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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좀 있는 소설이라는 것을 읽기 전에 알았다. 1940년에 완성한 소설을 출판하려 했으나 너무 파격적으로 환상적이라는 이유로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 거절을 당하고는, 작가는 소설 원고를 잃어버렸다고 해지만 결국 작가가 죽은 후에 원고가 발견되었다. 출판된 이후에는 작가의 대표작이 된 소설.
작가의 이름도 이 소설에서는 플랜 오브라이언이라고 되어 있지만, 본명이 브라이언 오놀란이면서 여러 필명으로 소설과 희곡, 평론을 발표했다고 한다. 얽힌 사정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추측만 한다.
읽기에 정말 난감했다. 스토리는 따라가겠는데,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맥락 없이 이어지는, 억지 같은 대화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는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꾹꾹 참으며 읽었다. 그렇다. 참으며 읽었다.
그렇게 끝까지 다 읽었다. 겨우 따라가던 스토리의 의미가 결국 많이 선명해졌다. 대화에 관해서는 세부적인 건 여전히 흐릿하지만 말이다. 결국 이름도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 주인공은 지옥을 헤맨다는 얘기다. 그 지옥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지옥이 아니다. 마치 현실 같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곳이란 얘기가 아닌가? 그리고 기억은 늘 새로 셋팅되면서 돌고도는 지옥. 16년이 지났지만 마치 처음의 경험인 것은 낯설고, 불가해한 상황이 바로 지옥이다.
경찰관의 기이한 모습과 행동, 대화를 통해 공권력을 비판했다고는 하다. 물론 그것도 읽히지만, 더 선명하게 읽히는 건 주인공의 뻔뻔스러운 자기 중심성이다. 스스로 누군가를 죽였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 살인에 대한 죗값이 아니라) 부당하게 사형당하는 것을 무척이나 억울하게 생각한다. 그건 반복되는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자신이 살아 있을 적에 노인을 죽였다는 것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단지 자신의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지은 잘못과는 상관없이 억울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다.
옮긴이의 해설을 보니, 영어에 아일랜드의 리듬과 문체를 섞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장이 ”이질적이고 모순된 요소, 묘하게 부자연스럽고 낯선 요소“를 포함한다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된 문장에서는 그런 미묘한 것은 알 수 없다. 번역의 한계다. 그저 의미 없음만 잔뜩이다. 실은 그게 작가가 의도한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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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다. 게다가 반복이다. 끝나지 않는 단죄, 벗어날 수 없는 족쇄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각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구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름을 잃어버린 남자. 죄책감도 잊은 듯하다. 그러니 죄책감이 사람으로 형상화 되어 지독하게 따라왔던가. 복선은 예상한 그대로였지만 그럼에도 읽어 내려가는 힘이 약해지진 않는다. 오히려 더 궁금해서 뒷장으로 내달리게 된다. 마지막 문단을 읽는 순간 심장 바닥에 무거운 고철 덩어리가 턱 놓여진 듯했다. 이런 지옥의 굴레라니. 그간 몹시도 미웠던 나의 현실과 직장 문제가 깃털이 되어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이런 역설적인 위로의 감각을 느낄 줄은 몰랐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러나 또 일리는 있는 가짜 철학을 늘어놓고, 가상의 인물에 대해 '과도한 주석'을 달고, 고차원의 풍자와 유머를 시도한다. '뭔 소리야?' 라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스며든다. 그럼에도 읽게 된다. 작가 필력이 대단한 걸까. 오브라이언은 정말 골 때리는 매력을 지녔다. 그 '과도한 주석'이라는 것은 정말 한치의 모자람없이 과-하다. '사람 놀리나?' 싶다. 본문은 달랑 1줄 적어놓고 나머지 빈 공간을 전부 빼곡한 활자의 각주로 채워두다니. 게다가 그 각주마저 오로지 거짓만을 말하고 있다니. 소설의 구조 자체가 이렇게나 해학적인 언어 유희와 작가의 비꼬려는 의도를 듬뿍 품고 있다. 나는 드 셀비가 가상의 인물임을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결국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해보고 만다. 제대로 속았다. 이 소설은 늘 그런 식이다. 말이 안 되는걸 알고 있는데도 속아 넘어가게 된다. 현실과 꿈의 경계도 없고, 인과와 논리가 없는 흐름은 어지럽다 못해 골치 아프다. 온갖 물음표를 껴안은 채 책장을 넘기게 된다. 아마 이 구간에서 중도 하차를 결심할 사람이 꽤 있으리라 예상해본다. 하지만 읽기 시작했다면 완독하길 추천한다.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는 소설인가. 죄책감이다. 끝나지 않는 단죄, 벗어날 수 없는 족쇄다. 자신의 죄와 실수를 자각하지 못한 채 개똥밭에 구르는 인간의 단상이다. 화자의 죄는 심판자의 얼굴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순환한다. 기억은 있으나 탈출은 없다. 뉘우침이 있어도 소용없는 쳇바퀴의 지옥이다. 단순한 응보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이름도 없고 자아의 경계도 없는 채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얼굴을 마주하며, 끝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고 같은 길을 다시 걷는 것. 그것이 오브라이언이 만들어낸 지옥의 구조일까. 화자와 디브니가 탈출해야 했던 것은 그 혼란스러운 세계가 아니라, 본인들의 잘못된 선택이다. 저자에 대해 알아보던 중 그가 1966년 4월 1일, 만우절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접했다. 독자를 속이고 현실을 비트는 글을 쓰던 작가가 만우절에 떠났다니, 그조차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느껴진다. 오브라이언씨. 당신의 소설도 삶도, 거참 어려운 팬케이크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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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협찬을 통해 작성한 글이며, 내용은 필자의 독립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을 담았습니다.
1. 명령에 따른 기계적 살인
이름 없는 주인공은 철학자 '드 셀비'의 연구서를 출간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활한 동업자 존 디브니와 공모하여 부유한 노인 매더스를 살해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살인이 주인공의 자발적인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범인 존 디브니의 지시가 떨어지자 주인공은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그에 반응하여 처참한 결과를 낳는다. 얼마 뒤, 디브니가 숨긴 금고를 찾아 바닥 아래로 손을 뻗는 순간, 주인공은 기이한 감각과 함께 우리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2. 고전 속 살인자들과의 대조
문학사에는 각기 다른 이유로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들이 등장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는 사회의 악이라 규정한 전당포 노파를 죽였고, 《이방인》의 뫼르소는 눈을 찌르는 강렬한 태양 아래 얼떨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이 '확신'의 산물이고 뫼르소의 살인이 '우연'의 결과라면, 이 소설 주인공의 살인은 자기 의사가 거세된 '기계적 복종'에 가깝다. 라스콜니코프가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지옥에 갇히고 뫼르소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다면, 이름 없는 이 주인공은 살인과 동시에 논리가 사라진 '영원한 루프' 속으로 추락한다. 그가 마주하는 것은 법적 심판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파리가 사실은 별채라고 우기는 기괴한 경찰들의 세계다.
3. 자전거와 인간이 섞이는 황당한 물리 법칙
이 기이한 세계는 인간의 영혼이 자전거의 원자와 뒤섞인다는 황당한 논리가 지배한다. 주인공은 이 부조리한 풍경 속에서 점차 자아를 잃어간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이름은 알지 못하는 익명의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 자아 분열의 과정에는 또 하나의 장치가 있다. 바로 주인공의 머릿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아, '조'다. 조는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며 이 기이한 현실을 함께 목격하는 내면의 목소리로, 주인공이 이름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침묵이 흐를 때마다 처지의 공포스러움이 머리 위로 던져진 무거운 담요처럼 주인공을 덮치고 휘감아 질식시키지만, 이 기이한 세계 속에서 공포는 점차 무기력한 일상으로 변모한다.
4. 가장 잔인한 형벌, '영원한 반복’
결국 이 소설에서 살인은 단순히 죄를 짓는 행위가 아니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영겁'이라는 이름의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된다. 라스콜니코프에게 살인이 '구원'을 향한 고통스러운 시작이었다면, 이 주인공에게 살인은 '나 자신조차 희미해지는 부조리한 반복'이라는 형벌을 선사한다.
소설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전개되지만,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마주한다. 주인공이 다시 그 기괴한 경찰서 앞에 서는 순간, 그가 겪은 모든 소동은 영원히 반복될 '닫힌 지옥'의 일부가 된다. 끝이 나지 않는 지옥의 루프, 그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도 가혹한 형벌이다. 여기에는 쓸쓸한 역설이 하나 더 숨어 있다. 작가 플랜 오브라이언은 이 소설을 1940년에 완성했지만, 출판사의 거절로 생전에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소설이 출간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인, 1967년의 일이다. 반복되는 지옥을 그린 작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반복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이 소설을 읽는 여운을 한층 더 깊게 만든다. #세번째경찰관 #플랜오브라이언 #을유세계문화사 #을유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_서평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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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경찰관』 은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현대 아일랜드 문학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플랜 오브라이언의 유작이자 대표작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독보적인 색채를 드러냈던 그는 아일랜드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주 언급된다. 이 작품은 그가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집필한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사후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매우 유명하다. 너무 환상적이라는 이유로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했다. 그러나 사후 출간 이후 20세기 최고의 컬트 소설 중 하나로 손꼽히며 미드의 팬이라면 고전과도 같은 드라마 <로스트>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인공 '나'는 철학자 드 셀비의 연구서를 펴내고 싶어 하지만 돈이 부족하다. 출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친구 존 디브니와 모의하여 부유한 노인 매더스를 살해하고 그 노인이 가진 금고를 훔친다. 한편 친구 디브니는 금고를 독차지할 속셈이라는 것을 살인 뒤에 알게 된다. 디브니는 금고의 위치를 묻는 주인공의 질문에 계속 답을 피하다가 "내가 여길 제대로 만들어 놓으려고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도 날 믿지 못한다니 유감이군." 이라 말하며 그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해 금고는 주인공에게 직접 가지고 오라고 위치를 알려준다. 금고를 매더스 노인의 빈집에 숨겨놓았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그 집에 갔는데 금고가 없다. 아니 그런데 금고가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매더스 노인이 살아있다. 그 집에 있는 매더스 노인과 한참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인에게서 무척 신기한 능력을 가진 경찰관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 경찰관들은 이 금고의 위치를 알려줄 것이라 기대한 나는 경찰관을 찾아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은 경찰관들을 만나게 되는데, 경찰관들을 만난 이후 주인공은 온갖 이상한 사건들에 연루된다. 자 먼저 이 작품이 블랙코미디 요소가 가득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독자인 우리는 처음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지만 노인을 죽였다는 죄책감보다는 친구가 금고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게 된다. 화자에게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한편 주인공이 금고를 찾으러 나가서 본인이 죽인 노인을 만나게 되고 상당히 놀란다. 그런데 그 순간 '조'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조는 일종의 도덕적 자아이자 이성적 자아이다. 살해한 노인을 재회했지만 오로지 이 노인을 이용해먹을 생각밖에 없고 심지어 이 노인에게 환대를 기대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착잡해진다. 그런데 또 화자는 금고를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도 경찰들을 만난 이후에도 온갖 사건들에 빠지고 위협을 받기 때문에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독자인 나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이고 '아, 이것은 이 작품의 블랙코미디 요소에 대한 반응이구나'를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작품의 초반에 해당한다. 화자가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계속된다. 주인공은 교수형에 처할 위기에 놓이는데,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결연하게 저항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독자인 우리는 '아니, 그래요 억울하겠네요. 그런데 당신 사람 죽였잖아요... 그건 기억도 나지 않나요?'라고 말하고 싶다.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경찰관들이 휘두르는 공권력의 횡포로 부당한 죽음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작가가 구축한 이 한 편의 엉망진창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인간사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를 맛본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경찰관들이다. 주인공이 처음 경찰관과 만났을 때 그들의 거대한 덩치에 살짝 긴장하게 되지만 상냥한 태도로 맞이해주기에 마음을 놓는다. 그런데 곧바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겉으로는 협조적이고 친절하다. 그러나 경찰들은 곧 그들의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 면을 드러낸다. 경찰관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초자연적인 현상을 계속하여 목격하게 된다. 아니 왜 그 궤짝에서 궤짝들이 무한히 나오는 것이죠? 머라고요? 무엇보다 왜 그렇게 자전거에 집착하는 것인가? 작품에서 자전거는 무척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고 보니 경찰이 주인공에게 제일 처음 건넨 말이 바로 "자전거 때문에 오셨습니까" 였다. 경찰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전거를 오래 타면 서로 닮게 된다. 사람의 원자와 자전거의 원자가 서로 교환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자전거가 되기도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가. 아무튼 그래서 경찰관들은 자전거 관련 범죄를 무척 심각하게 여긴다. 자전거를 절도하는 것은 곧 사람을 훼손하는 것과 동격이다. 아...... 최근 나는 신유물론에 대한 개론서를 열심히 읽었는데 도움을 받았다. 그래... 물질도 능동적 행위자이지. 그래... 자전거와 사람이 오래 있다 보면 서로 관련을 맺고 닮아가기 마련이다... 나는 어떻게든 작가가 구축한 세계에 머무르고자 애를 쓴다. 아무튼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작가가 펼쳐내는 세계 속으로 점점 걸어 들어갔다.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가득한 환상소설 속으로. 이 거대한 엉망진창 부조리 속으로. 아, 그리고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작품 속에 포함된 철학적 요소이다.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두 철학적 개념은 베르그송의 시간과 지속개념과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다. 소설 속의 시공간 개념은 초현실적이고 주관적이며 주인공이 겪는 사건들이 무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테리 이글턴의 『모더니즘 : 위기의 문학』 을 읽었다. 모더니즘 작품들은 난해하다. 작가들은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작품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또한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특정한 시기에 살았고 그 특정한 시기에는 특정한 사회적 변동이 있었다. 작가의 감수성을 거쳐 시대의 변화와 부조리가 표현된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달된다. 플랜 오브라이언은 1911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23년 더블린으로 이주했고 1935년부터 1953년까지 아일랜드 공무원으로 일했고 1966년 만우절에 더블린에서 사망했다. 공무원으로 일했기에 행정 시스템의 무능과 형식주의, 관료주의의 병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작품 속에 경찰관들의 모습들을 떠올려보자. 영국에서 갓 독립한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영국 문화와 아일랜드 전통문화의 뒤섞임 속에서 정체성 혼란을 느꼈다. 작품 속의 '조'의 존재를 떠올려보자. 강한 가톨릭 사회였던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주인공 나는 살인을 해도 그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할 생각밖에 없다. 작품은 그가 이미 죽은 상태였고 따라서 그가 있었던 곳은 지옥임을 암시한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에 처음 걸어 들어갈 때는 잠시 혼란스럽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지? 무슨 일이지? 이게 말이 돼? 그 세계에서 머물다 보면 이 낯설고 말이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별로 변함없는 우리의 악의 본성,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길 바라는 어리석음 등 말이다. 「뉴스위크」는 "어둡지만 재치가 넘치는 철학 소설"이라 표현했는데 가장 와닿는 평이다. 이 작품은 한번 읽고 덮을 책이 아니다. 읽고 또 읽으면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팬들이 많은가 보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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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촘스키가 아닌 오브라이언의 자전거 이론(bicycle theory)을 국문으로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서 잠깐은 얼떨떨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책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찾아 읽었어요. 그러다가는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가 떠올랐습니다. "배의 모든 부품을 하나씩 바꾸었을 때, 그 배는 이전의 배와 같은 배인가?" 플랜 오브라이언은 이 철학적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거의 선언문의 형식처럼 작성합니다. "인간이 자전거를 많이 타면 인간은 자전거가 된다!" 자전거를 객체가 아닌 주체처럼 묘사하다보니, 논리적 정합성을 갖춘 듯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소설은 어쩐지 논리적인 비논리 - 논리 체계를 갖춘 비논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듯 합니다. 특히, 이름 없는 화자가 드 셀비를 연구하면서도 그러한 살인과 강도를 저지르는 이유가 돈을 많이 벌어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 - 셀비가 그토록 혐오했던 - 에 틀어박혀만 있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야기 할 때, 저는 "역설적"이라는 메모를 적어두었습니다. 글을 끝까지 읽으니 그 단어가 이 소설을 관통하는 단어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진정한 희극 정신이란 깊은 사유에서 나온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배웠어요. 그리고 문득 율리시스 독회가 십 몇 년도 넘게 이어지는 이유 같은 걸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책을 해석할 여지가 많아서요! 그리고 일전,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좋아한다던 어떤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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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경찰관, 플랜 오브라이언
을유문화사 . 현실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현실 같지 않은 세계와 이해하려 할수록 더 낯설어지는 세계의 이야기, <세 번째 경찰관> . 한 남자는 친구 존 디브니와 함께 한 범죄에 얽힌 뒤, 숨겨진 금고를 찾기 위해 시골 마을을 떠돌게 된다. 그 여정 속에서 그는 어딘가 수상하고 요상한 경찰들을 만나고, 자전거와 인간이 섞인다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평범한 사건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나는 아주 낯설고 기묘한,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 이야기 속 인물들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이 설명하는 것들은 이상할 정도로 엉뚱하다. 자전거에 관한 이론이나 농담처럼 보이는 설명들은 분명 ‘논리적’으로 이어지는데 결론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이상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상함이 때로는 묘한 설득력을 갖기도 했다. . “거의 절반은 사람이고 반은 자전거인 주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놀라실 거예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만 심하게 구멍 난 타이어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126쪽) .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연신 갸웃거렸다. “지금 이 말이 농담인가, 아니면 진지한 이야기인가.” 나를 놀리듯 눈앞에 던져 놓는 의미심장한 설정과 엉뚱한 논리에 이야기의 의미를 찾기보다, 그저 화자의 이야기와 감정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 정말 한도 끝도 없어. 조가 말했다. 여기서는 못할 말이 없고, 뭐든 진실이 되고, 믿지 않을 수가 없군. (126쪽) . 화자의 내면을 드러내는 지속적 존재이자 마음 깊숙이 자리한 불안과 호기심의 목소리, ‘조’는 화자의 속마음과 생각을 낱낱이 보여주며, 이야기 속 세계에 더 깊이 몰입하도록 안내한다. 화자가 느끼는 죄책감, 혼란, 그리고 존재에 대한 고민까지 함께 느끼며 묘한 불안과 신비로움을 온전히 체감할 수 있었다. . 사방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른 기운, 깨어나고 시작하는 느낌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직 자라거나 무르익지 않았고, 시작한 것은 끝나지 않았다. 나타나고 있는 토끼는 꼬리를 드러내기 전이었다. (212쪽) . <세 번째 경찰관>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내용보다 분위기 때문이었다. 줄거리는 전혀 복잡하지 않은데, 자꾸만 길을 잃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장면은 분명 현실 속 익숙한 장면처럼 시작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마치 꿈속에서 길을 걷다가 문득 “여기가 어디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과 비슷했다. . 명확한 감동이라기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여운이 남는다. 재미있고, 불안하다. 웃기면서, 쓸쓸하다. 어쩌면 이 소설의 매력이 바로 이 ‘애매함’이 아닐까. 경찰관의 말과 이론, 화자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문장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맴돌기 때문에, 쉽게 잊지 못할 이야기가 될 것 같다. . #세번째경찰관 #을유문화사 #을유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_서평단 .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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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세 번째 경찰관] 서평 플랜 오브라이언 지음/이정화 옮김 1940년 작가는 완고한 출판사들로부터 거절당한 뒤, 원고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며 27년간 서랍 속에 감춰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세상에 나온 이 책은 아일랜드 문학의 보석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게 되면 독자는 단순한 독서를 넘어 '지적인 멀미'와 '기묘한 해방감'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 당연했던 세상이 '의심'스러워집니다 우리는 밤이 오면 해가 진다고 생각하고, 바람은 그저 공기의 흐름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길가에 부는 바람을 보며 '저건 무슨 색일까?'라고 자문하게 되거나, 밤의 어둠이 정말로 '검은 공기'가 쌓인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익숙한 현실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경험이죠. ✍️.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름을 잊어버린 주인공이 경찰서에서 겪는 수모를 보며, 독자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나라고 믿는 근거들이 사실은 이름표, 주민등록번호, 소유한 물건들 같은 '외부의 기호'들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요. 이 책은 "그 모든 껍데기를 벗겨냈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묵직한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 사물과의 관계가 기묘해집니다 (자전거의 유혹)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면 길거리에 세워진 자전거를 예사로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혹시 저 자전거의 주인은 자전거와 원자를 너무 많이 섞어서 이미 반쯤은 고무와 철로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오브라이언식 유머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되거든요. 사물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부조리한 공포와 웃음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어른 버전을 여행한 기분이 듭니다. 앨리스처럼 환상적이지만 그 끝은 훨씬 서늘합니다. 살인이라는 무거운 죄의 대가가 물리 법칙이 붕괴된 기괴한 지옥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뫼비우스의 띠)임을 깨닫는 순간, 독자는 이 책이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대한 거대한 비유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p177이봐. 가기 전에 말해 줄게. 난 네 영혼이고, 네 모든 영혼이야. 내가 가면 넌 죽게 돼. 과거의 인류는 새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실제로 담겨 있어. ✍️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 "당신이 믿는 현실은 정말로 실재하는가?" 작가는 우리가 집착하는 이름, 명예, 지식 같은 것들이 이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는 자전거 바퀴살보다 못한 가치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현실에 대한 맹신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기괴한 여행은 결국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겪는 '영원한 회귀'의 형벌이며,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굴레를 상징합니다. 📝 결론적으로 읽기 전에는 '난해하고 이상한 책'일 수 있지만, 읽고 나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렌즈'를 갖게 되는 책입니다. 이 책의 파편화된 괴변들도 결국 '실존의 허무와 죄의 굴레'라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해 줍니다. 내 안의 또다른 자아와 종종 대화를 나누지만, 이 책을 통해서 언어유희의 재간에 말문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기를 반복했습니다. 위 서평은 출판사로 부터 도서를 제공받아서 작성하였습니다. @eulyoo #을유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_서평단 #을유문화사 #세번째경찰 #세계문학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