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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떠나지 않고 돌연 집으로 들어와 마루에 들어 누워 버린 걸까 , s와 고향으로 가기로 했으면서 아마도 s가 전처와의 관계가 물건을 이유로 계속 이어질 것을 알아서 . 드나들어도 문제되지 않고 눈치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의 존재는 편한 사람인건지 , 쉬운 사람인건지 . 그런 생각이 든 걸까... 그녀의 집처럼 그녀가 언제고 드나들어도 된다고 생각한 친정으로 1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의 집은 이제 곧 철거 대상이 될 집으로 , 진작부터 부실건축이었는데 . 사방 아귀하나 제대로 맞는 곳이 없는 .낡을만큼 낡아 언제 주저 앉아도 이상 할 게 없을 주택 단지. 그녀는 그 집과 자신의 신세가 같다고 느껴진 걸까 . 상념에 잠긴 그녀위로 무너진 집이 처음 주택가를 무너뜨리고 있는 풍경들과 겹치는 것이 복선같았다 . 집도 사람도 인생도 어느 시점이 되면 최고라고 생각하던 지점을 찍고 이후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 노화라고 표현해도 좋고 전성기라 해도 좋고 노후라고도 해도 상관없겠다 . 부르는 대상이 다를 뿐인데 , 비슷하단 생각은 증명이란게 필요 없을 것 같다. 어떤 식이냐 하는 차이, 각자의 고유한 역사로 자신만의 무늬를 가진다는 게 다를 뿐이지 , 어떻게도 최대 장점이 정점이던 때는 과거에 있지 내내 유지되진 않는다 . 그 기간을 조금더 연장할 수 있느냐와 아니냐 , 연장을 못 하는 시점에서 부터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부분이 추락의 지점. 그녀는 어떻게 될까.. 구해지기는 할까.. |
| 올해 황순원 문학상 수상자가 김훈으로 결정됐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일순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말았다. ‘또 김훈이야?’ 작품집의 편집 행태가 짜증을 가중시켰다. 표지에 박혀 있는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과 수상작 제목 ‘언니의 폐경’이 모두 가녀린 명조체로 되어있는데 반해 오로지 ‘김훈’만이 견고딕으로 부각돼 있는 게 아닌가. ‘하긴 황순원문학상이나 그 외 후보작가와 후보작을 다 내세워도 김훈 한 사람의 구매력을 따라가기 힘들테니...’ 그러나 읽어야 했다. 무엇보다 <언니의 폐경>이라는 제목의 흡인력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거기서 뭘 확인하려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기대보다는 흠집을 골라내려는 심사가 일정부분을 차지했던 건 분명하다. 그러나 실패했다. 흠결을 찾기보다는 다시 한번 김훈 문체의 마력에 빠져 맥없이 투항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참으로 우스운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당연히 뒤에 이어지는 작품들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읽어야 했다.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작심하고 김훈 문체의 폐해(?)에 대해 써볼 요량이었음으로 그와 대비되는 당대의 작품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었던 것. 그러나 다시 실패했다. 오히려 김훈 문체의 위력, 심지어는 어느새 김훈 문체의 독성에 중독 되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김훈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장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언니는 비린 생선을 거의 먹지 못했다. 나이 들면서 언니는 겨우겨우 먹었다. 봄에는 달래와 냉이를 잘게 썰어서 반반씩 섞고 거기에 흰 쌀밥을 비벼서 간장과 깨소금을 쳐서 먹었고 여름에는 물에 만 밥 위에 새우 젖을 한 마리씩, 또는 파래무침을 한 올씩 얹어서 먹었다. 고추장에 찍어 먹는 오이지도 언니의 여름 반찬이었다. 언니가 까탈 없이 편안해하는 반찬은 꽈리고추를 넣고 간장에 졸여낸 멸치볶음, 미나리를 썰어 넣은 물김치, 그리고 연근부침이었다.” (16P) 특히 두 번째 문장 “나이 들면서 언니는 겨우겨우 먹었다.”야 말로 김훈 문체의 특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간결하면서도 정수를 찌르는 표현, 굳이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부사나 형용사만으로 표현의 정확성을 획득하는 기술. <언니의 폐경>은 김훈 소설의 특징을 골고루 드러내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훈 문체의 특성으로 자주 거론되는 간결하면서도 예리한 심리묘사의 한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이 작품 역시 다른 작품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의 소설, 특히 단편 소설들이 주로 특정 세대(중년층)와 특정 계층(중산층)의 얘기로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그 속에 담긴 정신 혹은 관념들은 ‘허무’, ‘결핍’, ‘회한’, ‘관조’등의 말로 압축된다. 제 아무리 문학기자 몇 십 년 경력의 소유자라지만 소설가로 나선지 불과 몇 년 만에 굴지의 문학상들을 차례로 휩쓸고 있는 김훈을 보면서 마음 한 켠이 헛헛하고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김훈의 탁월성이 부각되면 될수록 기존 문단과 기성 작가들의 허약성과 상실감이 그만큼 커질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의 ‘문체’가 구효서·임철우의 ‘서사와 리얼리티’, 김연수의 ‘학구적 기질’, 성석제·은희경의 ‘이야기솜씨’와 박민규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왜 일까?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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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타라ㅡ망 [ 因陀羅網 ] <불교> 인타라가 사는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 그물 , 각 그물코마다 보주 (寶珠) 가 붙어서 다시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가 비치고 , 그 하나하나의 그림자 속에 다른 모든 보주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으로 ,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관계하면서도 서로 장애가 되는 일이 없음을 비유한다 .고 [비슷한 말]인타라주망 .
사실은 스릴러 적 반전을 기대했는데 , 그럼 너무 전형적인 이야기로 가버리게 되고 주제를 벗어나는게 될까? 꼭 그럴 것 같지도 않는데 , 내가 생각한 반전은 69일간 대소변을 받아오며 묵묵히 기다린 그 정체모를 남자가 원래의 범인인 거고 , 최후의 목격자를 , 기억을 확인하고 소멸하기 위해 있었다 . 랄까? 이유 따위는 ... 아, 어차피 이상한 나라로 가자고 한 건 작가니까 ...... 하지만 나의 기대는 웃기지마 하듯 멋지게 빗나가 주는데 , 결과적으론 또 다른 살인의 시작이 된다 랄까 . 아니면 글 속 범인의 주장처럼 긴급피난 ,혹은 정당방위가 되려나? 그 아들의 처사는 ? 그나저나 이 69일 만에 깨어난 남자는 참 불운해 . 그저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을 뿐인데 , 아내가 갑자기 해산을 한다고 해서 말이지 . 뭐 늘 그렇듯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지 . 하필 눈이 그렇게 오는 날에 차는 왜 사고가 나고 , 하필 거기서 도움(?)같을 걸 받을게 뭐람 .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피해자와 마주쳐 그 사단이 날게 뭐냐고 ...어쩌면 , 이 남자의 죄는 출산 중의 아내를 위해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데 있는게 아닐까 ? 하지만 그 이상한 집의 분위기라면 (사건의 현장이 대게 그럴 것이듯 )발걸음이 쉬 떨어지진 않았을 것도 같아 . 혹시 도움이 될 지도 몰랐을 건데 ...너무 극심한 공포 앞에 이성이 무너진 안주인은 남자를 범인으로 보고 달려들어 버리고 아무리 상황을 말해도 이해 될 일이 아니었지 . 도저히 그 상황에선 ...... 모든 것이 범인의 계획이었는데 , 차사고로 그저 도움을 준거라고만 생각한 남자는 그 집이 범인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고마워 해 . (아 , 말이 이상하지만 그 남자 라고 해야하나 ? 범인이 돕고 범인이 함정에 빠뜨리기위해 남자를 데려오곤 가버린 상황인 것임) 곧 나타난 아들은 집 앞 언덕에 쓰러진 이 남자를 지금까지 (차사고가 심각했던 탓인지 후유증인지 장장 69일간 의식을 잃고) 보살펴 왔는데 , 남자는 전후 사정을 기억 못하고 그저 감사하며 이런 저런 부탁들을 하고 가까이 하게돼 . 그 곁엔 이 남자가 죽이려한 이 아들의 어머니가 식물인간으로 누워있고 호흡기만 떼면 바로 저 위로 갈 분위기이지 ... 인타라망은 아들이 이 남자에게 읽어주는 책의 내용인데 , 한치 앞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로 나왔더라고 ... 그 내용도 재미있는데 섬뜩한 시간차 공격이라고나 할까 ... 죽음이 바로 앞에 당도하고 있는 걸 본인들은 모른다는 그런 얘기였는데 ..저 남자처럼 말이지 . 기껏 69일 만에 깨어나 기억까지 찾으니 이번엔 안주인의 아들이 복수라는 정당방위로 남자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까 ...흔한 말로 인과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 또 봤다고 ..죗 값보존법칙은 어딜가나 있고 !! 아ㅡ독특한 분위기의 이 작품 꽤 재미있게 봤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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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기록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찾아보니 없다 . 노트의 줄 위치까지 기억나는 그 한자의 환영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 또 기억 속의 이 하얀 화면들에 까맣게 점점이 찍혔던 익숙한 문장들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글을 본 것일까 , 오늘로 세번째 읽는 < 다시 한 달을 가서 설 산을 넘으면> . 사실은 읽었던 것이고 , 기억에 썼던 것이라 가볍게 내 리뷰나 읽고 넘어가려고 찾다가 없어 당황을 했다 . 그래서 결국은 기록을 하는중이다. 기억의 소실인지 , 기록의 소실인지 , 아니면 그 모든 것이 그저 나의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지...... 처음 만난 책은 2009년 김연수 작가가 이상문학상을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수상하고 그 작품집의 자선작으로였다 . 두번째는 <나는 유령작가 입니다 > 소설집에 수록 되어져 만났다 . 그리곤 이번이 2005년도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 작품집 속에서 다시 만난다 . 연대도 마구 흩어져 엉망이고 들쑥날쑥 하지만 , 책의 질감을 기억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걸까 ? 마치 소설 속의 그가 홀연히 저 낭가프르트에서 사라져버린 것처럼 ... 내 기억에 뭔가 틈이 생긴 걸까? 크랙이나 크래바스같은 ? 어두운 구멍이 ...... 글은 사실 좀 섬세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곧 길을 잃게 된다 . 나는~으로 시작했다가 어느새 그는~으로 바뀌어 있고 그 변화는 지극히 미묘한 가르킴이어서 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금새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 큰 줄기를 놓고 보면 산악부에 몸담고 있던 소설가로 가능성 있는 대학4학년 생의 그가 돌연 여자친구의 실연 (자살이지만 그는 실연이 아직 오지 않았다 우기고 있으므로)으로 집에 처박혀 책을 읽으며 소설을 장장 9개월간 쓰고 , 그걸 우연한 기회로 찾은 , 여자친구가 대출해 본 마지막 책으로 짐작되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주석을 단 나" (그는 교수님이라고 부르며 12 살 연상이다 . 물론 가정도 있고!)에게 보내게되고 , 나는 그의 노트를 출판사에 넘겨서 편집자와 같이 노트를 봐 버린다 . 재미있다고 편집자는 말하는데 그는 소설을 낼 생각이 없었으니 돌려 달라고 하고 , 그가 알고 싶었던 건 단지 그 왕오천축국전을 마지막으로 들여다 본 여자친구의 심리에 뭐가 있는지 였다 . 주석을 단 교수는 알거라고 생각한 그가 매달리지만 사실은 알 수 없는 채 잠시 둘의 감정은 부딪히지만 그게 뭔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도 못되고 , 그는 어느새 비행기에 몸을 싣고 88올림픽을 기념하는 낭가파르트원정대에 있다 . 이후의 글 속 기록은 다시 읽어도 거의 영화 "남극 일기" 속의 상황들을 떠올리게 한다 . 고소증세로 , 혹독한 기후로 또 , 척박한 지원금과 무지막지한 계획의 몰아댐으로 그들은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눈 길을 다지지만 결과는 참혹하고 , 그는 나에게 마지막 편지로 "다시 한달을 가서 설 산을 넘으면..." 이라는 문장을 끝으로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야기 이다 .
본래의 내 기억이 맞다면 내 리뷰는 있어야 하고 , 원래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바라는 꿈들을 이뤄간다면 아마도 글 속의 여자친구와 그는 결혼을 했거나 , 혹은 헤어졌거나 그게 아니라면 지지고 볶고 싸우고 남들 다하는 것들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 평범한 것들을 그저 최선을 다해 소망하면서 , 있을 자리에 있었을 테지 , 그런데 무엇이 그 미세한 틈을 만들어 놓은 걸까 , 80년대 후반이라는 사회적 정서? 아니면 이 글 속의 나는 과 그는 처럼 넘을 수없는 관계 ? 그를 그 고산대 까지 오르게 하고 기어이 미쳐버리게 한 것이 무엇인지 , 한 참의 젊은 여학생이 한강으로 투신하며 세상에 용서를 구한 것이 무엇인지 .
보지 못하고 , 표현 못한 문장들 속 그것들은 과연 무엇이엇을까 ...혜초도 미쳐 모른 왕국이 어딘가 있었을까 ... 그럼 그는 설산을 넘어 그의 나라로 가고 , 내 리뷰는 하얀 이 화면 어딘가에 분명하게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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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내내 물고기의 날 것 냄새를 코 끝으로 느낀다 . 2004년도 이상문학상이 화장이니 이 글은 어쩌면 그 연장선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책장에 꽂힌 화장을 다시 펴 볼까 하다가 말았다 . 이 집에선 더이상 날 것의 비린내가 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 엊저녁 욕실의 쓰레기 통을 비우려다 보니 아이가 돌돌 예쁘게 말아둔 뭉치들이 여럿이었다 . 내가 치우는 첫 뒤처리물들이다 . 아 , 괜한 내 코만 탓했는데 사실적 일이 내 집에서 벌어지는 걸 소설을 읽으며 체감을 하는 이상한 모양에 설핏 웃음이 나기도 했다 . 냄새가 맡아 질 뒷처리가 아니었는데 아마도 연상작용일테지... 어제 오라비와 마주 하고 앉아 네가 몇 살이지 ? 따위를 주워 삼기며 어릴 때 이야기들로 속절없이 웃었는데 , 아직 오지 않은 쉰 과 쉰다섯의 자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 이야기들만 같았다 . 한동안 '밥벌이의 지겨움' 에 대해 또 , '라면을 끓이며' 등으로 화제였는데 이 소설의 십 년을 훌쩍 뛰어 넘어선 그 느낌이 전혀 , 낯설어 서걱서걱 대는게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몇 번을 끄적거리며 읽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고 그냥 내쳐 읽기만을 하기로 하고 겨우 끝을 냈을 때 그 후련함은 꼭 뭉친 월경이 화악 세어나오는 듯한 시원함을 대신 느끼게 한다 . 이젠 하는 수 없는 일로 나와 상관없는 월경과 또 다른 여자의 삶 . 뭔가를 또 하나 넘어선다는 느낌의 월경 과 폐경 ... 그 나이면 폐경을 맞이 하는구나 , 상식적인 것들로만 알다가 소설로 읽으니 이상했다 . 하긴 요즘은 뭐든 우리 때완 다르기도 하니까 ... 언젠가 직장 일로 스트레스가 높았던 친구가 폐경 위험을 알리는 병원 소식에 울적해 하며 전활 걸어 왔었는데 그땐 뭐랄 수 없이 먼 거리감에 무슨말로 위롤 했었는지 기억도 가물하고 다행이 친구는 한참 돌쟁이 딸 아이와 어린 아들을 키우며 지금 행복하니 새삼 기쁜일이구나 , 피를 흘린다는 건 ... 뭐 이런 생각들 ... 쉰에 남편이 이혼을 요구해온다 . 하나 있는 딸아이도 시어머님 돌아가시고 유학 중이고 기회다 싶게 정리를 당연한 일처럼 내미는 남편에 두말없이 응하는 여자 . 그 여자 곁엔 강 건너 진작 혼자가 된 쉰 다섯의 언니가 있다 . 언니는 이 여자의 삶에 내밀하게 가깝다 . 동생의 새 집에 드나드는 남편의 부하직원이던 그를 말로 내비친 적도 없는데 살뜰하게 살핀다 .그치만 참 서글프다 . 동생의 남편이 긴 시간 계절이 바뀌도록 여자의 머리칼을 속옷에 묻혀 돌아오는 걸 알았으면서 모른 척한 이 여자와 해고된 부하직원과 물론 사별한 남자지만 아직 미혼의 딸아이가 있는 사람의 만남에 불륜의 이미지를 덧씌운 듯해서 궂이 알릴 것 없지만 , 어쩐지 이 설정이 야박하게 느껴지고 하는수 없다는 표현에 그 나이대의 연애란 그런걸까 ...그저 상상을 해볼 뿐이다 . 사는 일이 크게 나이와는 상관없으려나 ...? 동생은 형부가 비행기사고로 죽었을 때 시신을 운구하는 엠블런스 뒤를 쫓으며 운전을 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 그때 그 차안에서 급작스런 하혈부터 언니의 폐경이 길고 불시로 드나들며 붉었던 걸 들려주는 참이다 . 저녁 노을이 퍼지며 사그라드는 장면을 오래 스미듯이 설명할 때 , 그 붉음과 이 붉음이 묘하게 겹쳐지면서 몸이 스르륵 풀리고 만다 . 두 자매는 이런 것이구나 . 넘어선 뭔가가 거리처럼 있으면서도 살가운 것 . 그런 거리에 대한 걸 읽었다 . 오랫만에 가독성있게 글을 읽어서 내게도 뿌듯하다 . 한동안 이 작가의 문장들이 그리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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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기린하면 생각하게 되는 두개의 이미지가 있다 . 하나는 학창시절 쯤 봤을 라이온 킹이라는 영화 속에서 마치 군무처럼 떼지어 맹수들을 피해 가젤들처럼 초원을 겅중겅중 그 긴 다리들로 뛰어 도망가던 장면이고 또 하나는 최근 동화였나에서 읽은 기억인데 아마도 개가 주인공이며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에 잠시 스쳐가는 사랑(?)의 단역으로 , 개는 무척 진지(?)하게 애정을 갈구하지만 이 기린은 관심이 없었다 . 기린에게 관심사는 그저 생명의 양식인 질 좋은 나뭇잎이 적당한 높이에 있고 물좋고 안전한 곳을 찾으러 가는 중에 동행을 할 뿐인, 개의 애정사 따위는 아웃오브 안중에도 없고 , 알지도 못한다는 , 그런 이야길 기억하고 있다 . 그러므로 기린은 내게 어떤 거리의 이미지이다 . 높은 곳을 보기에 그럴지도 모르고 육식동물이 아니기에 그럴지도 모르고 , 그렇습니까 ? 그런 , 기린입니다 . 제가 아는 기린은 ...... 박민규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두 번째 동물 시리즈 랄까 ? 처음엔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가 욕탕에서등을 밀더니 이번엔 지하철 역에서 기린이 살포시 손을 포개 잡으며 은근하고 단호히 그렇습니까 ? 기린입니다 . 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듣게 된다 . 한 쪽에선 고마워 눈물을 글썽이게 하더니 , 한쪽에선 왠지모를 서러움에 (그게 그건가?) 또 눈물을 쏟게 만들고 주절 주절 떠들게 만든다 . 더구나 그 기린을 승일은 아버지! 라고 생각하면서 ... 미안하단 말을 하며 한 쪽 다릴 못 쓰게 된 타조 ㅡ 같은 눈빛 , 그 회색의 먹먹한 눈빛을 얘기 할 때 . 젠장...어째서 불안한 얘감은 틀림이 없는건지 , 또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겐 어째서 무거울 뿐인 짐을 이렇게나 마구 어깨고 등이고 머리고 사정없이 짊어지게 하는 건지 ,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 승일은 방학이면 스스로 알바하느라 정신이 없고 , 어떻게든 부모 어깨를 가볍게 해주고 집 안에 보탬이 되려 , 자기 만의 산수를 , 그러니까 자기 신수를 챙기는 애어른이다 . 이 어린 녀석에게 어머니는 병들어 쓰러지는 걸로 , (얼마나 가혹한 일상이었으면) 아버지는 어른아이처럼 돌연한 가출과 실종으로 보답을 해준다 . 그래도 서로 의지하고 살고 있다고 믿었는데 , 고등학생인 승일도 이제 진학이냐 , 취업이냐 진로 걱정을 해얄 때인데 , 오히려 생업같은 알바로 바쁘다 . 엄마가 쓰러지시곤 오히려 아침 1교시마져 담임이 빼주어 그 시간에 지하철에서 , 방학 내 하던 푸시맨을 한다 . 하아,,난 이런 일이 게임으로만 있는 줄 알았다 . 물론 해본적은 없는데 . 뭐 이런 게임이 다있냐 했었는데 . 게임이 현실이고 현실이 막장보다 더한 환상게임 속 같다 . 아버지의 등도 출근하는 온 인류의 몸통들도 사정없이 끊임없이 밀고 밀 뿐인 일 . 시급 3000원 짜리 . 그 걸 믿고 아버진 그냥 내빼신 걸까 ? 이 치열한 삶의 현장따위에서 ... 자신은 풀이나 뜯겠다고? 아 어디서 개 풀뜯어 먹는 소리 들리지 않나? 응? 승일이 우는 소리만 들린다고? 그, 그렇습니까? 아, 예예 ㅡ 밀지 마 , 그만 밀라니까 . 왜 세상은 온통 푸시인가 . 왜 세상엔 '푸시맨' 만 있고 ' 풀맨' 이 없는 것인가 . 그리고 왜 , 이 열차는 삶은 , 세상은 , 언제나 흔들리는가 . 그렇게 (156,7쪽 본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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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작으로 읽은 『별명의 달인』이란 책에서 만난 【바소콘티누오】가 아직 생생하다 . 하이든의 첼로협주곡 D장조의 여운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걷던 언 눈이 곳곳에 있던 귀갓길에 두 그림자를 비추던 나트륨 주황의 가로등 불빛들이 ...근 이년여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잘 맞춘 간수로 만든 담백하고 깨끗한 두부처럼 따끈 따끈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 가족사를 다루는 작가들은 많고 많지만 나는 구효서 작가를 빼고 갈 수없다고 생각한다 . 【도라지꽃 누님】에서 【모란꽃】에서 그가 누이들을 상대로 글을 낼때 느낀 감정은 , 밍밍한 두부가 뭔 깊은 맛을 내겠나 싶겠지만 제대로 만든 두부란 별 조리가 없이도 그 자체로 따듯하며 신선한 요리가 된다는 걸 알게 해주었던 것처럼 . 한 마디로 간이 잘 밴 요리같이 어느 귀퉁일 지나도 옛집의 감나무처럼 생각이 나니까 ... 그러나 잘 받은 상차림과 음악들의 여운이란게 대게 그렇 듯 분명한 선에서의 끝이란 게 없다 . 그저 진행형의 무엇일 뿐이다 . 소금가마니를 마침 좋은 위치에 놓고 오래 오래 간수를 내듯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인 공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지 , 그게 뭐라고 확실한 모습으로 표현되어지진 않는 것처럼 , 이 소설이 또 그렇게 내게 한 맛의 세계로 언어적 표현의 끝을 보여주었다 . 주먹두부처럼 와당무늬를 찍어낸 반듯반듯한 두부가 아닌 거친 베에 짠 모양을 그대로 드러내는 주먹두부가 나는 생각이 났다 . 아흔 일곱의 천수를 누린 어머니의 마흔 다섯 나이에 얻은 막내둥이 아들로 나이가 들어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삶의 방식이 폭력적인 아버지보다 더 이해 어려운 무엇으로 , 주인공은 평생 다른이의 씨로 형제자매들과는 달라 (다를 것이라는)그 처지를 눈치 받으며 살아왔는데 , 어머니가 죽고 나서 누구에게도 물을 수없는 사실을 외종형이 남긴 어머니가 보던 책이라는 것에서 찾으려 한다 . 가늠이 안되는 부모는 대체 어떤 부모일까 ... 나는 최근에 한 이웃분이 자신의 어머닐 소개하며 생에 가장 멋진 분이고 그런 분의 자식임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얘길해 무척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 존경과 외경을 받는 부모의 자리 , 거기에 주인공은 키르케고르의 저서 「공포와 전율」을 펼쳐보면서 토정비결도 아닌 「금옥연」이나 「동정추월」 , 「김인향전」 도 아닌 저 키르케고르에서 놀란다 . 더욱이 자신이 잘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보던 철없던 시절의 밑줄 친 부분들이 어머니가 연필로 줄 쳐 놓은 것들과 묘하게 겹친다는 걸 느끼면서 서책의 주인이름(자신의 생부라고 추측들을 하는) 이 박힌 책을 곱씹는 순간들과 자신의 피는 그저 어머니의 아들일 밖에 없음을 깨닫는 순간까지를 그려낸다 . 그 어머니 생애의 폭력은 가혹하니... 가혹하다 , 가혹할 수밖에 라는 어떤 시인의 싯귀만 떠올릴 정도의 삶이었는데도 다행이 말년이 곱고 고와서 두부같이 정갈하였다 . 어머니의 그 두부로 자식들을 키우며 소리없이 참고 인내한 간수같은 인생 . 소금가마니가 녹아 주저 앉아도 그 소금창고 속 존재가 내내 생생하듯 어머니란 존재는 폭력에 저항없던 어머니의 삶과 소금이란 희생의 결과물임을 그저 짐작만 해 볼 뿐이다 . 그럴 듯한 말로 멋지게 해석되어지진 않으나 좋은 문장에 밑줄에 절로 쳐지 듯 그런 거였다고 ... 작가가 보고 또 구현해 보이려 한 소금 가마니의 생 ㅡ 감히 그 속에 나는 들어가 오래 앉아 있을 수나 있을지 , 겨우 짠 눈물만을 이해하는 내가 ... 그래서 한 없이 내가 작아지는 단편이었고 , 또 역시 어느 귀퉁일 돌아 만나는 감나무의 까치밥처럼 문득문득 내 삶을 깨치겠지 . 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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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폐경 ㅡ김 훈
글이나 책에서만 보던 이름이었다는 고백이 , 피식 웃게했다 . 김훈 작가만도 쉬었다 가는 역참처럼 한참 먼 사람같은데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더 거리를 느끼게 하는 글 아닌가? 내가 좋아하던 산책코스 중엔 소나기마을이 있는데 , 그 동네의 유명인인 황순원 작가의 소설에서 따 이름이 그렇다고 알고 있다 . 지금은 예전 같지않아 오래 걸을만 하지않지만 예전엔 그 동네는 한적하니 바람 맞으며 걷기가 좋았더랬다 . 겨울에도 강바람이 싫지 않던 그런 곳... 약봉투 , 마름모꼴로 접은 약종이 , 정말 이 소감은 순전히 황순원작가와 추억을 위해 쓰인듯해서 마음이 정겨워진다 . 이 책을 구하느라 좀 번거로운 절차를 걸쳤는데 , 사실 중고를 장려하면서 나는 실제 중고 책방을 잘 이용 않는다 . 지금이야 통합된 인터넷 서점에서들 판매도 하지만 , 실은 개개인의 중고장터도 있기 때문인지 사이트를 열어보면 뭔가 늘 마음만 바빠지고 제대로 단 한권도 가져오질 못했었다 . 이번엔 다른 이웃 분의 책 리뷰를 보고 골랐더니 아니나 다를까 , 품절도서인 탓에 정상가로 구입은 어렵고 품절책의뢰를 해서 손에 넣게 되었다 . 금액은 그보다 쌌지만 , 책은 조금 애쓴 흔적 ... 그래도 2005년 작인데 비해 코팅지도 아닌 커버가 이정도면 좋다고 해줘야지 ... 어렵게 만난 값을 제대로 해준다 . 시작을 김훈 작가가 해서 그럴까 ? 참 그럴 수없이 좋다 . 원글은 아직 닿지도 못하고 이 소감에 한참을 눈이 머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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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에 관한 이미지만 있지, 호기심이나 정보가 정말 너무 없었구나 싶었다 . 내가 나비를 생각하는 식이래야 애니메이션의 불길하면서 환상적인 그것으로 다인데 기껏해야 어릴 적 잔소리 처럼 흘려듣던 흰나비를 보면 부모중 아비가 죽는다거나 , 그래서 그것들이 멀리서 보면 예쁜 거지 가까이 하고싶은 종류의 것은 아닌 탓에 호기심도 없었다 . 나비도 길이 있어 제 길로만 다니는구나 . 그래서 보통 저승을 안내하는 길안내 역을 나비의 이미지로 보내는 가보다 . 무지하니 이정도로 대충 주워 챙겨야지... 임철우 작가의 작품이 정말 오랫만이다 . 198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붉은 방]으로 만나고 , 이 나비이야길 읽으니 , 그 연장 선에 있는 소설을 읽긴 한것 같은데 어느 소설집였는지 기억이..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아닐지도 모르겠다 . 뭐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지금 이 소설이 중요하니까... 나비는 제길로만 다닌다는데, 그래도 사람은 따르는지 그 흔적을 남기는 모양이다 . 마지막 자취같은 것을... 신발 만 남겨두고 세상에 오직 혼자인 기병대 , 서른세살 , 나비선생, 번태선생이라고도 불리는 , 약하고 깨끗해 보이는 이미지의 선하고 착하고 그런 사람이 작은 분지의 마을에 들어와 선생이 되면서 이상기온으로 마을도 학교의 학생들도 이상하게 짜증과 불쾌지수, 지금말로 불쾌지수라고 이렇게 평이하게 표현하지만 , 그 모습은 살짝 정상을 벗어난 광기 아님 미친 시간 ..아니었을지 ... 그럼 어디부터가 미친 시간이었나, 쫓아가 보자며 나비효과처럼 ...한번도 없던 산골 마을의 이상기온 , 그리고 산골 마을에 안 어울리는 낭만 괴짜선생 , 그리고 그 선생이 하는 나비 채집과 그걸 배우는 마을의 황천 이발사 황씨 ,순간 분위기는 확 바뀌듯 황천이발소의 천적 같은 나씨가 돌아오고 마을의 자율방범대장을 맡는다. 그는 황씨의 초,중 ,고 , 심지어 군대까지 같은 곳의 선배였다 . 그의 치욕을 알고 있는 . 이렇게 까지 하면 그가 뭐 대단한 동성애자 같이 오해를 할 수 있겠는데 , 그는 그저 언어의 세계가 보통 남자들과 다른 오히려 시인같은 감각의 세계를 , 소설같이 표현해도 되는 줄 알았던 사람인 것. 현실에선 그런 말투나 문장을 이어 길게 말로 하면 남자들은 말이 많다, 정치할거냐 . 의도가 뭐냐 . 의심부터 한다 . 이 황씨는 그저 순수한 문학도 같은 입장이었을 뿐인것 같은데 , 그걸 알아준 이가 기선생이고. 이런 촌구석에선 그런 교양은 짓밟힘의 대상이 된다 . 다르기에 그런 것도 있고 , 자신보다 잘남이 싫어서 그걸 봐 줄 수 없는 이유도 있다 . 해서 진실 따위는 알고 싶지 않으니 가장 오해하기 쉬운 성을 매개로 매도를 하고 인성과 인격을 짓 밟는다 . 그게 가장 쉬우니까 . 나씨는 체육대회날 기선생을 아이들 보는데서 폭행한다 . 순저히 아이들 장난을 수습하느라 나씨의 정신지체 아들 만식을 씻겨준게 이유였다. 이유따위는 알것 없고 나비의 변태를 설명하다 변태선생이 된 그는 변태로 몰려 구타를 당하고 , 그렇게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 사라짐이 먼저인지 이상기온으로 동네의 부글댐이 먼저인지 그건 알수없게 아득하다 . 이발소 황씨는 도와줄 수없었다 . 그를 도우러가면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확인시켜주는 셈으로, 자신이 바로 추락할 거란 걸 알았기에 ..끝끝내 모른척 한다 . 그와 나씨의 그 팽팽한 눈치엔 서로 알고 있는 부분을 암묵적으로 감추고 있다 . 지배욕과 무지와 무학에서 온 알 수없는 편견이 그런 불편한 침묵으로 그것들이 마치 그 마을의 공기들 같이 떠돈다 ...
나비도 제길로만 다니 듯 사람도 제 쉬운 길로만 다니는 것 , 그런 얘긴 걸까 했다 . 길을 한 번 바꾸기가 그렇듯이 쉽지않은 거라고 , 뭔가 반전이 있기를 바랬는데, 있기를 행간을 노려 보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 뭐 , 있다면, 찾아지겠지...기선생의 시체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제목의 황천이야기 란 중의적 해석 , 일단 죽은 사람이 나오니까 그런 것도 있고 황천이란 곳이야기란의미기도하고 ...달리 죽은 곳이겠냐 , 마음 껏 표현을 못하는 이 세상이 어찌보면 죽은 세상 아니겠냐는 의미로도 읽혔다 . 아마 그게 가장 큰 주안점 일거라고 ... 그러고 보면 , 우린 다 , 나씨의 아들 만식이나 마찬가지다 ..싶네.. 씁쓸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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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집은 역대 급에 최고의 소설들만 모은 그야말로 최고구나 , 이제야 보는 것이 살짝 억울하고 이제라도 보는 것이 너무나도 다행이고 고맙기도 한 , 한 편 한 편 볼 때마다 서둘러 생각을 적고도 싶고 아니면 두고 두고 다른 마음의 변화를 지켜보고도 싶고 , 갈등하다가 일단은 생각을 적는데 사실 적어나가면서 제대로 이 작품을 읽고 있는걸까 걱정하면서 마음이 조바심 난다 . 문장이 실시간으로 달아나는 것 같고 순간 느낀 감정이 날아가는 것 같아 도저히 잡히지 않는 표현이 될 것 같아서 ...안달이 나는 바람에 입술이 바짝 마른다 . 그렇게 읽어버린 책들이 얼마나 많고 제대로 표현해 주지 못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 차마 어떤 시작조차 못하고 환상과 현상을 드러내는 문장들만 줄줄이 베껴 놓은 노트들을 보며 한숨이 나는 중이다 . 그건 마치 이 시대를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숨만 쉬며 보내고 있는 것과 같아서 , 지금의 내 모습과 또 시대가 잃어버린 인간들과 무력하고 폭력적인 부모를 보듯이 애증을 진저릴내며 앓을 수 밖에 없어서 , 먹먹하고 막막하다 . 잃어버린게 있는데 뭘 잃었는지 기억이 잡힐 듯 생각속이 간지러운 그 것처럼 . 그러나 언제까지고 잃어버린 탓을 하며 살 수 만은 없어서 시침을 떼고 , 잃어버린 사실조차 없다는 듯이 살아야 한다 . 언제고 잃어버린게 뭔지 기억이 나겠거니 하면서 .
소설은 소설가 이선대의 고향 재종형님의 전화로 시작된다 . 재당숙모의 부음을 알리는 걸로 어릴 때 그의 기억에선 희미하지만 그 재당숙모가 집 안 어른들에게 어쩐지 입 밖에 꺼내면 안되는 은근한 압력의 느낌으로 남아있고 , 더 어릴 때 재당숙부가 유난히 울던 자신을 봐주었다는 이야길 들었었다 . 그 재당숙부 이름이 이봉한이고 이제는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 그 독립유공자까지 간 사연은 그야말로 기구하고 기이하다 . 그 기구한 사연도 사연이지만 실은 이 선대 소설가에겐 열살무렵 자신이 어린마음에 거칠고 야박하고 무섭게 쫓아낸 재당숙네의 쌍둥이 형제에 대한 기억이 빚처럼 남아 있는게 더 크다 . 그래서 먼 고향 고령까지 빈한한 상가까지 쫓아 내려온 것이다 . 어릴 때 빚진 마음을 털어내 보자고 , 어찌들 살았는지 서로 이야기라도 하며 털어낼 생각이었다 . 워낙에 재당숙부네가 살이가 기구했으므로 좋은 모양세로 살수는 없었을 거라고 짐작은 해가면서 영안실까지 내려오는 그에게 이봉한 인생에 대한 재종형의 반추가 이어지는데 일제시대와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는 시기와 유신정권의 시대까지를 한달음에 쫓는다 . 이봉한은 일제시대에 일본유학까지 한 엘리트고 유학중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혹독한 시간을 보내다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를 한다 . 그가 유별난 운동가도 아닌데도 계속된 감시로 다시 중국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고 하는데 중요한 건 그가 독립운동을 하는 사회주의 운동가도 민족주의 운동가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 그저 몸을 피해 살은 것뿐으로 조용히 살고자 하는 이에게 많은 부(富)는 형벌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게 아버지대에 정당하게 벌어들인 것임에도 어떻게든 가진게 없던 사람들은 있는 사람을 같은 처지로 만들지 않고는 못베기는 법이니까 .이봉한의 아버지가 죽고 이봉한은 아버지가 물려준 땅을 문중에 내어주고 자신을 것으로 하지 않는다 . 일한 만큼만 먹고 살려한 사람이었는데 시기마저 가혹해 한국전쟁이 닥치며 자신도 모르게 좌익으로 분류되서 보도연맹에 가입되고 그 때문에 죽음 앞에 섰다가 혼자 배에 총상을 맞고 살아 돌아오지만 , 와서도 죽은 사람인 채로 세월을 산다 . 이승만 정권 말에 자신의 신원을 복권해보려 했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시간은 흘러 유신시대가 오고 그는 계속 죽은이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고 , 결국 뇌졸중으로 죽는다 . 그가 죽자 애국지사로 독립유공자로 만드는데 열심으로 노력하는 장안 권속들 . 살아 있을 때는 그의 어려움이 행여 자신들에게도 묻을까 쉬쉬하고 , 그들이 좀 더 가진 채 살았을 때는 있는 기둥시계하나까지 들어내가는 문중들이었다 . 그리고 그런 시절의 어디 쯤에 이선대와 만났던 이봉한의 쌍둥이 아들들 . 그들은 보살피는 손 없이 귀찮은 입에 불과했고 이선대의 부친은 이봉한과의 그 간의 정 때문에 아이들을 잠시 맡기로 하지만 남자어른은 말만 맡을뿐이고 집안 여자들에겐 군입일 뿐이니 얼마나 가시 같았을지 , 아마 그 눈치를 이선대는 알았겠지 . 집에서도 쫓아내고 싶어하는 분위기인데 차마 그럴 수 없어 한다는 것을 , 그래서 어린 나이에 철 없음을 빙자해 쌍둥이 형제를 쫓아내고 , 사십년이 지난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재당숙모가 죽었다니 그 때의 미안함을 빌어 볼 량으로 온 것이었다 . 재종형이 궂이 전화까지해 안챙기던 안부에 상까지 챙기라고 하는데엔 모종의 죄의식 나누기 가 있는 셈이다 . 어른인 재종형과 문중어른들은 당시 이봉한 가족들의 어려움을 도왔거나 모른 척한 것에 또 ,죽어서도 애국지사를 어거지로 만들어 자신들이 혼자남은 재당숙모네를 떠안지 않으려는 꾀바름 . 그렇지 않으면 사실 그들이 붙여먹는 그땅들은 재당숙네 거니까 . 제 발저림에 대한 처사였달까 . 그리고 이선대는 문중어른들의 행위에 자신은 올곧은 척 속으로 재종형의 말들에 반발하며 땅을 돌려주거나 떼어주거나 세를 내어주거나 했어야하는게 아니었냐고 하는데 정작 말은 하지 않는다 . 그리고 생각난듯이 쌍둥이 형제들의 안부를 꺼내 묻는데 , 그런 그에게 재종형은 말하기를 몰랐냐 ? 그 애들 굶어 죽었는데 한다 . 그러니까 그때 자신이 쫓아낸 시점에 그들은 죽은 거였다 . 하나도 아닌 두 생 목숨이 , 굶어 죽는다니... 그 형제들의 길이 눈 앞에 그린듯이 보였다 . 보고도 안보이는 척 하는 사람들 . 떠나게 두는 사람들 ... 그리고 죽어 발견 된 것을 알리지 않는 사람들 . 인간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이제 또 모여서 죽은이를 애도 하는 척만 , 하는 것을 보게 된다 .
망연해 하는 이선대를 나는 냉정하게 볼 수가 없다 . 그는 말하자면 내가 잡으려 안달하는 그 표현의 어떤 것인듯해서 , 잃은 것이 뭐였더라 하고 기억이 날 듯 말듯 가물가물한 그 것같이 . 저도 모르게 가장 악한의 위치에 서 있었음을 기억해내게 되는 순간이 이렇듯 올까봐 , 그러나 아주 오지 않고 영영 모를까봐 더 두렵기도 한 , 이 어중간함 . 노릇만이 있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 겨우 시늉만 있었는데 , 그 시늉들이 지금의 체면이고 모양세가 되었다고 . 이 나라가 되었다고 . 그러니 그 안에 인간은 없다 . 아무도 ...시늉과 체 하는 무엇만 있을 뿐 , 성석제 작가가 잃어버린 인간에서 들려주는 얘긴 어쩌면 아주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고 그저 잃어버린 사람이 있을 뿐이란 것이 아닐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