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진즉에 나왔어야 할 책이다. 홍세화 선생님의 그 '나느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가졌던 파워와 감동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똘레랑스'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홍세화 선생님께서 직접 이 개념을 설명하진 않으셨지만, 오히려 이런 번역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성격상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책은 똘레랑스에 대해서 쉽고 깊이있게 접근하고 있다. 홍세화 선생님의 서문, 신문기사, 저자와의 대담을 거친 후에 이 글을 읽으면 더욱 신뢰가 간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그만큼 저자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번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책 내용에 대한 오자와 저자에 대한 궁금증에 대해서 메일을 주면 저자와 연락해서 성실히 답변하겠다는 첫머리의 말은 특별했다. 보통의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써비스였기 때문이다. 아마 이 역시 똘레랑스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일지도 모르겠다. 똘레랑스는 인류애이며, 영원불멸한 인간 권리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숙된 가치이며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의사소통의 밑바탕이다. 소통과 평화, 자유가 느껴지는 똘레랑스. 우리에게도 그런 가치와 태도가 생겼으면 좋겠다. 또 하나. 이 책을 읽어본다면, 혹자가 말한, 똘레랑스 역시 사대주의이며, 불필요한 서구 개념의 수용이라는 오해를 씻어낼 것이다. 덧붙여서, 나는 상형문자라는 출판사를 처음 보았는데, 상당히 인상이 깊었다. 이 책은 '라딕스 총서'의 일환으로 나왔다고 책의 첫머리에 소개가 되어 있는데, 이 총서를 간행한 이유가 아주 강렬하고 신랄하다. 책 자체와 더불어 이 머릿말을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지금도 이런 출판사가 있다니! |
| 똘레랑스. 빠리의 택시 운전사였던 홍세화씨가 우리 나라에 소개한 개념이다. 불어로 '참다', '견디다'라는 뜻의 이 말은 한국어로는 관용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다른 것, 내가 불편한 것을 참는다는 의미의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파시즘의 나라인 대한민국 사회에 큰 방향을 불러 일으킬만한 것이었고, 이러한 사회구조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의 취향이 되어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 홍세화씨와 똘레랑스는 큰 방향을 일으켰다. 저자는 똘레랑스를 3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 첫번째가 기독교 전제정치 하에서 똘레랑스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공리주의에 의한 똘레랑스 이다. 그 마지막이 자유를 위한 똘레랑스 이다. 이 세가지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바일, 로크에서 시작해서 마르쿠제까지 서양근대사상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똘레랑스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필요한 그리고 절실한 사상이다. 그러나 3가지 측면에서 똘레랑스를 다시 한번 고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첫번째는 다만 서로를 이해하는데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이해해"라는 말은 너무나도 허무하고 아무것도 바꾸어지지 않는 현재를 유지시키는 보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자신을 성찰적으로 바라보고 상대와 계속 대화(폭력이 아닌)하겠다는 의지로 이어져야지 그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두번째는 똘레랑스는 가진자의 아량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못가진 사람들을 "어여삐여겨" 베푸는 아량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전제 아래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는 태도가 바로 똘레랑스 인 것이다. 가진자의 아량은 오히려 똘레랑스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똘레랑스는 저항의 무기라는 점이다. 거리에서 집회를 하는 이들에게 "대화하지 않는 앵똘레랑"이라고 칭하는 것은 똘레랑스의 저항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똘레랑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앵똘레랑스를 앵똘레랑스하라"라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의 거대한 힘이 민중을 혹은 공동체의 구성원을 앵똘레랑스하고 있는 상황에,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 조차 누리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어서 우리는 사회구조를 앵똘레랑스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똘레랑스는 단순히 현재를 긍정하는 비폭력의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를 앵똘레랑스하는 저항의 무기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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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항상 '장미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오랑캐꽃과 쟈스민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없애지 못하는' 세계에 조화를 깃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이 우리와 다른 것을 기쁨으로 받아 안아야 하고 그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해야 한다. 이 조화를 관망하는 속에서 진리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그 경계를 찾아야 한다>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잠시.. '똘레랑스'에 대한 굵직한 덩어리가 잡히지 않는다. 다만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차이를 조화롭게 하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똘레랑스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똘레랑스라는 개념이 보편화되기까지의 세계사적 배경을 더 잘 알수 있다면 이 책은 훨씬 재미있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쉽게 느낌이나 개념이 다가오는 책은 아니었다.'똘레랑스는 자기중심주의의 포기'라는 말에서도 많은 뜻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냥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는 책을 읽었다 하기 힘들듯하다. 약간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내용의 일부에 '책'에 대한 언급이 재미있어 적어본다. '책'에 적용되는 똘레랑스의 개념이다. ^^<주권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공적 발언들이 강제하는 것과는 달리, 책은 어느 순간에도 독자가 자유로이 멀리하거나 또는 문제를 제기하도록 내버려둔다. 택해도 그만이고 버려도 그만인 책, 항시 손에 닿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대꾸하지 않은 채 논평하고 비평하도록 내버려 두는 책은 똘레랑스한 가르침이며 비폭력적 확신의 작업이다. 대중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책은 싸우지도 않고 다만 이성에 맡겨진 정신안에 퍼지는 진리의 승리를 보장한다. 책에 대한 탄압이나 규제는 그 자체로 진리에 대한 범죄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그런 탄압이나 규제는 진실이 반드시 승자가 되도록 하는 평화적 대결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을 집어들어 읽거나 버리거나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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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씨의 이전 책-에세이라고 하기엔 좀 가볍고, 미셀러니라고 하기엔 좀 무거운-들에서 프랑스인의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접하기 전에 똘레랑스라는 말은 많이 낯설었다. 하지만 막연하게나마 중용의 도, 혹은 관용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겠거니 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이 책을 사 보았다. 현대사회에서의 똘레랑스의 역할, 혹은 방법론을 알기 위해 책을 구입한 것이었는데 다 읽고난 인상은 "어렵다"는 것이다.
똘레랑스란 개념이 서구 기독교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책은 기독교와 관련한 똘레랑스 논의의 발전과정에 초첨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나같은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버거운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서구 기독교 역사에 밝은 사람이라면 책의 내용이 더욱 쉽게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흔히 교과서에서 봐 왔던 서구 철학자들, 예를 들어 스피노자나 백과사전학파, 루소, 밀 등의 철학에 근간(?)이 되는 똘레랑스의 개념을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런 과정을 읽어가면서 현대 사회에 똘레랑스를 어떻게 확장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은 단지 인류의 진정한 자유를 구하는 개념으로서의 똘레랑스를 소개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취사선택이란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지일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남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나 자신 속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그만 둔다. 똘레랑스에는 자발적인 포기, 즉 "1인칭의 특권"의 포기가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박탈"에 관한 것이다. 빈곤화의 이지적인 해석, 나아가 신비적인 해석으로서, 똘레랑스는 영혼에서 진리가 박탈된 때의-에카르트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무(無)에 대한 자유"를 수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는 "초자연적일 수 있는 희생, 영웅적일 수 있는 무사무욕"이 있다. 이처럼 똘레랑스는 그 극한에서 부조리한 자아의 망각을 시인한다. 모든 안전과 모든 질서를 쉽게 잊어버리게 하는 이 무분별이 바로 똘레랑스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얀켈레비치는 "사랑할 능력이 없어서" 똘레랑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또한 사랑 그 자체 고유의 영웅주의로, 즉 "자아는 의무만 지니면서 남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주는 양도운동"으로 간주되지 않는가? 인간에게 앵똘레랑을 보호하도록 이끌고 "자신의 패배를 만드는 당치 않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는 이 비합리성은 우리들 눈에 하나의 절대적 아량으로 똘레랑스에 가치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 가치 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