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다양하다. 쉴 새 없이 변하고, 지금도 변한다. 어떤 것은 백년을 있다가도 없어지고 어떤 것은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하룻밤 새 생겨나기도 한다. 그 안에 사람이라는 존재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인간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던 르네상스의 시기는 의미 없이 뒤죽박죽이 된 피카소의 추상화처럼 변했다. 하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사람이 빠지면 그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도서관에 책들이 가득하지만 그 안에 알맹이가 없이 그저 겉표지만 가득 꽂아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철학은 사람들에게 위안이다. 고리타분하고 심각한 문제들로 꽉 들어찬 문제일 수도 있지만 철학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는 위안이다. ‘다 빈치 코드’의 세상인 중세 이전에는 철학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매체가 없어서 많이 유행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의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들이 미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려면 적어도 거기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떤 상인이나 탐험가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런 정보는 별로 의미가 없었고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정보라는 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달라졌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TV로 생중계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 허리케인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는 따뜻한 방에 앉아서, 청명한 가을 날씨에 단 1초 만에 전송 받아서 습득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데이터이다. 데이터는 그 자체로는 효용가치가 없다. 가공하여 정보가 되어야 한다. TV와 라디오, 신문과 잡지는 그런 데이터 가공의 역할을 잘 수행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미디어’에 불과하다. 지금은 그 미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그 때 철학이 위안이 된다. 움베르토 에코는 ‘철학의 위안’에서 해박한 배경지식과 통찰력으로 세상을 정리해나가고 있다. 마치 바벨의 도서관 입구에서 하염없이 졸고 있는 학식 높은 사서처럼 깊은 사색과 풍자로 세상을 비벼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쉬운 방법으로 세상을 사는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어렵고 복잡한 세상,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이런 세상의 데이터를 하루 종일 접하고 또 하루 종일 정리하고 있다.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정보를 하루는 라면처럼 끓여먹고, 하루는 비빔밥처럼 비벼먹는다. 찜도 해먹고 날것으로 먹기도 한다. 에코의 책은 맛좋은 식단에 빠질 수 없는 밑반찬이다. 잘 익은 김치다. 미디어에서부터 익살맞은 도서관 얘기와 엑스포 이론까지. 근래 50여 년 정도를 움베르토 에코는 책 한권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능력도 참 대단하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의 철학은 오늘도 위안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