두고볼 일이지만 실실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언젠가 일을 저지를 것 같기도 하네요. 계의 경계를 훌쩍 넘진 못하겠지만 지금보다야 색에 충실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욕망해도 괜찮다고 저 자신을 다독이지 않을까요. 상상만 해도 즐겁네요. 하하하.

 

 


 


 

이 책을 읽은 후 꼭 보고 싶은 두 가지가 생겼습니다.

 

1. 영화 : 색,계(2007)

 


 

2. 책 : 4001 (신정아, 2011)

 



YES마니아 : 로얄 g********s 2012.06.22. 신고 공감 10 댓글 27
리뷰 총점 종이책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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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말은 어린 시절 수업시간에 가만히 녹여먹는 사탕의 기억처럼 달콤하면서도 조심스럽다. 그 말조차 금기시하면서 살아온 보통의 사람들에게 저자는 도발적인 제목을 던졌다. 욕망해도 괜찮다고. 표지의 붉은 색이 강렬하다. 그렇다. 당신의 욕망이 무엇이든 괜찮으니 해보라고 손을 잡아끈다. 호기심 따위 이미 세월의 바람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었나.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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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말은 어린 시절 수업시간에 가만히 녹여먹는 사탕의 기억처럼 달콤하면서도 조심스럽다. 그 말조차 금기시하면서 살아온 보통의 사람들에게 저자는 도발적인 제목을 던졌다. 욕망해도 괜찮다고. 표지의 붉은 색이 강렬하다. 그렇다. 당신의 욕망이 무엇이든 괜찮으니 해보라고 손을 잡아끈다. 호기심 따위 이미 세월의 바람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었나.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나이 들어보니 나이와 별개인 것이 너무 많다.


 나는 마흔 살이 되면 더 이상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취미생활이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게 될 줄 알았다. 남편은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근처 시골로 들어가 최소한의 경제생활을 하면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겠다고 늘 내게 얘기하고는 했다. 나는 촌부의 아낙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었다.


 이 책은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고백을 통해 억압된 욕망의 역습에 희생양이 되지 말라고 조언한다. 성실한 고백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한 대가에 대한 치유와 회복이 될 것이므로. 그 고백의 처음은 자신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기이다. 자신의 치부를 눈 부릅뜨고 보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욕망의 덩어리를 정확히 봐야 만이 다른 사람의 욕망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 어느 정도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앞을 보며 달리는 친구들이 내 주위에 있다. 내가 늘 지금하고 있는 일을 정리하려고 드는 반면 그 친구들은 앞으로 새롭게 하게 될 일들을 위해 자격증을 따고 늦게 시작한 대학원 공부에 몰두했다. 나는 친구들의 열정이 괜한 짓으로 보여 만날 때마다 그만하라고 한 마디씩 뱉곤 했다. 그러나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현실의 나를 변화시킬 힘도, 용기도 없었는데 나와는 다르게 현재의 벽을 뛰어넘어 도전하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던 거다. 나 역시 더 나은 스펙을 쌓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이 기다릴 거라는 것을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스펙을 위해 투자할 여유가 없었고, 노력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 안에 숨겨진 ‘굴절 된 욕망’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대학원 진학을 해서 석,박사 학위에  도전하고 있는 친구들이 나는 몹시도 부러웠던 거다.


 저자는 특이하게도-내가 생각하기에는-『4001』을 쓴 신정아의 이야기에 많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했다. 신정아, 변양균 두 사람이 일으킨 스캔들 내용이 궁금했지만 사서 보기에는 어쩐지 불편해서 보지 않았는데 저자는 그 것 역시 자신과 닮은 욕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멋지게 정의해 버린다.


 나는 무엇 때문에 스스로의 욕망을 감추고 살아왔던 것일까? 어쩌자고 읽고 싶은 책 하나도 남의 눈을 의식해서 사보기를 포기해야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건 아마도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어린 시절 남과 비교해서 자기 자식을 칭찬하면 팔불출이라는 욕을 듣고 살았던 부모님 세대들로부터 들은 인색한 칭찬의 결과가 아닐까. 부모님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나는 질책 받지 않는 것이 칭찬이라고 여길 만큼 주변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었고,  나 역시도 자식의 장점에 대해서는 속으로만 흐뭇해할 뿐 표현하지 않고 자식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매섭게 질책하는 부모가 되어있었다.


 알게 모르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살아온 내게 저자는 비법 하나를 전수해준다.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이웃들이 있다. 십 수 년을 알고 지내면서 서로 친하다는 이유로 우리들은 어느새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하기보다는 단점을 긁어서 조언해주는 일에 더 열을 올리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마음에 아픈 말도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런 날이 계속되자 만남이 뜸해졌다. 아무리 상대를 위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 조언의 말 속에는 상대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서로가 했던 것이다.

 일상에서 흔한 이럴 경우, 저자는 외부의 심각한 공격에 대항하면서 내면의 자존감을 지키는 유용한 수단으로 이야기를 삼천포로 빠트리는 “꺾기도 비법”을 사용하라고 권유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까지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차가운 진실을 인정해버리면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내가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의 여유를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앞으로 이 “꺾기도 비법”을 가슴 속에 간직할 거 같다. 자신과 안 맞는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 궁합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억지로 맞춰가며 스트레스 받으면서 살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저자의 말에 공감을 느끼니까 말이다.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끝장낼 수 있는 용기라는 말에는 더욱 깊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신 거울 앞에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누구인가?

 재능이 부족해서 얄밉고 노력이 부족해서 쥐어박고 싶은 나지만 내가 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와 맺어진 내 주변의 모든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가진 욕망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부인하고 억압하면서 계속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것 보다는 달래어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붉게 단장한 한 권의 책을 지팡이 삼아 내 안의 욕망의 미로를 따라 들어가 본다. 감추어진 골목 안 풍경에 어느 날 느닷없이 당황해하기 보다는 미리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골목이 가진 장단점을 찾아내어 함께 살아가고 싶은 따뜻한 마음이 생겼다. 그걸 위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용기를 내야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의 내면에 깊숙하게 억압 된 욕망을 고백할 용기, 그 힘으로 내 안에서 들끓고 있는 열등감을 치유하고 나의 자아가 회복할 수 있게끔 나의 욕망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려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 책이 붉은 확성기처럼 말해주고 있다.






t******e 2012.06.06. 신고 공감 9 댓글 18
리뷰 총점 종이책
난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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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음절 뒤에 느낌표 두 개쯤 붙여 비아냥거리고 싶었으나 ‘선’을 넘으면 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십대 소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   중학교에 막 입학할 무렵, 도덕 시간으로 기억한다. 교과서와 선생님은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셨다고 했다. 여하튼 법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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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음절 뒤에 느낌표 두 개쯤 붙여 비아냥거리고 싶었으나 ‘선’을 넘으면 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십대 소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

  중학교에 막 입학할 무렵, 도덕 시간으로 기억한다. 교과서와 선생님은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셨다고 했다. 여하튼 법은 중요한 거니까 잘 지켜야 한다고 마무리될 때 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악법을 지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좋은 법으로 바뀔 수 있도록 힘써야 했다고, 제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죽음을 선택한 소크라테스는 바보 천치라고. 허나 눈에 보이지 않는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두려워 게워낼 뻔한 말을 도로 삼켰다.

  삶에 대한 애착이 모두 소진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자기 욕망에 솔직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후에 이 명언이 플라톤에 의해 지어졌음을 알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매일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해오는 사회관습을 무시할 수 없는 다수에 불과한 나도, 친구들도, 마주하면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는 어른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누구나 욕망에 충실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배고프거나 불편할 때 무언가가 충족되지 않으면 울음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새로운 환경과 맞닥뜨리게 되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욕망을 감추는 게 미덕임을 강요당한다. 욕망이 파도쳐도 그렇지 않은 척할 수 있는 방법을 나름 터득하게 되고, 노골적으로 자기의 욕망을 표출하는 사람을 배척하게 된다. 모범적인 생활의 첫 번째 조건이라도 되는 양 나 또한 적당한 가면을 쓰고 살았다. 가면에 꽤 익숙해질 무렵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를 펼쳤다.

  채도 높은 빨강이 더없이 어울린다. 저자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글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된 과정에 흥분과 분노가 담겨 있다. 이 두 가지를 걷어내니 용기와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인체 활동성을 자극하는 빨강처럼, 이 책은 고착된 우리네의 그릇된 욕망에 대한 태도를 자극한다.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일은 무섭고도 두려운 일이다. ‘겉으로 보면 계(戒)에 속해 있지만 실상은 색(色)의 노예인 사람(P. 43)’임을 인정한 저자는 자신의 과거를 당당히 밝히며 한 개인의 억압된 욕망을 대놓고 엿보게 한다. ‘보이는 나’에 자유로울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부모와 형제로 시작되는 타인의 눈으로, 규격화된 세상의 잣대로 욕망이 끼워 맞춰져 정작 자기가 원한 형태와 멀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여기며 지내왔으나 스스로를 의심하며, 세상을 의심하며 원래의 나를 찾아가게 되는데 사회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지 않은 이에게 뒤늦게 감춰진 욕망이 꿈틀거리거나 삐뚤어진 모습으로 불쑥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매스컴을 뜨겁게 달군 사건을 재조명하며 분출되지 못한, 관심 받지 못한 개개의 욕망을 분석하기도 한다. 자기 욕망에 익숙해질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부모의 기대가 고스란히 자기의 욕망이 되고 사회의 가치가 욕망을 부채질하는 상황에 길들여진 청춘들의 안타까움을, 허영과 명예욕에 물들어 평생 추구했던 가치를 잃어가는 영혼의 측은함을 보여주며 욕망과의 대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외부에 비치기를 원하는 ‘이미지’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진짜 자신(real self)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P. 224)’고메즈 목사의 말을 인용한 부분이 가장 와 닿는다. 존경받는 사회적 위치를 팽개치고, 온갖 핍박과 야유를 감수하면서까지 동성애자임을 밝히고서 여전히 목회와 강연 활동에 활발한 그는 행동으로 직접 ‘이미지의 나’를 의심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그 안에 숨겨진 욕망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행복의 우선 조건은 진짜 자신을 찾는 것. 허상이 아니라 실상을 볼 줄 아는 자가 자기의 삶을 온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인지할 때야 비로소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외면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진짜 나와 만나게 되면 헤어질 수 있는 용기가 생길 수 있을 터. 헤어질 수 있는 용기는 ‘상대방과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기 위치를 확보한다는 의미(P. 120)’다. 타인과 끝장낼 수 있는 과감함이야말로 좋은 관계를 맺게 하는 용기이다. 그러려면 혼자 있을 수 있는 용기 또한 요구된다.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행복할 수 있(P. 124)’다. 헤어질까봐, 혼자 남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이라면 먼저 자기 내면부터 바라볼 일이다. 자기 욕망부터 의심할 일이다.

  사회의 온갖 규범들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랑과 연대의 공동체를 일구어내는 출발점은 바로 규범에 대한 의심(P. 275)’이다. 의심하다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는 눈이 생길 테고, 가면 뒤에 숨겨진 어두운 부분이 짐작될 것이다. 가면을 벗긴 맨얼굴이 환한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하려면 의심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의심한 규범을 그대로 따랐으나 개개의 욕망에 충실할 이 책의 독자는 출발점에서 더 나아가리라 믿는다.

  근래 개봉한 여성 인권을 다룬 영화 <더 스토닝>에서 투석형의 끔찍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음모에 휩싸여 간통이 아닌,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는 죄목으로 판결한 지 1시간 만에 투석형이 집행된다. 돌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우리 마을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다는 종교 지도자의 말과 누명에 대한 항변 없이 함께 호흡한 나를 당신들은 죽이려 한다는 여성의 말이 부싯돌처럼 불꽃이 인다. 여성의 이모로부터 우연찮게 전해들은 프랑스 기자의 글로 세상에 알려진 실제 사건은 욕망과 규범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투석형은 정의로운가. 과연 간통죄는 사형당할 만큼 그렇게 무거운 죄일까. 처녀가 애인과 동침했다고 아비나 남자형제가 죽였는데, 왜 죄가 되지 않는 걸까. 종교와 규범의 허점을 이용하여 삐뚤어진 욕망에 불 지피는 사람이,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는 사람이 등을 맞대고 공존한다. 사정이 좀 나을 뿐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진짜 자신을 찾지 못하고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된 허세와 과시, 위선, 이중성 등에 길들여진 당신에게 빨강이 되어줄 책, 끌리지 않는가.

  저자의 비유대로 누구에게나 내재한 욕망은 B형간염과 같다. 치료에 급급하면 오히려 사망에 이를 수 있지만 적절한 거리를 두면 오히려 큰 문제가 없는 바이러스. ‘욕망을 부인하고 억압하면서 계속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것보다는 욕망과 조심스럽게 대화하면서 살아가(P. 289)’야 한다. 삶은 새로운 욕망을 끝없이 만들어가며 채우는 시간이기도 하니까.

 

 

 

 

* 박성우 시집 <난 빨강>에서 제목을 차용하였음.

  

 



YES마니아 : 골드 a*****4 2012.06.22. 신고 공감 9 댓글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