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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로부터의 차별을 받으며 숨어 살아간 '라 만차'의 자손들을 일컫는 라스 만차스.. 처음에 소설의 제목이 그런 뜻이라는 것만 알았어도 책을 구입하지 않았을 거 같다. 환타지 운운하는 표제나 그림체가 오히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환타지 소설같은 느낌이어서 가볍게 읽어 볼 마음으로 부담없이 구입했다가 다소 오랜 시간 책장에 전시해 둔 후에야 비로서 읽게 되었다. 큰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장시간 비행기를 탈 일이 생겨 그동안 머리아프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를 읽어야 겠다는 생각에 집어들었는데.. 읽는 내내 예상치 못한 칙칙한 느낌이 출장의 기분까지 다소 다운시키는 것 같았다.
평범하게 살아가려 노력해도 잘 안돼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행 이야기가 이 소설의 소재라면, 그러한 '불가항력'을 만들어내는 원인에 대한 구체성이 지나치게 결여되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포함한 주인공 가족의 잘못이라고는 남들보다 다소 지나치다 할 수도 있는, 크게 다르지 않은 '우유부단함'을 들 수 있겠으나, 그러한 무척 사소해보이는 잘못이 너무도 처참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우유부단하다는 이야기를 간혹 들어온 내가 느끼는 강박성 반발일런지도 모르지만..
다소 변태(?)적이랄 수 있는 엽기적인 상황설정도 읽는 내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으며 창피스러움과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죄책감(?) 비슷한 것도 들었다. 스스로의 마음 기저에 깊숙히 잠들어 있는 이드(id)가 만들어내는 감정이었을까? 우울하고 다소 엽기적인 선정성과 주인공이 지속적으로 느끼는 이해는 안가지만 알 수 있을거 같은 무기력함이 너무 싫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남들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은 아니다. |
| 라스 만차스라는 것은 책 속에서 소개되는 영화다. 라 만차라는 사람이 선조인 일족의 고립됨을 나타내는 영화가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왜? 그것은 마치 주인공 ‘나’의 현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단편처럼 각기 나누어 볼 수도 있지만 그 단편 하나 하나가 이어져 장편을 이루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두가지 작품이 생각났다. 한 작품은 러브크래프트의 <공포의 보수>로 작품에 등장하는 기묘한 괴물이 사는 인스마우스라는 도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가 떠올랐다. 이 작품은 추리 소설이 아니니 이 정도를 스포일러라고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처음 기묘한 동거 생물을 살해하면서 ‘나’는 가족에게서 고립된다. 그것은 가족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지만 가족은 그를 외면한다. 그리고 갱생원에서 나와 취직을 하게 된 ‘나’는 끊임없이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조차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면서 순응하고 쫓겨 가듯 유배되듯 가족에게서 멀리 내쫓기게 된 ‘나’는 마지막 가족과 같이 보게 되는 영화에서처럼 계속 더 깊숙이 고립되어간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기묘한 괴담같은 이야기들과 괴생명체들의 이야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현실에서 계속 부딪쳐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아닐까.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나름대로 그런 형식을 도입해서 작가는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가족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도 작가는 묻고 있다. 가족은 어떤 면에서 라 만차 가를 따돌린 이웃처럼 느껴진다. 이마에 붉은 점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금 느낌이 이상하고 기분이 불쾌해진다는 자신들의 느낌만으로 따돌려 고립되게 만드는 존재들... 다른 사람이 아닌 가족에게 따돌림을 당한다면 그건 정말 세상에서의 진정한 고립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아버지는 끊임없이 자식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비춰지지만 실상은 관심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의 말없는 폭력을 휘두른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나’의 누나가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나’는 비로소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모든 것을 끊고, 모든 것과의 단절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서. 그리고 떠난다. 꿈을 향해서... 어쩌면 그가 가는 곳은 라스 만차스가 사는 곳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라스 만차스가 ‘나’로 대변되는 모든 젊은이들의 이상향은 아닐까.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그 어떤 곳... 독특한 작품이다. 환타지적이기도 하고 추리나 미스터리적이기도 하다. 몽환적이기도 하다.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목에 걸리는 것이 있어 꼭꼭 씹게 되는 작품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 환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괜찮은 작품이다. 작가의 처녀작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
| 저는 이 책을 읽는 데 무척이나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방 속에 넣고 짬이 날 때마다 읽다가 다시 가방에 넣은 것이 근 한 달은 된 것 같습니다. 뭐라 할까, 일반 소설은 뒷 내용이 궁금해서 막 읽어 내려가는 편인데 이 소설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또 희한한 것이 오랜 시간 동안 이 소설에게서 손을 떼게 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이 책을 살 때 표지의 ''일본 판타지 문학 대상''라는 문구와 소녀와 소년의 일러스트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구입했습니다. 정말 유쾌한 재미 위주로 이틀이면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인 줄로만 알았지요. 하지만 대여섯 장을 읽다 보니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알 수 없는 상징, 암울함, 어둠이 가득 묻어나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열심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저는 소년(나)이 첫 이야기 이후에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 괴물들과사투를 벌일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프닝(?)이라고 할 수 있는 첫 이야기가 끝나고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제 상상고는 전혀 다르게 소설은 판타지보다는 성장 소설로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그 때부터 이 소설을 읽는 제 속도가 현저히 더뎌진 것이 사실입니다. 기대를 하면서 하면서 매우 더디게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고 읽으면서 왜 ''판타지 문학 대상''을 탔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소설을 다 읽고 덮은 순간 알 것 같았습니다. 판타지는 환상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물론 이 소설 속의 세계가 가히 현실 세계라고만이라고는 생각하지 힘들지만 이 소설처럼 현실과 밀접히 맞닿은 판타지적 이야기는 되려 환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보다, 또 현실 세계에서 펼쳐지는 현실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소년의 성장통은 극단적이면서도 어디서 보아온 듯한 느낌을 풍기기 때문에 그것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구현되었더라면 이 소설은 이 정도로 비범한 소설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판타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독자에게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책장을 덮고 보니 재미있었습니다. 희한하지요?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지만 자리를 뜨자마자 내용과 장면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가 있는 반면 볼 때는 별로 알지 못했지만 집에 가서 잠자리에 들 때 이상한 여운을 남겨 주는 영화도 있습니다. <라스 만차스 통신>은 후자의 영화처럼 그런 여운을 남겨 줍니다. |
|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특이하게 만들어진 표지가 인상적인 라스 만차스 통신은 그 표지만큼이나 특이한 경험을 가져다준다. 줄거리만 요약한다면 성장기 소년의 기괴한 경험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한 소년의 성장기를 넘어서는 뭔가가 책을 지배하고 있다. 초반은 약간 지루하게 전개되며 책을 놓고 싶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표현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을 끝까지 읽을래?’ 하는 작가의 시험대와 같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통과 못하면 이 멋진(?) 이야기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두 번째 단락인 혼혈극장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이 일하러간 곳은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 찬 곳이다. 아니, 수수께끼라기보다 작가는 주변 풍광과 인물의 관계도만 늘어놓은 채 독자들이 상상을 하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공은 뭔가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밝히려고 하지도 않는다. 무기력한 것이다. 그러나 분노에 찬 주인공이 진실을 밝히고자 했을 때 위태하게 유지되던 질서를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다.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이 그렇게 세상의 중심에 설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일로 인해 스스로도 상처를 받고 어디론가 또 떠나야 하지만.... 이후 주인공이 또다시 “옮겨지는” 산장은 말그대로 지옥도 이다.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산장에 지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지옥을 탈출하는 것은 역시 “무기력한” 주인공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올해의 발견이다. 예전에 독일작가인 ‘카렌두베’의 ‘폭우’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경험했던 그로케스크와 알 수 없는 쾌감이 페이지사이사이에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소설을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 적극 추천한다. |
| 오직 상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비틀어진 세계관, 현실과의 접점,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환상... 어쩌면 세상은 환상(幻想)이지만, 너무나 익숙해서 상식으로 느껴지는 것일지도, 어쩌면 세상은 환상(環狀)이라서, 돌고 돌고 또 돌아가기 때문에, 익숙한 것일지도, 소년은 라스 만차스의 붉은 반점처럼 인생이 물들어가고, 물들어간 인생은 라스 만차스의 붉은 반점처럼 씻을 수 없게 된다. 되풀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악몽, 하지만 그보다 더 한 현실 그래서 소설이 오히려 더 현실같은 비참한 기분, 잔혹하리만치 하드보일드한 세상의 중심에서 원더월드가 펼쳐진다. 나의 세상과 닮은 원더월드가... ...... 일본에서 대중적인 이야기의 등용문으로는 꽤나 권위가 있는 일본 판타지 소설 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 한다. 이 상 출신으로 유명한 작가라면 단연 '링' 시리즈를 쓴 스즈키 코지, 현재는 심사위원으로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자기가 심사했던 소설중 제일 재미있었다! 라고 하는 카피 문구는 잠시 접어두고... 어쩌다 보니 생기게 되어버린 굳혀진 선입관, 판타지 소설은 반지의 제왕같은 검과 마법의 세계로만 국한되어버린 것. 국내의 경우는 드래곤 라자 이후로 검마의 세계관들을 다룬 판타지 소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판타지 소설하면, 중세 유럽풍의 시대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해 버리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 '라스 만차스 통신'의 경우에는 그러한 검과 마법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판타지 소설이 아닌 '환상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차피 소설은 허구요, 상상의 산물이라지만, 라스 만차스 통신의 매력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에 있다는 점이다. 허구의 세계를 당연한듯이 그리면서,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하고 귓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그래서 이 소설을 '환상문학'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주인공 소년에게 펼쳐지는 잔혹하고도 기묘한 세상, 그럼에도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듯한 모습. 소년이 지고 가는 라스 만차스의 붉은 멍에는 꼭 그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씻을 수 없는 흔적일 것이다. 그래서 라스 만차스의 세계는 내가 사는 세계와 닮은 꼴의 원더랜드인 것일지도... |
| 이상한 세계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곁는 뒤틀린 이야기를 다룬 소설 (이하글 책 내용 조금 포함....) 일단 책의 배경이되는 세계는 현재 인간이 살고 있는 태양계의 3번째 행성 '지구'라는곳과는 '조금'다른 곳이다. '지구'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당히 이상한 생물, 환경, 생활, 현상등이 책의 세계에서는 그저 그런 일일뿐이다. 그런 세계에서 불행한(저주받은) 주인공의 뒤틀린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것은 어느것도 확실한 것은 없으며 독자 스스로 생각해야한다. 이책은 보는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면서 그 배경은 보는이가 알 수 없는 세계를 펼쳐놓아 보는이를 즐겁게 하는 보는이들에게 유쾌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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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공포/괴기영화가 유난히도 홍수였다.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1960년대(정확한 연도는 몰랑~) 만들어진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은유라고 널리 이해되고 있다. 쏴도 쏴도 죽지 않는 좀비들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끈질기고도 소통불가의 지배층...대충 이런 은유이다.
이런 공식을 적용시켜 보면, 1990년대 말 오타쿠 출신의 악동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로 스타트라인을 끊은 일련의 좀비영화들도 은유대상이 명확해 진다. 대개 아직도 꽤나 보수적인(헐리웃 기준으로 나쁜 의미로 쓰이는 경우지만) '미국 남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 '좀비와의 투쟁'을 다룬 작품들은(우리나라에도 꽤나 나왔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두각을 드러내던 '부시와 그 지지기반'에 대한 극악유머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우리식으로 정색하고 말하자면, 명백한 지역감정 조장이다-_-;)
마침 이라크의 불꽃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로메로의 작품이 리메이크 되어 나오는 것을 보아도 타깃은 분명한 것 같다. <우주전쟁>도 이런 식으로 리메이크 되었다고 하는 상황이니...
결국 서양 영화에서 좀비나 흡혈귀들은 선동적인 표현을 섞자면, '사고회로가 꽉 막힌 집단/사회'이거나 '민중을 착취하는 지배계급' 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국내수입 되었다가 상영도 못해보고 묵히고 있는 <뱀파이어 헌터 D> 극장판을 보아도, 숫제 여기서는 지배계급의 명칭 그 자체가 '뱀파이어'이다. 놀라운~
이 소설에도,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여러 종류 등장한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구석은, 이들 존재의 상세애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 형상, 특성 등 국내의 일반적 판타지에서 묘사되는 상세는 일체 생략이다. 그것이 더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마치...점잖은 신사가, 미국식 ?쇼를 보고 흥분에 온몸을 떠는 그런...
장기불황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각종 싸이코 흉악범죄가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한국의 상대적 정상성'에 대한 묘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게 했던 지난 10여년의 일본. 이 시대의 화두는 '불확실성'이 아니었을까?
과연 이 작품 속에서는 곳곳에 불확실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주인공의 상세 이력, 가족간의 끈끈한 정도, 주변인들의 내력, 무대와 배경 모든 것이 불확실성을 걸치고 있다. 매우 의도적이고 치밀한 설정이라 생각된다.
작가 자신이 90년대 중반 불황기에 사회에 진출한 세대라서 그런지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온 인생이 절절히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 꽈악 막힌, 이른바 '폐색의 상황'이라 할 작중 세계는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되는 것이 없는 세월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마지막에 분노한다. 그리고 폭발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난다. 처음 시작에, 한심한 인생에 책을 집어 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였던 나의 마음은...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약간...만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젠장, 사는 게 이런 건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히메>가 생각난다. 1997년, 꽉 막힌 일본에서 그는 말한다 : "살아라. 살아 남는 것이 이기는거야." 누구에게서 이기는 것일까?
공포영화 속에 은유된 네탓이야 스타일의 지배계층? 아니다. 미셸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 권력' 또는 '권력 관계'로부터가 아닐까? 콘트롤 타워가 없는, 영구작동 MEAT GRINDER 기계와 같은 현실 말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오키나와 출신인, 일본어가 가능한지 여부조차도 불명확한 브라질계 일본인"과 함께, 떠난다. 오키나와... 브라질계 일본인 후예... 일본인들도 이제 '상징 구사'가 가능할 정도로 연륜이 쌓였나. 일본판 변경의 생 아웃사이더 설정이다, 퍄~ [인상깊은구절] 안 됩니다. 현실을 봐야 합니다. 당신은 보지 않으면 안 돼! 봐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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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라스 만차스 통신 (양장) 히라야마 미즈호 저/김동희 역 | 스튜디오본프리 | 원제 : ラス.マンチャス通信 | 2005년 09월 정가 : 9,500원 /판매가 : 8,550원(10% 할인) • 목차보기 제1장 다다미방의 형 疊の兄 제2장 혼혈극장 混血劇場 제3장 재의 도시에 사는 그것들 次の奴が棲む町 제4장 그들의 황혼 鬼たちの?昏 제5장 검붉은 얼룩의 승자 無毛の覇者 저자 후기 著者後記 역자 후기 譯者後記 Tinno's 評 - 내가 좋아하는 '링'의 작가인 스즈키 코지가 심사위원을 맡은 이후로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극찬을 하였기 때문에, 보게 되었다. 꽤나 두툼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손이 선 뜻가진 이유는 특이한 어감의 제목과, 앞표지의 일러스트가 지금까지 읽었던 일본 소설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스스로 판타지 성 소설이라고 할 정도면, SF적인 느낌도 있을 테고, 일본 나름대로의 감수성은 그대로 살아있을 테니, 어떤 작품이 나올까 궁금했다. 총 5장으로 되어있는데, 그 5장의 내용들이 단편이면 단편이라 할 수 있고, 이어지면 이어진다라고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는데, 아무래도 이어진다~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나'라는 존재이고, 그 주변에 누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계속 유지가 되며, 매 장의 배경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1장만 한번 봐도, 으스스한 기분이 감돌고, 이런 느낌의 글이구나라는 감이 딱 온다. 정말 스멀스멀 무언가가 자신의 등뒤로 기어가는 느낌... 그렇다고 무섭다기 보다는 신기하고, 무언가에 홀린 느낌으로 읽어 내려가게 된다. 딱히 재미라는 것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볼만한 작품이다. 문장력 ★★★★☆ 디자인 ★★★★☆ 경제성 ★★★★ 연출력 ★★★★ 소장가치 ★★★ |
| 히라야마 미즈호의 작품 중 두번째로 접하는 작품. 실제로는 이 책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된 것 같은데 조금 늦게 만난 듯... 그의 이 작품은 시작부터 독특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들, 그리고 이야기들... 마지막까지 그 비밀은 밝혀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이런 환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을 감산 어두움이란...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암울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들이었다... |
| 읽고 나서 기분 나빠진다는 점이 ''적의 화장법''을 떠올리게 하지만 완성도라는 면에서나 읽고 난 후의 기분 나쁜 점에 대한 반응이라는 면에서나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개인적인 감상이라는 걸 미리 말하고 싶다. --- 적의 화장법을 읽고 싶지 않은 것은 너무 잘 썼기 때문이고, 라스 만차스 통신을 읽고 싶지 않은 것은 주인공이 짜증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판타지라고 하는 장르에 대해 지극히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내 기대와 다르니까 이 책이 별로라고 여긴 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좋게 평가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역시 잘 되지 않는다. 발화장치가 기괴하고 기분 나쁘게 한다는 점에서 말벌 공장이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소설에 비견하기도 하고, 그래서 띠지에 ''데미안에 필적하는 이색적인 성장 소설!''이라고 적고 있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주인공은 나이에 있어서 소년이 아니지 않나? 단지 그런 채로 수년을 보낸다는 점이 가장 짜증난다. (게다가 성장하지도 않는다. 그것도 성장이라고 말하고 싶어? 20대 중반의 남자의 성장점은 거기까지?!) 초반부의 ''다다미 방의 형''에서 나뭇가지를 붙들고 훌쩍이고 있을 때를 묘사할 때까지는 단지 소년이라고 생각해서 짜증이 나도 참을 수 있었지만, 주인공이 최소한 18살 이상(고등학교 졸업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그리고 이후로 ''다다미 방의 형''에 등장하는 <놈>이 다시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고무된 독서감도 사라졌다.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은 도대체 <놈>의 정체는 뭐야?! 라는 의문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책도 요즘은 많은 것 같지만. <놈>이 어땠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왜 갱생원에 가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 결말까지 가서는 "결국 어땠다는 거야? 그렇게까지 만신창이가 돼도 뭐가 뭔지 모르고 있는 주인공이 짜증난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이 주인공이 소년(의 마음을 가진 성년남자)이기 때문이라면 남자(소년)라는 거 꽤 짜증나는 존재잖아." 하고 생각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성격 괴팍한 심사위원 밖에 없는가 싶어서 친구에게 ''말벌 공장''을 빌리기로 했다. 소재 문제가 아니라 원래 글을 못 썼다는 심증을 확인하고 싶다. 난 꿈과 희망이 가득찬 판타지 월드를 좋아하지만 거기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