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 큉은 그의 저서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교회를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교회의 본질이 으레 비본질적인 것에 의해 왜곡되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적으로 교회에 대한 신뢰를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한스 큉의 대답은 교회의 부정적 상태에 대한 현실적인 인정과 더불어 조심스러운 긍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립 얀시는 어려서부터 조지아주의 백인 보수교회에서 자라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조지아주는 흑인의 인권을 위해 비폭력 투쟁을 전개했던 마틴 루터 킹의 활동이 시작된 곳이다. 필립 얀시는 나이를 먹어가며, 세상을 알게 되며, 자신이 지랐던 교회의 편견과 무지와 왜곡과 죄악의 모습을 발견한다.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 인종 차별에 대한 종교적 옹호, 거룩한 예전 뒤에 숨은 사악한 부조리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 필립 얀시는 청년의 시기에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필립 얀시는 LaSalle Street Church에 출석하면서 교회에 대한 희망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이후로 교회의 연약함을 붙들고, 교회가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깨우치는 "교회 옹호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필립 얀시가 겪었던 교회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회 안에 있는 인간들의 어두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필립 얀시가 경험한 교회 안에 있는 인간들의 변화를 향한 빛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교회 안의 인간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교회 안의 인간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교회 안의 인간이 너무나도 연약하고, 교회 안의 인간이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고 있지 못하고, 교회 안의 인간이 참으로 위선적이고, 교회 안의 인간이 교회 밖의 인간보다 조금도 나아보이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하더라도, 교회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곡을 연주하는 솜씨가 너무나도 엉망이고 듣기가 괴롭다 하더라도, "비록 작곡가가 애초에 구상한 음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지만, 불완전한 그 음이나마 세상에 들려줄 사람들은 우리(교회) 외에는 없"기 때문에.
미션 스쿨의 교목실장이었던 사람이 쓴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신했다』가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르고, 연일 신문에 대형교회의 비리와 분쟁을 다루는 시대에, 과연 누가 교회를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자격이 있을 것인가? 불신자들과 교회혐오주의자들의 돌에 맞을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변호하는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냥 조용히, 이웃들 보지 않게 교회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기독교인으로서 대단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게다. 하지만 필립 얀시는 교회를 끝까지 옹호한다. 누가 돌을 던지더라도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께서" 세우신 공동체이되, 예수께서 "유일하게" 세우신 공동체이며, 예수께서 유일하게 "당신의 명령을 수행하라고" 세우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를 포기한다면, 예수께서 주신 명령을 수행할 공동체가 이 땅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 둘 있는데, 하나는 결혼을 하는 것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는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은 도무지 혼자 수행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필립 얀시는 돌맞을 각오를 하고 교회옹호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교회를 포기하는 것은 명령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그래서 필립 얀시는 이 책을 통해 자신처럼 교회를 옹호하는 대열에 우리도 합류하라고 속삭이고 있다. 선동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애정과 아픈 마음을 가지고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결정했다. 교회를 옹호하는 필립 얀시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자. 이 옹호는 "무작정 편들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믿음과 희망"은 버리지 말자는 뜻이다. [인상깊은구절]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라고 월터 윙크는 말한다. |
| 쓰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라 은혜를 공유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설교식 보다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를 독자들이 알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마음에 더 와 닿았습니다. 비록 책의 두께는 얇지만 아주 두꺼운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제가 모이는 모임에서 다른 사람을 향하여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성향의 한 형제를 향하여 마음 깊이 용납이 되질 않았는데, 이 책의 내용 중 저자가 다녔던 러셀 스트리트 교회의 아돌프스 청년이야기를 읽고 하나님께 용서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교회(모임)가 모든 사람들을 수용하고 용납하는 모임이 되어야 함을 절감하였습니다. 갯벌이 모든 강물의 찌끼를 받아들이듯이. 이 내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후반부로 갈 수록 더 깊어져서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가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는 사역자들이 격기 쉬운 감정적 고갈과 상처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자신의 아내를 지켜 보면서, 다른 사역자들의 조언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가르쳐 줍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라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 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자신을 내어버리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그것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은혜가운데 용납하고 가족과 같이 대하며 도와줄 수 있을 지를 가르쳐 준 아주 귀한 책이었습니다. |
|
필립 얀시의 책이다. 최근에 국내에 가장 많이 소개 된 저자중 한명이다.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받은 율법주의적인 상처로 인해 잠시 교회를 떠난 아픔이 있었고 그 아픔이 치유 되면서 교회가 과연 이 변화 무쌍한 사회에 어떻게,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느낀점을 서술한다. 이책의 추천서를 쓴 유진 피터슨은 많은 교인들이 종교생활에 익숙해 있고 영적인 삶에는 그렇게 신경을 안쓴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 생활이란, 적당히 세상을 즐기면서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일만큼은 부담스러워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유진은 우리 믿는 자의 태도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에 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참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이책은 3장으로 구성 되어 있다. 제1장은 왜 교회를 붙들고 고민 하는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교회는 직접 다니지는 않지만 버팀벽처럼 교회 밖에서 교회를 지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요즘에는 교회는 안다니면서 심정적인 교인이 의외로 많다고 저자는 말한다.이들중 상당수는 교회의 위선적인 행동으로 교회를 떠난다고 말하지만 교회의 위선은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판단 하실수 있다.
예배에 있어서도 "우리는 오늘 예배에서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 질문하며 나서서는 안되고, 도리어 "나의 예배로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라고 자문해야 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에배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인들은 예배의 형식에만 몰두함으로 중요한 핵심인 희생과 순종과 감사라는 내적인 태도를 잊었다. 그후 저자는 시카고의 한교회에 다니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과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가족의 모임인 교회는 일치를 추구하되 획일이 아니며, 다양성을 추구하되 분열이 아닌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남"을 깨닫게 된다. 즉 나와 같지 않은 사람이 모인 공동체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똑같은 죄인이기때문이다. 제2장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어떤 비유로 설명할까 하다가 최종적으로 우리의 몸에 비유했다. 그어떤 비유보다 가장 최적의 비유였다. 서로를 돌볼수 밖에 없는 몸이기에... 저자는 교회 밖의 모임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듣는다. 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나 복음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강요하지 않는다. 교회란 우리가 우리의 고통을 들고 오는 곳이다.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의 쪼개진 몸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다. 그러기에 겸손한자들이 와서 높임을 받는 곳, 그토록 작으므로 높은 자들이 낮고 낮아져야 들어올수 있는곳이다. 결국 우리인간들이란 하나님께 끝없는 고통을 안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따뜻한 관계를 나누신다. 우리 역시 이웃에게 이런 관계를 유지해야 될것이다. 제3장 벽을 넘어서 사역에서 섬세함이란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마음의 결을 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먹는 것이다. 통독전 동독에서 장애아들에 대한 일반인드이 헌신을 한후 설문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그 장애자를 통해 정상인들이 더 많은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결과가 나왔다. 즉 그아이들의 고통은 다른 사람의 삶에서 세련된 교육 체계가 가르쳐 주지 못한 교훈을 배웠던것이다.
교회는 고통과 어려움을 회피하면 교회는 그 자체로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리는 죽고자 할때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섬김으로서 가장 잘 죽을수 있다. 우리가 점검 해야 될 사항
1.나는 사람들 자체를 염려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고통에 더 노심초사하지 않는가? 페루 선교사들에서 그들에게 제일 위험한 두가지 태도는죄의식과 구원 열망이라고 한다.예수님도 그분 생애에 온 세상을 회개 시키겠다고 나서지 않으셨음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겸손과 감사의 영혼을 통해서만 최상으로 일하신다.
2나는 내가 하는 일을 귀하게 보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가?
3.나는 삶을 하나님과 혼동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큰 고통을 겪은 형제의 말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공평하므로 삶도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이 아닙니다.삶의 상황에 맞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항구적인 관계가 못됩니다. 우리는 그 모든 삶의 불공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나? 사역은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따라서 좋은 사역자란 늘 하나님 앞에서 보고한다. 우리는 혼자 세상의 모든짐을 지고 번민할 수는 없다. 예수님도 그의 짐을 하나님께 내려 놓았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내려 놓아야 한다. 교회는 정확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인간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사명에 실패하고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이것이 하나님의 모험이다. 교회란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가는 그 무엇이다. 완벽을 교회에 기대하면 실망 뿐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함게하는 모험의 시작이다.
이책을 통해 예배와 교회내의 어려움 등이 머리를 스친다. 이런 약한 존재들과 함께 모험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 모험이 하나님께 결코 실망이 아닌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 [인상깊은구절] 많은 교인들이 종교생활에 익숙해 있고 영적인 삶에는 그렇게 신경을 안쓴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종교 생활이란, 적당히 세상을 즐기면서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일만큼은 부담스러워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유진은 우리 믿는 자의 태도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에 임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참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
| 필립 얀시의 책은 이걸로 네권째인 것 같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거 지금까지 읽은 필립얀시 책 중에 제일 얇고, 제일 금방 읽었다 아. 사실 교회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 때문에 방황하던 젋은날의 그의 모습이 꼭 나 같아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디 한 번 보세, 하면서 비평가처럼 앉아있는 모습 교회 사람의 위선을 비판하며 제3자 효과를 마음에 콕콕 박으며 멀찍이 떨어졌던 모습. 그럼에도 교회가 필요한 이유와,교회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잘 썼다 이 사람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쉽게, 호소력있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 밖에 없게... 대략 부럽지 뭐 이런 건 |
| 교회, 그 얼마나 사랑스러우면서도 고민이 되는 이름인지 모르겠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저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교회로부터 어떤 완벽한 그림을 찾는 것 같다. 완벽한 교회...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완벽할 수 없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단지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교회와 그것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저자는 그것을 깨닫고, 보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교회를 보면서, 또한 저자 자신이 그런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교회의 지체의 일부가 되어 교회를 위해 노력하면서 새로운 안식을 취한 듯 하다. 우리는 언제쯤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 주기만을 바라면 기다리는 자세를 포기할 수 있을까. |
|
필립 얀시의 글쓰기는 평균적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들이 품음직한 의심과 갈등, 심지어는 불신에 대한 적나라하고도 정직한 드러내기에서 출발한다. 이 작은 책자도 '교회'라는 주제에 대한 저자의 갈등과 회의를 풀어나가는 방법으로 서술한다. 얀시는 교회라는 담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적절한 질문들을 던진다. 수도 없이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해 나간다. 그는 분명 인생에 있어서 질문의 중요성을 아는 자일 것이다. 원제도 질문이지 않나! Church : why bother?
필립 얀시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고통의 문제, 하나님께 대한 실망 같은 신앙 주변부의 주제들로 나의 저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예수, 은혜, 구약, 교회에 대한 책들을 통해 좀더 중심 문제에 다가가고 있다."
이 책도 얀시의 이처럼 말한 의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일 것이다.
크게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왜 교회를 붙들고 번민하는가?"이다. 얀시가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는 다양성을 무시하는 율법적이고 위선적인 교회였다(물론 얀시의 눈에 그런 것이지, 나는 그 교회를 모른다). 그 교회를 떠나면서 얀시는 위선의 껍질 뿐 아니라 신앙이라는 몸통까지 내던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는 질문한다. '왜 교회를 붙들고 고민하는가? 기독교인에게 교회는 진정 필요한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은 내게는 무의미하게 들렸다. 한 번도 교회의 무용론을 주장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병원과 같지 않나! 아프거나,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 않나! 불완전함은 당연해' 라는 생각을 『차마 신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라는 책에서 배웠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불완전함에서 안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큰 오류다. 완전하지 못한 것이 존재하지 말라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한 완전한 인간도 없으니까~
하지만, 교회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실제로 교회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얀시의 이 질문과 답변들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얀시는 자신이 교회 회의론자에서 옹호론자로 바뀌게 된 것은 [네 가지의 보는 방식]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 주위, 밖, 그리고 안을 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위를 보는 것은 교회,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예배에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은 "나의 예배로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주위를 보는 것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아들이는 한없이 넓은 다양성의 폭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밖을 보는 것은 교회의 선교가 내 이웃의 절박함에 손을 내미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같은 거리를 오가는 지역공동체 사람들에게 다가서고자 하는 교회의 노력이다.
마지막으로 안을 보는 것은 나를 돌아보는 것! 내게서 싸늘한 비평과 경쟁의 독을 제거하시고, 대신 은혜를 채워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얀시는 그렇게 교회에 와서, 위를 보고 주위를 보고 밖을 보고 안을 본다. 그렇게 그는 교회와의 화해를 위한 고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의심한 후에 그의 믿음과 헌신은 더욱 공고해 지리라. 비 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교회 후배들에게 한 번씩 회의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말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에 세뇌당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길 갈망하라고 말한다. 얀시는 늘 이렇게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다져나가는 것이다. 그가 누군가의 말을 그저 믿는 것은 없다.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지금 또 무언가를 두고 고민하고 회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장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교회'를 열두 가지 비유를 들어 교회의 참모습을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인 3장은 가난하고 소외 받은 자를 위해 봉사하는 사역자들의 고통과 그에 대한 대처법을 다루고 있다. 3장은 다소 책의 전체 주제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한 가지 비유를 함으로 교회의 존재 이유를 정리하고 마친다. 실력 없는 고등학교 합주단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데, 한 사람이 질문을 한다.
"왜 저들을 괴롭혀 형편없는 음악을 연주하게 하십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습니다. 객석에 앉은 청중들 중에는 그 학생들의 연주를 통해서야 베토벤의 위대한 9번 교향곡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청중들이 그래도 베토벤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길은 학생들의 그 연주뿐입니다."
작곡가가 애초에 구성한 음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실력 없는 학생 연주단.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에는 결단코 이를 수 없는 교회와 나. 불완전하지만 그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들이 우리(교회)밖에는 없다. 우리와 하나님이 갖는 괴리감은 교향곡 원래의 음과 학생 연주가 갖는 괴리감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하나님을 이렇게 불완전하게 전한다는 사실에 노여워지는 이 순간, 진정 그 분을 전하는 자는 우리 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해괴한(?) 사실을 재빨리 인정한 후, 좀 더 연습하고 노력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하나님! 나로 주님을 온전히 전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인상깊은구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습니다. 객석에 앉은 청중들 중에는 그 학생들의 연주를 통해서야 베토벤의 위대한 9번 교향곡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청중들이 그래도 베토벤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길은 학생들의 그 연주뿐입니다." |
|
존 스토트는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의 첫 머리에서 서구 사회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한 현상을 언급한다. "Hostile to the church, friendly to Jesus Christ!" 60년대 서구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을 잘 드러낸 표어와 같은 그 어구를 시대와 장소가 다른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 적용해 보더라도, 역시 답은 동일하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좀더 정직히 말하자면, 그리스도 이후 인류 역사 2,000년 동안의 기독교 교회가 위의 평가에서 벗어난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면 이해할 수 있다. 나도 때로는 교회가 싫다. 사실 교회는 그리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언론에서 문제화하는 그런 예들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설혹 그러한 문제가 가시적으로 크게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정직한 답을 양심으로 하건대 교회는 그리 아름다운 곳은 아니다. 그래도 교회가 일반 다른 조직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일보 양보한 자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일보 양보한 이 대답에도 자신이 없다. 요즘 흔히들 이야기하고 현대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병폐라고들 말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덫에 교회만큼 심각하게 걸려 있는 조직이 또 있을까.
전도를 하면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십중팔구 교회에 대한 비방을 한다. 전도자들은 궁색한 변명을 한다.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를 보자.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이지 교회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그 말은 물론 맞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궁색하고, 부끄럽다.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회를 변호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교회의 사역자로서, 교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 그러나, 때로 나 자신조차도 교회와 상관없이 단지 그리스도인일수만은 없을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유럽과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인 아닌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점점 더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를 떠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최근 나는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시각을 통해서 이 땅에 그토록 불완전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일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발견했다. 그것은 존 스토트가 "교회의 양면적 모호성"이라고 제목을 붙였던 한 설교(2000년 케직 사경회)에서였다. 당시 뿐 아니라 이후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보다도 더 비참한 상황(근친상간, 세상 법정에서의 소송, 우상숭배, 분열, 은사 논쟁, 이단 등)에 직면해 있던 고린도의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이 그들을 하나님의 집이요 밭이요, 성전이요, 하나님의 몸이요! 라고 말한 그 장면을 생각해 본다. 바울은 그 상황이 너무나도 비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집이요, 몸이요, 성전으로 단호히 인정했다. 그들은 "아직 더 되어야 할" 교회였지만, 그럼에도 "이미 된" 교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충격적인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얀시도 말한 것처럼, 왜 하나님은 세계의 복음화를 이런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셨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호령 한 번으로, 손짓 한 번으로, 한 번의 마음먹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든지 아니하시든지 결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은 이토록 섣부르고, 어설픈 모험을 하시는 것일까?
얀시가 여러 번의 성경 통독을 통해 발견한 것처럼, 교회는 하나의 정점, 곧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신 역사의 궁극적 실현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새로운 표석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몸의 한 지체로 우리를 부르셨고, 각 지체된 우리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몸을 이룬다.
실로 이것은 모험이다. 우리는 현실상의 교회의 문제들을 늘상 본다. 그의 불안하고 나약함을 늘상 목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성경 전체에 그토록 명확하게 자주 기록된 하나님의 그 의도를 보면서 한숨 어린 감사를 돌릴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은 내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체인 내가 몸의 구성요소인 것처럼, 한 교회의 구성 요소인 나 자신이 하나님의 그런 의도를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하고 불안한 존재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를 통해 그리스도를 발견하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사랑하시고, 인정하시고 내게 하나님은 세상을 맡기셨다!
얀시는 말한다. "그렇다. 교회는 정확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인간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사명에 실패하고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험이다. 완벽을 기대하고 교회에 들어가는 자는 이 모험의 본질도, 인간 조건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한다. 연애의 낭만적 감정이란 결국 어떤 깨달음으로 귀착하는가? 결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비로소 사랑을 만들어 가라는 노력이라는 인식 아닌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란 비로소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비록 작곡가가 애초에 구상한 음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겠지만, 불완전한 그 음이나마 세상에 들려줄 사람들은 우리 외에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험의 궁극적 결과를 알고 계시다. 이것이 교회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모험의 실체인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그렇다. 교회는 정확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 인간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사명에 실패하고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이 하나님의 모험이다. 완벽을 기대하고 교회에 들어가는 자는 이 모험의 본질도, 인간 조건의 본질도 이해하지 못한다. 연애의 낭만적 감정이란 결국 어떤 깨달음으로 귀착하는가? 결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비로소 사랑을 만들어 가라는 노력이라는 인식 아닌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란 비로소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비록 작곡가가 애초에 구상한 음에는 결코 이르지 못하겠지만, 불완전한 그 음이나마 세상에 들려줄 사람들은 우리 외에는 없다." |
|
기독교란 철학이나 내향성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전적으로 공동체라는 기반 위에 서는 것이 기독교다.
![]()
무려 10년이 넘어 책장에 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나눔과 이야기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나는 어떤 자세와 태도로 신앙을 이어가야 할까,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오래전 읽었던 이 책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때도 교회는 분쟁과 시비와 소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이제 막 마음을 부으려는 찰나에 그곳을 나와, 지금의 교회로까지 오게 된 사실이 그때의 아픔이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거 같다. 사뭇 어린 시절의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과 지금의 내용은 내게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찾으려는 의미와 이야기에만 중점이 되어있었다면 이번에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 현재의 교회와 대입하며 입체적으로 책을 대할 수 있어 좋았다. 17살의 내가 읽었던 어린 왕자와 37살의 내가 읽은 어린 왕자가 다르듯.
저자는 고린도 교회를 비교하면 그때의 교회 혼란과 지금의 교회의 혼란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끝없이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생각하고 비유하며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너희는 교회고 밭이고 집이고 성전이라 -
현재 우리의 교회도 그런 모습이 가득하지 않을까, 그러니 교회를 향해 세상이 손가락질을 한다해도 할 말이 없다. 우리가 교회를 향한 고민이, 번민이 가치가 있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교회에 오는 많은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와 같은 사람들이 한 곳에 불러모여 앉았으니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나누고 서로를 돌보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교회의 기능적 역할에 대해..., 우리끼리의 나눔과 공급도 좋지만, 낮은 곳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주는 건 어떨까. 물론 지금도 선교지로의 봉사와 소외계층을 돕는 일들이 있기는 하지만 받는 이의 입장을 헤아려보고 서로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해 준다면..
<눈물로 깊어지는 마음> 저자의 다른 책 #아내안에하나님이없다 에서도 알 수 있듯, 어쩔 수 없이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거나 고통사고를 통해 사랑하는 이를 잃는 일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치매에 걸린 노인을 두고 '이 정신 놓친 노인이나 백치 아이에게서 우리는 과연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정말로, 내가 자주 하는 질문이다.) '이들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들의 삶에도 의미가 있는가?' 중증의 정신지체아들을 위해 헌신한 소아과 의사가 묻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대답을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설문지를 통해 돌려 그 답을 찾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세련된 교육체계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교훈을 거기 와서야 배우는 자원봉사자들의 삶에서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같은 고민을 갖고 있다. 그들의 교훈을 위해 그들이 장애를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되지만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치유자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갖고 있는 왼발의 염증에 대한 예를 통해 이 문제를 보다 객관적이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삶이 공평하므로 삶도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이 옳지 못함을. 우리의 상황에 흔들림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형성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 하나님은 어떤 교회가 되길 바라실까... 물론 사랑이 넘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만 그런 추상적인 개념말고 우리가 매주마다 가서 예배드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맛난것도 먹는 그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 걸까.....교회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다..<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게=""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분의="" 은혜="" 때문임을="" 나는="" 믿게="" 되었다.="" 믿되="" 진정으로="" 믿게="" 되었다.더이상의="" 표현을="" 알지="" 못하므로="" 나는="" 진정으로="" 믿게="" 되었다는="" 말밖에는="" 못한다.="" 사랑은="" 값없이,="" 아무="" 조건없이="" 온다.="" 내가="" 아무리="" 잘난=""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커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못난=""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작아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냥="" 나를="" 사랑하신다.=""> 물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그래도 이런 고백을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제 벽을 넘어 우리의 모습들을 돌아보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하나의="" 우화를="" 들어="" 교회를="" 설명한다.="" 이="" 교회의="" 교인들은="" 집거위들이다.="" 거위들은="" 매주="" 뒤뚱거리며="" 교회에="" 들어와="" 설교를="" 듣는다.="" 설교자는="" 비행의="" 경이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뒤뚱거리며="" 걸어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이="" 장소에만="" 머무를="" 필요도="" 없습니다."="" 설교자="" 숫거위는="" 신도들을="" 북돋운다.="" "="" 우리는="" 저="" 창공으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더="" 먼지역,="" 더="" 축복받는="" 땅으로="" 비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녕="" 날="" 수="" 있습니다!"="" 거위들은="" 매주="" 설교를="" 들으며,="" 꽥꽥="" 거리는="" 소리였겠지만=""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리고는="" 다시="" 일렬로="" 서서="" 뒤뚱거리며="" 집으로="" 간다.="" 그들은="" 여전히="" 걸어서="" 간다.=""> <밖의 시선으로="" 교회를="" 들여다="" 볼="" 때는="" 사실="" 비판할="" 게="" 많았다.="" 하지만="" 일단="" 교회=""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헌신하게="" 되자,=""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교회의="" 모범을="" 그대로=""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제="" 교회에="" 헌신하고="" 있는="" 나는,="" 교회의="" 실패를="" 좀더="" 동정적인="" 눈으로="" 바라볼="" 줄="" 안다.="" 드높은="" 이상을="" 제시해="" 놓고="" 정작은="" 질퍽거리는="" 땅으로="" 걷게="" 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좌절할="" 것이다.="" 그러나="" 리차드="" 로어가="" 말하듯,="" 교회는="" 바로="" 그="" "좌절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모습들이 어쩌면 너무나 듣는데에만 익숙해져 버려 말씀의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너무나 의욕적인 나머지 몸은 움직이지 않은채 머리와 입으로만 생각하므로 비판만 할줄 알게 되어 교회의 일들과 사람들을 자로 측정해야 하는 실험대상으로만 여기는 건 아닌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성경에서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몸으로,성전으로, 밭으로, 집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들만을="" 위한="" 사역이라면="" 세상의="" 여타="" 인간="" 기구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을="" 희석시켜서는="" 안="" 된다.=""> 맞는 말이다...말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한다 하는데 그러면서도 우리의 자아가 살아서 그 자아가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하신 목사님과 하나님의 몸되신 교회를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헌신하려 노력하는지...우리 것을 버려야 하나님꼐서 우리를 채워주시고 살리실 텐데.....우리>밖의>쇠렌>하나님이> |
|
교회는 지상의 전투적인 교회가 천상의 승리적인 교회가 있다. 빌립안시 말하는 고민하고 사랑하는 교회는 지상의 교회다. 학교나 직장은 자퇴라든지 사표를 통해서 의사를 밝히면된다. 그러나 교회는 이렇게 쉽게 이동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선교단체의 간사의 말이 생각난다. "이 지상에 이상적인 교회는 없다. 설령 그런 교회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교회가 당신이 교인 되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고민하고 한편으로 사랑하는 교회에 한번쯤 생각하는 도움을 주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많은 독자들처럼 유년기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안고 있다. 교회의 다양성과 유일성을 실감나게 보인다. 책제목이 평범한 교회의 이야기를 하리라 예측했지만 저자의 풍성한 독서에서 읽는 중에 지상의 교회든 천상의 교회든 우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주도권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하나님의 고가 철도 몇년전 시카고대학에 문학 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다.그 대학은 도시 최남단에 있어서 고가 철도를 타고 5키로미터쯤 간 다음 다시 마을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나로서 이 고가철도 여행은 시카고라는 사회를 들여다보는방편, 말하자면 일종 세상구경인 셈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밖으로 드러나는 간명한 복음과 안으로 한없이 깊어지는 신비의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