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에서 최우수 서평자에게 준다는 백만원은 작은 돈이 아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돈에 끌려 이 책을 처음 집어들 계기를 갖게 되었을 거다. 나도 그 액수에 끌려서 서평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조금 들렌 뒤에 결국 옆에 있는 친구에게 "돈에 눈먼 그리스도인"이라는 경고를 듣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 자체가 그 백만원이라는 욕망 얽힌 현상을 충분히 상쇄한다. 일단 이 책을 집어 읽는다면, 돈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은 그보다 더 뿌리 깊은 욕망, 곧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욕망에 가리워 시들시들 그 빛깔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렇게 우리 시대의 현대인에게도 그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크다는 것을 여러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아아, '백만원'이라는 멀리 있고 가능성도 없는 그것이 우리를 툭툭 건드려, 하나님을 덥썩 물게 만든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떤 책을 선물해야 하나 오래 고민했다. 교회라곤 일생에 고작 어쩌다 한두 번 가본 게 다인 친구에게 내가 알고 있는 여러 기독교 양서는 너무 '기독교적'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나서 내 고민을 덜게 되었다. 저자 밀러는 스스로 뿌리 깊은 일반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이 만난 하나님, 게다가 내가 판단하기에는 우리가 정말 만나야 할 그런 진짜 하나님을 제시해주고 있다. 미국의 상황에서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하나님. 사회 정의와 휴머니즘에 누구보다 민감한 사람일지라도, 편모 슬하에서 자라난 고립되고 이기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저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일지라도 반드시 만나야 할 하나님. 그분 앞에서 얻는 삶이라는 생명을 그려주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를 변명하지 않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정말 어떤 분인지는 잘 보여준다. 난 내일 친구와 만나러 가기 전에 잠시 '반즈앤노블'에 들러서 이 책을 몇 권 살 것이다. 이 책은 또한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나는 교회 안에서도 참 외로울 때가 있다. 물론 내 괴팍한 성격과 교만한 이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교인들이 내가 아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 같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위로를 주었다. 아직 책을 절반도 다 읽지 않았을 때, 서평을 쓰기 시작했었다. 그 때 이미 이 책에 관해 써야 할 것들이 충분히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책에 나오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내가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는 생생한 이야기에 기쁨의 감격을 눈물로 서너번 터트리고 말았다. 가끔씩 이런 고백을 만날 때, 이런 하나님 이런 기독교를 경험한 사람들이 나말고도 제법 있겠구나 하고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은 '재즈' 같은 하나님, 원제를 따르자면 재즈처럼 '블루'(blue)한 하나님을 보여준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협화음'으로 포장되어 제시되지 않는 그런 하나님 말이다. 가끔 솔직히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 그분마저도 교회라는 곳 안에서 질식된다고 느껴질 때, 이 책은 갑자기 우리의 일상을 정지시키고 끼어든 아련하고 강렬한 추억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만난 하나님은 내 규칙없는 변주 같던 삶에 다가온, 커다란 협화음을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같은 분이 아니시던가. 그 생생한 음과 음, 소리와 소리의 부딪힘이 이 책 사이로 삐져 나온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하면서, 우리 함께 예수님과 쨈(zam: 재즈의 즉흥연주)을 해보자고 하고 싶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는 책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나오는 뽀르뚜까 아저씨 같은 분이셨다. 어느 날, 그 어느 날 내게 다가와서는 헝크러져 뒤엉킨 작은 방 속의 외로운 영혼을 안아주시는 분이셨다. 비유컨데, 나는 제제였고, 그분은 뽀르뚜까였다. 의심하기 좋아하는 고집 센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복음서를 읽어가는 나와 만나주셔서, "당신이 나를 구원하실 분이고, 당신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입니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탄복하게 만드셨던 그 멋진 분을 소개하는, 마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같은 감동적인 책이 왜 기독교 책중엔 거의 없을까 하고 아쉬워 하던 차에 그분을 이렇게 잘 소개하는 책이 나와 반갑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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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
마술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에세이다? 이건 어불성설이다. 에세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사실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난다고 보기엔 신비스럽지만 당혹스런 이 책 속 사건들에 대한 묘사는 어쩌면 이미 현실이라는 것, 특히나 기독교 영성 속에서는 신비라는 것이 일상에 맞닿아 있음을 반증하는 일이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에 기반한 삶의 모습을 마술적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을지도. 여하간 이 책에서는 이처럼 당혹스럽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회심의 기록들과 기독교 영성을 표방하고 있는 삶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고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다. 비슷한 느낌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즈처럼 하나님은 속의 유별난 에피소드들을 읽고 있자니 아직까지 인기가 식지 않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나 최근에 아주 각광받고 있는 미국의 유대인 작가인 폴 오스터가 쓴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고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네들이 표방하고 있는 포스트 모던한 – 교계에서 사용하는 나쁜 의미에서 말이다 - 세상에 대한 매혹적인(마법적인) 에피소드의 독특한 전개나 설득력 있는 묘사와 이 책이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내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하루키나 오스터의 실존의 허무에 대한 멋들어진 문체가 마음에 든다면 이 책 “재즈처럼 하나님”도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거라는 사실이다 – 물론 문체(style)가 마음에 든다고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다 동감할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앞서 스타일에 얘기를 꺼낸 것은 이런 이유다. 이 책은 구성 면이나 문체 면에서 포스트 모던의 세례를 흠뻑 받은 책이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언어로 무너진 정통주의 신학의 전통을 되살린 칼 바르트의 저서의 울트라 라이트 모던 버전일지 모르겠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자유주의자들에게서도 정통주의자들에게서도 모두 외면내지는 비판을 받은 요지가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 담배와 초코렛을 먹으며 성경을 읽는다거나 펭귄의 섹스를 통해서 복음의 본질을 깨닫는 일을 이해 못 할 신자들도 부지기수고 그러한 파격의 방식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기독교 복음 메시지 자체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더 부지기수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이 쓰여진 목적, 즉 세상을 향한 변증서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을 수도 있고 대체로 변증서들이 신자들에게 줄 수 있는 지적인 통쾌함도 줄 수 없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의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내려 가면서 내내 이런 가능성에 대해 염려하면서도 이 책이 가장 현대적인 언어로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그 긴장감 속에서 오히려 ‘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 긴장감을 아주 아주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과 모더니즘의 사이, 이 책은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경쾌하게 전개되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앞서 양식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이 젊은 작가 – 나에게 정확하게 나의 형님 뻘인 – 나 그의 친구들이 이 책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가장 현대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삶의 양식(style)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들었다. 아마도 그런 삶의 모습들이 지지해주지 않는다면 이런 긴장감은 양 극단 밖에는 나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작가가 지극히 현대적인 모습과 방식으로 복음을 라이프 스타일로 구현하기 때문에 이 책은 유행(fashion)으로서 하나의 싸구려 영성 소비재가 아니라 양식(style)의 기품을 지닌 유쾌하기 그지 없는 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기독교 영성의 마술적 리얼리티를 삶으로 살아가면서 써낸 책이라는 점 일거다. 결국 신비를 포용한 삶의 방식이 삶의 모습에 활기를 주고 기쁨을 주고 주체적으로 선을 행사할 힘을 선사한다. 이 책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활기찬 기운의 근원은 바로 그 포용된 신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신비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것일 것이다.
이제 와서야 예수님 얘기를 꺼내지만 공생애 당시 예수님이 비판을 받은 것은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동시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동시대 성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가장 큰 신비를 품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세상적으로 비취셨다면 우리가 그렇게 동시대적으로 살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물론 신비를 품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진실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 잘은 모르겠지만 - 그런 의미일거다.
예수님 이야기가 조금 늦었다면 ‘그 분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야기의 선두를 아낌없이 맡기시며 이처럼 대미를 장식하시는 퍽이나 멋진 분이시다’ 라는 아부성 발언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인상깊은구절] 오래전 나는 하나님께 개심했으나 이제 세상을 향해 개심했다.. ... 뭔가 멋있고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
|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 때가 있다. 마치 상대가 우리에게 길을 일러 주는 것 같다.” 내 손에 들린 이 책이 전개될 방향을 알지 못한 채, 서문에 쓰인 이 두 문장에 나는 사로잡혔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를 이보다 호소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책은 나에게 길과 같다. 나는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사람(나를 포함하여)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때론 나의 지적 호기심이 우선순위에 놓이기도 하지만, 나의 책읽기가 시간 때우기나 단순한 취미의 수준에 그치지 않고, 내 삶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선순위에 놓인 책읽기를 통해서였다. 물론 한 권의 책이 나의 모든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책을 읽도록 인도해 오셨고, 그때마다 내가 누리는 유익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재즈처럼 하나님은>은 그동안 내가 읽어온 신앙서적들과는 색깔이 많이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은 전혀 무게를 잡지 않는다. 나와는 차원이 달라보이는 뛰어난 지성과 영성으로 압도하는, 그래서 때론 나의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하는 많은 기독교서적과 달리 이 책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편안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저자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치 그가 나와 같은 일터에 있으면서 종종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곤 해서 나보다 뛰어날 것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우선 저자가 자신의 정서적 연약함이나 개인적 기질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점이 좋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남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무시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절망시킬 이유를 찾는데 능숙하다. 심지어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영성을 지닌 사람 앞에서 자신감을 잃고 주눅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그 자체로 의미있게 여기고, 자신만의 독특한 점을 찾아 계발시키려는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우리가 아무리 의인인 척 해도 뿌리 깊은 죄성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흔들곤 해서 우리의 죄인됨을 상기시키듯,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심으신 성향은 지울 수 없는 것이며 또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무지개의 아름다움은 무지개를 이루는 띠가 저마다 분명한 색깔을 자랑하되 그것이 함께 모여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은 특정한 공장의 조립라인을 모두가 똑같이 거쳐 완제품이 되는 과정과는 다를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사람은 저마다 독특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해 자신이 속했던 많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갈등해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기독교 공동체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아니라, 조건적 사랑을 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는 언제나 옳았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모든 사람을 얕보았다. 성경의 윤리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데 나는 질렸다.’ 사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친히 지으시고 각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각 개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에 무관심할 때가 너무나 많다. 내가 원하는 곳에만 지불되는 돈처럼 사용되는 사랑은, 교회 내적으로는 신앙적 어려움을 겪고 방황하는 많은 이들을 수용하지 못해 그들을 고통 속에 방치하는 한편, 외적으로는 세상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형성하고 세상과 벽을 쌓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다양한 가치의 공존을 인정하지만 이것이 이기주의와 분열을 부추겨 교회 공동체를 허무는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각 개인을 세우면서도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장려한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삶이란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간파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삶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인 ‘나’라는 존재를 떨쳐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딜 가나 내가 있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 ‘나’는 개인일 수도 있고 공동체일 수도 있다. 내가 있는 자리에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끼어드는 것은 얼마나 우릴 참을성 없게 만드는가. 심지어 그 존재가 하나님일 때도 그렇다는 것은 참 묘한 역설(逆說)이다. 이런 인간의 모순에 대해 저자는 해부하려 들지 않는다. 아니 해부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더 나은 설명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도 하나님도 신비이다. 그런데 저자는 신비란 삶의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삶을 하나님께 드려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으로 여긴다. 기독교 영성이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우리 영혼이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자연의 장엄함 앞에 말을 잃고 압도되듯이, 우리 삶의 불가해성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개념 앞에서 우리는 경외감을 느낀다. 그 경외감에 우리 자신을 좀 더 자주 내놓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우리 삶은 협화음이 되지 않는 재즈를 닮아 있으니까. |
| 이 책은 하나님, 죄, 믿음, 구원, 예수님 등의 주제를 장별로 다루고 있지만, 책 전체가 하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재즈 음악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재즈 음악은 협화음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밤 포틀랜드의 바그다드 극장 밖에서 색소폰 부는 남자를 본 후 재즈 음악이 좋아졌단다. 하나님도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었다. 하나님도 협화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흙먼지 길을 걸어 자신에게 오신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죄성의 개념은 무엇인가, 용서받고 싶은 갈망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 하나 쉬우면서도 정감있게 이야기해 나간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에 목말라 하는 이들, 삶의 열정의 회복을 간절히 소망하는 이들, 삶과 사랑과 구원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한국기독교양서보급중앙회(생각하며 책읽는 전문학교 제공) http://cafe.daum.net/Melchizedek |
| 안녕하세요?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인 당신을 만나 반갑습니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것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한 권의 책을 통해 만난 당신은 참으로 나와 닮았습니다. 오랜 친구처럼, 많은 대화를 나눈 가까운 지인처럼 잘 통하는 느낌이 듭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덮은 후 이렇게 나의 생각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도널드씨, 당신과 나의 가장 큰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의문들을 내뱉었던 ‘문제아’였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무 댓가 없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불합리한 사실을 참지 못해했던 모습도 무척 닮았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의 진리를, 저만 빼고 모두들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 소외감을 느꼈던 지난 날들…. 다들 잘만 믿는데 저는 왜그리도 호기심이 많았을까요?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며 교회 문턱을 넘던 저는 어느덧 2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하나님은 의심 많고 불평 많은 저를 잘 다독이며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셨지요. 당신에게 다가가셨던 그분이 저에게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펭귄의 섹스를 예로 들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죠? 눈을 들어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면 펭귄의 섹스만큼이나 신비로운 일들이 수 없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 중에 가장 특별하고 신비로운 존재는 세상 곳곳에 당신의 지문을 찍어두신 ‘하나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신이 그 분을 재즈음악에 비유했다면, 전 바닷물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내 안에 가득차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시기에 하나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바닷물을 작은 컵으로 퍼낸다고 상상해보렴. 아무리 열심을 다해, 평생을 바쳐 퍼낸다해도 결코 바닥을 볼 수 없을거야. 네가 나에 대해 품는 의문도 마찬가지란다. 인간이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바닷물을 바라보고 만지고 느낄 수는 있듯이 너도 나를 마음껏 느끼고 바라볼 수 있단다.나를 이해하려는 힘겨운 노력을 그만두고 이제는 나와 그냥 함께 해주지 않을래?” 정말 놀랍지 않나요? 이것을 깨달은 순간, 저는 하나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친구가 되었죠. 참으로 신비롭고 특별한 일입니다. 도널드씨,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요. 당신은 참으로 소소한 일상의 단편들 속에서 그분을 떠올리고 숨겨진 보석들을 발견했더군요.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더러운 인질에게 다가간 포크 싱어의 이야기, 섹시한 당근이라는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통해 본 인간의 어리석음과 구세주의 필요성에 대한 고찰, 식료품점에서 본 푸드 스탬프를 통해 깨달은 은혜와 기독교 영성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기독교 안에 내재하는 문제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 아마 당신이 ‘문제아’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솔직하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쓰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이 곳, 한국이라는 작은 분단국가에는 교회들이 넘쳐납니다. 밤에 높은 곳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면 빠알간 십자가 불빛이 가로등불처럼 좁은 간격으로 촘촘히 빛을 내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전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인 나라,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학생들을 배출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크리스천’이라는 신분이 일반인들에게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가 만든 작은 틀안에 갇혀 기독교인들만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고 살아갑니다. 이런 때일수록 예비 그리스도인이자 현재의 ‘문제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가 되어줄 당신 같은 친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유명하지도, 특별한 경력 사항을 갖지도 않은 당신이 이 책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나와 당신을 닮은 이들이 세상에 의외로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당신의 글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소외된 자들, 그리고 구원의 문턱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많은 자들에게 훌륭한 조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왠지 모를 책임감을 느끼게 하네요. 나 역시 당신처럼 내게 오신 예수님이라는 귀한 선물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문제아’들을 아끼고 보듬으시는 하나님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God bless you! 2005년 겨울 당신의 친구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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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동안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갈등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앙에서 자라온 나였기에 나의 이러한 느낌과 상황을 집에서 감히 어머님께 말할 수 없었고 교회에서는 더더욱 쉬쉬하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나의 이런 상태가 탄로 날까 두려워 교회에서 믿음이 있는 척 보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대학교에 가서는 선교단체에 속하여 마치 주님을 위해 거창한 헌신자가 된 듯 자랑삼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의심은 몸에 붙어 있는 혹처럼 절대 떠나지 않았다. 간혹 이런 의심이 복받쳐 올 때는 누군가에게 정말 터놓고 말하고 싶었으나, 내 주변에는 전혀 이런 문제로 갈등하지 않는 신실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런 생각을 꾹꾹 누르며 참아야 했고, 정신적 압박감으로 여러 번 탈진도 경험하게 되었으며 사람들과도 관계가 어려워지게 되었지만, 진정한 나를 들킬까봐.. 점점 나는 자기 편력증세를 가지고 됐고, 사람들보다는 ‘한때 돈이 그랬던 것처럼’ 내 스스로와 대화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자가 되고 가고 있었다.
‘돈’의 이야기는 나에게 과거의 모습을 다시 생생하게 재현시켜 주었다. 물론 모든 점에서 그와 나의 고민점들이 같진 않았지만, 많은 부분이 나의 공감을 자아내게 했다. ‘돈’과 나의 차이점은 그는 그의 문제를 사실대로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점이었고, 나는 나의 신앙적 문제를 속으로 삭이면서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숙되는 과정은 비슷한 것 같았는데, 결국 ‘주변의 사람들’-전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 것 같았던 로라같은 경우, 공동체의 경험, 히피들과 함께 한 삶-을 통하여 많은 부분을 깨닫게 되고 신앙의 성숙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의심과 질문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 그에 대한 반발로 기독교 근본주의를 추구하게 되는데 ‘돈’도 이런 경험을 했던 것을 보게 된다. 나 또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강도를 높이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까 해서 강도 높은 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매일 성경을 20장을 읽고, 기도를 1시간 이상씩 하며 매일 한 사람 이상에게 전도를 하며,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나의 이런 강도 높은 훈련은 처음엔 날 진짜 신앙인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고 이런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은 내게 더더욱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치 문선명의 하나님처럼.. 어떤 임무를 완수 하지 못하면 나를 질타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게 하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점점 상실해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마치 나의 신앙적 삶이 ‘의심의 시기’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시기가 있었듯이, ‘돈’의 인생에도 두 시기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하고 고민했던 시기, 그리고 짧았지만 율법적으로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로 말이다.
두 시기를 개별적으로 보면 신앙인에게는 성숙되지 못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두 시기에 대해서 ‘돈’은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두 시기의 경험을 재즈음악처럼 불협화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필요한 시기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불협화음을 동시에 누르면 우리 귀에 듣기에는 매우 거북스러운 음이 된다. 그러나 그 음을 펼쳐서 시간적으로 차이 나게 배열하면 앞 음과 뒷 음이 불협화음 일지라도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게 한다. 돈에게도 나에게도 하나님은 의심의 시기와 근본주의의 시기를 주셨다. 그러나 이 둘을 시간적 차이가 나게 함으로써 두 음의 진동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 음악은 아름답게 들린다. 하나님에게도 내게도....
‘돈’이 하나님을 만난 이유는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위선이 아니라 ‘솔직함’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부단히 알아갈려는 노력이 내면에 솔직하게 새겨져 있다. ‘돈’은 책으로 그의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나는 내면의 생각이 그 작업을 그리고 있다. 내가 확실히 깨달은 사실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하고 고민하고 행동하는(내적이든 외적이든) 사람은 언젠간 주님이 서서히 내게 다가오리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두 개의 불협화음이 눌려진 후, 그 음들이 만들어낸 음악을 느낄 때이다.
이제 나는 벌써 32살이 되었고, 예쁜 딸을 가진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신앙도 예전에 비해서 많이 성숙했음을 느낀다.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날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이 책 뒷 부분에는 앨런이 브라이트 박사에게 “예수가 당신의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울음을 터뜨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이제 나에게도 해당하는 질문이 된다. 누군가가 나에게 “예수가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나도 눈물로 밖에는 답을 할 수 없다.
[인상깊은구절] 재즈는 음악이면서도 종이에 담기가 아주 어렵고 오히려 영혼의 언어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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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재즈를 듣고 있지는 않다.
집시의 바이올린연주를 듣고 있다. 와인한잔을 하면서 책을 마무리 했다. 하나님은 이 ‘돈’이 표현한 것처럼, 정말 재즈처럼 자유롭고 해방의 영을 소유하신 분일까 ? 그래 그럴것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와인처럼 땅기고 바이올린처럼 우울하게 만드는 시간들이다
그 시간들의 연속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추천하고 싶은 존재도 아니다.
오랜 교회생활에 지치고 벙어리 생활과 침묵수행-예배시간의 연속-을 통해 질린 이들에게는 재즈와 와인, 바이올린은 금지 항목이다. 아니 담배는 생각도 못하는 것이리라. 물론 와인은 포도주라는 이름과 소주라는 대체 용품으로 이름이 바뀐다면 어감은 또다를 것이다.
그냥 자유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재즈 그 재즈를 통해서 해방구를 찾았던 흑인 노예들이 그려진다.
레이찰슨이 복음성가를 재즈풍으로 노래할때 백인들이 그리고 흑인들 마저 보인 반응이 그려진다. 나무에 매달린 빈병들이 바람이 날리고 부딪히고 깨지며 내는 소리들이 영혼의 울부짖음이요 병들의 잔치였다. 그것이 교회제도와 관습에 갖힌 노예들의 영가였다.
혹 깨진 병들은 어찌되는줄 아는가 ?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만 하는가? 마치 가을날 떨어진 낙엽을 미관상의 이유로 청소를 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자연의 노인이 퇴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그냥 그곳에 땅에 파편으로 박히고 깨진 병목만 끈에 매달려 시체처럼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바람이 다시 왔을때 ' 아 이곳이 내가 지나간 자리였구나 '하고 알고서 친근한 미소를 던져줄수있지 않을까 ? 그러한 여유가 자유며 그러한 배려가 해방이며 그러한 것들 속에서 하나님을 우연히 만났으면 좋겠다
이 책은 이런 사람들은 읽지 말아 주시길 부탁한다.
찬송가만이 음악이요, 손을 들고서 울어야만 예배의 감격이요,
술담배는 말도 안되구요, 동성애는 저주받은 자요, 혼전섹스는 말도안되고, 오로지 공부해서 성공해야 하고 그것이 복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은 하지만 행동은 여전히 단호하지민 꼭 그렇지만은 않은 분들. 또 하나의 오만으로 인한 편견을 쌓을수 있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딴청을 피운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트로트처럼 인생을 노래 하실수 없나요?
난 트로트가 좋은데 막걸리처럼 걸죽하실수 도 있구요
해금처럼 나의 심금을 울릴수도 있구요
진달래꽃 즈려밟고 가시는 십자가일수도 있구요
[인상깊은구절] 기독교 공동체의 문제는 우리에게 윤리가 있고 규율과 율법과 원칙이 있어 그것으로 서로를 판단한다는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 사랑은 있으나 그것은 조건적인 사랑이었다. |
| 어렵고 힘든 신학서들보다 밀러가 소개하는 예수가 더 깊이가 있고 자연스럽다. 그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밀러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일상의 경험에서 영성을 퍼올리기란 말은 쉽지만 복음 대로 살지 않고서는 다다를수 없는 경지이다. 밀러는 자신이 직접 만난 예수를 어린 시절과 살아온 날의 경험으로부터 퍼올린다. 그렇다고 그냥 자전적인 소설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선정한 경험들은 하나같이 자연스럽지만 우리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함께 하고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들의 구체적인 형태들, 그리고 그것들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투사들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은 본회퍼나 바르트의 글을 읽어 보거나 래리 크랩의 책을 몇 권만 읽어보아도 대강을 그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길어낸 통찰을 우리의 삶의 자리로 가지고 내려와서 밀러 처럼 다소 수다스럽게 재잘되거나 갑자기 일어나 시를 읊조리듯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또 다른 문제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사춘기 소년의 영웅 혹은 마술사가 되고픈 욕망은 종교가 혹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추구하는 우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차라리 가슴아픈 통찰이다. 누구든 따뜻하게 보호받고 사랑받고 싶고, 항상 새롭게 되기를 원한다. 그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를 말하고, 내가 새롭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언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다른 이가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그렇다는 진중한 죄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밀러의 고백을 들으면 바로 내 자신도 별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는 종교, 심지어는 기독교 자체에서도 사람을 새롭게 하는 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고백을 말이다. 칼 바르트의 모토는 '부정을 넘어선 긍정'이며, 본회퍼가 현대를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성인됨으로 갈파했을 때, 우리는 이미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야만하는 사명을 게을리했음을 알아차렸어야만 했다. 밀러의 언어는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이전의 어떤 글과는 다른 새롭고 신선한 문체다. 그리고, 재즈바의 들뜬 열기처럼 뜨거운 하나님의 숨결을 경험하게 한다. 하나님은 재즈바에서 만나는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성큼 다가서는 친구와 같다. 그가 그렇했듯이 그 이전에는 비록 재즈의 열기를 싫어했더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으로 나를 부여잡는 그 무엇으로 말이다. 종교는 사람이 아닌 거룩한 신을 바라보라고 청한다. 그러나 인간은 진흙탕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병자들이고, 누군가 내 인생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원한다. 내가 겪어야만 했던 좌절과 멸시, 그리고 고독하고 외로움에 찌든 내 자신 그 자체를 거짓없이 내 보일 수는 친구를 찾아 헤메고 있다. 하나님은 필경 그런 병자들에게 이약를 청해 듣고 함께 저자거리의 상스럽지만 흥겨운 음악에 몸을 맡기며 같이 떠드는 친구들 속에 있는지 모른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결핍된 사랑을 전이하는 것이 아닌 그런 사랑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복음은 아버지의 부재의 대용물도, 영웅과 우상, 자기의 욕망을 이루는 마술지팡이, 혹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 같은 마술사도 아니다.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아프디 아픈 우리의 일상을 감싸는 어릿광대의 미소어린 눈물이다. 예수는 친구처럼 오신다.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용서하지만 연민하는 자가 아닌, 새롭게 다른 삶을 계획하고 함께 꿈을 꾸는 친구로서 그는 우리에게 온다. 필요할 때는 부재했던 아버지도 아니고, 한바탕 소나기처럼 열정이 식으면 잔뜩 애처로운 눈초리로 서로를 보내는 철 지난 연인이 아니다.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조금 넉넉하게 친구들을 받아주고는 몰래 눈가에 눈물짓는 그런 속 깊은 친구로 예수는 서 있다. 밀러의 글을 읽으면서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만나서 대화를 시작하면 아마 말이 잘 통할 것 같고, 오래 친구처럼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
| ivf수련회에서 맴버들이 사준 책이었다.2년전에ㅋㅋ 이제야 읽어보는데 제목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전혀 감이 안잡히는.. 그치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정말 책 내용에 딱 맞는 제목이라는 느낌이다. 도널드 밀러의 자서전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자서전과도 많이 다르다. 한편의 소설같았다. 실제인물 같지가 않았다. 워낙 내면을 진솔하게 써서 그런가.~~ 신앙서적중에 이런 느낌의 책은 처음읽어보는 거 같다. 읽으면서 저자의 자유함이 참 좋았다. 하나님앞에서의 진실함. 겉치레 없는 신앙 그 자체,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관계라는 것이 가장 본질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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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수필을 읽듯 딱딱함 없이 편히 읽은 책입니다.
저자가 약간은 독특한 사람인것 같습니다. 일상중에 소개되는 저자의 모습은 '이사람 참 독특하다'란 생각을 계속하게 만들었거든요. 하지만 거리낌 없이 열린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순수함 같은것을 느꼈습니다.
재즈 연주는 한번도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나라 판소리도 마찬가지인데...틀에 억매이지 않고 즉흥성이 중시됩니다. 하지만 즉흥적이어서 부족하거나 무계획적이지 않습니다.하나님도 우리에게 고정된 방법으로,똑같은 방법으로 다가 오시지 않습니다.
각자 각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느낄수 있도록 다가오시고 얘기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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