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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책은 난 좀 지루하게 여기는 편이다. 소장리스트 중에서 소설의 플롯짜기나 퇴고하기에 관한 책이 있긴 하지만 왠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반면 글을 쓰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작가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폴 오스터의 <빵 굽는 타자기>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딱딱한 문예이론을 벗어나 자유로운 서술방식으로 글쓰기에 대해 풀어놓은 책이어서 아껴가며 읽었는데 이 책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역시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요즘 말로 '취향저격'인 내 스타일의 책이다. 작가란 이미지는 부(富)와는 거리가 멀다. 어둔 방에 촛불하나는 아니더라도 일정한 잠수 기간동안 방구석에서 머리 싸매고 산고의 고통 끝에 창작의 산물을 뱉어낼 것 같은 환상. 그런 가난한 예술가의 전형적인 모습이 작가 한창훈에게는 자유스럽고 거친 문장들에 힘입어 자연스레 그려진다. 보통 사람들에겐 고독과 쓸쓸함의 상징인 섬. 바로 그 곳 '거문도'가 그에겐 비린 추억과 글거리가 샘솟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고 그리운 고향이다.
소재가 되는 것들은 참 소박하고 서민적이다. 연탄, 여관, 술 , 포장마차, 낚시, 고깃배, 항구, 시인등등.. 과거 글짓기상 한번 타보지 못했다는 그의 글 속엔 피식하는 해학이 있고 흔한 광경 속의 뭉클함이 있고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가 있다. 개구졌던 유년기와 조금은 방탕했던 부랑생활, 오다가다 스쳐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과 시인들과의 허심탄회한 술자리도 손색없는 이야깃거리다. 시인의 성공은 세상의 실패를 증명하는 척도이다. 좋은 세상에서는 아픈 시인이 있을 리 없으니까. - p.262 글재주가 탁월하여 소설가가 된 이들에 비해 '맨땅의 헤딩'식으로 문단에 입성한 그의 글은 틀에 박히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함이 있다. 억지로 꾸미거나 수식하지 않아도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전해주는 공감과 감동이 내 개인사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글을 쓰고 싶게 만든다. 구수한 남도사투리가 읽기에 정겹고 좋다. 그 중에서도 사색이 짙은 몇몇 구절은 가슴에 깊이 남는다. 구멍에 관한 웃기고도 심오한 이야기, 도시의 욕망과 우울, 사회의 비참과 변방의 삶을 적는 글쟁이인 자신을 곱씹으며 한탄할 때 소설이, 작가가 무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글의 배경이 되었던 아낙들과 예전 풍경은 변했고 그의 머리도 하얗게 세었지만 그는 여전히 무소유를 추구하고 투박한 글쓰기를 고집한다. 섬이 있어 그가 있고 그가 살아온 삶이 글이 되는 작품생활. 이제부터 그의 책을 한 권씩 섭렵해나가고 싶어진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어부를 본 적이 있는가. 그리워 달려가면 바다는 날카로운 현실이 되고 마는 까닭도 있지만 꿈 속에서의 그것은 실제보다 크고 거세면서도 신비하게 채색된다. 어쩌면 꿈꾸기 위해 내륙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꿈꾸는 곳은 늘 멀리 있는 법. 먼 곳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꿈 꾸는 것. - p.3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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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제주도 올레 길을 걸으며 파도에 부서지는 포말을 말없이 바라보며 유한한 인생도 어느 순간 스러져 자연으로 순환하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외로움이 더한다. 지금은 친구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해안선을 따라 걷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할 수 있는 일들은 줄어듦을 알아차리게 된다. 거문도 섬에서 나고 자라 작가를 직업으로 삼아 뱃사람이라면 으레 행할 일련의 일들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이로 바다를 배경으로 질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인심 좋은 작가가 건네는 막걸리 한 사발 쭉 들이키며 일상의 일을 전하며 오늘과 내일이 별반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일상이 융해되어 있다.
섬을 여행하다 보면 육지에서 보던 풍광과는 다른 고독이 묻어난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처럼 바람이 불고 비가 거세게 내리면 한정된 공간에 고립되어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독과 친해지는 법을 배우며 사는 이들이다. 변방의 섬과 겨울 바다의 강요로 배가 묶일 때는 하는 일 없이 술과 더 친해지는 풍경이 되풀이 된다. 갈치 배를 타던 형의 푸념은 어획량보다 인건비가 더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나이 들어가면서 험한 뱃일을 계속 할 수 있을는지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니 글을 읽는 동안에도 어부의 헛헛한 마음에 짠해졌다.
바람이 바뀌고 찾아오는 어종에 따라 변하는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고 사는 이들은 바다의 주기를 시간으로 삼아 움직인다. 작가가 거문도로 들어와 살기까지 생업뿐 아니라 활동 영역을 확장해 생활해 온 터전인 여수, 부산, 서울 등에서 경험한 일은 창작의 질료로 쓰여 행간과 줄글 사이에 녹아 있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에 작가는 이들과 가까이에서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는 가운데 만난 사람들이 소개된다. 속인의 눈으로는 특별할 게 없는 생활인들이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띠는 독특함으로 살아났다.
자신과 인연을 맺고 사는 이들에 대한 애정은 삶을 관조하며 쓴 글 곳곳에서 묻어난다. 가까이 지낸 생활인들부터 문단의 거목들과 교유하고 소통하는 현장을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담아 평범함이 변주한 또 다른 삶의 진수를 보여준다. 음식 솜씨가 좋은 방이 이모가 고향으로 돌아와 식당을 열고 주린 돈벌이보다는 배고픈 이들의 배를 채워줌으로써 가출한 아들이 어디에서든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모정은 선업을 쌓게 하였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진정성은 감동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일깨워주기라도 하는 듯 그 아들은 한식 조리사로 돌아와서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개척해보고 싶었다고 말하였다니 부모 의존형인 청춘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술과 낚시를 좋아하던 방이 이모부와의 소통은 일상 속 의미를 찾아가는 즐김으로 섬 생활에 윤기를 더하였다.
결핍을 견디며 사는 법을 터득한 이들은 필요 이상을 소비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음을 안다. 권력의 중심 ‧ 과잉된 욕망의 도시와는 떨어져 지내지만 더딘 변화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항구 주변에 깃들어 사는 이들의 삶은 질박한 사람들의 실재하는 풍경으로 꿈틀거렸다. 끝도 모를 수평선을 말없이 바라보며 침묵을 견디고 거대한 파도와 강풍을 감내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도 고립할 수 있는 근간이 있어야 섬에서의 일상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익명의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섬에 왔다가 며칠을 보내다 밀려드는 고독을 달랠 길이 없어 도심으로 회귀하는 이들이 흔하다. 섬으로 들어왔다 섬을 떠나는 사람, 평생 섬을 지키며 사는 사람, 욕망을 찾아 도시로 나갔다가 섬으로 회귀하는 사람들의 일상성이 갖는 비문학적 삶 하나하나가 문학을 키우는 질료라는 말에 공감하며 경험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욕 안 듣고 살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하던 중 예술가를 떠올렸던 작가는 그 중에서도 타자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며 서술하는 소설가를 생각하고는 좋고 감동적인 것을 잘 쓰면 되겠다고 토로했다. 글 쓰는 기교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리하며 시선을 주변인들에게 돌렸는지도 모른다. 가난과 추위가 시인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유용주는 시로써 자신을 구원하고자 했던 것을 넘어 상처 입고 살아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물질적인 산술적 잣대를 대지 않는 교원대 졸업생을 아내로 맞은 시인의 지난한 삶은 신산함을 넘어선다. 무력감에 젖은 청년에게 ‘관촌 수필’로 살아갈 힘을 줘 힘들 때마다 꺼내어 읽는다는 조문객의 일화는 누군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밖에도 문단에서 교유하며 살아가는 이들과의 인연은 숨겨진 시간 속에 녹아 빛을 발하였다. 여전히 저자는 거문도에서 글을 쓰고 틈틈이 낚시를 하여 회를 떠 술을 곁들이다 충동적인 섬 여행에 동참하는 이들을 반기며 그들의 이야기에 길을 기울이며 지낼 것이다. 유명을 달리한 이들의 빈 자리에는 바람이 불어 그들의 영혼을 불러내고 침묵 속에 느리게 움직이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며 사는 곳 한 바퀴를 돌며 걸어가는 작가의 뒷모습은 고독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섬사람들의 숙명이 더께처럼 어깨에 내려앉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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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많은 독자들을 거느린 중견 소설가라면 답을 알고 있어야 마땅할 것만 같은 질문이 ‘나는 왜 쓰는가’일 것이다. 그럼 소설가는 이렇게 답할 것만도 같다. ‘산이 거기 있어 산에 가는 것과 같다.’
딱히 답하기가 복잡미묘한, 지나치게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문답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책을 들고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그러면 나는, 독자도 뭣도 지니지 않고, 기다리는 이가 없이 혼자 쓰는 나는 왜 누가 써 달라 하지도 않는 글까지 지겹게 쓰고 또 쓰고 있는가.’ 왜
책을 읽어 보면 한창훈 작가의 답은 대략, 쓰는 일이 삶을 궁리하는 방편이며, 과정이며, 결과물이라는 것 같다. 내 골똘한 생각의 결과도 다르지 않다. 삶의 궁리에 여러 가지 방향과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뭔가를 쓰는 것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했고, 그래서 마치 밥 먹고 차 마시는 것처럼, 다반사로 그걸 하는 것이라고.
사실 소설은 작가를 밀쳐 놓고 그냥 소설로 읽지만,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같은 에세이는 읽기가 부담스럽다. 이처럼 속속들이 자기 이야기를 썼는데, 생판 남의 입장에서 읽기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가 강연회를 찾아갔다. 육성 듣기. 작가의 음성이 책에 쓴 글과 많이 일치한다는 느낌을 안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작가를 떠올리면서.
작가는 새벽에 약수터에서 엉엉 울고 있던, 사람들이 거지라고 부르는 이와의 만남으로 책을 시작했다.
울음은 깊고 길었다.p.24
청년 한창훈은 왜 울었느냐고 묻지 않았다고 했다. ‘어른 울음의 대부분은 비밀에 부쳐지기를 원하지 않던가.’라는 까닭이었다. 두 사람이 술친구가 되었다가 헤어진 이야기는 묘하게 어루만지는 구석이 있었다. 밤에 혼자 깨어 꺼억꺼억 울어 본 적 있는 어른들은 다 아는 이야기. 아, 이래서.
강연회에서 작가는 ‘백석, 정지용 시대에 이미 시가 완성되어 버렸다’는 말을 했는데 백석 팬 인증하듯이 ‘삶을 궁리하는 방법’이라는 제하의 글 속에 백석 시 하나를 인용해 놓았다.
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처럼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平安道의 어늬 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 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작가는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언어를 익혀 나갔다고 했다. ‘상황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언어. 견디는 자세가 아픔을 더 크게 보여주듯이,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는 자의 얼굴이 좌중의 웃음을 유발하듯이, 언어는 냉정하게 정돈된 거라야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p.164 우리 모두의 삶은 잠깐의 즐거움과 긴 고통, 신산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걸 정제해 내는 게 글의 몫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보았다. 예전에 시를 배울 때, 슬픔에 겨운 어휘를 나열해 놓으면 시인이 한 마디 하셨다. ‘자, 네 감정을 알았다. 이제 시를 써보라.’ 오늘은 백석 시 ‘여승’을 되뇌야겠다.
이 책, 정겹고 털털하고 섬세하고, 멋있다. 바닷내음새는 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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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든 삶이든 궁리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 대상이 아니던가.’ (165쪽)
꾸밈없고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배웠다. 배운 대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과 감정을 적절히 배합할 수 있는 글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연습과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셀 수 없는 날들의 노력이 쌓여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으니 작가의 삶이란 정말 대단하다. 어느 시절에는 소설가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고 짐작했다. 이제는 그것이 부단한 쓰기의 결과라는 걸 믿는다. 한창훈은 그런 사람일 것이다. 삶을 쓰는 소설가. 때문에 소설과 산문은 다르지 않았다. 한창훈이라는 고유한 무늬가 문장 속에 있었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는 글쓰기에 대한 책이 아니다. 삶에 대한 책이다. 그가 사랑하는 바다, 섬,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그것과 하나 되어 살아온 삶으로 고독과 결핍을 아는 사람이기에 말이다. 그 안에 글이 소설이 있고 문학이 포함될 뿐이다.
‘반쯤 가라앉아 가는 배. 돌에 눌린 배추씨앗처럼, 익사 직전의 상태에서 언어의 싹을 틔워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창작하는 이들과 닮았다. 노질을 하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바닷가에 닿을 것이고 그러는 사이 배는 낡아진다. 결핍과 상처를 창작의 질료로 삼으라는 말은 맨 처음 누가 했을까.’ (106쪽)
파도를 이불 삼은 선원, 건설현장 잡부, 수산물 가공 현장, 살아온 삶의 이력이 말해주듯 한창훈의 문장엔 생명력이 넘친다. 어쩌면 노동을 동반한 생명력이 한창훈 문장의 시원인지도 모른다. 바다와 섬은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아버지를 누군가의 남편을 데려가 버린 바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을 바꾸는 바다에서 삶을 퍼올렸다. 그것은 생활이자 소설이다. 그래서 한창훈이 쓰는 소설은 언제나 바다를 품었고 소설 속 인물들은 고단하고 외롭다.
‘상황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언어. 견디는 자세가 아픔을 더 크게 보여주듯이, 이를 악물로 웃음을 참는 자의 얼굴이 좌중의 웃음을 유발하듯이, 언어는 냉정하게 정돈된 거라야 한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164쪽)
아는 것을 쓰는 것과 안다고 믿는 것을 쓰는 것은 다르다. 한창훈이 쓰는 글은 전자이다. 제대로 문학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온 그의 치열한 삶이 있어 가능했다. 신춘문예 등단 영예가 아니라 당선 상금에 눈을 돌렸던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설 쓰기와 좋은 글과 감동을 주는 글에 대해 고민할 때 만난 백석의 시 여승이 그에게 답을 주었듯 삶을 쓰는 그의 글이 나를 감격하게 만든다. 인간 한창훈도 다르지 않다. 가족과 지인, 문단의 동료에 대한 글에서 그들을 격하게 아끼고 있다는 게 보인다. 시인 안현미를 위한 만세는 마치 행복을 부르는 주문과도 같다.
‘안현미처럼 사는 인생, 만세다. ‘만세’는 압박과 불편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노래하는 단어이다. 지금까지 잘해왔으니 앞으로는 더 잘 될 거라고 예측할 때도 슨다. 뭐 당장 그렇게 안 돼도 상관없다. 만세를 또 부르면 되니까. 자꾸 만세 부르다 보면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웃음소리가 정말로 행복하게 들리게 될 것이다.’ (262쪽)
한창훈과 바다는 자석처럼 서로를 당기는 한 몸이다. 문장에서 파도 소리가 나는 건 착각이 아니다. 바다향 짙은 그의 소설을 함께 읽어도 좋겠다. 그나저나 거문도의 5월 바다는 무슨 빛을 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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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에 그닥 어렵지는 않지만 왜 하는지도 모르는 채 꾸역꾸역 하게 되는 일이 있다. 이를테면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만 해도 그렇다. 어떤 대가가 주어지는 일도 아니고, 가령 내가 쓴 어떤 글을 읽었던 누군가가 감동하여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얘기도 들려오지 않는데 나는 지치지도 않고 몇 년째 블로그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인내심이 특출한 사람이었던가?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그렇게 강한 인내심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딱히 기억할 만한 중요한 것을 기록하는 건 아니다. 읽었던 책의 좋았던 문장을 가려내어 언뜻 떠오른 내 생각과 함께 기록하는 게 고작이고, 이따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시답잖은 내 과거를 들춰내는 게 전부이다. 더러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얼마를 줄 터이니 서포터즈가 되어달라는 쪽지가 오기도 하지만 소심한 나는 '혹시 이러다 사기를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서 단 한 번도 가타부타 대응한 적이 없다.
소설가 한창훈의 산문집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다가 문득 궁금했었다. 나는 왜 쓰는지. 작가는 원고료 때문에 쓴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짧은 질문은 긴 대답을 요구한다'고도 했다. 또는 '왜 쓰는가'하는 질문은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이어서 대답하기 부끄럽고 쪽팔리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독자가 제목에서 기대하는 그런 게 아니다. 예컨대 작가의 창작론이나, 작가론 등 어떻게 쓰고 어떻게 생활하는지 시시콜콜 말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 한창훈이 걸어온 삶의 단면, 그가 태어난 거문도와 여수와 광주와 부산, 대전을 거치며 만났던 사람들, 소설가로 등단하여 교류했던 문인들, 그가 읽었거나 썼던 책에 대하여 작가는 진솔하게 쓰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왜 사는가?' 묻는 독자들에 대한 그의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상금이 없었다면 신춘문예 응모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응모가 끝나면 후배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나는 계속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겨울철엔 일자리 구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택한 곳은 지방 신문사였다. 응모하고 나서 기다리고 있었고 머지않아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담담했다.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들, 짐작하지 못했던 것들이 돌발적으로 엄습해오는 미래만 무거웠다." (p.173)
책에 소개한 작가의 일과는 단순했다. '새벽 기상,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가늠하기, 담배 피우면서 그냥 있기, 원고 쓰기, 낚거나 뜯어온 것으로 국 끓여 밥 먹기, 책 읽기, 산책이나 생계형 낚시하기,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 듣고 있기'(p.109) 소설가보다는 어부를 직업으로 선택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책에서 그가 밝힌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아시바를 매고 고기를 낚던 그의 손에서 짙푸른 감동을 길어올릴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에둘러 말하지 않아도 그가 쓴 소설은 그가 속했던 삶의 현장에 대한 정밀한 기사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과 외곽을 그리는 소설이 의미를 잃는 시대에 나는 소설가로 살고 있다. 변방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쓴 소설이 나오면 으레 고색스러운 방 하나에 한꺼번에 모아놓고 체크인 해버리는 게 요즘 풍토이다. 토속적이다, 질펀하다, 한마디 내뱉어주면 된다고 여긴다. 평론가들의 모국어 기피, 근친 혐오, 그 배경 속에서 쓰고 있다." (p.108)
책에서 작가는 유용주 시인, 고 이문구 선생, 송기원 시인, 고 박영근 시인, 이흔복 시인, 박남준 시인, 이정록 시인, 안현미 시인 등 작가와 교류가 있었던 문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들 중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에서 버들치 시인으로 소개되었던 박남준 시인과 안현미 시인에 대한 소개글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그의 넋두리와도 같은 이 책을 끝내 다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삶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한 사람이 결국 소설가로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작은 깨달음들, 그것을 나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일인 양 아팠다.
"상상보다 앞서 나간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없다면, 그런 모습이 없다면 자본의 확대재생산 속도를 늦춰줄, 도시와 비도시의 균형을 맞춰줄, 사람이란 그렇게 독하고 모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쓰기 시작했다. 섬의 딸들이 어떤 식으로 위기를 넘겼는지, 어떤 형식으로 지리적 천형과 운명의 굴레를 이겨냈는지, 숨은 마음과 유쾌한 말을 적어나갔다. 죽음과 삶이 한 쾌에 엮여 있는 것. 울음과 웃음이 한 장소 같은 시간대에 뒤범벅되는 것. 자신이 떠나는 자리에 웃음소리 돋아났다면 그 인생도 괜찮은 인생 아니겠는가." (p.294)
비가 예보되어 있는 오늘,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고 한여름인 양 무덥다. 타들어가는 농작물을 보며 불기운에 데인 양 아프지 않은 사람은 농부가 되지 못한다. 철썩이는 파도를 보며 망망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어부가 되지 못한다. 결국 소설을 쓰는 작가는 세상의 모든 삶을 아파해야 한다. 소설가의 숙명은 아파하는 모든 인생에 경배하는 일이다. 어쩌면 직접 세상을 사는 본인보다 지켜보는 소설가가 더 아파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독자는 소설을 통해 한줌 위로를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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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쌤의 새 책, 아니 개정판이 나왔다. 예전에 나왔던 첫 산문집 『향연』이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온 것. 제목은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이다. 『향연』은 읽어도 세 번은 읽었을 터인데 개정판인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읽으니 왜 새롭던지...!! 이게 개정판 맞나? 했을 정도다. 얼마나 인생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타인의 아픔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왜 아침에는 울어서는 안 되는가 말이다. 내가 쓰는 이유는 그들이 애써 알고 싶어하지 않는 당대 이야기로 그런 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인생은 요리와 비슷하다. 한 가지라도 빠지면 맛이 안 난다. 신체와도 같다. 오장육부 수백 개 뼈마디가 다 괜찮다 하더라도 이빨 하나 썩거나 발톱 갈라지면 통증 때문에 잠을 못 잔다. 국가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면 아침에 우는 사람들의 존재가 왜 중요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된다. 중심과 권력과 도시의 고독한 자아 외에도 저 먼 곳의 거친 삶도 하나의 뚜렷한 형태로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해놓고 보니 문득 떠오른다. 사실 구구절절 떠드는 것보다 이게 가장 좋은 답이 될 것이다. 브레히트의 시(詩) 「책 읽는 어느 노동자의 질문」이다.
편집자의 책소개에 보니 2편이 빠지고 7편이 새로 들어갔단다. 이전에 있던 흑백의 사진들은 다 빠지고 텍스트로만 편집했고, 목차도 죄다 바꾸었다. 제목도 다 바꾸어서 훨씬, 책다운 책이 되었더라는... 글 속에서 눈 하나 떠, 읽는 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을 허공에 떠서 나를 바라보는 눈으로 여긴 것이다.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하고 금지시키는 눈.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알고 보면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나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보다 더 일찍 나왔던 "첫" 산문집인 터라 이제는 추억이 되어 버린 이야기들도 있고, 그런 까닭인지 이상하게 나는 읽을수록 자꾸만 옛생각들이 떠오르고.. 밥상이나 술상하고는 다른, 인간적이고 좀더 '한창훈' 같은 느낌의 글들이 많다. 그래서 더더 좋아했던 책이었다. 노래미를 낚다가 물에 빠져 죽은 소녀를 본 것도, 자장면을 먹어본 것도, 지구 반대편을 향하여 배가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도, 거웃이 돋아난 것도, 맨바닥 뒹굴며 싸움을 한 것도, 폴 모리아를 듣고 넋이 나간 것도, 꽁지머리 여학생을 따라가본 것도, 시장 튀김집 골방에서 소주병 기울여본 것도 모두 항구 여수에서였다.
표지의 일러스트는 한창훈 쌤의 딸인 단하가 그린 것이다. 아빠를 젤 잘 아는 딸이기에 아빠도 젤 잘 그릴 줄 아는 거겠지. 여러 컷의 사진으로 표지를 하고 구매 선물로 나가는 원고지 노트에 일러스트가 다 들어갔다. 고향으로 가니 좋냐, 고 물어온다. 고향이라고 무조건 좋을 것만도 아니어서 대답이 쉽지 않다. 단지 아침에 일어나 빗자루 들 수 있어서 좋다. 마당 비질하는 소리가 가슴속 묵은 때를 벗겨내는 소리만 같다. 고향이든 아니든, 살기 좋은 곳은 스스로 부지런해지는 곳이지 싶다.
한창훈 선생님의 소설도 좋지만, 산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아실 듯. 읽어보면 안다. 왜, 좋은지. 습습함을 기억하는 것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였다. 그리고 먼 길을 흘러 마침내 돌아오면 항구는 늘 그만큼의 떠들썩함과 그만큼의 습습함을 지닌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숱하게 떠났고 떠난 횟수 만큼 돌아왔다.
덧붙여, 지난 주 출간 기념하여 있었던 강연에 다녀왔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니 글쓰기도 궁금하여 그동안 여러 글쓰기 강연을 들어왔다. 작가들이 하는 얘기는 다 비슷비슷했다. 내가 글을 쓸 사람이라면 새겨듣겠지만, 그저 글쓰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조금의 호기심으로는 글쓰기를 주제로 하는 강연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한창훈 쌤의 강연도 그럴까? 그렇겠지, 했다. 한데, 잘못 알았다. 그동안 한창훈 쌤의 강연을 안 들은 것은 아니다. 두어 번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글쓰기를 주제로 하는 강연을 들은 적은 없었다. 아니, 이걸 글쓰기 주제라고 해야할까? <향연> 때는 몰랐던 감동들이 이번 책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으면서는 새롭게 느꼈는데.. 그 감동이 강연에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책에서 그는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 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들려줄 뿐이다. 그의 경험과, 그의 생각들. 그것들이 이 책 속에 그대로 들어 있고 우린 그걸 읽으면서 느낀다. 그렇구나,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구나. 책을 읽으면서 그냥 알게 된다. 강연에서도 그랬다. 글을 잘 쓰려면… 운운하지 않았다. 그냥 들려줬다. 나고 자란 이야기, 할머니 이야기.. 듣다 보면 알게 된다. 아, 그가 왜 쓰는지, 왜 작가가 되었는지... 그는 어린 시절 글을 잘 쓴다고 인정 받으며 자란 것도 아니고,. 좋은 대학은커녕, 전공을 한 것도 아니다. 마땅한 직업이 없었으니 글만 쓰면서 살 수도 없었고 그저 직업을 찾다 보니 작가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런 숱한 어려움들이 글 속에서 녹아 그를 작가로 만든 것일까? 어쨌든 글을 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작가로서의 할 일을 한 것이겠지. 그가 '왜 쓰는가' 스스로 반문하며 써내려간 글은 아니지만, 다 써서 묶고 보니, 결국은 '왜 쓰는가'가 되어 버린 글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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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 가끔 내 일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 책 볼 때는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책 제목은 보고 싶게 하는데, 글쓰는 것은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거 알고 있었는데도 조금 기대했다. 무슨 기대를 한 건지. ‘왜 쓰는가’ 첫번째 대답은 먹고 살려고다. 작가니 그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원고료 받지 못하는 글은 쓰지 않는다는 말도. 이 말 처음 보는 건 아니다. 작가는 거의 돈이 되지 않는 글은 쓰지 않을 거다. 그건 작가가 가지는 특권이겠지. 두번째 대답도 있다. 하나만 말한 건 아니다. 두번째는 제대로 살기 위해서다. 남보다 위에 있으면서 밑에 사람 피를 빨아먹지 않는 사람이다. 불편한 것을 말하고 싶다고도 했다. 이런 말을 봤지만 한창훈 소설은 단편 하난가 보고 다른 건 못 봤다. 얼마전까지 그 소설 다른 사람이 썼다고 생각했다. 소설 제목과 작가를 잘못 짝지었다고 해야겠다. 그런 일 아주 가끔 있기도 하다. 자주는 아니다. 소설 내용은 잊었지만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 아닌가 싶지만. 한창훈이 소설 쓴 지 스무해가 넘었는데 소설 한권 제대로 못 본 게 미안하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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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표절 문제로 한참 시끄러운 시기에 조지오웰이 쓴 책과 같은 제목으로 나온 책을 읽었다. 비록 작가의 이름이 앞에 있기는 하지만 이런 건 괜찮은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또 굳이 조지오웰의 제목을 따올 만큼 절실한 제목이었는지도 따져보게 된다. 2009년도에 <한창훈의 향연>으로 출간된 책이 올 4월에 출판사를 바꿔 개정 출간되었다. 전업소설가 한창훈의 유일한 산문집이라고 한다. 산문의 형식은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겐 매력적일 수도 있다. 늘 드라마를 지휘 감독하던 피디가 그 자신이 다큐에 출연하는 것쯤 될까. 4부로 구성된 산문집 곳곳에는 바다사나이 한창훈이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가 그려져 있었다. 그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 고향인 거문도를 떠나 여수에서 보낸 어린 시절, 그리고 부산에서의 청춘, 반 백수로 떠돌던 시절의 이야기, 다시 거문도로 돌아와서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유려한 문장에 기대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온다. 한창훈 소설의 매력이라면 정겨운 사투리와 꾸미지 않은 것 같은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는 사실성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산문집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그대로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객관적인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주관을 읽을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작가는 바다와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전업 작가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며, 그의 글에 나오는 그대로를 보자면 아픈 사람을 끌어안을 줄도 알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지 못하고 글로써 그들을 위로하려고 애쓰는 멋진 작가이다. 그는 왜 쓸까? 남들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삶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드러내놓고 싶어서 쓴다고 한다. 아픔이 있어도 아프다고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눈물을 그대로 세상에 드러내, 모두에게 똑바로 보라고 쓴다고 했다. 결국 잘난 사람들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자신의 책무임을 무겁게 느낀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남들을 착취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방편으로 작가를 택했다는 말도 했다. 이 따뜻하고 정의로우며 남자다운 작가가 자신이 처음 결심한 대로 그런 작가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분다고 했다. 며칠 전 이 책을 구입할 때만 해도 이 책에 대한 좋은 평들과 제목이 주는 호기심과 궁금증이 커서 책 읽을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들보다 먼저 제목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작가에게 유독 강한 도덕심과 깨끗한 양심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이분들에게 바치는 순수한 경애심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다면 억울하다고 할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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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구독하고 있는 주간지 <한겨레21>에서는 명절마다 푸짐한 상품을 걸고 퀴즈 큰잔치를 한다. 2015년 설에는 yes24추천도서 40권을, 추석에는 크레마 단말기를, 2016년 설에는 교보문고 추천도서 24권을 받았다. 정답 엽서를 자필로 작성하다보니 굉장히 반듯한 글씨로 구구절절하게 사연을 적어 보내는데 그게 기자들의 눈을 끄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출제 기자가 직접 나에게 전화 인터뷰를 해 왔다. 세 번 연속으로 당첨되었다니까 꽤나 놀란 모양이다. 정답도 정답이지만 이 퀴즈 대잔치는 선물을 직접 고를 수 있는데 내가 책과 관련된,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낮은 것들만 선물로 골랐던 게 당첨으로 연결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선물로 받은 책들의 제목은 이렇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한창훈 <블루오션 전략>, 김위찬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로움의 왕과 여왕들>, 다니엘 월러스 <센트럴 파크>, 기욤 뮈소 <대한민국 미래보고서>, 국제 미래학회 <에너지 혁명 2030>, 토니 세바 <살아있는 뜨거움>, 김미경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김정운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 <파수꾼> 하퍼 리 <감성제곱>, 이힘찬 <1cm>, 김은주 <제주에서 뭘 먹고 살지?>, 정다운 <개떡아빠>, 김세호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이창재 <비포 아이 고>, 콜린 오클리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강윤중 <김이나의 작사법>, 김이나 <이카루스 이야기, 세스 고딘>, 박세연 <언젠가 너에게 듣고 싶은 말>, 임수진 <시를 쓴다는 것>, 다니카와 슌타로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김재진
이상 24권이다. 우와! 이거 읽고 싶었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한 권도 없다. 책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책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요즘 yes블로그 활동이 뜸해서 곁눈질로라도 보는 책들이 없으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중에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이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였다. 소설가가 직업이라는 이 소설가의(?) 소설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지만, <한겨레21>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을 재미있게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바닷가의 어느 작은 섬(섬이니까 당연히 바닷가....), 아마도 거문도 쯤으로 추정되는 곳에 살면서 그곳의 형님 동생들과 술을 마시고 바다와 함께 살아가고 맛있는 것 먹는 이야기, 그리고 그곳의 사람 이야기들을 솔직하고 꾸밈없는 어투로 재미나게 쓴 칼럼의 제목은 한창훈의 산다이. 최근에 재미나게 읽은 칼럼의 제목은 '내가 알파고를 이기는 방식'(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449.html)'이었다. 어디서 이름을 많이 들어봤는데... 했더니 작년엔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와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라는 책이 출간되었고, 나는 책 제목에 빡 꽂혀서 yes에서 진행하는 서평 이벤트에 구구절절이 응모했다가 떨어졌었다는 기억이 났다. 그래서 한창훈이라는 사람과 그 글을 접할 때면 언제나 짭쪼름하고 푹 삭은 젓갈 한 종지와 잘 구운 볼락, 바삭하게 구워 기름 바른 김, 초장에 듬뿍 찍어 집어먹는 두툼한 활어 회가 한 점 함께 떠오른다. 소재 뿐만 아니라 글도 맛이 괜찮다. 젓갈의 첫 맛이 먹는 사람의 코와 혓바닥을 빡 때리는 것처럼 한창훈의 글도 내게는 그렇다. 코드가 잘 맞나보다.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 역시도 이런 글들을 모아 놓은 산문집이다. 살기위해 때로는 삶을 포기해야하는 아이러니한 바다라는 곳에서 겪는 다양한 사람의 모습들과 세상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들이 투박한 말투 속에 곳곳이 배어있다. 과메기에 바닷바람이 스미듯이 말이다. 목차를 넘기고 머리말을 읽다가 또 빡 꽂혔다.
예전에 <아침마당>에서 출연자가 어렸을 때 헤어진 가족 찾는 것을 수요일마다 했다. 진행 맡고 있던 이금희씨를 어쩌다 만난 자리에서 그 프로그램 관련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말하기를 ‘재수없게 아침부터 눈물바람이다’라며 불만을 표시한 시청자가 제법 있었단다. 나는 그따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보고 싶었다. 얼마나 인생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타인의 아픔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왜 아침에는 울어서는 안 되는가 말이다. 내가 쓰는 이유는 그들이 애써 알고 싶어하지 않는 당대 이야기로 그런 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종자들이 참 싫다. 자식들을 바다에 묻은 사람들에게 그만 좀 하라고 말하는 종자들도, 표를 구걸할 때는 무릎을 꿇다가 배지를 달고 나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이 무릎을 꿇어도 외면하는 그런 종자들도 싫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저런 종자들은 나쁜 놈들이고 당대에는 몰라도 역사는 반드시 저들을 나쁜 종자로 기록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그 증거가 되는 문학 작품들을 보여주고 우리 사는 세상에 어떤 놈들이 나쁜 종자들인지 함께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글을 함께 읽는다. 그래서 요 위에 인용한 머리말의 일부는 요번 중간고사 문항 가운데 <보기>로 활용했다.(애들은 지금 이 글을 못 보니 아쉽겠군ㅋㅋㅋ) 이런 글과 이렇게 글쓰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아직 인간은 더 진보할 수 있고 문학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신뢰와 확신을 갖고 산다. 그러한 믿음을 잊지 않기 위해 이런 글을 읽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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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하얗고 날카롭게 생긴 얼굴에 하얗고 고운 손. 그러나 이 책의 한창훈 작가는 달랐다. 얼굴 생김도 기골장대함도 또한 뱃일에서 시작하여 공장생활에 공사판 인부까지 두루두루 거친 삶의 이력 또한 내가 갖고 있는 작가의 이미지와는 아주 달랐다. 책상에 앉아서 사색에만 빠져 지내는 백면서생이 아니었고, 삶에 온몸을 부딪쳐 궁리하는 소설가, 문단의 인맥이나 학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우면서 독립적인 영혼이었다. 그냥 멋있다. 그 동안 알던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이 작가만의 새로운 매력에 푹 빠졌다. 작가의 고향은 거문도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바다인, 그림을 그려도 파란색 크레용만 닳아버리게 되는 섬에서의 생활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외로움을, 그 적막함을 나는 알지 못하고 지냈다. 생각해보면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섬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그 파아란 바다를 눈 뜨면 바라보기 시작하여 그 속에서 놀고, 그 속으로 나아가 고기를 낚아오고, 물질을 하고, 떠나는 이를 쳐다보고, 오지않을 이를 기다리고...... 더디가는 시간을 버텨내고, 삶의 지난함을 깨닫게 되고... 소설가가 되는 일은 또 어떠한 것인가?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겪게되는 이야기들. 문예창작과에 들어가 작가수업을 받는 것이 정도인가? 삶의 요모조모를 이바닥 저바닥 굴러다니며 배우고 익혀 자신만의 언어로 뱉어내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낮에는 직업인으로서 살아가고 밤에는 글을 쓰며 주경야독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돈이 떨어져도 온몸을 던져 글쓰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더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 동안 알던 작가들과 너무도 다른 스타일의 소설가 한창훈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소설가들 사이에서 튀는 존재. 하지만 너무나 매력적이다. 더 알고 싶다. 이 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