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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 Costello :: J. M. Coetzee 함께 살고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 중 한 녀석은 참 고양이답지 않은 녀석이다. 길거리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사람에 대한 경계가 거의 없고 개처럼 이름을 부르면 멀리서도 달려온다. 제 먹을 게 아닌 빵 뜯어먹기를 좋아하는 것도 유별난 일이지만 (그렇다고 사람 먹을 건 다 먹는 것도 아니다) 탈이라도 날까 못먹게 하려고 혼내고 위협하고 때려보기까지 했는데도 5분이면 금세 돌아서 또 같은 일을 하곤 한다. 보통 고양이의 특성이라는 것을 대부분 갖춘 다른 녀석은 크게 울리는 소리 한번에도 기겁하여 털을 세우고 숨어 버리곤 하는데 그에 비하면 이 녀석은 고양이의 정체성이라는 게 의심될 지경이다. 3년을 같이 살며 지금까지 판단한 바로는 '뇌 구조가 다른 고양이' 라고 할까.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사람으로서의 판단이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둘째치고 나는 이 녀석의 나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고양이답다, 라는 것부터가 잘못된 명제인지도 모른다. 예민하다든가의 일괄적인 패턴을 보인다고 해서 모든 고양이가 다 그럴까? 기분이 좋으면 골골거리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를 내치는 것이 정녕 사실일까? 고양이와 의사 소통이 안되는 우리가 어떻게 기분이 좋다 나쁘다를 단정지어 말할 수가 있을까.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예외를 염두에 두지 않은 일괄성의 타성에 빠지면 인간은 '단정' 을 맹신화 하기 시작한다. '그럴 것이다' 가 '그렇다' 로 굳어져버린 것은 비단 동물의 행동 패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들끼리도 서로를 단정 내리기에 바쁘고 심지어 신의 영역, 종교에 있어서도 인간에 의한 '단정' 이 강요된다. 신과 직접 소통했다고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이들의 말만 믿고 '그게 맞다' 고 단정 내리는 인간들이 종교의 맥을 잇게 한다. 도대체 인간이 뭐를 얼마만큼이나 안단 말인가. 이 소설은 작가 존 쿳시의 개인적인 회의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노벨상을 비롯해 부커상을 2회나 수상한 대가 중의 대가지만 그는 작중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통해 [과연 독자가 작가를 정확히 이해하는가] 에 대해 의문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스스로 왜 수차례에 걸쳐 수상받는지 어리둥절한 마음에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사하는 작가가 진정한 작가라지만 자신은 정말로 현실을 잘 투사하고 있는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 반성에서부터 시작해 독자의 판단을 의심해 본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받아 들이는 건 독자에 따라 다 제각각이다. 그것이 무엇을 대변한단 말인가?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책으로 작가를, 그 인간 자체를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 책은 그저 우리 자신만을 겨우 비춰서 보게 할 뿐이다. (p167) 그런데도 마치 안다는 듯이 단정 내리는 것은 무슨 습성 때문인가? 물론 '그가 이러한 의도로 글을 썼을 것이다' 라는 것도 내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안그래도 난해하고 방대한 고민의 이 책을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고 판단낼 수도, 그럴 자격도 없다. 그저 내가 읽을 수 있을 부분만을 읽고 그가 제시한 대로 함께 고민해보는 정도다. 설령 이 감상문에서 단정적으로 보이는 어투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내 어휘력이 모자라서이지 그의 책을 제멋대로 판단 내려서가 아니다. 어쩌면 함부로 이런 글도 써선 안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그가 한가닥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써주어서 부족한 생각에 졸필이나마 끄적여보는 것이다. 그는 남성이면서도 굳이 여성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그에 대한 이유를 본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자기와는 다른 사람을 만들고, 또 그 사람이 움직일 세계를 만들면서, 타자성 자체에 직면하는 게 하나의 도전입니다. " (p21) 남자 작가가 여자에 대해 쓰는 데 그것이 과연 리얼리즘인가, 라는 설정의 시작만으로 리얼리즘의 관념적 한계와 고민, 의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절망을 내비친다. 엘리자베스와 아들 존과의 관계에도, 또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언니의 사이에도 도무지 넘을 수 없는 갭, 벽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데 동물에 대해선 어찌 알겠으며 신에 대해선 어찌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쿳시는 이러한 고민을 다소 극단적이면서도 비약적인 예를 들며 발제하고 있는 듯 하다.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로서 아프리카적인 것을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비롯한 문학계에 일침을 놓고, 동물을 이성이 없다는 이유로 인간보다 열등하게 보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실험을 통해 과학적 근거를 얻었다해도 그 또한 인간중심적인 근거일 수 밖에 없다. 도식화 된 것을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도 않고 인간이 정한 것을 당연시 한다는 것이 당연하단 말인가. 인간 연구, 인문학 이라는 것 자체도 모순일지 모른다. 행동 패턴은 일부일 뿐인데 어떻게 인문학이 인간 모두를 대변한다 할 수 있겠는가. 쿳시는 이와 같이 자신의 회의를 타자로 나누어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에 맞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겠고 그것도 나름대로 다 합당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그리고 자신의 주장과 이론에도 스스로가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아니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부딪혀 살아간다 해도 '고민만큼은 하고살자' 는 절박한 간청이랄까. 그러나 이러한 진심조차 세상에는 안 통한다. 그녀는 이 '당연시 하는'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의지상실하며 점점 더 움츠린다.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을 여기까지 밖에 못읽는 내가 스스로 세상에 대해 움츠리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한때 작가를 꿈꾸었다가 이젠 완전히 그 꿈을 접었다. 도무지 거짓말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가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만들어 어떤 배경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모든 작가들을 능숙한 거짓말쟁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이 가진 최소한의 요령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쿳시의 이 책에서 그런 글귀만 찾아 마음 위로하려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는 나치의 만행을 적은 어느 작가의 잔혹한 묘사에 경악한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왜 그걸 진실인양 이야기 하는가. 그럴 자격이 도대체 어디 있나. 대변자를 자처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누군가 전달자가 있어야 한다지만 그걸 전부로 받아들이는 오류는 누가 책임지나. 엘리자베스는 공감은 상상에 불과하다며 무언가를 읽고 일체화 되는 것, 진실의 오류, 역사의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작가가 그런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를 회의한다. 작가로서 엘리자베스는(혹은 쿳시는), 작가는 믿음을 가지되 그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즉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시적인 믿음을 가져야하며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인간에 대한 공감, 휴머니티를 가지면 족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신을 안다고, 인간이 동물을 안다고, 인간이 인간을 안다고 단정 짓고 전형성의 지식이나 교훈을 주입하려 들지말고 차라리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공감' 의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신이 인류에게 왜 이러는지, 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당장 5분 뒤에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를 '그렇다' 고 편하게나 오만하게 생각하지 말고 예외의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마음을 열때 도무지 넘을 수 없는 갭, 소통의 거리가 조금은 줄어들게 될지도 모른다. 설령 끝나지 않는 이해불가에 대한 고민으로 영영 괴롭더라도 그 괴로움이 가장 인간다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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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옮긴이의 글을 중에서 몇 줄 빼어 보자. 이 소설의 부제는 “여덟 개의 강의(교훈)” 이고, 여덟 개의 장과 후기로 되어 있는데, 7장과 8장을 제외하면 모든 장은 6년여에 걸쳐 강연이나 에세이 형식으로 출판된 것이다. 또, 쿳시의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인 “그와 그의 남자”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드포(Daniel Defoe)와 관련된 한 편의 소설을 낭독한 것이라고 한다. 옮긴이의 글의 제목 : [쿳시의 대화적 소설과 관념] - “소설은 나에게 사유의 한 방식이다” - 소설이라는 장르에 사유를 담아내는 지적 능력, 사유의 깊이, 빼어난 형식미, 복합적인 의미의 층, 서구적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 이처럼 관념을 다루는 소설에서는 자칫, 그 관념이 예술적 완성도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심오한 관념이나 사변에 젖다 보니, 예술적 형상화를 소홀히 하는 탓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그러한 오류에 빠져들지 않는다. 이 소설이 주는 감동 - 에 굳이 별명을 지어 놓고 싶다. 책도, 책 끝의 ‘옮긴이의 글’도 흥미롭다. 이런 즐거움을 '사유를 공감'한다는 것이라고 해보자. 1강 : 리얼리즘, 소설 속 인물에 침잠해 그 인물을 중심으로 또 다른 소설을 쓴 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리얼리즘에 관해서 아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어느 쪽이 좋으니? 네가 바라보지 않으면 동물들이 황홀경으로 빠져드는, 사육사들이 없는 동물원이니? 관념이 없는 동물원이니? 고릴라는 없고 고릴라라는 관념만 있는 고릴라 우리니? 아니면 코끼리는 없고 코끼리에 대한 관념만 있는 코끼리 우리니? 너는 코끼리가 하루에 몇 킬로그램의 똥을 싸는지 아니? 만약 네가 말이다. 진짜 코끼리들이 있는 진짜 코끼리 우리를 원한다면,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줄 사육사도 필요한 법이다." 코스텔로의 소설쓰기 방식이 리얼리즘의 뒤치다꺼리와 같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2강 : 교육과 연구, 자신의 세계를 외부인들에게 설명해주는 동시에, 어떻게 그 세계를 깊이 파고들 수 있겠어요? 3강 : 코스텔로는 사고의 반대는 충만함, 육화됨, 존재의 자각이라고 얘기한다. 코스텔로가 대상에게로 침잠하는 방식이 그것이라고 얘기하는 듯 하다. 그리고 동물적 존재가 되었을 때 생기는 '문제'를 제기한다. 동물의 대변인이 되어 4강: 이성이 객체를 설명하는 쪽이라고 본다면 2강에서 언급한 것에 의해 이성보다 존재의 자각이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5강: 두려움과 고통, 인류에게 적합한 연구대상이 인간이라는 것에 반대하고 신에게로 돌아가자는 블랑쉬는 인간연구가 인간의 음침한 면을 제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블랑쉬는 에이즈에 걸린 아이들에게서 두려움을 떼어내고 있다. 그 방법이 고통에 순응하게 하는 듯 한 것이 코스텔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 같다. 두려움보다 고통이 더 끔찍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아쉬운 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 코스텔로는 그녀와 비슷하게 이성 중심주의에 대립하는 언니, 블랑쉬를 통해서 자신의 방향에 물음을 갖게 되는 듯 하다.
6강: 이제 코스텔로는 추잡한 것은 무대 뒤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작가의 소설을 읽다 추잡함을 들추는 것도 추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계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구 문명은 무제한적이고 무한한 노력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어서,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의 고삐를 꼭 잡고 가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뭐, 이런 염세적인 생각 말이다.", "무한성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증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할 수만 있는 겁니다." 7 :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지각할 정도로 충분히 신과 한 몸이 될 수 있을까?" - 8 : "불신이란, 모든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극단적인 것 사이를 떠도는, 여유롭고 느긋한 삶의 징표죠."
소설 속 소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어느 소설 속 여인에게로, 도축되는 동물들에게로, 신에게로 침잠하여, 그들의 존재를 체험하려 하고, 그것을 소설이라는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한다. 하지만,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 체험들이 어둡고, 무겁기 때문이다. 코스텔로의 소설이 대상에 침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독자를 전제로 하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사유의 도구로 적당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 코스텔로는 소설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한다. 아무튼 코스텔로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소설가의 사유를 다룬다. 또, 강연하는 것, 설명하는 것을 위한 전통적인 글쓰기보다 독자의 감정이입을 요구하는 소설이 대상의 세계에 보다 깊이 파고 들 수 있을 것이라며 코스텔로가 이 소설의 작가, 쿳시를 변호한다. 이런 순환적인 자기지시가 이 소설이 주는 재미이고, 이 소설의 형식이 아닐까. 그런 이유로 옮긴이가 언급한 '관념을 다룬 소설'에 관한 우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는 무관할 수 밖에 없고, 더불어 이 소설이 '관념소설'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소설 속 소설가의 작품 소재가 어둡고 무거운 관념이라 해도 이 소설은 재미있다라고 얘기할 수 있다. 둔한 독자인 필자는 항상 독서 뒤에 여러 가지 물음이 남기 마련인데, "들녘"에서 출판한 이 책은 좀 엉뚱한 지점에서 큰 궁금증이 생기게 한다. 어두운 책 표지와 그 표지 뒷부분에 본문에서 인용해 놓은 부분이 그 지점이다. 책 표지와 옮긴이의 글 일부에 반발하여 이 책의 자매 격인 "동물로 산다는 것" 의 표지 뒷 부분에서 한 문장을 가져온다.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 코스텔로에겐 송구스러운 일이나, 필자에게 이 책은 진실을 외면하고 숨기는 '사고방식'을 휘 젓는 한 바탕 소동에 가깝다. 이 책이 주는 감동은 고통보단 난감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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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코스텔로라는 여성 작가와 그녀의 아들이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대개는 그녀의 강의 내용이나 그에 얽힌 전후 ''사건''들이 제시된다. 여러가지 주제들에 대한 그들의 신념, 의견, 개인적인 상념 등이 이어진다. 쿳시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긴장감을 주는 빠른 진행이나 절정으로 치닫는 위기감, 혹은 누가봐도 매력적인 주인공 들을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때로는 읽는 것이 지칠 수도 있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도 그의 작품들은 나름대로의 보편적 문제에대한 성찰을 담고 있으며, 그것은 소설이라는 형태로 어느정도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다. 소설이 아니라면, 어떤 분야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될까??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가 언제나 자신이 태어난 곳 아프리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작가는 정치적 문제와 순수한 예술적 차원에서 적절한 균형감각을 발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말했듯이 ''소설은 누군가에게 있어 사유의 한가지 방식''이다. 또한 그의 소설에서는 인간을 바로 보고자하는 노력들이 발견된다. 포장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 약하고 추한 모습을 간직한 모습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 조금더 솔직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인상깊은구절] 술탄은 바나나 아래쪽에 나무상자들을 쌓아놓고 그 위로 올라가 바나나를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그는 나를 혼내는 걸 그만둔걸까? 그에 대한 답은 노No입니다. 다음날 그 남자는 철사에 싱신한 바나나 묶음을 매달아놓고, 나무상자에 돌을 가득 채워놓습니다. 너무 무거워서 끌어당기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왜 나무상자에 돌을 채워놓은 것일까? 옳은 생각은 이런 것이겠지요. 나무상자에 돌이 가득 담겨있지만, 어떻게 하면 나무 상자를 이용해 바나나에 손이 닿을까?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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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일종의 관념 소설이다.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로 나오는데, 남아프리카 출신의 존 쿳시는 2012년 오스트레일리아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 는 유명 작가로 세계 곳곳에 강연자로 초청을 받거나 유수의 문학상에 수상자로 선정되어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는 한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연설 그리고 대화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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