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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는 가장 예민한 부분이니 건드는 게 아니다?
'새내기'라는 상큼발랄한 명칭으로 불렸던 때, 그러니까 대학에 갓 입학한 1학년 때의 일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학생회 선배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을 앉혀놓고 세미나를 한답시고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 같다. 토론이라는 놈이 언제나 그러하듯,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이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갈팡질팡 했고, 화제는 어느덧 미국의 근본주의 개신교 문제에 이르렀다. 그 때 크리스챤을 표방하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물론, 저도 미국 근본주의자들 안 좋게 생각하지만 종교는 개인의 신념의 문제이고 가장 예민한 부분이니 이런 자리에서 논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논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이렇다. 종교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이란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될 수 없다. 그렇기에 섣부른 가치 판단을 금하고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는 타인의 비판에서 자유로워진다.
얼핏 보기에 종교전쟁으로 얼룩진 중세의 유럽을 본다면 상기 태도는 일보 진보한 듯 보인다. 각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상호 존중과 이해를 통해 아름다운 문명을 가꿔나가자,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2. Epoche(에포케)
종교학에서 강조되는 학문적 자세로 'Epoche'라는 말이 있다. 굳이 번역하자면 '판단정지'라고 할 수 있다. 즉, 각 종교전통을 이해할 때 자신의 신념을 던져놓고 한 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보자는 말이다. 의도는 좋다. 하지만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처럼 자연과학조차 연구자의 주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마당에 '에포케'가 가지는 실천적 함의가 얼마나 될까?
종교현상학에서 '에포케'의 발현은 각 종교전통의 단순한 기술로 끝나고 말았다. 기독교는 이렇고, 불교는 이렇고, 이슬람은 이렇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대해 함부로 가치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식의 서술이 유행이 되었다. 게랄루스 반 델 레우같은 학자의 학문적 작업이 이런 식이다. 멀치아 엘리아데와 윌리엄 제임스 역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단순한 기술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을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했고, 특히 고대인의 존재론을 현대인의 역사와 대비되는 영원으로 승화시켰다. 제임스의 경우, 중요한 것은 개인의 종교 체험이었고 이를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위험한 태도라고 경고한다.
전공 수업에서 선생님들이 강의한 논지도 이와 대개 비슷했다. 기독교 개론의 배철현 선생님은 근본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들어 냈지만, 나머지 수업에서는 그 어떠한 논쟁적인 내용도 논의되지 못했다. 종교이론, 종교전통의 역사, 이것이 강의의 주된 내용이었다. 엘리트들의 독단적인 담론이 아닌 실제 인간들의 사고와 인류의 역사가 궁금하여 철학과가 아닌 종교학과에 지원했건만......
3. 브루스 링컨, 맑시스트 종교학자
이 때 본인의 주목을 단번에 끈 학자가 브루스 링컨이었다.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브루스 링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리아데 밑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은 몰역사적이라는 비판과 성스러움을 중심으로 하는 또다른 신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이러한 엘리아데의 영향력 아래에서 역사적 접근을 중요시하는 브루스 링컨의 종교학이 나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브루스 링컨 역시 기존의 종교학에 대한 거부감을 줄곧 느끼고 있었던 바, 마르크스를 통해 그의 학문적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그는 종교학이란 말 그대로 종교사학(history of religion)이 되어야 한다며, 성스러움과 영성과 같은 신학적 용어를 배제하자고 주장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가 다루는 종교의 실체는 이데올로기다. 단, 이 때의 이데올로기는 일방적으로 억압적 기제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닌 통합이나 해방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이데올로기를 일컫는다.
4. 거룩한 테러, 처음으로 소개되는 브루스 링컨의 저서
'거룩한 테러'는 브루스 링컨의 저작 중에서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예상했던대로 역자는 김윤성 선생님 - 본인도 브루스 링컨을 김윤성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 받았다 - 이다. 책은 6개의 개별적인 논문으로 구성되지만 각각의 논문들이 긴밀하게 연결된다. 책 제목에서 예상했겠지만, 이 책이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는 사건이 지난 9.11테러다.
9.11테러 직후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논란이 되었다. 테러의 본질이 이슬람 근본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의 싸움이라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이와 반대편에서 이 사건은 종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정치와 외교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책의 저자 브루스 링컨이 보기에는 이들 모두의 주장이 불완전했다. 저자는 종교만으로 9.11테러를 설명하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무시한 채 분석하려는 시도 역시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교를 다양한 구성요소와 복잡한 측면을 갖고 또 잔인한 폭력을 성스러운 의무로 둔갑시키는 능력을 비롯한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 역동적이고 모호한 실체로 다루고자 한다(p.7).
제1장 '현대 정치 상황 속의 종교 이해'에서 저자는 근본주의를 다룬다. 그는 근본주의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함의를 가지기 때문에 '최대주의'로 바꿔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정치에서 종교는 최대주의적 흐름과 최소주의적 흐름의 갈등이 존재한다. 종교의 최대주의는 종교가 인간의 모든 면에서 스며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이다. 이 과정에서 종교는 도덕의 신성하고 확고한 토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엔, 종교는 스스로를 신성하고 확고한 것으로 구성해내는 인간적 담론에서 시작되며 이를 통해 행위들이 도덕으로 규정될 뿐이다(p.48).
제2장 '대칭적인 이원론들'은 부시와 라덴의 연설을 비교한다. 이들의 연설은 몇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몇 가지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우선 그들은 약자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자신들 모두가 정의를 대변한다고 믿는다. 한편, 부시와 라덴은 자신들의 주장을 받쳐주는 권위를 다른 곳에서 찾는다. 부시는 정부와 민주주의에, 라덴은 종교와 카리스마에 기댄다. 사회집단들이 종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스스로를 경험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집단들은 경쟁자들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못박는 경향이 있다.
제3장 '자하드, 탄식, 내부의 적'은 미국의 유명한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대담을 다룬다. 테러 직후 이루어진 이 대담에서는 제리 팔웰과 팻 로버트슨이 자신들의 신앙을 대대적으로 표출한다. 이들의 비판 대상은 이슬람이라는 외부의 적 뿐만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동성애자, 자유주의자들에게까지 확장된다. 테러는 하나님을 저버린 이들의 탓이라는 논지였다. 대담 이후 미국 내 여론들은 일제히 이들을 비난한다. 팔웰과 로버트슨은 여론을 의식한듯, 자신의 얘기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수습에 나서지만 평소 근본주의자들의 생각을 엿볼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제4장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하여'는 종교가 문화를 구성해내는 방식에 대해 다룬다. 문화는 어떤 집단이 국외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배제함과 동시에 집단과 구성원을 규정하는 가치들에 얼마나 충실한가의 정도에 따라 자체 내의 내적 위계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집단이 결집하고, 집단 정체성을 구축하며, 연대감을 발휘하는 가장 주된 수단(p.119)이다. 취향(미학)과 도덕(윤리학)에 초월성을 부여함으로써 종교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제로 기능한다. 종교전쟁의 폐해를 목격한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의 '초월성'을 공격함으로써 시민윤리를 구축하려 애쓴다. 특히, 칸트는 철학으로 이 작업을 수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제5장 '종교적 갈등과 후기 식민국가'에서는 민족국가와 알카에다에 대한 고찰로 이루어진다. 브루스 링컨은 국가가 계몽주의 자식이라는 점과 민족은 조직화된 폭력을 키우기 위해 생긴 종교의 범주라는 점에서 봤을 때 이들 간의 결합이 상반되는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이러한 민족국가의 모델은 세속화된 정부가 종교의 역할을 상당부문 빼앗는 양상으로 진행되며 세계적으로 전파되는데 이들 모델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대주의적 종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알카에다는 민족국가를 넘어서 범세계적인 가치 아래 최대주의적 운동을 실현하려는 단체로써 주목받는다.
제6장 '종교, 반란, 혁명'에서는 저항의 기제로써 종교를 다룬다.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이 악화되고, 혁명이론의 정당성이 담보되어야 하며, 동조자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 때 혁명은 성공하는데, 혁명을 부르짖는 종교의 딜레마는 다음과 같다. 혁명에 성공한 종교는 그 시점부터 체제안정을 지향하는 보수적인 종교가 될 수 없다. 혁명에 실패한 종교는 주류 세계로부터의 탄압에 직면하여 노선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5. 지식인은 글로써 대중과 소통하는 자이다.
브루스 링컨은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글'이라고 했다. 물론, 다른 지식인들도 글을 쓴다. 엘리아데도 글을 썼고, 조갑제도 글을 쓴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목적과 그의 글쓰기가 의존하는 권위에 있어서 브루스 링컨은 진보적인 지성인이라고 부를만 하다.
'학생은 자신의 사고체계가 너무 굳어져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종교를 다룸에 있어서 이론과 공동체, 역사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도 좀 생각해 봐라. 학생의 그러한 태도는 새로운 경험을 가로막는다'
인도종교 시간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과제란에 올린 인도의 해탈 개념에 대한 선생님의 논평이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서 내게 종교학이란 이것도 옳을 수 있고 저것도 옳을 수 있다기 보다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학자의 길은 포기해버렸지만, 앞으로 한국의 종교학도 이러한 작업을 많이 해 줬으면 좋겠다. 브루스 링컨식의 접근을 한다면, 공격에 버틸만한 내공을 가진 종교전통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학자는 뭐 먹고 살라고? 학자에게 중요한 것은 담론의 합리적 구성이지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 방어는 아니지 않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