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단순한 동양 철학 소설이 아닙니다. 헤세는 1911년 직접 인도를 여행했지만, 기대했던 정신적 충만함 대신 깊은 공허함만 안고 돌아왔습니다. 이 책은 그 실패한 여행이 남긴 질문들을 10년 넘게 붙들고 씨름한 결과물입니다. 직접 가서도 얻지 못한 것을 글로 풀어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얼마나 절박한 탐구에서 출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스타북스에서 출간된 판본으로 읽었는데, 번역이 원문 특유의 느리고 명상적인 호흡을 잘 살려냈습니다. 헤세의 문장은 서두르지 않는데, 이 판본의 번역도 그 리듬을 충실히 따라가고 있어 읽는 내내 자연스러웠습니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모든 것을 갖춘 브라만의 아들이지만 내면의 갈증을 채우지 못해,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납니다. 여기서 이 책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역설이 등장합니다. 싯다르타는 실제로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붓다를 직접 만납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깨달음이란 누군가에게 전달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따르는 순간, 그것은 이미 '나의 진리'가 아니게 됩니다. 완벽한 스승 앞에서 고개를 돌린 이 장면이 책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후 싯다르타는 기생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우고, 상인이 되어 욕망의 끝까지 내려갑니다. 이 타락의 과정을 헤세는 죄악이 아닌 필수적인 경험으로 그립니다.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 강 앞에 선 순간, 그는 근원적인 소리 '옴(Om)'을 듣고 깨어납니다. 이후 뱃사공 바수데바 곁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비로소 진리에 닿습니다.
이 책에서 강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헤세가 강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입니다. 강물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동시에 흐릅니다. 싯다르타가 강에서 들은 것은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현재·미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방황도, 타락도, 고통도 전부 흘러 지금의 나를 이루는 강물이라는 것. 그래서 이 책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다. 지금 이 시대에 유튜브 강의, 자기계발 콘텐츠, 명언 계정이 넘쳐나는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공허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깨달음을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정작 내가 직접 겪고 실패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회피합니다. 싯다르타가 완벽한 스승 앞에서 등을 돌린 것처럼, 헤세는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열심히 따르고 있는 그 가르침, 과연 당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냐고.
사회의 기준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이상하게 공허한 분. 좋은 책, 좋은 강의를 열심히 찾아다니는데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분. 실패와 방황을 낭비된 시간이라고 자책하는 분이라면, 이 책이 그 모든 경험을 다르게 읽는 눈을 열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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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체크카페를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삶의 의미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책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 나의 경우는 문학계의 거장인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 대해 그 전까지는 ‘수레바퀴 아래서’ 그리고 ‘데미안’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듣거나 종종 매체에서 언급되는 것을 듣고는 했다. ‘싯다르타’라는 작품은 그가 10여년간 인도 사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집대성한 작품으로 개인의 깨달음과 화해를 담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싯다르타는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기대 속에서 자라났으며,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위대한 현인이 되기를 바랬지만 싯다르타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조차 찾지 못한 자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함께 집을 떠나 고행을 떠나게 된다. 싯다르타는 처음 사문으로 향하게 되며, 그곳에서 싯타르타의 목표는 오직 비우고자 하는 일이었다. 갈증을 비우고, 욕망을 비우고, 망상을 비우며, 기쁨과 슬픔 마저 비우는 것. 자기 자신을 죽여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것. 일단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극복해 적멸하게 되면, 모든 욕망과 충동이 마음속에서 침묵하게 되면, 마침내 궁극적인 부분인 자기 존재의 가장 내밀한 곳이 깨어나 더 이상 ‘나’가 아닌 위대한 비밀을 깨닫게 되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사문에서의 고행도 무의미함을 깨달은 후 그는 위대한 현자인 고마타(세존)를 찾아가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세존의 제자가 되지 않는데, 이 때 그는 세존의 해탈은 가르침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세존 자신의 탐구와 명상과 인식과 깨달음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결과적으로 해탈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는 세존의 가르침 또한 그에게 궁극적인 깨달음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이후 그는 카말라에게서 사랑을 배워 보려고도 하고, 부유한 상인 카마스와의 만남을 통해 물질적인 쾌락을 경험하게 되지만, 다시 한 번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며 결국, 싯다르타는 자신만의 깨달음을 찾기 위해 강가에 다다르게 된다. 강가에서 만난 노인 바데스바와 생활을 하게 되면서 통해 결국에는 진정한 깨달음에 가까워지게 된다. 바로 강의 흐름을 통해 삶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를 찾게 되며, 이 과정에서 그는 사랑, 고통, 그리고 삶의 의미를 깊게 깨우치게 된다.
[드리어 강의 소리를 통해 깨달음의 완성을 경험한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한 인간의 삶의 의미와 진리를 찾는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가 겪는 고통과 갈등이 결국에는 다시 우리의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소설의 초반에 세존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듯이 어떠한 깨우침을 위해 가르침을 받는 것 보다는 자신이 직접 깨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강가에서 바스데바와의 만남, 카말라의 죽음 그리고 아들과의 만남,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번뇌를 느끼던 와중 드디어 강의 소리를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바스데바는 그제서야 후광을 내며 사라졌고, 그의 자리는 싯다르타가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바스데바라는 인물은 깨달음을 주기 위한 신성한 존재이나, 싯다르타를 재촉하지 않으며, 그의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묵묵히 바라보았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혼자 극복하고 깨달음 얻게 되는 싯다르타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의 의미를 어떤 것일까 라고 한번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았던 것 같다.
[우리들도 우리만의 깨달음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보자]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신동운 #스타북스 #체크카페 #체크카페리뷰단 #도서서평 #도서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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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으면 그저 놀랍다.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하는 생각만 드니 말이다. 고전, 고전하는 이유는 있고 그 이유를 알지만 막상 읽어보면 나 스스로가 그 가치를 깨우치기엔 턱없이 부족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차라리 해제를 읽는 게 더 도움이 된다. 싯다르타는 인간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삶을 살던 그가 진정한 깨달음을 좇아 사문의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금욕 수행자들과 함께하며 극단적인 고행을 실천하지만, 그 역시 완전한 해답이 아님을 깨다고 다시 떠난다. 후에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듣지만, 남의 가르침만으로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본인만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세속적인 삶 속에서 성공도 하고 사랑도 하지만 그러한 삶에 지치며 허무를 느낀 그는 뱃사공 바주데바와 함께 지내며 강의 소리를 통해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깨닫고 내면의 평화를 얻게 된다. 결국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진리를 찾아가는 인간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타인에게 의존하기보단 각자의 삶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자연과 강을 통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은 삶의 순환과 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헤르만 헤세의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여전히 내게는 쉽지 않은 책이지만 삶과 방향에 대한 고민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문화충전200 카페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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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싯다르타>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구도자의 여정을 담아낸 소설입니다. 신동운 번역가의 문체로 다시 만나는 이 고전은 주인공 싯다르타가 안락한 카스트의 특권을 뒤로하고 숲속 사문들의 고행에 합류하는 장면부터 강렬하게 시작해요.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향해서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한 문장 한 문장에 녹아 있습니다. 그는 세속의 즐거움과 고통을 모두 경험하며 강물이라는 거대한 상징 앞에서 멈춰 섭니다.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만물의 조화와 영원한 현재성을 배우는 과정이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었어요.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라, 직접 몸소 부딪치면서 얻어낸 삶의 지혜라는 점이 많은 깨달음이 전달되었어요. 우리가 방황하는 순간마다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과 같은 이 책은 단순한 종교 소설보다는 인간의 내면 성장을 밀도 있게 다루어져있었어요. 완성된 문장들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긴장감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요. 스스로의 내면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고요한 평온을 경험해 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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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고민할 때 누군가의 답을 참고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길을 따라가면 조금은 덜 흔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길을 따라가도 같은 결과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싯다르타》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해 ‘답을 찾는 과정’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한 인간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 과정이 단순한 수행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학문과 수행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길을 떠나며, 사문 생활과 붓다의 가르침을 거쳐 결국 세속의 삶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가르침이나 스승도 완전한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게 됩니다.
읽다 보면 이 작품은 ‘무엇이 옳은가’를 말하기보다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같은 경험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는 점, 그리고 실패나 방황조차도 하나의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흐름은 현실의 삶과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빠르게 답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경험이나,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던 시간이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답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기준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나,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해본 사람에게 잘 맞는 작품입니다. 빠른 결론보다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기준을 만들어가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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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데미안'을 먼저 읽고 '싯다르타'를 접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주는 편안함과 결이 맞닿아 <싯다르타>를 완독한 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편안한 마음 상태에 이르는 방법은 어쩌면 욕심을 덜고 마음을 비워 속세로부터의 번뇌를 내려놓으면서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교를 잘 몰라도 세상에의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흐름이 있었기에 읽으면서 깨달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굉장히 신선하고 느끼는 바가 컸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도 발맞추어 그 속도에 맞춰야 하고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해야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잘 맞춰진 퍼즐 같은 모습의 사람에게도 심연의 고민과 걱정이 있기 마련이라 정해진 기준은 없고 오직 나만이 만족에 이르도록 스스로를 다독이고 평온의 상태에 이르도록 조절하는 수행 아닌 수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인들의 외부 요인에서 오는 극한의 스트레스와 번뇌를 비워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불교에서 수행하는 것처럼 부단히 명상하고 각자의 방법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 어느정도 마음의 평정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에서 만인의 자랑이자 존경의 대상인 싯다르타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고행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깨달음이었습니다.
내 마음의 평온함을 찾아 떠나는 고행이 결코 헛된 여정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일련의 수행 과정들이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인간 내면의 섬세한 심리 상태를 잘 보여주었다면, <싯다르타>에서는 불교라는 종교에 힘입어 깨달음을 얻고 힘있게 앞으로 전진하는 과정이 웅장하게 와닿아 더 극대화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헤르만 헤세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스타북스 #문화충전 #문화충전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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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은 꼭 읽어야하는 명작이자 고전들이 많다. 그 많은 작품들 중에 <싯다르타>도 있다. <싯다르타>는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한 한 청년의 이야기로 깨달음을 얻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와 같은 작품을 쓴 이유는 헤세가 불교에 심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양인이 동양의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낯설기도 하지만 헤세는 불교를 종교라기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인간의 고통과 해탈에 대한 통찰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에 얻는 것에 큰 공감을 느낀 것이다. 또한 헤세는 불교를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보다 비판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와 탐구 의식을 가지기도 했다. 어떤 교리나 스승의 가르침도 개인의 직접적인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작품 <싯다르타>에 넣은 것이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인도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도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브라만 계급이고 이들은 사제 계급으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로 경전을 가츠힐 수 있는 지식인 집단이다. 브라만은 왕족보다 높으며 가장 순수하고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는데 '싯다르타'가 신분제도의 가장 높은 위치였다. 가장 높은 위치의 브라만에게 부족한 것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완벽하고 충만함뿐이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는 충만함과 풍족함보다 오히려 집을 떠나 고행자들의 삶을 선택하고 금욕과 수행을 통해 진리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스 고행자들의 고행 역시 완전한 깨달음을 주지 못했고, 싯다르타는 또 다른 길을 찾아나선다. 드디어 싯다르타는 위대한 깨달음을 주는 존재인 '붓다'를 만나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타인의 경험일 뿐 스스로의 진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을 떠났던 친구 고빈다는 붓다의 제자가 되었지만 싯다르타는 다시 혼자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이 원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행한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찾는 깨달음은 쉽게 찾을 수 없었고 아름다운 여인 카말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또 상인 카마스와미와 함께 부와 쾌락을 누리는 삶을 산다. 점차 물질적 삶에 지치고 공허해진 싯다르타는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싯다르타는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고 고행을 떠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었던 삶을 살아본다. 속세에서 여인과 사랑도 하고 부자 상인과 물질적 삶을 살아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싯다르타에겐 깨달음이 없었고 싯다르타의 삶은 오히려 더 공허하고 절망적이다. 세월이 흐른 후 싯다르타는 함께 수행을 떠났지만 중간에 헤어진 친구 고빈다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흐른 시간만큼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그때서야 싯다르타는 종교의 교리로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을 전하게 된다. 싯다르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 삶의 모든 여정이 경험이고 깨달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 얻는 깨달음은 진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싯다르타>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를 주인공 '싯다르타'의 인생을 통해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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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신동운 스타북스 헤세 본인의 학창시절과 그 이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인 소설 세 편중 하나인 '싯다르타'를 보았다. 다른 두 작품도 너무나 유명한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 로 세 작품이 모두 다 아름답지만 가슴이 저려오기도 한 아픔도 선사하는 청년기때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그린 작품들이다. 인생 중 한 번 이상은 가슴에 묻어 둔 과거의 기억이나 잊혀진 사건들의 느낌들을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해줄 것이다. <싯다르타>에서는 싯다르타를 통해서, <데미안>에서는 에밀 싱클레어를 통해서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한스 기벤라트를 통해서 읽는 이들에게 과거의 빛났던 또는 그 때 앓았던 청년시절의 그 기억들을 떠오르게 만들어준다. 알다시피 여기 나오는 세 주인공의 모티브는 저자인 헤르만헤세 본인이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헤세는 아마 자신이 겪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잘 정리해뒀거나 잘 모아두고 준비했던 것인가 싶다. 작품을 통해서 너무나 그 점들을 잘 녹여서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을 한다.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독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포장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을 해왔을 것이다.
독일에도 유명하고 멋진 작가들이 많은데 그 중 헤르만 헤세도 빠지지 않는다. 한 작품이라도 국내 유수의 많은 출판사와 번역가들이 앞다투어 번역을 다수 해왔고 여러가지 번역판으로 시중에 나와있다. 번역과정에서도 나뉠 듯하다. 독일어를 바로 한국어로 번역했거나, 독일어가 영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번역했느냐일텐데 이 책은 저자의 약력을 보니까 영어로 된 싯다르타를 한국어로 번역한 버전으로 보인다. 먼저번에 읽었을 때는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버전을 읽었다. 큰 맥락에서는 달라질 것이 없지만 미묘하게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여서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일단 결론은 독일어를 한국어로 바로 번역한 버전이 더 낫다고 말하고 싶다. 이유를 묻는다면 미묘한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묘한 차이가 실제로는 미미하지 않아 번역이 여러 버전이 나오는 이유가 다 있나 싶다. 어떤 독자는 번역자가 누군지 눈여겨 보았다가 번역자의 책을 수소문해서 찾아 읽는 경우도 보았다. 그만큼 작품자체 못지않게 번역도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를 보기 전에 붓다의 본래 어렸을 때 이름이 싯다르타였음을 알고 당연하게도 그의 보리수 아래 경건하고도 험난하게 수행해왔던 뭔가 초월적인 면모와 과정을 기대했을텐데 그렇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붓다가 되기 전에 겪었던 인간적인 과정과 아픔과 시행착오와 속세 속에서 번민한 한 약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될 것이며 그 점이 <싯다르타>라는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 된다. 헤세는 붓다가 되기 전의 작은 붓다가 우리가 같이 그랬을 것이라고 믿었다기 보단 그 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싯다르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싯다르타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점의 빛도 바래지 않고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서가에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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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1877~1962)는 인간의 내면과 자아 탐구를 깊이 있게 그려내고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작가이다. 3년 전 독서모임에서 헤르만 헤세 읽기를 같이 했었는데 당시에는 『싯다르타』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번에 다시 읽고 당시 토론 기록까지 함께 보니 훨씬 흥미로웠다. 『싯다르타』는 동양 사상을 바탕으로 ‘깨달음’이라는 주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싯다르타는 바라문(카스트 제도 최상위 계급)의 아들로 아름답고 총명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자신은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가슴속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p.18)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친구 고빈다의 사랑이 자신을 영원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점점 또렷이 느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사문들을 따라나섰고 그 길에 고빈다도 함께한다. 그는 사문들에게 극단적인 수행법을 비롯한 많은 것을 배웠고 자기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여러 길을 익혔다. 욕망, 기쁨, 슬픔,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비우려 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질문한다.
명상, 육신을 버린다는 것, 단식과 호흡 중지, 그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도피하는 것이다. 인생의 고통을 잊으려는 짤막한 마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도피나 마취쯤은 술을 마셔도 얻을 수 있다고. 그러나 고빈다는 친구를 걱정하며, 우리는 많이 배웠고 윤회의 사슬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높은 세계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윤회란 나선 모양이라고. 그러던 중 부처가 된 고타마의 소식을 듣고 두 친구는 그를 만나러 떠난다. 고타마의 설교를 들은 후 고빈다는 세존의 제자가 되기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세존에 귀의하지 않는다. 지혜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고 판단한다.
세존의 경지를 의심하지 않지만, 세존의 가르침으로 그 자신이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만일 세존의 제자가 된다면, 그를 따르는 일이 자신의 자아를 더 커지게 할까 두렵다고 했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다른 길을 간다. 토론에서 독일인인 저자가 동양의 성인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쉬운 문장으로 설명해 주는 부분이 놀랍다는 의견이 있었다. 특히 지혜는 가르침으로 배울 수 없다고 말하는 싯다르타가 고타마의 한계를 포착한 점이 대단했다. 부처의 기원정사를 떠나 걸으며 싯다르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동안 그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통해 무엇을 배우려 했던가. 문득, 번개처럼 생각이 스쳤다.
그는 깨달았다. 이 세상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었음을. 그는 세상을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은 더 이상 마라의 마술도, 마야의 장막도 아니었다. 무의미하고 우연적인 현상계에 불과한 것도 아니었다. 의미와 본질은 사물 너머에 숨은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그대로 깃들어 있었다.
그는 세상을 배우기 위해 강을 건너 세속으로 들어갔다. 카말라에게 사랑을 배웠고, 상인에게 돈 버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그들을 관찰하는 입장이었다. 그들과 함께 살며 배우는 것은 쉬웠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가 사랑하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하는 이 사람들은, 어린아이 혹은 동물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돈, 쾌락, 하찮은 명예를 위해 서로 싸우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보였으며 사문이라면 웃어넘길 정도의 괴로움에도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오래도록 세속에서 살면서 그는 점점 그들과 닮아갔다. 특히 노름 장면이 인상 깊었다. 그는 무서운 노름꾼이 되어 노름에서 돈을 잃으면 크게 화를 내고, 동시에 장사꾼들의 우상인 돈을 '경멸'하는 행위를 통쾌해했다.
그는 자신의 현재 생활이 윤회라고 느꼈다. 어린아이들의 장난이었다. 싯다르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을을 떠났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난 뒤, 그는 강가에서 삶을 끝내려는 생각까지 했다가 스스로 깜짝 놀랐다. 자신이 그토록 제정신을 잃고 떠돌았던가.
그는 생각했다. 알아야 하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는 일은 반갑다. 쾌락과 부유가 결코 부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것을 눈과 마음과 배 속으로 알게 된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절망의 순간은 필요했던 것이다. 싯다르타는 오래전 강을 건너 준 뱃사공을 다시 만나고 그와 함께 강 옆에 살며 강에게서 배운다. 그와 바스데바가 강가의 현자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는 깨달음에 거의 도달한 듯 보였다. 그런데마지막 반전이 있었다. 토론에서도 다음 부분이 하이라이트라는 평이 많았다. 카말라와 그의 아들이 강을 건너려고 강가에 왔다가 카말라가 뱀에 물려 죽는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만나 깊은 사랑을 느끼고 그를 돌보지만 아들은 떼를 쓰고 행패를 부릴 뿐이다. 바스데바는 아들을 마을로 돌려보내라고 권유하지만 그는 아들이 자신의 그릇된 길을 다시 걷게 될까 두려워했다.
싯다르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천에 옮길 수 없는 지식이었다. 알고 있음과 할 수 없음 사이의 간격이 그를 더 괴롭게 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지식보다 강했으며 아들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그의 비해와 불안은 그 지식을 훨씬 넘어섰다. 결국 아들은 도망쳤다. 그는 아들이 간 길을 따라갔다가 바스데바와 함께 돌아온다.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배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어느새 그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형제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끝내 동정하게 되었다. 그들이 욕심을 내는 이유가 결국은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분주함과 소란이 사실은 마음의 허기를 메우려는 몸짓이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바스데바로부터 지혜를 얻고 바스데바는 싯다르타를 강가에 두고 산속으로, 범의 품으로 떠난다. 강가에서 싯다르타는 고빈다를 다시 만나고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한다. 3년 전보다는 낫지만 지금도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전에 토론 때, 이해하기 어렵다는 후기가 많았었다. 또 헤르만 헤세 작품 주인공들이 '뛰어난 개인'이라서 공감이 덜 간다는 의견과, 말로 전할 수 없다면서 책에서 구구절절 말로 옮기고 있다는 재밌는 의견도 다시 생각이 났다. 🙂 다음에 다시 읽으면 그땐 또 어떨까. 독서 모임에서 다시 읽기를 해도 좋을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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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드디어 싯다르타를 읽었다. 자기이해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고전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나였기에 이 책을 펼쳤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나는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이 삶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분명히 나름대로 열심히, 또 바쁘게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문득 설명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밀려오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감정은 늘 애매하게 흘려보냈던 것인데,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그 감정의 정체를 마주하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왜 이제야 이 책을 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이 오랫동안 읽히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이제서야 체감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깊이 와닿았던 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갈증’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엇을 이루어도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감정,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음, 그리고 스스로의 길을 찾고자 하는 욕망까지. 내가 막연하게 느껴왔던 감정들이 이 책 속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인생은 결국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길을 만들어간다. 정답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고, 또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어떤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과정 자체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는 말처럼, 이 책 역시 어떤 답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방식으로 다가왔다. 나도 더 이상 조급하게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의 고민과 흔들림조차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길 위에 서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길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을 의심하기보다,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삶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마무리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속도대로, 자신의 방향대로 고맙고 즐겁고 편안한 삶을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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