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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상처로 서로 붙드는 시
윤임수 시집 『상처의 집』(실천문학사, 2005)은 사물들의 상처에 시적 관심을 기울인다. 상처는 인간 세상에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세상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이원 사람들」연작, 「철도 궤도공의 편지」연작, 「두 할머니」, 「늙은 과부의 술집」 등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는 존재의 슬픔이다. 삶은 상처로서 빚어지는 삶이고, 또한 상처로서 이룩되는 삶이다. 하지만 표제작인 「상처의 집」에 표현되는 것처럼, “세월에 덧나고 금간 / 상처와 상처가 서로 붙들고 /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 그 오래된 끈기를 보고 싶다”고 시인은 열망한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상처는 “오래된 끈기”를 불러내는 삶의 징후이다. 오래된 끈기가 없다면 상처는 ‘독’으로 변해 존재의 죽음을 잉태한다.
상처에 내포된 이러한 특성이 사물과 대면하는 시인의 방식을 규정한다. 요컨대 시인에게 상처는 존재의 본질이면서, 존재가 넘어서야 할 삶의 징표이다. 「파도」에서 “절망의 벼랑” 위에 서 있는 시인은 동시에 “퍼렇게 멍든 몸부림으로 다가와서 / 절대 허물어지지 말라고 속 내미는 / 그대”를 생각한다. 1980년대 민중시의 계보를 잇는 윤임수 시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시인이 사물과 마주하는 방식의 일단을 엿보게 된다. 시인에게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이어서는 안 된다. 사물의 본질이 상처라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상처투성이의 사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지니고 있되, 그 상처를 극복하는 힘을 내재하고 있는 사물, 그것이 윤임수가 바라보는 사물이고, 윤임수가 직관하려는 사물의 ‘정신’이다. 이 때문에 윤임수의 시에서는 사물 자체보다는 그 사물로써 표현되는 시인의 정신이 오롯이 부각된다. “연방 흔들리면서도 / 그물집에 말갛게 걸린 노을을 / 조금씩 핥아대고 있”는 거미는 곧바로 “살아오면서 내내 / 뜨거움으로 가득 차 / 그을고 가시 박힌 내 마음”(「거미」)으로 전치되고, “가을일 모두 끝나고, 서릿바람 검실거리는 들판에 / 낮은 허리 엮은 / 짚가리”는 “팔십 평생 땅 한 평 갖지 못한 / 우리 아버지 그 질긴 눈물”(「짚가리」)로 변주된다. 저마다의 사물 속에 내재된 다양한 상처들은 시인의 기억에 갈무리된 상처의 기억들을 불러내고, 그로써 윤임수 시가 지향하는 하나의 세계가 구축된다.
기차는 빨라졌고 나는 늙었네 하루에 네 번 있는 완행도 서둘러 떠나는 시골 정거장 파란 깃발을 흔들어 기차를 보내고 나면 어느새 힘없이 늘어지는 오후 한때 팔딱거리던 근육이 쓸모없는 무게로 기차가 떠나간 곳 바라보는 눈길을 막아 힘겨운 걸음을 돌려 오는데 가을 햇살 아래 홍시 떠받친 불그름한 이파리들 서로 몸을 비비며 낮은 모습으로 더 낮은 모습으로 가슴을 여미라 하네 두고두고 허물어지지 않을 것은 이 땅의 낮은 것뿐 그 자리를 꼭꼭 지키라 하네 - 「더 낮은 모습으로 - 늙은 역무원」전문
시간은 존재의 쓸쓸함을 부추긴다. “한때 팔딱거리던 근육이 쓸모없는 무게로” 느껴질 때, 존재를 향한 시간의 역습은 최고조에 이른다. 하지만 시간의 역습을 막아내는 것도 역시 존재의 특성임을 위 시는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의 역습이 강할수록 존재는 “더 낮은 모습으로 / 가슴을” 여며야 한다. 낮은 것은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나이 든 존재의 ‘겸허함’으로만 읽어야 할까. 더 낮은 모습으로 내려앉음으로써 사물(존재)은 비로소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상처의 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낮음’의 상상력이 지니는 맥락은 바로 이곳에 있다. 늙은 과부가 “평생 햇빛 든 날 없는 / 쥐구멍만도 못한 인생”을 살아왔으면서도, 시인에게 “아픈 가슴 나누어도 좋다”(「늙은 과부의 술집」)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것도, 그녀의 삶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삶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물도 한숨도 비틀거림도 / 풀풀 풀어놓는 주름진 얼굴”(같은 시)은 수없이 많은 상처들로 빚어진 민중들의 형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윤임수의 시가 민중들의 상처에 주목한다는 것은 돌려 말하면, 그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민중들이 여전히 상처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낮은 곳을 지향하는 그의 시는 항상 상처 없는 세상을 향한 시적 다짐으로 귀결된다. “낮은 몸으로 간절히 부둥키어 / 더 넓은 삶을 향해 흘러가야 한다”(「여울목」), “어색한 너에게 / 손을 내밀어 / 당당히 어깨를 걸기 위하여 / 때로 멈추어 서서 / 추스르는 것이 당연하지”(「머나먼 길」), “내 뜨거운 땀방울의 당당함으로 푸르게 / 푸르게 서는 날 있으리라 믿어요”(「철도 궤도공의 편지 2」) 등에 나타나는 시적 다짐의 어투는 그가 지향하는 세상이 상처가 치유되는 ‘낮은 세상’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물론 시인은 이러한 세상이 쉽게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시집의 마지막 시 「사량도」에서 시인은 “뻔한 길을 걸어온 자에게는 /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는 듯 / 안으로 말아 튼 몸길 단호하”게 거부하는 “사량도 지리망산”의 “철계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리막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시인의 고백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이 고백이 낮은 곳으로 나아가는 시인의 길이 그만큼 험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험난한 길이라는 점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시인은 자신이 가야할 시의 길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한 생 가득 담은 눈빛을 선뜻 버리고 / 저토록 투명하게 / 참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 한바탕 몸을 날려 떠날 수 있”는 “저 작은 물방울”(「물방울과 같이」)의 삶에도 “잠시의 망설임”(같은 시)은 있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망설임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다. 상처는 그 눈빛이 살아 있어야만 비로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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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68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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