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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墨畫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묵화(墨畫)」 묵화(墨畫)는 영화로 치면 흑백영화이다. 시간적으로는 과거를 향하고 있는 묵화의 세계는 고요한 내면을 추구하는 이와 특히나 잘 어울린다. 달리 말하면 묵화는 적막한 세계를 그림으로 구현한다. 적막함을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적막하다는 것은 흑백의 영상이 빚어내는 분위기를 가리킬 뿐이다. 고요한 상황도 결국은 적막한 상황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김종삼의 「묵화」는 이러한 고요함이 묻어나는 세계를 시어로 표현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시는 그런 고요함-적막함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할머니가 있고, 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화자가 있다. 화자는 할머니와 소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화자가 대상의 의미를 규제하는 이성 주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인데, 이 시에 드러나는 ‘보는 주체’는 시적 대상과 공감하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다. 돌려 말하면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욕망으로 대상의 의미를 재단하지 않는다. 그가 대상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보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내보이는 욕망의 근원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물을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히는 상황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 짧은 시는, 시인이 그린 묵화 속으로 읽는 이를 들어가게 만드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가 손을 얹는 장면은 사실 농촌에서는 일상적으로 벌어진 풍경이다. 그것이 시적으로 무어 그리 특별한 사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시는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걸 우리는 이 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를 단순히 이야기로 한정할 수는 없다. 시는 이야기 너머로 나아가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시에서 그것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사건을 시적으로 해석하는 시인=주체의 마음결로 나타난다. 마음은 마음의 (물)결이다. ‘마음결’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시간과 더불어 진행되는 마음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 이러한 마음결은 시적 대상=상황을 순간적으로 직관하는 존재를 통해 구현된다. 일상적 사건이 시적 사건으로 변주되는 과정에는 무엇보다 대상을 직관하는 시인의 마음결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보는 주체와 시적 대상을 편의상 나누었지만, 작품 속에서 이 둘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할머니가 물 먹는 소 목덜미에 손을 얹는 순간 시인은 할머니-소와 하나가 되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경험한다. 시인은 할머니와 소가 벌이는 상황을 단순히 관찰하는 게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 할머니의 마음을 그대로 추체험한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라는 시적 진술은 따라서 시인이 겪은 일상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함께 하루를 보냈으니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발잔등이 부은 건 노동의 대가가 아니던가. 시인은 노동하는 할머니가 되어 역시 노동으로 발잔등이 부은 소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다. 노동이라는 일상은 이렇게 할머니와 소를 연결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인을 그 세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서로 적막하다고,”라는 이 시의 결구는 일상을 함께 보낸 존재들의 적막함이라는 점에서 쓸쓸함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물론 이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홀로 집안을 꾸리고 있다. 할아버지는 저세상으로 갔을 테고, 자식들은 아마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 할머니는 쓸쓸한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할머니와 소가 이루는 관계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할머니에게 소는 노동의 수단이 아니라는 말이다. 할머니는 소가 있기에 이런 쓸쓸한 풍경을 견딜 수 있다. 소가 남편이고 자식이다. 시인은 할머니가 느끼는 이 정서를 흑백 영상에 담아 우리에게 보여준다. 묵화는 아주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풍경과 맞닿아 있다. 오늘도 할머니는 소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내일도 할머니는 소와 함께 일상을 영위할 것이다. 말 그대로 반복이다. 그리고 그 반복된 일상 속에서 할머니와 소는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게 될 것이다. 김종삼은 바로 두 존재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런 세계를 묵화의 형식으로 묵묵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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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울음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黃海道 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 김종삼, 「민간인(民間人)」
1947년이면 남과 북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이다. 남한과 북한에는 1948년에 단독정부(남한 8월 15일, 북한 9월 9일)가 들어섰다. 국토가 두 나라로 분단되는 시기에, 남쪽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려 했고, 북쪽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올라가려 했다. 김종삼은 바로 이 시기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때는 1947년 봄 어느 날의 심야이고, 장소는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인 용당포이다. 용당포는 황해도 해주에 있다. 사공이 조심조심 노를 젓는 배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황해도는 북쪽에 있으니, 아마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탄 배이리라.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길을 잡은 이 사람들은 혹여나 감시병에 걸릴까 숨을 죽여 밤바다를 건넌다.
갑자기 배에 탄 영아(?兒)가 울음을 터뜨린다. 감시병들이 아이 울음을 들으면 모든 게 끝장이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아이 울음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 아이를 안은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악몽이라도 꾼 것일까? 아니면 배가 고픈 것일까? 배에 탄 사람들의 눈에 공포가 스민다. 아이가 더 이상 울지 못하도록 무슨 수든 써야 한다. 여러 목숨이 달린 일이다.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인은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兒)를 삼킨 곳.”이라고 쓰고 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엄마가 스스로 그 일을 했을까? 아니면, 차마 그러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옆에 있는 누군가가 그 일을 했을까? 누가 그 일을 했든, 배에 탄 사람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이를 죽인 멍에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는 죄가 없다. 울음이 터지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이에게 울음은 본능이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요컨대 아이는 살기 위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살기 위해 우는데, 어른들은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죽음을 본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어른들은 속절없이 죽는다. 이 날을 위해 들인 시간이 얼마인가? 사람들은 아이를 버리고서라도 살기를 원한다. 아이만 사라지면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은 살 수 있다. 아이를 바다에 버리면서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누군가가 죽어야 누군가가 살아야 하는 비극이라니. 누가 사람들을 이런 비극에 빠뜨렸는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정작 아이의 생명 하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이념은 뼈다귀를 취하기 위해 살을 버린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뼈다귀를 얻으려는 싸움에 아이와 같은 약자들만 목숨을 잃는다.
그 날 이후로 스물 몇 해나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남한과 북한은 여전히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자신들이 사는 체제를 선전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남한은 군사 정권이 들어서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을 억압하고 있으며, 북한 또한 일당 독재 체제로 인민들을 억압하고 있다. 시인은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는 진술로 여전히 이념 싸움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이념에 빠진 사람들은 아이가 왜 바다에 빠져야 했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를 살리는 게 아니라 권력을 쟁취하는 데 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아이 하나쯤 죽어도 상관없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인간이 만든 이념이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인은 ‘민간인’이라는 시 제목으로 이념에 희생된 민간인의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도 이 비극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권력과 권력이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 속에서 힘이 없는 민간인들은 속절없이 목숨을 잃는다. 아이들이 왜 포탄에 맞아 죽어야 하는가? 아이들이 왜 포탄에 맞아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야 하는가? 아이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이들은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은 정작 안전한 후방에서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아이들 하나가 죽어갈 때마다 권력자들은 이익을 얻는다. 전쟁이 일어나야 무기를 소비하고, 그래야 무기를 만든 권력자들은 돈을 번다. ‘민간인’을 죽음터로 내몰수록 자본은 더욱 증식되는 이 상황을 우리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 한다. 오늘도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인간의 비극.
2. 시인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시인에게 묻는다. 시가 무엇이냐고? 참으로 막연한 질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글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이렇게 대답을 해도 맞고, 저렇게 얘기를 해도 맞다. 정답이 없는 물음이라는 말이다. 시인은 어떤 답변을 내놓았을까?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시인은 스스로를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시에 대해 무어라도 말할 듯한데, 시인은 아예 시인이 아니라는 말로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 시에 대한 물음은 시인에 대한 물음과 같은 것일까?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시에 대해 대답하려면, 시인에 대해서도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 곧 시인이니까. 물론 시와 시인이 동일할 수는 없다. 시인은 언어로 시를 쓴다. 시인과 시 사이에는 ‘언어’라는 매개가 있다. 시인과 시에 대해 말하려면 그래서 ‘언어’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시에 대해 물었는데, 시인을 알아야 하고 언어를 알아야 하는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까? 스스로를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 시인은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거닌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이곳을 거닐면 시에 대해, 시인에 대해, 언어에 대해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일까? 시인은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던 생각을 한다. 빈대떡을 먹으며 시인은 시에 대해 생각한 것일까? 하긴 빈대떡은 빈대떡이고 시는 시라고 말해도 사실 무방하다. 빈대떡이 시라고 말한들 그 누가 탓하랴. 앞서 말한 대로 시를 정의내리는 뚜렷한 내용이 있을 리 없다. 천 명의 시인이 있다면 천 개의 시가 있을 뿐이다. 시인마다 생각하는 시가 다르고, 시인마다 쓰는 시가 다르다. 시가 뭐냐는 답을 얻으려면 그러므로 시를 쓰는 사람 모두를 만나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면 시가 뭐냐는 물음에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시를 쓰는 사람들만큼의 시에 대한 생각이 나올 수는 있겠다. 돌려 말하면 아무리 많은 시인들을 만나도 시가 뭐냐는 물음에 걸맞은 정답을 얻기는 힘들다. 이 때문일까? 시인은 저녁녘 남대문 시장에서 시를 생각하지 않고 빈대떡 먹던 시절을 떠올린다. 시간이 흘러도 빈대떡을 먹던 맛은 여전히 몸에 새겨져 있다. 시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시에 대한 감각이 몸에 새겨져 있어, 사람들이 시가 뭐냐고 물으면 저녁녘 남대문 시장에서 먹던 빈대떡 맛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빈대떡 맛을 모르는 사람들은 빈대떡을 먹으면 된다. 물론 사람마다 빈대떡 맛을 다르게 느낄 수 있지만, 최소한 맛있다, 맛없다 정도로 통일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이 정도라도 시에 대한 감각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나마 괜찮을 것도 같다.
하지만 시와 빈대떡은 엄연히 다르다. 시는 우리가 빈대떡에서 느끼는 맛감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시에도 감각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언어’라는 매체를 경유한 감각 이미지라는 점에서 실제로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니다. 그러니 시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시를 써보면 된다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빈대떡이라는 사물은 뚜렷하지만, 시라는 사물은 뚜렷하지 않다. 대상이 없는 대상을 말해야 할 때 드는 낭패감이 밀려든다고나 할까. 시인은 시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을 멀찌감치 떨쳐두고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저 사람들이 있어 이 세상이 돌아간다.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가식적인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시에 대해 질문을 던졌는데, 시인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시인은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라고 표현한다. ‘알파’와 ‘고귀’와 ‘광명’이라는 찬사가 붙은 이 사람들은 그러나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무교동에도 있고, 종로에도 있고, 명동에도 있고, 남산에도 있고, 서울역 앞에도 있다. 어디에나 있는 이 사람들을 떠올림으로써 시인은 시인됨의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알파가 되어야 하고, 고귀한 인류가 되어야 하고, 영원한 광명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될 수 있느냐고? 대답은 이미 나왔다.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김종삼은 그러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시인을 정리한 것이다. 시인도 못되는 사람이 내놓은 답변치고는 참으로 알차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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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김상욱 외)>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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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2 김종삼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 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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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연 생각 : 우리 현대시사를 통해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도 평가되는 김종삼 시인의 작품입니다.
장편(掌篇)이란 손바닥만한 크기의 작품이란 뜻으로 매우 짧은 산문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콩트라고도 하고요.
거지 소녀가 장님 부모를 데리고 오자, 식당 주인은 화를 내며 그들을 쫓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거지 소녀는 10전짜리 두 개를 내놓았고요. 소녀는 부모의 생일이라서 모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온 것이지요.
일제강점기 때는 외식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식대은 상당히 고가이지요. 당시 10전은 지금 시세로 만원이 훨씬 넘는 금액입니다.
거지인 이 소녀는 그 돈을 어디서 구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푼 두 푼 그야말로 수백 번을 구걸해서 그 돈을 만들었겠지요. 자신의 식사는 시키지 않고 부모님 두 분만 드시도록 2인분만 주문한 것이고요. 소녀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 긴 사연들이 열 줄도 안 되는 이 짤막한 시속에 모두 담겨 있으니, 그야말로 장편(掌篇)이란 제목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작품이네요.
* 김종삼(1921~1984 ) : 시인.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남. 일본 도요시마 상업학교 졸업. 1951년 <현대예술>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함. 평생 보헤미안처럼 살며 고전음악에 심취했던 시인으로, 세속적인 것에 일체 관심을 두지 않고 무구한 세계를 지향함. 과감한 생략과 절제된 언어로 여백의 미를 살린 시를 씀. 시집 <십이음계>, <시인학교>, <북치는 소년>,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등이 있음.
* 자료 출처 : 2010학년도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와, <석류꽃, 1952, 현대사>에 실려있으며, 감상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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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어느 평론가는 ' 우리 시에서 "가장 순도 높은 순수시"를 쓴 시인 또는 한국 현대시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데. 잘 모르겠다.
아무리 찾아 봐도 <북치는 소년>이 안 보인다. 어디로 갔나? 하도 정신없이 읽다 보니 빠트렸나. 요즘도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김종삼의 삶은 고단했다. 수 많은 죽음을 맞닥뜨리면서도 자신의 죽음만은 지겹게 비껴갔다. 운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삶도 어떤 삶인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종삼의 시를 보면서 그의 삶도 대충 짐작이 간다. 얼마나 적막한 삶이었을까.
시를 보고 시인의 삶을 짐작한다는 것이 많은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이런 무리를 리로 바꾸는 데는 전집을 읽는 것이 최고이다. 독자는 전집을 통해 한 시인의 삶을 통시적으로 관통한다. 전집을 통해 시인의 삶과 우리의 역사를 본다. 문득, 김종삼의 초기 시를 보며 김윤식 선생이 말한 '인공어 세대'라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것 같다. 다만, 그런 건 있다. 2000년대의 독자는 김수영의 시를 보면서는 그런 인공어를 환상으로 받아들이면서 김종삼의 시에서는 매끄럽지 못함을 발견해야 하는가. 나의 경우다.
나는 시인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간혹 티벳에서 라싸를 찾아가는 고행객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의심도 생긴다. 진정 그들의 삶은 진정성이 있는가. 그들은 자신의 운명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게으름에 순응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게으름은 어떤 가치를 갖는 단어인가.
이 책이 끝까지 살아남을 지 모르겠다. 책값을 봤다. 이 책을 누가 사서 읽을까. 아니, 공짜라고 해도 누가 읽을까. 이제, 이런 전집은 발행했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지니는 시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