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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었다. 이 책을 부여잡고 울었다. 이렇게 외쳤다. ‘주여, 이런 설교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주여, 이런 설교를 하게 해주소서. 또한, 주여 로이드 존스 같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니, 로이드존스의 갑절의 은혜를 구하나이다.’
요즘, 설교를 해도 변화되지 않는 것 같은 청년들을 보면서, 나는 깊은 고뇌와 좌절에 빠졌다. 스스로 설교를 잘한다고 -내 또래 어느 사역자들보다도-교만해있던 나였다.
스스로의 교만함을 회개하고, 질책하면서, 내가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다고 생각했던 설교의 은사에 대한 회의와 ‘설교자체의 효용성’에 대한 회의가 나에게 물밀듯이 밀려왔다.
‘과연 설교를 잘해서 이들이 변화될까?’, ‘정말 내가 설교의 은사를 받긴 받은 걸까?’
설교. 현대 사회 속에서 설교는 정말 필요한 것일까?
뭔가 교회의 부흥과 성도들의 영적각성, 교육을 위해서는 뭔가 현대에 맞는 새로운 방법들이 시도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너무도 강하게 파고들었다. 실제로, 성도들은, 그렇게도 많은 성도들은 왜 예배 때 설교시간에 그렇게도 조는 것일까?
설교는 과연 중요할까? 너무 일방적인 것이 아닌가? 설교의 비중을 줄이고, 소그룹과 제자훈련 또는 다른 것들을 도입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로이드 존스는 점쟁이처럼 이런 나의 생각을 완전히 꽤뚫어 보고 묵살 시킨다-그런데, 이런 생각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요즘의 추세를 보면, 설교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 소그룹, 상담, 심방 등이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을 본다.이와 동시에, 나에게 고민으로 다가왔던 것은 설교 때 청중들의 반응이었다. 스스로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말발이 좋고, 애드립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남을 웃기는데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던 나는 내가 이렇게 설교를 무겁고, 진지하고, 엄숙하게 할 줄은 몰랐다. 마치 청년들은 장례식장에 온듯했다. 나는 미안해하면서 설교해야 했다.
청중들을 웃기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마치 왜 괜히 그런 유머를 구사해서 설교시간을 더 오래 끄느냐는 분위기였다. 몇 명이 웃긴 했지만, 비웃는 것인지, 정말 웃겨서 웃는 것인지 아직 미스테리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물론 ‘교육전도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사람들과 친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설교라 그럴 것이다.’ 스스로를 엄청나게 위로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철 자아상도 나의 우울한 기분을 바꾸어 주지는 못했다. 나는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을 웃겨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이런 설교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청중들을 웃기려는 나의 노력과 발버둥은 이 ‘설교와 설교자’란 책에 의해 제압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모든 설교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설교 무용론’과 ‘인본주의’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설교가 아닌 다른 방법들을 구하기 시작했고, 성령의 능력을 신뢰함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분위기를 쇄신시켜보려고 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가 여전히 중요하고, 대안은 없다는 것과 청중의 분위기를 바꾸는 이는 바로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나는 함정에 빠질 뻔했다. 요즘도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들을 보면서도 나는 믿지 못하고 있었다. 보라. 여전히 하나님은 탁월한 설교자들을 그의 최고의 사역수단으로 사용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은 또 얼마나 진지한가!
나는 요즘의 한국교회가 로이드 존스가 말하고 있는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강단의 위기’이다. 수천·수만명의 전도사와 목회자들이 말씀에, 설교에 목숨 거는 대신 다른 방법들, 기술들을 찾고 있다. 각종 세미나, 셀, G12, 총동원전도, 수많은 찬양집회들, 가수들, 프로그램들. 과연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것들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로이드존스의 말처럼 한순간의 유행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유행들, 풍조들이 문제인 이유는, 설교의 중요성과 위치가 갈수록 약화되고, 사역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씀과 설교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에, 기도에 목숨 거는 사역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듯하다. 대신, 각종 기법, 방법론, 세미나들 등의 외적 활동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신학교에서 교수님조차 설교보다 상담과 심방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일부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런 현상들에 대해 걱정스럽다. 로이드 존스의 지적처럼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선포되지 않을 때, 유럽교회가 무너진 것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의 선포대신, 인간적인 방법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해갔을 때, 유럽교회가 망한 것이다.
설교는 일방적이고 너무 권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 설교의 위엄과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설교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로이드존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유럽의 교회가 무너지는 현장에 있었던 로이드 존스의 증언에 우리는 주의를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목회자들은 설교에, 말씀에 온 힘과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상담도 좋고, 심방도 좋고, 소그룹도 좋고, 윙윙 세미나도 좋고, 찬양사역도 좋고, 간증집회도 좋지만, 그런 것들을 좇기보다 책상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사역자를 하나님은 오늘날 찾으신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역자들이 많아져야 오늘날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살아나지 않을까?
그래서 울었다. 내가 그런 사역자가 되게 해달라고. 내가 하나님마음에 합한 사역자가 되게 해달라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전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는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화려하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말씀에 목숨 거는 사역자가 되게 해달라고. 시대를 깨울 수 있는 말씀의 사역자가 되게 해달라고.
[인상깊은구절] 참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온다는것, 그것도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언제나 그러했다는 것을 저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이미 입증한 바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이 여전히 동일하시며, 사람또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p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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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설교자들을 위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로써 이 책을 읽어본 이유는 "어떠한 것이 설교인가?" 라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전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사도행전 강해설교집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터라서 설교에 대한 책에서는 어떤 말씀을 전하실까라는 기대감도 다분히 있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강단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이 "강단꾼" 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국의 유명한 설교자들을 떠올려보았다.
CBS, CTS에 단골로 등장하는 여러 목사님들과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들었던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 그리고 내가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의 설교는 어떠했는가 생각해보았다.
이런 생각을 유지하면서, 책의 한 단락, 한 단락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고, 진정으로 위대한 설교자를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만드는 글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는 설교를 접했던 것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분의 책에도 단점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시대가 변했다고도 말할 것이다. 지금은 설교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 같다. 이미 교회 안에는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그런 유행을 잘 따라가야만 모고히를 잘 하는 것처럼 여기는 평신도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또한, 그 유행의 한 부류인 셀장으로 청년부를 섬기는 사람으로써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본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한주간의 생활을 나누는 셀과 같은 모임이나 양육을 위한 프로그램, 은사를 발견하기 위한 어떤 장치, 전도를 위한 특수한 방법따위가 아니라 '진짜 설교' 가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것 아닌가?!" 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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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웅
약 11년 동안 부교역자로서, 그리고 4년 반 동안 시골 교회 담임목사로서 사역해오는 동안 나의 목회와 설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심원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로이드존스 목사이다. 내가 그의 강해서들을 통해서 얻은 첫 번째 유익은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나는 청교도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성경적인 설교인 강해설교에 눈이 열리게 되었다.
『설교와 설교자』는 1971년에 처음 출간된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아왔고 설교학의 고전적 텍스트중 하나로 추천되어왔다. 그가 이 책을 출판하는 이유는 모든 설교자는 자기의 방법에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교에 대해서 표준적인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전하려고 할 뿐이다. 그는 41년 반의 목회 생활을 성공적으로 완주하고 나서 본서의 토대가 되는 연속 강연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행했기 때문에, 그의 설교론은 학식 뿐 만 아니라 풍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래전에 첫 번역본을 통해서 강해설교의 기본을 익혔는데, 이제 다시금 로이드존스 전문가에 의해서 번역되고 미려하게 장정된 새 번역서를 숙독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더 큰 감동과 배움을 얻었다. 책을 꼼꼼히 읽으면서 지나온 16년의 목회와 설교를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강해설교에 목회의 생명을 걸었다고 생각하고 달려왔는데, 로이드존스의 설교론을 다시 읽으면서 설교자로서의 자질과 자세에 대해서, 그리고 설교 준비와 설교 내용에 대해서 반성과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 현장은 설교 이외의 수많은 방법론들과 프로그램들에 의해서 휘둘리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새로운 성공 방법을 제시하는 세미나에 몰려들고 있고,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목회 현장 방문과 노하우 배우기에 열성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우리가 로이드존스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각성하게 되는 것은 설교 사역의 중심성과 설교자로서의 소명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설교는 사람의 소명 중에 가장 고귀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교회의 가장 크고 긴급한 필요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큰 필요이다”. 그에 의하면 교회와 설교자의 유일한 임무는 인간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이며 화목케 하는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으나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설교는 여전히 교회의 중심적인 임무이고, 또한 그것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설교를 영광스럽게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주신다. 오늘날 갈팡질팡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과 회중들은 다시 한 번 설교의 중심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원로목사의 충언이다.
로이드존스는 설교는 소명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철저하게 준비된 자 만이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설교자로 소명을 받은 자의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꼭 같이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철저한 준비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한다고 한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붙잡아야 할 필수적 사항들이다. 그는 설교 준비 이전에 설교자의 준비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설교를 어떻게 잘 할 것인가 하는 기술이나 방법 문제 이전에 설교자가 하나님과 영혼을 향한 사랑,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자가 먼저 진리에 의해서 감동을 받고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히는 삶을 살아야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 분의 임재를 느끼게 해 주는” 설교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구주되신 그리스도의 사랑, 복음의 장엄함을 희미하게라도 보여주는” 일에 도구와 통로로 쓰임 받을 수가 있다.
로이드존스는 설교가 철저하게 강해적이어야 함을 강조하여준다. 오늘날 본문을 읽어놓고 설교자의 사견이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예화들로 설교를 채우기 일쑤인 강단 현실을 감안할 때 로이드존스의 주장은 귀에 따가운 질책일 수밖에 없다. 설교자의 최우선의 임무는 본문과 성실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이나 대지는 본문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한다. 예화나 예증은 진리를 섬기는 일에 종이 되어야 하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머도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다. 이는 오늘날 강단을 점점 물들여가고 있는 유머 중심의 설교 붐에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이다. 유머와 조크가 필요하고 정당하게 사용되어질 수도 있지만 설교의 본질은 인간의 생사가 달린 진리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진지한 것과 딱딱하고 메마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본문에 충실한 강해설교를 하되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면 생동감이 넘치게 하고 기쁨과 감격을 가져오고 청중들의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로이드존스는 풍부한 학식과 목회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아주 원리적이면서도 실천적인 설교 론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었다. 그렇게도 목회 성공에 목말라하는 목회자들에게 조차 참된 성공의 길이 무엇인지 그 비결을 보여준다. 그는 성경에 기초한 강해설교, 인간의 잔재주나 기술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고 의지하는 설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혼에 대한 사랑의 동기로 하는 설교 사역, 청중의 요구에 휘둘리는 설교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주도되는 자유로운 설교등이 참되고 영속적인 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본서를 통해서“불붙은 논리”로 설득력 있게 잘 해명해 주었고, 또한 그의 성공적인 목회 현장을 통해서도 멋지게 증명해 주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원로 목사의 따뜻한 격려의 목소리와 아울러서 따가운 질책의 목소리들을 다시금 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설교와 설교자』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는 나와 같은 수많은 설교자들에게 다시금 목회 본질로 돌아가게 격려하고 책망하는 목자의 음성이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설교란 무엇입니까? 불붙은 논리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성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 진리와 관련된 이성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신학입니다. 불붙지 못하는 신학은 결함이 있는 신학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신학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에 결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학입니다. 진리를 참으로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 감정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강단에 설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므로 강단에 서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입니까?="" 불붙은="" 논리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성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 진리와="" 관련된="" 이성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신학입니다.="" 불붙지="" 못하는="" 신학은="" 결함이="" 있는="" 신학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신학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에="" 결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학입니다.="" 진리를="" 참으로=""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 감정=""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강단에="" 설=""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므로="" 강단에="" 서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설교란 무엇입니까? 불붙은 논리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성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 진리와 관련된 이성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신학입니다. 불붙지 못하는 신학은 결함이 있는 신학이라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신학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에 결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는 불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신학입니다. 진리를 참으로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 감정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강단에 설 자격이 전혀 없는 것이므로 강단에 서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 |
|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 거기서 뜻밖의 신간을 만났는데 그 책은 다름 아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와 설교자="">였다. 이 책과의 만남은 자그마치 10년 전 신학교에 입학했던 첫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목사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설교가 무엇인지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신학교 초년생 때 읽은 책이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가슴 뭉클한 감동과 도전으로 기억되는 책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론을 전공한 정근두 목사님의 충실한 번역으로 새롭게 탄생한 책이기에 고민할 것 없이 샀고 그날로 바로 읽고 또 읽었다. 인간의 기억의 무능력을 절감하면서 마치 정말 처음 읽은 사람처럼 책의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강연식의 문체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한 탓인지 몰라도 내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강의를 직접 듣는 학생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다움’이란 신조어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매 장마다 ‘과연...’, ‘맞아...’하는 내적인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내용을 접하며 나는 다시금 이 투명한 설교의 거울 앞에서 나를 보게 되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 사역이 참된 설교자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 아니면 형편없이 어긋나 있는지를... 물론 후자 쪽에 서 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며 뉘우치고 반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시대에 참된 설교자상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서 내 모습도 그런대로 쓸 만하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 뻔한 나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마음 아픈 고마움을 느낀다. 유명한 화가의 대작을 보듯이 로이드 존스를 통해 나는 참된 설교자의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내게는 ‘큰 바위 얼굴’과 같아서 계속 응시하고 바라보며 꿈을 키운다면 나도 그렇게 변하리라는 희망을 주기에 더욱 고마움을 느낀다. 로이드 존스는 영혼의 의사와 같다. 그는 그의 시대와 현 시대를 불문하고 매 시대마다 변하지 않는 부패한 인간 본성의 문제 속에서 사람들이 설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적 병폐를 지적한다. 그 병폐 속에 함몰되어가는 설교의 진정성을 되살리며 그는 왜 설교가 교회의 최우선 과업인지를 본 강의를 통해 외치고 있다. 그 누구보다 교회사에 정통한 로이드 존스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특히 부흥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불꽃같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참된 설교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권위 있는 설교가 어떤 것인가를, 또 어떻게 참된 설교를 할 수 있는가를 세세히 가르쳐 주고 있다.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는 ‘설교문’과 ‘설교행위(전달)’로 구분되는데 그는 특히 설교행위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아무리 학식 있고 훌륭해 보이는 설교문을 쓴다고 해도 그 자체가 설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실제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전 과정에서 설교의 진가가 우러나온다고 말한다. 자신은 당시 유행하던 라디오 방송 설교의 요청에 끝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이런 설교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했는가를 알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필요성과 정의, 그리고 일반적인 특징과 특별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설교의 총체적인 면모를 이 책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 아, 책을 읽기는 쉽지만 이 내용을 소화시켜서 실제 설교에 적용하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날의 설교자 자신의 부족함도 문제거니와 현대교회의 회중의 수준 역시 이런 식의 설교에 얼마나 동의하며 이를 갈망할지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설교와 진정한 설교자를 향한 추구와 노력은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숙명적인 과제임을 깨닫는다. 책을 덮지만 이 책은 가르침은 덮여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내 마음에 울리고 퍼지는 메아리처럼 그렇게 살아있다. 누군가 기름부음이 있는 책을 가리켜 ‘그 책을 읽고 무릎 꿇게 되는 책’이라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분명 기름부음이 있는 책일 것이다. 지금 내가 무릎 꿇고 기도하게 되니 말이다. “오 하나님,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를 말라있는 이 시대를 보시옵소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하나님을 외치며 간구했듯이, 오늘 저는 주께서 영광스런 교회 역사 속에 세우신 불꽃같은 설교자들이 오늘 이 시대 가운데도, 우리 조국 교회 가운데도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이 땅 가운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달음질하며, 그 말씀의 권위가 혁혁한 권세로 친히 입증되게 하옵소서. 아멘.” 목사와>설교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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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설교자」는 저자 로이드 존스 목사님 자신의 44년간의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된 책이다. 또한 저자가 직접 실천한 내용들을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을 위해서 집필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점만 미루어 보아도 이 책의 가치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마지막 청교도로 불리며 최고의 설교자로 칭송을 듣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44년간의 목회와 설교 사역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것도 하나의 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 스스로가 직접 실천한 내용들이다.
저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현대 교회의 문제와 무기력함이 설교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설교가 무엇인지, 설교자란 어떤 자인지, 또한 설교자가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고 선포해야 하는지를 실재적인 내용들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설교와 설교자」는 그 어떤 설교학 교과서보다 더 유익하고 실제적 실천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설교란 무엇이면, 설교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된다. 설교란 붙붙는 논리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이성이다. 그리고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 분의 임재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켜 전 생활 영역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가슴에 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슴에 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가슴에 깊이 다가왔던 단어는 “소명, 자유, 기름 부으심”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나를 압도한 것은 “자유”라는 단어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단어가 내 가슴에 메아리쳤다. 저자는 설교문을 전달할 때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은 성령이 순간순간 주시는 영감에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문이 잘 준비되었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할 때, 설교를 전하는 데 있어서 자유롭게 해야 한다. 자기가 준비한 것에 너무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 자유의 요소가 중요한 것은 설교는 언제고 성령 아래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사역자로 부름을 받고 설교 사역을 할 때 원고를 너무나 많이 의지하고, 사람을 의식하는 것을 많이 느꼈다. 나는 원고가 없으면 설교를 하지 못한다. 그런데 막상 지나치게 원고를 의지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 설교를 하고자 강단에 설 때 원고보다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가장 큰 위험은 자신 준비한 것을 의존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순간순간 주시는 성령의 영감에 마음을 열어놓고 성령에 붙들리기 위해서 ‘자유’가 필요하다.
저자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설교해야 함을 시종을 강조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 그것은 성령께서 설교자 위에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이며,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로 하여금 성령의 손에 사용되게 하시고 성령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매시간 성령의 능력을 찾고 있어야 한다. 내 말과 전도함이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그 능력을 따라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추구해야 한다.
목회자로 부르심은 받은 자라면 바른 설교자, 뛰어난 설교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바른 설교자가 되는 첫걸음은 「설교와 설교자」를 읽는데서 시작될 것이다. 이 책은 한마디 한마디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설교에서 실패하면 모두 실패한 것이라는 말처럼 얼마나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는 옷을 팔아 책을 사라고 하였다. 설교하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책꽂이에 아직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없다면 자신의 헨드폰이라도 팔아서 이 책을 지금 당장 사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1년에 한번 이상은 이 책을 다시 읽고자 결단하였다.
[인상깊은구절] *설교문을 전달할 때 자유롭게 해야 한다.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은 성령이 순간순간 주시는 영감에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란 붙붙는 논리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이성이다. 그리고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 분의 임재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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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책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런 감동을 느껴보지 못한 때는 거의 없다. 구태여 논리적으로 이끌어가지 않으려 하지만 논리가 뭍어나오는 책의 구성또한 너무 부드러웠다.(?)
내 자신이 설교자이니 이 책을 대하는 심정을 남달랐다. 이 책의 중심주제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의 준비사항을 조목조목 설명해 나간다. 그 중 가장 인상깊게 받은 내용은 '설교자의 자유'이다. 형식은 중요하나 너무 형식에 메이지 말라고 주장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존스 목사가 그것을 주장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주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성령의 나타나심에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형식에 너무 메이면 그 형식에만 끌려다녀 성령의 감동을 묵살하고 그냥 설교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이 있었다. 저자는 계속 설교자는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 진리에 초첨을 맞추어야지 잔 재주를 부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최근 전병욱 목사가 시무하는 'S교회'에 가보았다. 대부분 청년이었는데 책에서나 설교에서든 전 목사는 '문화와의 소통'을 강조했다. 들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존스 목사와 전병욱 목사가 계속 오버랩 되었다. 전병욱 목사가 잔재주를 피우는 것이가, 아니면 존스 목사가 시대에 뒤떨어진 고집을 피우고 있는가? 지금도 솔직히 그 균형점이 이거다 정확히 말할 자신이 없다.
대략적으로 내가 이해하고 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병욱 목사는 성도의 수준에 더 관심을 보였고 존스 목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편에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전병욱 목사도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입장에서 청중의 수준과 문화에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내가 그 중심을 두고 진리와 청중의 수준을 고려해야 하는 고민이 생긴다. 개인적으로 고민 끝에, 내가 확신하기로는 그 중심점은 바로 성령이다.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선포한다. 설교의 균형은 다른 주장이 아닌 실제로 살아계신 성령이다. 그 분께서 그 균형점이 어딘지를 인도해주시리라!!
앞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존스목사는 큰 통찰력을 나에게 주었다. 그것은 바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고 회심시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성령'이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누구도 이견이 없으리라. (물론 '알미니안'이 견해를 다를지 모르지만) 거기에 청중의 수준을 살펴서 그들이 들리는 언어로 전파하되 항상 진리를 전파한다는 중심을 잃지 말아야 겠다. 곧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그 해답인 것 같다. 이를 적용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모쪼록 그렇게 유명하다는 책을 읽었는데 소문만 무성하진 않았구나 하는 맘이 든다. 대단한 책이다. 특히 목사와 목사 후보생은 꼭 읽어야하는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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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든 교회간판이 참 많다. 대한민국에서 교회를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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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이책은 '목사와 설교'라는 책으로 번역이 되어서 많은 신학생들에게 알려진 책이다. 하지만 이번에 로이드 존스의 설교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근두 목사님이 목회와 신학에 조금씩 번역해서 실은 글들을 모아서 드디어 책으로 나왔다. 최소 신학생이라면 로이드 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의 거의 설교는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고 있다. 그의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의 아직도 살아서 역사하는 듯 하다. 그는 설교를 생사의 문제로 본다. 이 책에서“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라는 말은 나의 가슴을 강하게 파고 들어왔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목회에 있어서 설교가 사활을 다루는 것만큼의 강한 인상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정말 말씀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인터넷을 통해,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동영상으로, 오디오로도 맘껏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인들은 설교가 그렇게 교인들에게 생사를 건 설교라고 느끼지 않는 듯 하다. 물론 분명 세련되고, 아주 재치있고, 호소력 있는 설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인들은 “목사님 참 은혜로운 말씀이었습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교인들은 그 설교 말씀 따라 자신의 삶의 양식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정말로 설교가 생사문제와 교인들의 삶의 문제를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인가? 다른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나, 기도훈련들이 더욱더 교인들의 문제를 더 실제적으로 다룰 수 있지 않은가? 사실 필자가 봉사하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전도’이다. 75명되는 성도가 담임목사님이 바뀐 이후로 만 6년 만에 주일 평균출석이 1000명이 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담임 목사님이 말씀이 좋아서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필자가 1년 이상 경험하고 분석해보며, 또한 목사님께 실제로 배운 바로는 ‘전도전략과 운영능력’이었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어떻게 하면 내가 맡은 기관을 부흥시킬 것인가였다. 그래서 자연이 설교준비보다는 아이들과 접촉하고, 프로그램 세우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했다. 하지만 이 책을 계속 읽어 나가면서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구나!”라고 속으로 말하며, 과거 말씀 증거자로 부르심 받은 것을 다시 한번 상기 했다. 십 몇 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조지 윗필드의 전기를 너무나 큰 감격과 환희를 경험하고,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책상위에 올라서 큰 소리로 설교하는 흉내를 내었고,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을 받았다. 마치 예레미아의 고백이 나의 고백과도 같았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라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이 책의 마지막장에서 앞서 던졌던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불이 있는 설교(Preaching On Fire)야 말로 교회를 살리며, 설교를 교인들의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자의 설교집을 읽을 때에도 느낀 사실이지만, 저자의 전직 직업인 의사출신 답게 여러 가지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런 방식 때문인지 평소에 필자가 궁금해하고, 문제시 하였던 것들이 해결되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논증을 풀어감에 있어서, 어떤 것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근거로 하여 결론을 내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물론 그건 경험들과 생각들이 충분히 공감을 가게 했지만, 논증의 근거에 있어서 성경적근거이면 더욱 좋지 않았겠나 싶다. 역자의 잘못된 번역인지 모르겠지만, 가령예를 들어‘나 개인의 회고담 형식으로...,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내가 보기에...,’라는 표현이 좀 신경쓰였다.1)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사람의 육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확한 진단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처방하고, 몰핀이나, 안정제 같은 임시적인 처방을 내리는 것은 범죄행위인 것처럼 사람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한 진단 없는 무책임한 처방은 엄연히 심판받을 범죄행위라고 하는 지적에 가슴이 섬뜩했다. 저자는 마지막장 영향력 있는 증거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감동하심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 저자의 주장은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는 재고해야 문제들이 있음이 사실이다. 저자가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동시에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이라든지, 웨슬리적인 세컨드 블레싱 같은 은혜의 필요성에 대한 것들이 그 예라 하겠다. 물론 저자의 주장대로 이 말은 설교자 편에서는 기도만 하면 된다던지, 꼭 저자의 말한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는 설교는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밝힌 교회사적인 증거와, 그리고 오늘날 선교지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사도행전적인 역사를 볼 때, 저자가 말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구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는 이 기름 부으심을 받도록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엘리야가 바알선지자와 대결에서 여호와의 불을 구하기 전에 불이 내릴 것을 준비했던 것처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단순히 설교(sermon)의 준비만이 아니라, 설교자로서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필자는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불이 있는 설교임을 깨닫는다. 당장 눈에 나타나는 일에 시간을 쏟기보다 조금은 늦은 것 같을지라도 생사를 거는 일에 시간을 쏟기로 결단한다. 특별히 말씀의 봉사자로 부르심 받은 필자에게 생사를 거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불을 받기위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을 다짐했다. 저자가 조언하고 충고하는 내용을 따라 지금부터 준비하고, 훈련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불꽃처럼 설교자로 사용해 주실 것을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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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교과서
설교 준비를 할라치면, 어디서부터 손을 데야할지 떨칠 수 없는 막막한 느낌이 벌써 설교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었다는 자신감을 무참하게 허물어 버리는 심술궂은 여우와도 같다.
신대원에서 배우는 설교학 강의와 서점과 도서관을 부지런히 드나드는 수고가 그래도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성장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지만, 늘 부족한 2%의 갈망으로 뒤척이는 날이 줄지 않았다.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를 신대원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날. 평소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범접하기 힘든 이 시대의 위대한 목회자 마틴 로이드 존스의 명성과 그의 막대한 영향력에 압도되어 책을 집어 들긴 하였지만, 솔직히 나의 설교준비와 설교 행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다음 주일 설교 작성을 위해 즉석 도움을 받기에 별 유익이 없을 것 같은 이 책은 그야말로 전국 대입 고사에서 수석(首席)한 학생의 우문현답(愚問賢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를 떠올리게 하는 탁월한 교과서로 나의 설교 작성에 큰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설교에 대한 회의론이 짙게 물든 어떤 이의 말처럼 설교의 시대는 끝났고 강단은 과거를 가졌으나 미래는 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설교를 교회의 기본적인 임무이자 목사의 기본적인 직무라고 믿으며 설교를 교회의 고유적 직무라고 확실히 못을 박는다.
따라서 그는 설교야말로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역이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음을 나에게 설득했다. 목회 상담이나 심방, 제자 훈련이나 다른 모든 활동들은 설교를 보충하도록 의도된 것이지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확신이 그로 하여금 탁월한 설교자로 만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설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매듭지음으로서 설교에 대한 뿌연 형상을 또렷하게 할 수 있었다. 잘못된 설교관으로 인해 잘못된 설교가 행해지고 있기에 이 기본 질문에 직면하기 전에는 설교의 기교나 방법 혹은 의사소통의 문제들을 급히 다뤄선 안 된다고 충고한다. 다시 말해, 참된 설교의 부흥이 있기 위해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반드시 발견해야 하는데, 참 설교는 설교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설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설교의 참된 기능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고 진리의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측면의 무언가를 전달해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설교란 사람들(어린이들)의 마음에 진리의 충격(Impact)을 강하게 가져다주어 그 진리를 살아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설교의 목표는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인상을 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나의 설교 교과서로서 자리매김을 한 명분이 설명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주일마다 선포되는 말씀이 명쾌한 구분이 가지 않아, 나 스스로도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케리그마’로서의 설교와 이미 믿는 성도(어린이)를 세우기 위한 ‘디다케’로서의 설교가 불분명했는데, 전도와 양육이 골고루 분석되는 그의 설교와 관점이 내 설교문의 형태와 내용을 결정짓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를 관통하는 설교의 세 가지 필수적인 원리는 이 책의 정수(精髓)로 꼽을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설교는 반드시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에 관해서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하고 항상 신학적 기반을 가져야 하기에 건전한 신학에 기초한 바른 해석이 필수적이다. 그 과정은 단일체로 이뤄져있는 모든 성경적 메시지를 잘 파악하기 위해 먼저 조직 신학에 대한 건전한 지식을 갖출 것을 이 책은 요구한다. 어떤 메시지라도 전체에서 분리된 것으로 취급하지 말고 개별적 본문에 담긴 각 메시지는 보다 큰 전체의 한 부분임을 항상 명심하라는 당부까지 잊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는 설교문은 반드시 강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원리는 설교의 형태에 관한 것인데 강해 설교란 참 설교의 모든 측면을 서술하지 않고 특별한 한 측면의 형태에 관해서만 말할 뿐이다. 모든 설교는 본문의 강해에 기초하지만 이 강해를 특정 형태의 메시지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해를 강해 설교로 만드는 것은 특정한 형태를 가진 메시지가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스가 생각하는 강해 설교를 하기 위해선 본문을 택해 그 본문을 강해로부터 출발해 개별적 본문의 핵심 사상 혹은 교리에 도달해야 하며, 그 후에 개별적 교리의 상관성을 전개하고 그 개별적 교리를 평행 구절로 강화하도록 권한다. 그리고 개별 본문에서 나온 핵심 주제는 반드시 대지로 나눠 중심 교리를 분명하게 보이도록 대지들을 점진적으로 배열해 절정을 향하도록 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설명과 함께 적용가능한 일을 계속해 설교는 반드시 적용과 권면의 논조로 끝나도록 하라고 충고한다. 현대 강해 설교의 아버지인 해든 로빈슨의 이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전달 행위를 지배하는 핵심 원리인데,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통제 아래서 행해져야 한다. 설교란 사람이 그것을 들을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면모를 살펴볼 때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국정 교과서에 해당한다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는 설교자의 서재에 반드시 꽂혀 있어야 할 검인정 교과서라고나 할까? 그런 표현으로도 전혀 손색없는 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상깊은구절] ♣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설교의 영광 설교는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고 진리의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보화를 전달해 주는 일이다. 설교란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라는 패역한 인간들의 항의성 짙은 질문과 반론에 ‘신정론(神正論)’에 해답을 매일 매일 도출해 내는 거룩한 작업이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며 오늘도 부족하지만 강단을 지키며 하나님의 입술을 대언하는 이 영광의 자리가 더 이상 부담이나 형식으로 채워지지 않게 되기를 강하게 희망한다. 질병에 걸려 힘겨운 마틴 로이드 존스가 그의 노년에도 힘주어 강조하는 설교의 최고 목표는 설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의식과 하나님 임재 의식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설교문이 좋지 않은 사람은 관대히 봐줄 수 있지만 설교자 자신이 비록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이 매우 위대하고 영광스럽다는 느낌이 전달된다면 그 설교자의 어떤 결점도 관대히 봐줄 수 있다는 대목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설교자가 성도(어린이 나는 어린이 사역자이기 때문에 성도라는 말에 어린이를 꼭 붙이고 싶다. )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및 구주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복음의 장엄함에 대한 어떤 희미한 일별(一瞥)이라도 준다면, 우리 모두는 그에게 빚진 자이며 그에게 깊은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미래의 영광스런 끝없는 가능성 때문에 인간이 종사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놀랍고 감격적인 행위인 이 설교자의 자리가 내 자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을 잇지 못할 감격이 가슴을 억누른다. 하지만 여전히 설교가 좋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여전히 나는 설교가 싫다. 무서우리만큼 싫다. 애증(愛憎)의 얽힌 관계로 평생 동반해야 할 동반자로서 나는 아직도 설교가 두려운 것이다. 그 영광의 무게에는 나 자신이 늘 하나님 임재 앞에 서야한다는 각고(刻苦)의 노력이 있어야 하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