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4)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10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9.0
리뷰 총점 종이책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한양 도성길 순례..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한양 도성길 순례.." 내용보기
올해는 1394년 이성계가 조선의 수도로 한양을 정한 지 622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은 중국 중심권 안에 머물렀던 유교 국가였다. 조선, 하면 생각나는 것은 당쟁, 남녀차별적인 유교 문화, 장구한 왕조의 역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성곽길도 나름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양 도성 걸어서 한 바퀴’는 오십을 목전에 둔 어느 날 한양 도성길 순례에 나선 역사 체험가 유영호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한양 도성길 순례.." 내용보기

 

올해는 1394년 이성계가 조선의 수도로 한양을 정한 지 622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은 중국 중심권 안에 머물렀던 유교 국가였다. 조선, 하면 생각나는 것은 당쟁, 남녀차별적인 유교 문화, 장구한 왕조의 역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성곽길도 나름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양 도성 걸어서 한 바퀴’는 오십을 목전에 둔 어느 날 한양 도성길 순례에 나선 역사 체험가 유영호의 탐험 및 탐사(探史)의 노고가 깃든 책이다.


한양 정도(定都), 그리고 주산(主山) 설정 자체가 유교 또는 풍수지리, 불교 등의 이념 대립이 낳은 결과이다. 한양도성은 현존 도성들 중 세계 최장 기간(514년: 1396 - 1910년)에 걸쳐 도성 역할을 수행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중국 문헌인 ‘석명(釋名)’에 궁(宮)은 궁(穹)이란 글이 있다. 담 위로 높이 솟은 집이라는 의미이다. 저자의 책을 통해 우리는 한양 도성길은 일제(日帝)가 남긴 흔적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왜(倭)에서 일본까지 엮인 우리의 역사는 친일과 민주인사의 대결 구도를 선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역사적 유물 및 건축물 등과 관계된 인물들을 호명해 그 배경과 변천사(變遷史)를 밝히고 우리의 현재 의미와 연결짓는 방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그렇기에 야사(野史)를 많이 참고한 것이 눈에 띈다.


좁게는 도읍을 둘러싼 성곽과 문을, 넓게는 성곽 및 그 안의 공간을 가리키는 한양도성(都城)은 18여 km의 둘레길이다. 한양도성 순례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할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처음 서울 성곽을 따라 걸으며 인구 1천만의 대도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과 숲이 있었나 싶을 만큼 놀라웠다는 말을 한다.


한양 도성, 하면 나는 먼저 부암동을 떠올리는데 그것은 자신이 사는 부암동 집을 "광화문이 지척이면서도 조용하고 호젓하며 공기가 맑다.“고 표현한 한 언론인으로 인해서이다. 수도로서의 위상과 지위를 지켜오던 한양 도성은 한말 외세에 의한 강제적 근대화와 일제강점으로 인해 훼손되기 시작했다.


1988년 전차 개통으로 인해, 그리고 1907년 숭례문 아래로는 비좁아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를 제시한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 사건 등으로 인한 수난을 당하게 된 한양 도성은 1925년 이후 성벽에 인접해 집을 지은 민간에 의해서도 훼손이 가속화했다고 할 수 있다. 책은 한양 도성과 이웃한 역사적 건물들에 대한 정보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낸 사건 이야기가 함께 비중 있게 전달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친일 쪽에 섰던 자들과 반일 애국지사들로 양분된다고 할 수 있다. 때로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도 담고 있어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저자의 치밀한 역사 고증을 신뢰한다. 확실한 근거 제시와 분명한 논리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명한 역사관은 조선 초기 있었던 불교와 유교 정확하게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대립 이상으로 흥미를 끈다.


왕위를 놓고 벌인 골육상쟁 및 부자의 갈등, 권력의 격랑에 휘말린 임금과 왕비(王妃)의 애틋한 사연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 사연들 중 단연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사연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세자가 아닌 국왕과 혼인한 왕비이다. 고려 의종때 희종법사가 창건한 숭인동 청룡사에 우화루(雨花樓)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밤을 지새운 곳으로 영원히 이별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영리정(永離停)으로도 불렸다.


인상적인 것은 오행(五行) 즉 상생상극 관계로 엮인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에 맞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란 미덕을 건물에 적용해 도성 동서남북의 문 이름을 각각 흥인(仁)지문, 돈의(義)문, 숭례(禮)문, 숙정(正)문 등으로 설정하고 중앙에 보신(信)각을 둔 것이다. 북문에 지(智)가 아닌 정(正)이란 이름이 붙은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숙종때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도록 축성한 홍지(智)문이 숙정문을 대신했다는 말이 있고, 숙정문이 소지(智)문이었다는 말이 있다.


‘한양 도성 걸어서 한바퀴’는 숱한 사연과 배경 지식을 실어 역사를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구성이 빛난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생각한 것은 역사적 유적과 건물도 결국 사람 사이의 관계로 수렴한다는 점이다. 도성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이 만나 이루어낸 사건에 대한 지식 곧 역사에 대한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어떤 관념적 주제를 논리적이거나 실증적으로 입증한 역사 보고서가 아니라 설명한다.


그저 물리적 시간대와 공간대를 따라 도성 길을 순례하며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기록한 순수 기행문이라는 소개가 눈길을 끈다. 그렇기에 시대적 배경면에서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역사를 수필(隨筆)처럼 자유로운 필치로 그려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달빛 따라 걷는 한양 도성길 걷기라는 프로그램이 눈에 띈다. 저자의 책은 그 낭만적이고 역사적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부추긴다.

이달의 사락 m******1 2016.09.04.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내용보기
우리 동네 시민교육단체에서 달마다 나오는 소식지에 이 책에 나오는 내용 한꼭지가 실렸다. 읽어보니 만만치 않아 얼른 책을 샀다. 그리고는 단숨에 쫙~~. 왜? 재미있으니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IT 관련한 일을 하다 지금은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의 대표까지 하고 있는 사람이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전공과 무관한 박사학위까지 땄다니 참말 대단한 양반이다. 이 책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내용보기

우리 동네 시민교육단체에서 달마다 나오는 소식지에 이 책에 나오는 내용 한꼭지가 실렸다. 읽어보니 만만치 않아 얼른 책을 샀다. 그리고는 단숨에 쫙~~. ? 재미있으니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IT 관련한 일을 하다 지금은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의 대표까지 하고 있는 사람이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전공과 무관한 박사학위까지 땄다니 참말 대단한 양반이다. 이 책도 아마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 보는데 내공이 심상치 않다.

 

서울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쭉 돌면서 눈에 밟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담았다. 덕분에 우리는 달랑 책 한 권으로 서울 주요부의 모든 곳을 가만히 앉아서 즐길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 비슷한 내용을 가진 책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이렇듯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 있는 건 흔치 않다. 한 번 읽어 보시라. 서울이 풍부해진다.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한 책이지만 다만 딱 한군데 오기가 보인다. 석파정과 아소정을 소개하는 단락, 126쪽 위에서 6번째 줄에 보면 대원군 이하응이 스물 네 살 때 대원군으로 봉해졌다고 했는데 이하응이 대원군에 봉해진 것은 고종 즉위년인 1863, 그의 나이 마흔 네 살 때였다. 대원군이란 호칭이 임금의 아버지를 뜻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이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살아있는 대원군이 탄생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왕족의 한 사람으로 그냥 흥선군이었다. 이하응이 흥선군에 봉해진 것이 1843년이니 우리 나이로 스물 네 살 때. 아마 이를 잘못 쓴 듯 보인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굳이 한 군데를 더 꼽자면 길상사와 관련한 것이다. 161쪽부터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요정 대원각의 마담이었던 영한이 시인 백석에게 기증해 길상사로 거듭났다는 것. 항간에는 다 이렇게 알려져 있으나 다른 주장도 있다. 손석춘의 책 박헌영 트라우마에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의 증언이 있다. 원래 대원각은 박헌영의 배다른 누이 소유였고 조카에게까지 상속되어 박헌영에게 주어졌으나 그가 이를 물리쳤다는 것. 그래서 잠시 형식상 명의를 영한으로 해 둔 것인데 6.25 등 혼란의 와중에 어물쩍 넘어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해 법적 소송까지 벌어졌는데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대원각의 새끼마담에 불과했던 영한이 어떻게 그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박헌영의 소유가 맞다 하더라도 당시 법원에서 전쟁까지 치른 남한 공산당의 수괴에게 소유권을 돌려 주라는 판결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보면 전혀 신빙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 이 대목도 살짝 언급해 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좋은 책이다! 지은이가 마침 동네 분이고 책이 나온 것도 나와 비슷한 때이니 만나서 술 한 잔 했으면 좋겠다

r****l 2017.06.0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600년 역사를 한양도성에서 만나다
"600년 역사를 한양도성에서 만나다" 내용보기
성곽 나들이를 가는 사람들은 흔히 일부 유명한 구간을 가거나 주변에 접근이 편하고 연계되는 볼거리가 있는 곳을 선택한다. 유교의 정신에 입각해 계획적으로 설계된 한양도성 역시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뿐 철저히 한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이분은 역사를 전공한 분이 아니어서 우리와 같은 시각, 우리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대신 물어주고 혹은
"600년 역사를 한양도성에서 만나다" 내용보기

성곽 나들이를 가는 사람들은 흔히 일부 유명한 구간을 가거나 주변에 접근이 편하고 연계되는 볼거리가 있는 곳을 선택한다. 유교의 정신에 입각해 계획적으로 설계된 한양도성 역시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뿐 철저히 한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특히 이분은 역사를 전공한 분이 아니어서 우리와 같은 시각, 우리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대신 물어주고 혹은 답을 해주어 가히 한양도성의 모든 것을 이 한권의 책으로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책 시작부분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성곽의 시설과 구조에 대한 명칭을 사진, 혹은 그림과 함께 넣어주어 성곽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을 옆에 끼고 한양도성을 돌며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키우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c*******5 2015.04.0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오직 두 다리만 의지한 채 한양도성 구간을 돌며 펼치는 역사기행서
"오직 두 다리만 의지한 채 한양도성 구간을 돌며 펼치는 역사기행서" 내용보기
처음 한양도성을 건설하던 설계자의 철학이 정말 멋졌다. 유가의 이상인 인의예지신을 도성 건설의 원리로 채택한 것부터 남다른 우리 선조의 지혜가 느껴져서 고마웠다. 그러나 여기저기 생채기를 남긴 일제의 만행과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한 식민잔재를 말할 때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했다. 외세의 침탈뿐이라면 그래도 ‘지나간 역사의 사실과 교훈이겠지.’ 하며 객관성을 유지
"오직 두 다리만 의지한 채 한양도성 구간을 돌며 펼치는 역사기행서" 내용보기

처음 한양도성을 건설하던 설계자의 철학이 정말 멋졌다. 유가의 이상인 인의예지신을 도성 건설의 원리로 채택한 것부터 남다른 우리 선조의 지혜가 느껴져서 고마웠다. 그러나 여기저기 생채기를 남긴 일제의 만행과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한 식민잔재를 말할 때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했다. 외세의 침탈뿐이라면 그래도 ‘지나간 역사의 사실과 교훈이겠지.’ 하며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외세보다 더 악독하고 나쁜 내부의 조력자인 친일파의 행위들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저지면서 한편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많은 영광을 지닌 고도古都지만 폐망한 나라의 수도이기에 한양도성은 온갖 치욕과 상처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음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권력지배층의 야욕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한양도성과 주변지역 수난의 역사

 

 

○ p.36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인하여 이제 조선은 ‘임금의 나라’가 아닌 ‘공신의 나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사대부들에 의한 당쟁을 여는 씨앗이 되었으니, 여기 농업박물관 앞 ‘김종서의 집터’라는 표석 앞에서 나는 조선 당쟁사의 뿌리가 바로 이곳에 있음을 다시금 떠올렸다.

○ p.103

우리의 생각과 달리 미국과 유엔은, 대한민국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은 유엔 결의안에 따라 ‘1948년 당시 유엔이 감시할 수 있었던 남쪽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이며, 북이 붕괴하거나 흡수통일 되는 경우 북쪽에 대한 통치권은 여전히 유엔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결국 문제는 ‘정전협정’이다. 이것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긴장과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분단이 계속되거나, 설사 북이 흡수통일이 되더라도 또 다른 파국을 면할 수 없다.

○ p.110

1953년 이곳을 인수한 주인이 그 이름을 ‘안마당에 멋진 오동나무가 있다’하여 오진암이라 지었다. 이렇게 요정으로 시작된 오진암은 당시 중앙부장 이후락 등 최고 권력자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이곳의 영업철학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이었다고 하니 권력가를 상대하는 밤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 p.135~6

홍제천 계곡 입구에는 세검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저 지명으로 알려졌으나 세검정이 정자 이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곳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반란세력들이 거사를 모의한 곳이다. 이곳에서 칼을 씻어 날을 세웠다 하여 그 이름을 세검정洗劍亭으로 지었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계곡인데 조선시대 당시엔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계곡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칼을 씻었다니 이내 마음속에 스산한 바람이 분다. 그것도 외적의 목을 벤 것이 아니라 같은 조선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는 점, 그리고 결국 인조반정이 가져온 역사적 후과를 생각하면 더 서늘해진다.

○ p.142~3

그런데 이 창의문을 어명에 의하지 않은 채 출입한 사람들이 딱 한 차례 있었다. 마치 1968년 북의 무장조직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온 것처럼 약 400년 전 조선의 임금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반정군이 창의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 인조반정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면서 명청 중립외교를 추진했던 광해군과 대북파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이후 조선에는 본격적인 노론 정권이 들어섰고, 이들 세력은 조선은 물론 일제 강점기,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창의문과 관련된 인조반정의 역사는 지금의 21세기 현실에서도 우리사회 기득권층과 밀접히 연결된 듯하다.

○ p.180~1

민족애가 흐르는 이들이 살았던 이곳은 급기야 삼청터널이 개통되면서 더욱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이제는 일본을 위시한 37개국 대사관저가 들어서 있다. 그런데 이런 뜻 깊은 동네에 지어진 삼청각이나 대원각 등에서 친일 군부세력의 요정정치가 행해졌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한용운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그녀는 심우장의 북서쪽에 일본국 대사관저가 자리 잡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 오래 된 그 집을 떠나 버렸다. 현재 심우장은 ‘만해 사상연구소’로 운영되고 있다.

○ p.196~7

장수마을을 옆으로 바라보며 산책하듯 걸어올라 금방 정상에 있는 낙산공원에 도착하였다. 경복궁은 좌청룡, 우백호로 낙산과 인왕산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좌청룡은 장남을 상징하고, 우백호는 차남을 상징한다. 하지만 장남에 해당하는 좌청룡 낙산이 낮고, 우백호에 해당하는 우백호 인왕산이 높고 험준한 까닭에 조선왕조는 적장자 세습이 드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적으로 스물여섯 대에 있었던 왕위 계승에서 적장자로 순탄하게 계승된 경우는 단 여섯 명에 불과하다. 그 여섯 명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이다.

○ p.22

청계천 버들다리에는 1970년 11월 13일 한국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스스로 분신자살한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반신상이 놓여있다, 당시 그가 외친 것은 임금인상도 아니며 그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였다. 하지만 고도성장이란 자본의 논리 속에 이마저 짓밟히고 만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세상을 향해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웠다.

○ p.239

시구문인 광희문 일대는 여전히 조선시대 때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군총들이 주로 살았던 하대인데, 최근의 광희동에는 중앙아시아 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1990년 러시아와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의류도매상이 밀집한 이곳에 러시아 오퍼상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이후 점차 그 범위를 넓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몽골 이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와 거주한다는 사실에 왠지 조선시대 때 차별받던 군총들이 이곳에 군락을 이루고 살았던 모습과 겹쳐져 마음 한 켠이 아련해진다.

○ p.255

김수근의 설계는 이런 이념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이 두 건물의 남쪽은 성곽이 지나는 자리였는데, 그곳 성곽을 헐어내고 그 성돌로 건물의 북측 담장을 쌓은 것이다. 이것은 문화재청의 조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축대에 사용된 돌에서 성곽의 각자성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p.280~1

지난 날 우리가 이곳에서 빼앗긴 것은 국권이요 인권이지만,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의 기억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 참고로 조선총독부와 안기부가 시대를 이어 존재했던 이곳의 동명은 예장동이다. 본래 이곳에는 조선시대 5군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무예장이라는 훈련장이 있었다. 이 이름을 줄여 예장이라 불리면서 동명으로 채택되었다. 어쨌든 이 일대는 무시무시한 무武의 역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병사들이 훈련을 하던 곳이었는데, 바로 이 장소에 일본군이 점령하여 무력을 행사하였고,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의 비밀경찰이 이곳을 차지했으니 말이다. 암울한 역사의 공간이었음에는 틀림없다.

○ p.312~3

우리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조경적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곳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는 점이다. 1945년 12월에 있었던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제한적 식민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1월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우익세력과 친일세력의 반탁운동으로 결국 미소공동위는 해체되었다. 게다가 이곳은 이남만의 단독선거를 감시하기 위하여 들어온 국제연합 한국위원회에서 사용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석조전은 분단의 씨앗을 창출한 공간이기도 하며, 6.25 전쟁 중에는 미군이 점령하여 군사령부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61년에는 박정희 쿠데타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비운의 장소이다.

○ p.322

19세기말 정동은 양인촌이라 말할 만큼 서양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던 곳이다. 1883년 미국공사관을 위시하여 서구열강들의 공사관들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이와 거의 동시에 선교기관들이 들어섰다. 이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람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이곳 정동은 양인촌으로 인식되었다.

선교활동은 주로 미국선교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이미 일본의 조선침략이 미일 간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29)을 통해 양국 간 역할분담이 정리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주도적인 선교활동이 가능했다. 이점이 서구 제국주의에 동반한 선교활동과 다르다. 즉 조선에서의 선교는 동양제국주의에 동반된 서양의 선교활동이었다.

○ p.334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우리나라가 미국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간 것은 단지 1945년 미국정 시기부터가 아니라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라고 보는 것아 보다 정확하겠다. 미국 대통령의 딸 엘리스가 110년 전 서울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에 머물렀다는 정보를 알게 된 뒤 나는 이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참 새롭고도 많은 역사적 정보를 알게 되었다. 역사란 이렇기 때문에 더욱더 흥미로운 학문이다.

s*******o 2015.04.0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