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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감독이자 동화 작가인 프레데릭 바크의 작품은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4년 동안 색연필과 크레용으로 그린 17,000장의 애니메이션 <위대한 강>을 보고 있노라면 선한 기운이 잔잔한 강물처럼 밀려온다. 눈을 감으면 스케치를 하는 작가와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호기심 가득한 어린 목동, 그리고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송아지가 있는 막토고엑 강변이 떠오른다. 어린 목동의 눈과 송아지의 눈, 그에게 이 둘의 구분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목동과 송아지의 눈망울이 그렇듯 작품 속의 자연과 사람은 서로를 닮았다. 미키 마우스처럼 부러 의인화한 게 아닌데도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이 인간을 닮아 있다. 아니,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을 닮았다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자연이 인간과 더불어 동질의 무게와 질감으로 다룬 작품이 주는 깊은 울림이 있다. 그렇다고 그가 막연한 낙원을 그리고 있는 건 아니다.
천 그루의 떡갈나무를 심은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담음 작품 <나무를 심는 사람>은 실제로 산림보호운동에 전 세계인의 동참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농사를 짓고 나무를 심는 성실한 환경실천가로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어야 한다"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이 옳다면 파스텔풍의 따스한 그림과 짧고 쉬운 문장으로 머리보다 가슴에 먼저 와 닿는 그의 작품은 환경에 관한 정책이나 구호가 가질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도는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위대한 강>은 북미 원주민에게 '막토고엑'(벼랑 위의 새들을 불러 먹이고 번식케 하는 자비로운 신)으로 불리다가 식민지 개척을 나선 백인에 의해 '세인트로렌스'로 이름이 바뀐 아메리카 대륙의 북동부 1만 리에 이르는 강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의 기념품 정도로 끌어내려진 세인트로렌스(聖 라우렌시오의 이름을 기념)가 아닌 마토고엑, 위대한 신의 자리를 되찾아 주어야만 위대한 강은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강에게 신의 자리를 내어줌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위대한 강>이 주는 메시지를 철학자 마틴 부버의 입을 빌어서 풀자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수직지배적인 수단으로 보는 '나-그것' 관계가 아닌 수평적이고 상호 평등한 '나-너' 관계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년 전 이맘 때 벌어진 삼성 태안기름유출 사건 역시 오래되어 낡은 선체나 관리 소홀이 문제가 아니다. 석유문명이 불러온 재앙임을 깨닫는 과정이 먼저 듯이 오염 물질 규제나 감소 정도의 '나-그것'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위대한 강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그것'으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나-너'의 관계를 통한 우리의 회복, 다시 말해 위대한 강이 '영원한 당신'일 수밖에 없는 초월적 위치에 서 있어야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이 책에 나오는 세인트로렌스 강의 이야기는 캐나다에 있는 강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있는 강들의 이야기이다. 남의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한강과 낙동강과 그 밖의 여러 강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세인트로렌스 강은 우리나라의 한강에 비해 훨씬 깨끗하다. 그런데도 캐나다 정부와 국민은 이 강이 옛날에 비해 심각하게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 강을 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