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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참으로 생활력이 강한 분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일을 하셨다. 보석 도매상에서부터 아이 돌보기, 밤껍질 까기, 공장일까지 줄곧 일을 하셨다. 지역에서는 건실한 회사에서 정비관련 일을 하셨던 아버지와 함께 늘 일을 하셨다. 나와 내 남동생이 모두 결혼해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돌아보면 부모님의 헌신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셨던 일이 라면스프에 들어가는 첨가물을 가공하는 공장이었다. 4남매의 장녀로 태어나신 어머니는 양반 끄트머리를 붙들고 계시던 외할아버지의 완고함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중학교에서 멈춰야 하셨다. 어머니 나이 23세에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는 기울었고 남동생 셋을 위해 성남으로 상경해 일을 하셨다. 시골 여자로 태어나셨지만 강한 리더십과 추진력, 카리스마를 가지신 어머니는 그곳에서도 금세 또래들 중 리더가 되셨다고 한다. 결혼 후 생전 처음 온 지역에서 정착해 살면서도 그런 어머니의 기질은 도드라졌다. 각종 계와 모임, 동네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해소자가 되기도 하셨다. 마지막으로 일하셨던 라면스프 공장에서도 비공식 직함인 ‘반장’이 되어 수십 명의 아줌마들을 리드하셨다. 공장의 상황이 갑작스레 안 좋아져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수십 명의 아줌마들을 이끌고 노동관련 부서로 쫓아다니시고 공장장과 사장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지어 퇴직금과 밀린 급여를 모두 받아내시기도 했다. 아마 남자로 태어나셨으면 못해도 회사 중역이나, 자치단체 장 정도는 하고도 남으실 분이다.
“잔뜩 열어놓은 창문이고 환기구를 통해 한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밀려들었다. 지나가는 산과 밭, 논은 온통 푸른데 바람 없이 햇살만 가득한 그 풍경이 무거워 어쩌면 가장 왕성한 생명력이란 저렇듯 무겁고 힘든 색깔을 등에 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p.65) 한창훈의 「홍합」을 읽으며 계속 어머니가 생각났다. 여수 홍합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의 고된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편 수발하고 새끼들 키우느라 일을 놓을 수 없는 아줌마들. 그녀들에게 계절의 변화는 체화할 수 없는 일상일 뿐이다. 뼈가 삭는 고통일 뿐이다. 숨이 막히는 한 여름 초록빛 세상은 목을 조여 오는 답답함일 뿐이다.
「홍합」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아줌마라는 단어 하나로 통칭할 수 없는 개별적 고통과 한숨의 주체다. “하늘에서 물 몇 방울 떨어진다고 사람들 마음이 그 새 창호지마냥 녹녹해지는 게 아주 우습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두고 보면 비라도 좀 내려 봐라, 나는 그 핑계 대고 놀란다, 세상만사 잊어 불란다, 소주 몇 잔만 눈앞에 있으면 온갖 시름 떨쳐버릴란다, 작정을 할 만큼 그들은 고달픈 것이다.” (p.23) 여수에서 순천에서 한 푼 벌기 위해 홍합 공장으로 모여든 여인들은 누구하나 곡절이 없는 이가 없다. 별의별 사연과 과거로 가득한 곳이다. 라디오 사연으로 써 내려가면 번지르르한 김치냉장고 하나쯤 거뜬히 받아낼 수 있을 만큼 구슬프고 어이없으며 짠하다. 하긴 경제적 어려움이 없고 남편 벌어오는 돈 만으로 새끼들 키우고 사고 싶은 옷 마음껏 살 수 있는 형편이라면 좁아터진 홍합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멈추지 못한 일로 굳어진 손마디와 마음 심지는 얼핏 뻔뻔하게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김씨 아줌마처럼 철판을 둘러놓은 것 같이 단단해 보이지만 그녀들이 살아온 삶의 굴절만큼이나 요동치고 잘못 건드리면 한꺼번에 쓰러져버리는 도미노 조각처럼 약하기도 하다. 그래서 좁은 공장에 모여든 서로를 위로한다. 내 옆의 00엄마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뭐 그런 날도 있었다. 그만큼 흔한 수 있는 게 남편들의 폭력이었고 사실 그 폭력에 가장 시달리는 이는 바로 석이네이기도 했다.” (p.44) “간간히 자신들도 눈가에 푸른 꽃을 달고 오면서도 누구 하나 그 몰골로 오면 천하에 못 볼 꼴 봤다는 듯 성화였다.” (p.79) 홍합 공장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의 남편들은 하나같이 인간 하자들이다. 제대로 돈을 벌어다 주는 놈 하나 없다. 열심히 배를 타지도 않고 열심히 농사를 짓지도 않는다. 싸지른 새끼들에게는 관심도 없다. 꼴에 사내노릇 한다고 술질에 계집질까지 가관이다. 공장에서 잔업이 있어 조금이라도 늦게 집에 올라치면 당장 때려치우라 되레 큰소리다. 술까지 마실라치면 어김없이 두들겨 팬다. 자식 낳아줘, 부모 공양해, 돈 벌어와, 밥상 차려주는 마누라를 두들긴다. 홍합 공장 여인들은 무저갱에서 탈출할 수 없다. 숙명처럼 자신의 팔자를 탓하기도 하고 이혼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단 한명도 실행하지 못한다. 부끄러운 훈장처럼 얼굴에 푸른 꽃을 피워오면 지난 주 자신이 피워온 푸른 꽃을 기억 못하는 듯이 더 길길이 날뛴다. 죽일 놈, 찢어 죽일 놈, 망나니 같은 놈 악을 써보지만 그녀들은 무저갱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집 옆집 같이 공장 다니는 여자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유독 그녀만 늦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 그 입방아를 무슨 수로 견뎌내겠는가. 도대체 이놈의 동네엔 말 못해 죽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p.181) 공장의 유일한 총각 문기사와 설레는 로맨스를 꿈꾸는 승희네는 일찍 죽은 남편의 부모와 자식들을 결국 벗어내지 못한다. 노총각과 과부의 로맨스는 전혀 불륜적이지도 외설적이지도 않다. 소설 속 승희네의 인생이 너무 구차하기 때문일 거다. 둘만의 사사로운 시간을 가질라치면 어김없이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거나 옆집에 불상사가 생긴다. 무슨 대단한 야반도주를 꿈꾸지도 뜨거운 하룻밤을 바라지도 않는데 그것조차 이놈의 무저갱은 허락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은 구차하고 애달프게만 읽히지 않는다. 작가 한창훈의 네이티브 전라도 사투리 표현이 일단 한 몫 한다. 그리고 남자들만 모여 있는 곳과는 달리 여자들만 모여 있는 곳은 늘 깔깔깔, 까르르르가 넘쳐나기 마련이다. 몰래 공장을 빠져나와 아들내미 학교에 다녀온 후 다른 여인들과 시비가 붙는 일도 있지만 마침 생선을 수송하는 트럭이 공장 옆 논두렁에 거꾸러져 맨손으로 팔뚝만한 우럭을 잡아와 다 같이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재미도 있다. 깔깔깔, 까르르르는 그네들에게만 통하는 정서요. 배출구요. 잠시나마 무저갱을 잊을 수 있는 짜릿함이다. 제일 나이 많은 언니를 망구로 놀리고 시답지 않은 남자 일꾼들과 노골적인 농지거리를 주고받으면서도 깔깔깔, 까르르르. 한창훈은 새콤달콤 알싸하게 잘 버무려진 홍합초무침처럼 여인들과 사투리와 깔깔깔, 까르르르를 섞어낸다. 돌이켜보면 내 어머니도 그러셨던 것 같다. 공장에서 일하고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어머니 음성 뒤로 아줌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그렇게 견뎌냈던 것이다.
한창훈의 글에 완전히 매료됐다. 구슬프지만 재미있고 고되지만 위안이 된다. 인물과 사건을 버무려내는 전라도 사투리는 맛있는 초고추장처럼 찰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김훈과는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준다. 내가 좋아하는 글이다. 이런 작가를 이제야 안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거문도 출신답게 초기작 대부분이 섬과 바다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여러 권 구입했다. 좋아하는 작가 목록 상위에 올려놓으니 부자가 된 듯하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한창이던 1992년 여름인데, 중간 중간 언급한 당시 정치적 상황과 전라도 사람들의 인식. 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은 작품에 더 큰 긴장과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표현한다. 홍합공장 여인들의 삶을 기똥차게 버무려 내는 것처럼 딱 그만큼에서 멈춘다. 그래서 더 임팩트 있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공장의 유일한 총각 문기사와 유일한 젊은 과부 승희네의 로맨스가 어떤 식으로든 영글었으면 싶었는데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기사와 아슬아슬한 로맨스를 이어가던 승희네는 공장에 출근하는 것만이 무저갱에서의 탈출이었다. 집안일은 내팽개친 시어머니와 꼬장꼬장한 시아버지, 참새 새끼마냥 저녁밥만 기다리는 새끼들은 가녀린 승희네의 어깨를 짓누르기만 하는 돌덩어리다. 한 여름 달게 익어가는 포도송이 같은 나날이었는데, 일생 도움이 안 되는 시어머니가 내일부터 공장 나가지 말고 논일 하란다.
“내일부터 공장에 못 가고 농약 친단다. 씨발 것, 독사야 내 발 물어라.” (p.185) 승희네는 과부에서도 며느리에서도 편모에서도, 자기를 둘러싼 무저갱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출렁대는 논물에 발을 담그지만 이내 빼버릴 수밖에 없다. 근데 오히려 딱 이만큼이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좋지 않은 결말에 대한 예상은 뚜렷하고 핑크빛 결말에 대한 기대는 모호하고 흐릿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에 생소한 단어가 많이 나왔다. 나름 책을 읽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단어가 참 많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뜻을 찾아보는 것도 쏠쏠하게 재미있었다. “에멜무지로 앉아” (p.12) “흉내를 내며 얼굴을 빤히 대고는 기롱지거리를 했다.” (p.27) “그예” (p.37) “한갓지게” (p.56) “틉틉한” (p.138) “고시랑거리며” (p.229) 한창훈의 다음 작품을 읽을 생각에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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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소설 <홍합>. 한겨레문학상 하면 첫 번쨰로 떠오르는 소설이 바로 <홍합>이다. 어촌 마을 중년 여성들의 삶을 특유의 입담으로 구수하게 그려내고 있다. 근래 들어(1999년 당시에는 워낙 철학, 문예 비평 이론서를 읽고 있던 터라) 오랫만에 소설 한 권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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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계절
고향이 제주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할머니나 어머니가 해녀냐는 질문이다. 제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모두 수영을 잘 한다고 여기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이 흔히 갖는 선입견이나 편견 중 하나다. 그러나 내가 수영을 못 한다는 사실만큼이나 내 어머니나 할머니가 해녀가 아니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중산간 출신이다. 할아버지도 외할아버지도
모두 농사를 짓고 사셨고, 할아버지는 4.3 제주항쟁 때
돌아가셨다. (아마 ‘지슬’이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엄마의 고향은 성읍인데, 친구를 만나러 그 동네에 들렀던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때
둘 다 열아홉 살이었고, 그렇게 둘은 정한수를 앞에 놓고 간략하게 혼례를 치른채 함께 살게 되었다. 두 분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가진 것 없던 가난한 두 남녀는
그렇게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삼남매가 태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은 대개는 안 좋은 것이다. 엄마가
울고 있거나,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고 있거나, 아버지가 술을
먹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모습들. 그게 내 유년을 점철한 기억들이다.
없으면 없을수록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야할 것 같은데, 사람 살이라는
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싸움이 많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술 먹는 남편들, 매맞는 아내들, 주눅들 아이들. 그게 가난한 동네의 보편적인 풍경이다. 한창훈이 그리는 여수의 가난한 동네도 여기서 크게 다를 게 없다. 남자들은
도박이나 술, 아니면 여자에 빠져 있고 여자들은 무능한 남편 대신 억척스럽게 일을 하면서도 걸핏하면
남편에게 얻어 맞기 일쑤다.
한창훈의 『홍합』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데, 행복한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모두가 불행했던 내 유년 시절과 내가 살던 동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들 그땐 다들 지지리도 가난했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건 우리가 가난했기 때문일까? 그 가난의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그 가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일까?
“순한 계절은 짧고 혹독한 계절은 길다.”(p.236) 내 유년 시절도, 우리가 살아온 시절도 그러했다.
태풍 오던 날
그러다가 한 부분에서 눈과 마음이 멈췄다. 태풍이 오던 날 현장을
지키던 문 기사와 승희댁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에서였다. 승희댁이 문 기사에게 말한다.
“손구락이 영 기요이. 남자 손구락이 이렇게 질어서 어디다가 쓰까.” 문기사는 올챙이처럼 파고 들어오는 손을 힘주어 감았다. “콧구멍 팔 때 좋소.” “콧구멍 파요?” “예.” “콧구멍 파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 침착하고 다정다감하다요.” “별걸 다 아시요.” (p.232)
『홍합』 의 인물들은 모두 여수의 가난한 동네 사람들인데, 유일한
이방인이 ‘문 기사’다. 문
기사는 대학을 나왔으나 어떤 연유로 떠돌다 여수로 흘러들어, 홍합공장에서 트럭을 운전하고 있다. 반면 ‘승희댁’은 젊은
과부다. 이제 겨우 서른 셋이지만, 죽은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공장일에 농사일, 시부모 건사에 병든 시할머니
간호, 두 아이 양육까지 홀로 감당하고 있다.
이런 두 사람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다. 둘은
한 방에 누워 서로의 손을 보고 있다. 남자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
일하지 않은 손이다. 묘사되지는 않았으나 아마 희지 않았을까?
문 기사와 승희댁은 서로에게 마음이 있지만 관계에 진전이 없다. 그건
여자가 과부이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손’의 차이.
“여자 손가락이 이렇게 퉁겁고 짧아서 어디다 쓰까.” “호미질하는 데 쓰지.” “호미질 잘하지라? “처녀 때부터 해온 것이 그것인디.” “메느리가 호미질 잘하믄 집안이 잘된답디다.” “…….” “일을 얼마나 했기에 젊은 나이에 손가락 마디마다 다 굳은살이요?” “그러게 말이요.” (pp.233-234)
결혼 전부터 온갖 농사일에 집안일을 한 여자의 손은 마디가 두껍고 굵고 뭉뚱하다. 마디마다 굳은 살도 박혔다. 노동하는 손, 일하는 손이다. 문 기사와 승희댁의 사이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건 바로 이 ‘손’의 차이 때문이다. 그걸 학력의 차이 혹은 계급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문
기사와 대조되면서 둘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손이다.
이 장면을 읽다가 문득 내 어머니의 손이 떠올랐다.
젊은 부부는 일찌감치 도시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당신들은 못 배웠지만 자식들만큼은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서라도 많이 가르치고 싶었다. 그래서 맏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에 내 부모는 제주 시로 이사를 한다. 어머니는
하숙을 쳤는데, 보통 열 명 정도의 고등학생들이 한 집에 살았다. 어머니는
새벽 같이 일어나 학생들의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고 아침밥을 준비했다. 내 기억 속 어머니의 손은 하루도 물 마를 날이 없었다. 늘 젖어
있었고 퉁퉁 부어 있었다.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의 손, 투박하고
뭉퉁한 손. 그게 내 어머니의 손이다. 나는 그 손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지만, 그 손을 사랑한 적도 없었다. 그 손이 나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는데도 말이다.
시간일 하는 여자들은 몸뻬와 퍼머머리로 모두 닮았다면 할머니들은 머릿수건과 두툼하고 구부러진 손마디가 닮았다. 가늘고 윤기 흐르던 손마디가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거쳐 갔는지 그건 당사자만이 알 거였다. 끊임없이 일을 찾아 써왔던 손 덕분에 시부모 편안하고 남편 든든하고 자식들 쑥쑥 컸을 터라 이제는 쉴 만한
나이인데도 모여들어 그 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확인하고 있었다. (p.130)
뽀글뽀글했던 엄마의 파마 머리. 두툼하고 구부러진 내 어머니의 손.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 땅을 살아온 대부분의 어머니들의 손, 고단하고
힘든 세월을 억척 같이 살아온 대부분의 여성들의 손이 아닐까?
한때 나는 내 긴 손가락, 육체 노동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내 유약한 손이 부끄러웠다. 죄책감까지 들기도 했다. 아마
승희댁의 손을 보는 문 기사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승희댁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그녀의 삶을 동정하고 연민도 하고, 그녀를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뜻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것, 그게 문 기사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내 부모를 바라보면서 내가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승희댁은 문 기사를 질책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올챙이처럼 파고
들어’ 문 기사의 손을 잡았고, 문 기사 역시 그 손을 ‘힘주어 감’는다(p.232).
나는 이 장면이 무척 애틋했다. 비록 서로 다른 손을 가졌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는 것. 이 세상에 ‘희망’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면, 이
맞잡은 두 손 사이에 있는 게 아닐까?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눈앞에 있다
그네들에게 세월이란, 수줍음이 무늬가 되던 몸에서 독기가 새록새록
피어나오다가 끝내 몰염치의 아성으로 굳어지는, 그 독한 시간대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는 부드러운 맨살도 있고 일에 혹독하게 달궈진 끝에 반들반들 닳은 굳은살이 있듯이 사람들 중에도
교양으로 제정신의 꽃을 피우는 부류와 이렇게 딱딱한 살로 차가운 바닥을 버텨내주는 부류가 있었다. (p.10)
내 어머니는 교양으로 제 정신을 꽃 피우는 부류라기보다는 딱딱한 살로 차가운 바닥을 버텨낸 부류다. 독한 시간대를 살아오며 독기와 몰염치가 몸에 배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를 낳고 키워준 내 어머니지만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그런 점들 때문에 일정 선 이상은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니깐 어머니와 나의 사이는 가령 이런 것이다.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 C. Escher)의 ‘손을 그리는 손(Drawing Hands)’이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는지. 이 작품 속엔 그림을 그리는 손이 등장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그림을 그리는 손 역시 그림을 그리는 손에 의해 그려지는 그림이다. 즉, 이 작품 속 등장하는 두 개의 손은 서로가 서로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렇지는 않은지. 연인이나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지금의 내 손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 결과물로서의
현재의 내 손 역시 실재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그 사람의
현재의 손을 결정 짓는다. 그 관계가 거듭 거듭 계속된다.
그러니까 내가 한 때 부끄럽게 생각했던 노동하지 않은 매끄럽고 깨끗한 손이 어머니의 수고와 헌신의 대가였듯, 어머니의 뭉퉁하고 마디 굵은 손 역시 나의 편안하고 순탄한 지금의 삶의 대가이다. 두 손은 서로 맞잡고 있지도 않고, 가까이는 있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가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고,
현재에도 미치고 있다. 그게 이 두 손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문 기사와 승희댁이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손 사이에도 어떤
관계의 변화내지는 진전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반복되는 관계가
평행선처럼 유지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이 중 한 손이 ‘올챙이처럼
파고 들고’, 나머지 한 손이 그 손을 ‘힘주어 감’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눈앞에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했거나 일부러
외면하고 있을 뿐. 유일하게 필요한 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내 눈 앞에 현존하는 그 손을 향해 내 손을 뻗을 용기이다.
우리 어머니도 제주도 여인이지만, 제주도
여인들은 대체로 강건해요.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생존문제를 여성들이 해결하는 풍토가 있어서 그런지, 억척스럽고 일을 잘해요. 참 고달픈 삶이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제주도 여인네들뿐만 아니라 그 현장의 모든 민중이 고달프게 살았던 것 같아요.
도법스님이 어떤 인터뷰에서 하셨다는 말씀인데, 나는 이 말에서 내 어머니와 『홍합』속 숱한 여인들을 보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민중’이라고 말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인 것이다.
이제라도 억척스럽고 고달팠던 그들의 삶을 향해 손을 내밀고 싶다. 꽉 깍지 껴 힘주어 감고 싶다.
* 본 리뷰의 제목과 소제목은 『홍합』의 9, 10, 11장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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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며 언젠가 포장마차에서 먹던 시원하면서도 쫄깃한 홍합이 먹고 싶어졌다. 별다른 조리나 양념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의 맛으로도 몇그릇이라도 먹을수 있는 홍합처럼 이 책은 마지막 장을 덮을때까지 시원하면서도 눈물겨운 쫄깃하도록 토속적인 그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수의 한 홍합공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작가가 한때 몸담았던 사회 경험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질박한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모습이 한과 설움으로 녹아있는 작품으로 무수히 많은 사투리들이 더 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도시인들에게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힘들고 어려운 하루 하루의 생활이지만 나름데로 서로를 위해주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 옆집의 중년여인들의 모습을 숨김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생명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삶의 매순간이 밑바닥을 헤메이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그들의 힘을 느끼게 한다. 사는것이 그렇게 사는것도 사는것이라면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너무 행복한 울타리 속에 둘려쌓여 있는것은 아닐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시원한 홍합국물에 술한잔 하고 싶다. 빗방울이 흩날리는 이 저녁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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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한 후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그럭저럭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하는 내게 온갖 풍파를 겪으며 거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감히 추측하기 힘든 그 무엇처럼 느껴지곤 한다. 때론 현실의 괴로움을 희석해보고자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삶이나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기구한 운명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이들을 떠올리며 가끔씩 난 새로운 힘을 얻기도 했다. 하긴, 거칠고 험한 세상살이 어디에 쉬운 곳이 있겠는가? 아무리 평등화된 사회라 주장해도 우리네 세상은 계급화 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고 또 하층계급으로 내려갈수록 삶이 퍽퍽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고로 제 자식들만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계층에서 살게 하고자 무한경쟁 속으로 내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린 하릴없이 그 끝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한경쟁의 결말을 향해 들쥐처럼 몰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면 안 되는 걸까? 이런 소리를 떠들어댔다가는 ‘순진하고 세상물정 모른다.’는 핀잔만 잔뜩 얻어들을 것 같다.
거문도가 고향인 작가 한창훈 씨는 대학 졸업 후 여러 도시를 떠돌며 인생의 온갖 신산한 맛을 본 뒤 고향마을에 정착하여 바다와 섬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헤엄조차 칠 줄 모르는 내게 거친 뱃사람의 삶은 매우 낯설고 투박하고 힘겨워 보였다. 제 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홍합’은 여수의 홍합 공장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을 담은 역작이다.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차로 실어온 홍합을 까고 삶고 씻고 얼려 포장하는 막노동의 현장에서, 그들만의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애틋한 노동의 땀방울을 흘리는 이들의 애환을 꼼꼼히 관찰한다.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작업의 특성상 주변지역 아낙네들이 모여든다. ‘홍합’ 속 여인네들의 삶은 하나같이 고달프고 짠하다. 대체적으로 무능한 남편들을 대신해 집안을 이끌어 가는 이들은 삶의 비루함을 걸쭉하면서도 토속적인 입담으로 풀며 힘든 공장 일을 견뎌낸다. 그들이 뱉어내는 말들은 이상하리만큼 정감이 가고 흐뭇하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에 가서 욕먹으며 좋아라하는 사람들이 찾는 것처럼, 홍합공장 아줌마들의 거친 말투 속엔 따스한 정감이 젖어있음이다. 여기엔 어느 샌가 잃어버린 우리 공동체의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 ‘홍합’속의 공장도 세월의 덮개 속으로 사라졌을 것 같다. 딱 봐도 인생의 이력과 현재의 상황이 온몸에 기록되어 있는 허접한 남편들과는 달리, 이 아낙네들의 생명력과 생활력은 강인하고 뜨겁다. 내게 있어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남편을 교통사고로 졸지에 잃은 아낙네가 정신을 차리고 냉정한 현실로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전율하며 굵은 눈물방울이 책 위로 툭 떨어졌었다. 강렬한 카타르시스였다. 비슷한 개인적인 경험이 떠올라서였는지 모르겠다. 자질구레한 묘사 없이도 머릿속에 이렇게나 선명하게 이미지를 형상화시킬 수 있다는 게 자못 놀라웠다.
힘든 삶을 투박하고 정겨운 사투리로 묘사해내는 작가의 내공을 통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홍합’에서 서정적인 필체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남성적인 굵은 터치임에도 미세한 감정 떨림을 자주 일으키는 한창훈 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필력은 자못 신기하다. 내가 읽어왔던 책 중 베스트 10안에 들어가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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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소설은 유쾌하다. 아무리 허섭쓰레기같은 삶이라 할지라도 눈물겨운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뒷골목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만큼 따뜻한 이가 또 있을까. 물론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나 <가던새 본다="">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제목에서부터 대중의 취향을 고려한 듯한, 다시 말한다면 기획출판의 느낌이 조금 든다. 하지만 누가 무어라 한들 한창훈의 따뜻함을 지루하다 할 수 있을까. 그의 해학은 즐겁고 그의 풍자는 따끔스럽다.
바닷마을 홍합가공공장의 아낙들의 입을 빌려 작가는 풍성한 이야기를 하고 그 풍성한 이야기에 빠져 시간이 무색하다.
끈끈한 사투리와 비린내나는 삽화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남도 출신이 아님을 비관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사투리.
그 사투리가 빛이 남은 삽화와 잘 어우러지는 인간냄새가 있었기 때문일게다. 그의 책은, (그의 소설, 이라 하는 것보다 그의 책, 이라 함이 더 어울린다. 그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짧아도 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므로) 따뜻하다. 그리하여 아름답다. [인상깊은구절] 밤바다는 아름다웠다. 말리 돌산대교 불빛은 수면을 타고 바로 눈 앞까지 미끄러져 와 있다. 저 작은 불빛은 어둠을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모두 그 컴컴한 어둠 속에 묻히고 나서야 제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항만에 묶여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은 하루동안의 노동을 끝낸 놈이나 여러 날째 마냥 쉬고 있는 놈이나 사이좋게 옆구리를 대고 잔물결에 출렁거리고 있다.가던새>바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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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합>은 홍합공장에서 일하는 삶들의 면면을 그들의 언어로 풀어낸 소설이다. 일단, 인물 묘사가 뛰어나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어떠한 부류에 대한 묘사도 그렇다. 독한 세월을 보낸 여인네들도 그렇지만, 공장 출신의 처녀들에 대한 설명이 더 와닿았다. 나와 더 가까운 나이대이기도 하지만, 내가 바로 그런 부류에 가까워서인 이유가 크다. '그래서 공장 출신의 처녀들은, 이 짓보다는 다음이 더 좋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빨리 연애하고 결혼하고 집 사고 아이 낳고 하는, 세상을 빨리 살아버리려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을 빨리 늙는 부류와 늦게 늙는 부류로 나눌 만했다.' 그런데 늙으나 젊으나, 삶을 견디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계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내용인데 자꾸 시선이 다음 문장을 쫓는 것은,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한 치의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 인간의 삶이 느껴지고 만져지기 때문이다. '공장에서는 날고 기는 이들이지만 버스에 올라타면 궁색스럽고 가년스런 몰골이 그대로 살아'나듯,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도 어떤 모습이 선연히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이들은 주로 여성들이다. 홍합공장에 다니며 제 몫의 밥벌이를 하고도 모자라 집안 살림을 꾸려내고 자식을 건사하고 노부모를 봉양하며, 남편에게까지 수시로 두드려맞는 여자들이다. 그들은 '간간히 자신들도 눈가에 푸른 꽃을 달고 오면서도 누구 하나 그 몰골로 오면 천하에 못 볼 꼴 봤다는 듯' 함께 분노한다. 물론 그네들끼리도 갈등하고 너죽고 나죽자 하기도 한다. 말그대로 인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참으로 크게 보이는 것은, '붕어빵이 축 쳐져서 불쌍하게 보인다' 며 별 것 아닌 사물에도 마음을 주고, 한바탕 웃어내기 때문이다. 지난한 삶에 질리고 지쳐 '독사야 내 발 물어라' 고 풀이 우거진 샘가에 맨발을 내놓기도 하면서도, 그래도 살아내기 때문이다. 이들이 겪는 삶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공장장은 직책이 반장보다 높고 문기사는 대학씩이나 다니면서 가나다라 해봤다지만 그러한 파탄에는 묘책이 없었다. 그들은 어렸고, 사람은 지혜로 늙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질펀한 사투리 섞인 글을 읽어본다. 작가는 5.18을 광주에서 겪은 후 대학에 갔지만 3학기만에 때려치고, 각종 일을 하며 치열하게 살았단다. 홍합공장에서도 일했다 하니, 그 때의 경험을 녹여냈나보다. 각자가 겪어내는 삶의 무게에 새삼 숙연해진다. 홍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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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의 냄새와 매력에 빠져 허우적댈 때, 한창훈 작가의 책을 읽으면 대리만족이 쉽다. 뼛속까지 '바닷사람'인 그의 책들에는 바닷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장편소설 『홍합』은 아름답고 혹독한 바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두진 않는다. 오히려 바다는 배경으로 존재한 채, 그보다 더 좁은, 구석구석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좁은 장소로 선택한 곳은 '홍합 공장'이다. 차에서 실어온 수많은 홍합을 까고, 삶고, 깨끗이 씻어 얼려 포장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작가는 땀 흘리는 그들의 노동을 본다.
세심한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일의 특성상, 홍합 공장에는 많은 아낙네가 모여든다. 자신의 이름 대신, 자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의 삶은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적나라하게 표현된 수다와 우스갯소리 속에 녹아든다. 그 속을 보면 어느 하나 순탄한 인생들이 없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버림받고, 술과 노름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예삿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서럽고 서러운 인생사를 수다로 풀어낸다. 제각기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 인생사를 구구절절 풀어내고, 분노하여 서로 욕을 뱉어주고, 복수 해주겠다며 소매 걷어붙인다는 이들의 수다는 '어찌 됐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겠다. 삶의 동력, 웃음 그리고 해학. 작가는 그들의 녹록지 않은 인생을 그저 구슬프게 읊지 않고, 마치 판소리처럼 신명 나고 능청스럽게 전해준다.
소설 『홍합』은 분명 서정적인 언어의 소설은 아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촉촉하게 달궈진 닳은 굳은살' 같은 소설에 가깝다. 감정을 다독이기보다는, 퍽퍽 두드리거나 긁어 없애버리는 식이다. 하지만 이 거친 '굳은살' 같은 소설은 우리네 삶을 품고 있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다. |
![]()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닻'이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구수한 입말과 해학적인 문체로 서민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을 주로 써왔다. 농어촌과 소도시 하층민들의 밑바닥 삶을 진솔하게, 그리고 해학적으로 그려내는 작가. 오늘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소설가 한창훈에 대한 소개글이다. 이 작가를 처음 알게된건 그 친구놈이 어느 동네의 작은 서점을 지나치지 못하고 구입한 한권의 책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는 술한잔을 하고난 다음이었기에.. 어떤 책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야. 라는 그놈의 말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건 작가의 이름뿐이었다. 꽤 오래전 일인데, 이제서야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만나본다. 한창훈.
1998년 제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한창훈 작가의 장편소설 '홍합'은 여수의 한 홍합공장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건강 한 생명력을 토속적인 입담과 해학적인 문체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사내들을 위해 그들은 홍합공장으로 밭으로 뛰어다닙니다. 때로는 부부싸움도 걸판지게 하고 때로는 아주 '보잘것없는 일' 때문에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슬픔을, 고통을 읏음으로 승화시키는 강인한 힘이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심사위원이 말하듯 '홍합'은 여간 재미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포장식품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푸성귀의 자극을 잊지 못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보통 소설을 읽을때면 등장인물이나 이야기에의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야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 온전히 내 감정으로 만들어진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서 즐거워지는 작품은 꽤나 드물다. 이 작품은 그런 드문 작품 가운데 하나다.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한번쯤 그들의 일상을 TV를 통해서 본 적도 없고, 딱히 시골이란 곳도 없는 나에게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은 작품 속의 배경.. 어쩌면 단 하나의 공감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네들 삶의 이야기는 이상하리만큼 즐겁고 건강한 웃음을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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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네들의 삶이 바로 어디에선가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이라는 걸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잘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일거다. 씨발놈의 인종이면서도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언젠가 꼭 말도 없이 가불 것 같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서도 그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라며 살아가는 사람들.. 경험하지 못해본 일상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삶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이 작품이 매력적이었던 또하나의 이유는 바로 사투리다. 전라남도 여수. 하지만 지역의 이동이 훨씬 쉬워진 지금은 그 지역에 산다고 전부 같은 사투리를 쓰는건 아닐게다. 경상도 사투리에 남편과 시댁 덕분에 몸에 익어 가는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기도 한 이들의 대화를 볼때면 언어의 다채로움에 놀랍기까지 하다. 그네들의 사투리는 그네들의 삶을 더욱 깊이 있게 표현하기도 하고, 삶에서 겪어내야 하는 슬픔을 조금은 투박한 웃음과 함께 토해내기도 한다. 노동의 고통이나 남편의 폭력은 그들에게 아픔이고 슬픔이 아니었다. 그네들의 대화에 섞인 사투리로 구성진 삶의 한 자락에 불과한 '사는 것'일 뿐이었다.
의외의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내가 이런 작품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읽을 수도 있구나.. 책의 뒷표지에 담겨있던 김윤식 문학평론가의 짤막한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공장이되 홍합공장이며, 노동자이되 중년여인들이며, 삶의 현장이되 건강미 넘치는 곳. 우리를 즐겁게 하는 장소로서의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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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언어, 도시적인 감수성, 깔끔한 인물묘사,
이런 것들은 절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한 번에 듣기에도 민망한 전라도 사투리, 그것도 바닷가 특유의 투박하다 못해 육두문자에 가까운 사투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정말, 거시기하게 만든다.
참 진한 소설이다. 절구통처럼 강인한 여인들, 그 누구도 이겨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입담은 그녀들에게 주어진 질팍한 삶을 이겨 내는 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들의 남자들은 어떠한가 마시고 또 마시고 그리고 습관적인 폭력이 그들의 임무인 것처럼, 한마디로 짜잔한 남자들이 징그럽기만 하다.
작가의 실험정신에 가까운 체험담이 들어가 있는 듯,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의 조각들을 무겁지 않게 풀어가는 진실된 글쓰기에 마음이 가는 소설이다.
지방색이 짙어서 충분히 평가받을 수 있는 작품이었나보다 깍듯한 표현 하나 찾아 볼 수 없지만 지릿한 인간사를 그냥 그대로, 아무런 필터링없이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