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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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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고 깨끗한 사랑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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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고 깨끗한 사랑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 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여승(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女僧)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송수권, 여승

 

 

고뿔을 앓는 아이가 장지문에 구멍을 뚫고 토방 아래에서 염불을 외는 여승을 내다본다. 고깔을 쓴 여승은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로염불을 외고 있다 때는 봄이다. 살구꽃 그림자 위로 뿌연 흙바람이 불고 있다. ‘는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 있다. 봄이긴 하지만 바깥 날씨는 아직 차니 바깥에 나오지 못하도록 부모가 단단히 이른 모양이다. 여승이 외는 염불 소리를 듣고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아이는 지금 엄청 당황스럽다. 여승이 외는 염불 소리도 황홀하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또한 염불 소리 못지않게 이 아이를 황홀한 상태에 빠뜨린다. 아이에게 황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경지를 의미한다.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상을 아이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간다.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몸이 스스로 따라 나섰을 뿐이다. 무언가에 들린 아이가 동구 밖 너머까지 따라오니 여승은 얼마나 난처했을까?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허겁지겁 여승을 따라간다.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으로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 발길을 멈춘다. 한계 지점이다. 이곳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소승(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 서서 합장을 하고오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뛰어간다. 열꽃이 피어난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다. 흙바람이 흠뻑 젖은 아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

 

아이는 염불 소리를 외는 여승을 황홀하게느낀다. 이 세상에서 처음 느낀 감정이다. 하지만 아이는 처음 느낀 감정을 다스릴 재간이 없다. 앞서 가던 여승이 돌아서서 던지는 한 마디 말이 아이는 그래서 한없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염불을 외는 그 목소리가 아니다. 장지문에 구멍을 뚫고 보던 그 얼굴이 아니다. 가뜩이나 고뿔에 들려 열에 들뜬 아이가 그 황홀하고도 무서운 얼굴과 마주했으니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는 그 뒤로 여승이 우리들 손에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사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다. 우리들 손에 닿지 못하는 여승을 어른이 된 시인 역시 한없이 그리워한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손에 닿지 않는 여승과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이 시는 어린 시절에 느낀 그 아련한 마음을 시인이 잊지 못하고 있음을 에둘러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지금도 꿈속에서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여승은 무의식에 새겨져 시인이 방심할 때마다 어김없이 의식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걸친 경계를 사라지게 하는 여승 이미지를 되돌아보며 시인은 자신이 시를 쓰는 진짜 이유를 발견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 앞에서 시인은 아직도 설레는 마음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승은 시인이 시 쓰기를 통해 이르려고 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열에 들뜬 얼굴로 바라본 여승을 그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간직하고 있다. ‘순수깨끗이라는 말은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로 여승을 바라보던 아이의 마음과 그대로 이어져 있다. 시인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아이들이 지닌 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시를 쓰는 이유가 있다. 송수권은 그 이유를 어린 시절에 겪은 황홀하고도 무서운기억에서 길어 올린다. 그것은 지금 무의식 깊이 가라앉아 있지만, 시를 쓰는 그 순간만은 새록새록 의식 위로 밀려나온다. 머룻빛 이슬을 털며 산을 내려오는 여승을 보는 마음으로 시인은 사물 앞에 선다. 사물이 털어내는 이슬이 맑고 찬란하게 빛난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시인은 아이가 여승을 바라보던 그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시를 쓰기 시작한다. 아이가 된 시인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까?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된다. 누구나 제 속에 감추고 있는 아이를 끌어내서 그 마음으로 사물이 내보이는 진실을 들여다보면 된다. 송수권은 바로 그 마음을 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시를 쓰다가 그는 생을 마쳤다. 네거리 큰 갈림길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시를 통해 여승이 사는 그 세계로 떠나간 것이다.

 

    

o*****s 2018.05.28. 신고 공감 4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