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저자 능행스님은 정토마을을 만들어 오갈 데 없는 말기환자들을 편안한 죽음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호스피스 스님이시다. 천여 명의 환자들의 죽음과 함께했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죽어가는 환자들의 슬픈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수행의 맑은 향과 밝음과 희망을 읽을 수 있다. 절망스러운 스토리지만 그 내용은 따뜻하고 아늑하기만 하다. 능행스님이 죽음과 함께하시고 죽음이 또 다른 우리 삶의 이야기임을 들려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도 오늘 죽을 수 있다.” 어느 목사님은 매일 이 말을 크게 소리내어 말씀하신다고 들은 적이 있다. 어떤 것이든 시작보다는 끝맺음이 더 어렵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가장 어려운 끝맺음은 죽음, 나의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이 땅에 고운 미소를 선물로 남기고 한세상 잘 살고 가노라고 마지막 쥔 손을 놓을 수 있다면…” 능행스님의 말씀처럼 나도 그런 소원을 품어본다. 웃으며 죽을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싶다고. |
| '죽음'이라는 화두가 나를 처음으로 찾아왔던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했던 것도 아니었건만, 왜 내가 그 주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북적거리는 낮 시간,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가도 철저히 혼자가 되어야만 하는 꿈나라 여행을 앞둔 시간이면 늘 시간이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세상에 익숙해져 갔고, 그와 함께 나의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흘러가기 시작했다. 10km/h의 속도 혹은 그 이하로 달리던 내 삶은 지금 25km/h 의 속도를 자랑하고 있다. 죽지 않게 해달라는 혹은 시간이 멈추게 해달라는 기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아버렸기에 이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고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많은 이들이 읽었을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어떻게 죽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곧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고... 하지만 어느 누가 죽음을 그토록 심오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제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살아있는 우리에게 죽음은 하나의 금기인 것을... 노인복지시설마저도 혐오시설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은, 물론 집 값이 떨어진다는 것이 표면적인 반대 이유이긴 했지만, 사람들의 죽음을 향한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를 반영하는 하나의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을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획득했을지라도, 죽음은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 우리 자시의 삶을 완성시켜야만 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의학의 발달이 많은 죽음을 삶으로 되돌려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칠 수 없는 병은 존재하며, 죽음은 고통스러운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육체적인 괴로움보다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어쩌면 정신적인 고뇌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확실히 말해주지 않았기에...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위안과 안락을 최대한 베푸는 봉사활동을 의미한다. 죽음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돕는 활동이라 하겠다. 사회적 기반이 열악한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활동은 주로 종교단체에 의해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종교가 정서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무시할 수 없겠지만, 인간답게 죽는 것 역시 하나의 권리임을 고려한다면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너무도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능행 스님이 펼쳐놓은 사연 하나하나는 아픔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의학도 포기한 자신의 삶을 연장시켜 달라며 매달린다. 이토록 많은 돈을 모았는데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느냐 묻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의 심장에 박히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눈물짓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움마저도 즐겨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생을 통해 쌓아올렸을 수많은 상처, 타인을 향한 미움들을 다독여주는 손길이 있다면 내 걸어야 하는 길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조금은 덜 괴롭지 않을까 싶다. 아니, 다음을 기약하며 붉게 자신을 태우는 낙엽처럼, 오히려 화려하고도 뜨겁게 죽음과 만날 수 있었으면 싶다. 모리와> |
| 이 책을 읽고 능행스님을 비롯한 말기 암환자분들을 보살피시는 모든 호스피스 여러분께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언젠가는 꼭 부딪쳐야할 죽음이라는 전환점에서 인간으로서의 참된 삶의 목적을 행으로써 보여주시고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에 즉 영혼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여러 환자분의 임종을 지켜주신 자비로움.현재 나의 인생을 다시한번 진지하게 뒤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잘 죽을려면 육체가 아닌 영혼을 평소 이쁘고 깨끗하게 가꿔야한다는 점.. 그러기위해 많이 배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 .그러나 그 것이 쉬운거 같으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지만 노력함으로써 우리도 이 현세에서 능행스님과 같은 동창생이 되고 싶다. 인생사가 괴롭고 정답없는 미로를 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꼭 한 번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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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 석달 정도가 걸린 듯 합니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려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어느날 몇 장 읽고 그대로 책을 덮어버리고, 또 어느날 몇 장 읽고 또 덮어버리며 그렇게 읽기를 석달 정도가 걸린 것 같습니다. 오늘도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하자 사람들이 무슨 일 있느냐며 묻습니다.. 삶의 이유를 찾기 힘드신가요? 삶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으신가요?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지쳐있는 분들께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정말 귀하디 귀한 책 같습니다. 능행스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아직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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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스탠드 불빛 아래서 이 책을 읽고 있자니,
불치병 환자들이 생을 마무리하러 들어가는
잘 다듬어졌거나, 또는 한권의 책으로써
자녀 넷을 모두 박사로 키워 낸 엄마의 얘기가 있다.
혹, 이 엄마란 여자가 가족에게 뭔 큰 잘못을 했던건 아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처지를 맘놓고 슬퍼할 겨를도 얼마 안남은 그녀는
죽기 전 유언과 같은 부탁을 가족에게 남긴다.
그 보따리엔 품위유지를 위해 끼고 다녔던 가짜반지 한개와
그녀가 죽은 그날,
알고보니 그 보따리는 그녀의 남편이 숨겼었다. 몇개월이 흘러 그 남편은 능행스님에게 찾아와
'스님은 알고 계셨죠?'...
능행 또한 그저 옅은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봐 줄 뿐...
이 이야기는 책 속에 담긴
이런저런 뒤섞인 얘기들...
삶에도 사랑에도 유효기간은 있다.
아마 이 책을 읽었다는 걸
삶이 영원하지 않기에 주변사람들과 나눌 시간 또한
그래도 이 책을 소중한 걸 배웠다는 이 느낌만은
이 책은 누군가에겐 사랑의 책으로,
해석하고 간직하는 건 각자의 몫이리라...
이 가을... |
| 출퇴근 복잡한 사람들속에서 읽으며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길때마다 죽음을 맞이하시는 분들 글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습니다. 호스피스에 대해 남의 얘기처럼 TV를 통해서 본적이 있었는데..막상 글을 읽으며 직접 겪으신 얘기들을 보니 진지하게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건립을 반대하시던 마을분들의 얘기를 읽을땐 공감도 가면서 안타까운 마음 그지 없었습니다. 최근 읽은 책중에 정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삶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기회였던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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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삶의 끝자락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끝없이 봉사하며, 늘 웃음으로 그들을 배웅하는 정토마을 비구니 능행스님의 보살같은 영혼 얘기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을 간호하며 호스피스의 일을 충실히 해 온 스님은 그간 이런저런 일들로 아픔을 겪어야 했던 여러 일화들을 중심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와 단절의 불행을 함께 두손모아 소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신다.
삶과 죽음의 이별순간에 환자는 그래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쉽게 눈을 감지 못하고...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액체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시체밑에 비닐을 깔고 휴지를 통째로 넣어 사망진단서가 나올 때 까지 악취가 진동하지 않게 단단히 준비한 후 화장을 하러 차에 싣고...
호스피스 시설인 정토마을을 만들기 위해 겨우 땅을 구입했는데 혐오시설로 인식한 주민들이 몰려와 시위를 하고 폭력을 쓸 때면... 스님은 막막한 심정으로 부처님을 향해 두손모은다.
"시님! 나 여거서 죽어도 되지라?" 정토마을에서 조용히 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삶의 또 다른 길로 가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로 한숨소리 깊다.
죽음을 앞두고 벌어지는 갖가지 해프닝과 소동은 스님에게 인간에 대한 기대와 배반을 한꺼번에 안겨드리지만...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양갈래 길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슬픈 현실들을 능행스님을 통해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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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꾼다. 빛도 그림자도 없었다. 그냥 둥실 떠 다니고 있다. 함몰돼어 패인 공백의 상념을 더듬어 메운 자리에 난 흔들거리는 진동을 느낀다. 자신의 이상이 얼마나 부질없던 동경인가가 지나치면서 회의는 웃는다. 자욱진 흔적의 자리에 선 무상한 허무는 그러함을 보여주면서 지난다. 아무도 없다. 그렇게 다 떠나 보낸 것인가? 인생이라는 연극에 초연의 첫막 처럼 난 그 홀가분한 비위생적인 옷을 벋어 던진 것인가? 자신의 이해나 위로는 얼마만큼의 한계가 있다. 먼지 구덩이에 이른 장막을 신처럼 창조커나 조율치 못한 허술함이 버틴 벽장에 산다. 자신의 욕망이 마치 타인의 은혜처럼 이해롭기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함은 자신의 처지에서 막다른 상황을 벋긴 충분하다. 난 가금 무엇이 진실인가를 생각해 본다. 진실은 분명 숱한 이들의 선망처럼 이해롭고 막힌 장막을 걷어내는 혜안 이런가? 선망이나 동경은 언젠가 자신의 퇴색한 기억속에 반영되기 마련이고 인생과 삶은 비슷하거나 경과에 차도 없는 그런 낡은 삶의 구 들이다. 자신이 이룩한 자신의 왕국은 결국 편엽스런 사리에 부딪치고 자신을 해탈할 본연은 욕망아래 머문다. 벌레먹은 사과처럼 기어이 집요한 숫셈에 빠져든다. 거친 분노의 격동이 살아나고 기만과 그 허술한 진실의 막바지를 잘라 신이 아닌 자신에 분해한다. 사람의 회의는 지나감의 바램으로 더욱 거룩해지고 남김의 찬란함으로 진보한다. 답보된 사고의 늪속에서 방향잃은 질주의 헤메임은 마치 갇힌 두려움의 어둠위을 걷는 듯하여 무겁다. 사리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순간적 위기만을 내세우는 만용된이기는 멀리가지 못하는 아집이지. 삶의 터득은 지독히 여문 지독함을 배우는 것인데 우리내 이상 아래 인과의 관계는 항상 전부롭지는 못 하다는 것이다. 한쪽이 기울면 한쪽이 이끌어 주고 한쪽이 희미해지면 한쪽이 거들어 주는 절름발이 인생 이더라. 그러함이 더욱 삶의 진귀함과 그러함의 도덕적 안배를 거침으로서 우린 알수없는 상신의 길을 가게된다. 비로소 얻은 작은 것 중에 하나 신뢰된 조작이다. 융성한 거울이 깨질때 소리나는 파열음은 잊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유리파편에 곁들인 작은 모습에는 이기하는 그런 모습은 다신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다. 자신이 최후하여 전부을 수용할 이상을 갖었든 그것이 이해의 토대가 아닌 기만이나 탐욕의 성을 쌓는 다면 그건 누구나 아는 허울된 가식의 얼룩짐이다. 누구에게나 편치 않은 불편은 있고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은혜로 자신이 옹립되기만을 기다리는 기만된 아집은 나로부터 헤칠수 없는 두려움으로 살아가길 강요한 영혼을 훔친 도적에 불과하다. 자신만의 고뇌가 곧 모든것을 대변한 표적이 되리라 상상한 우리내 마음의 편취된 허울일 것이다.
우리는 각자 하나 이상의 가면을 쓰고 산다. 그것은 자신의 가면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허울이 버벅 거리고 기만된 진실이 난무한다. 그곳에 욕망은 기생하고 순간의 이기는 달콤함을 부리며 자신을 기만한다. 남겨두고는 갈수 없는 자신의 잔해된 잔재 앞에 댓가를 치루지만 지나간 흔적의 고해는 어쩔수 없다. 부디 곱게 물들여 함몰돼지 않은 사고 앞에 아름답게 소회되기만을 바란다. 어차피 삶의 잔해는 그렇게 부셔지기 마련이고 소멸된 뒤 다시 잉태하기 마련이다. 진실이란 자신의 시련을 이기지 못한다면 다 소용없는 잔재들이다. 이러함으로 자신의 소회는 아물어 가고 이러함으로 타인의 전형의 틀은 무너져도 되는 그런 이기된 사고의 함몰은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지독한 미로의 함수을 풀고 싶다. 나에 뇌리에 그만한 이유와 그만한 댓가를 치룰 언덕을 찾고있다. 시린 겨울처럼 그 지독함으로 봄을 기다리는 얼음 위 하루강아지처럼 뭉실 부드러운 이해을 사고 싶다. 이해는 해동을 이룰거며 아직도 이루지 못한 우리들의 냉해을 위로해 주리라 믿는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아니 떠나려는 자들의 헛된 이유가 실소로 베인 허공의 칼날과 같으니 언젠가 돌아올 자신의 회의된 댓가는 본연을 잊은 허울의 분신 같기만 하다. 지나감을 모른채 눈을 감는다. 그러함으로 잠들거다. 모든건 다음 마디에 풀이할 숙연된 본연만이 지켜 볼 것이다. 아직도 이별은 쉬지않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다신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