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나이 열 아홉살 때 |
|
-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 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이 책의 첫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그친다. 나는 열아홉 살에 무엇을 원했던가? 열아홉 살.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 1학년생이었던 나. 그때 그 어린 나이에 내가 원하던 것은 이 책의 주인공이 원하던 것과 어떻게 달랐던가?
현대소설의 새로움을, 문화충격이라는 말을, 음악과 시와 그림과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온갖 성적인 것들에 대하여 내 안의 '아담'은 어떻게 눈을 떴던가...
|
|
이 책은 아담이 눈뜰 때를 비롯하여 제7일과 펠리컨등의 그의 다른 단편 소설들과 함께 묶여져 있는 책이다. 물론 아담이 눈뜰 때가 메인 소설로 가장 앞부분부터 시작되는데 그의 작품을 총 7개나 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구입함에 있어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장정일이라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가 의미하는 혹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을 여러가지 작품으로 살펴 볼 수 있는 큰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이런 작품세계에 대해 논하거나 비평할 만큼의 지식과 능력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가며 머리속에서 남는 것은 한두가지 아니며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비해 훨씬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섣부른 단정을 지어보련다. 그의 작품은 한두가지 패턴이 아닌듯 보인다. 그것이 오히려 읽는 이로 하여금 머리속에서 복잡함과 알수 없는 의미를 동시에 제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담이 눈뜰 때는 이 책의 메인 작품인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유용한 내용이라 본다. 주인공의 모습과 현재의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처량하다. 그러나 더욱 처량한것은 암울한 세계관이다. 무엇하나 밝아 보이지 않는 그 배경은 책을 읽는 내내 어두움에 가깝고 회의적인 생각이 소설을 유도한다. 영화로 나왔지만 영화를 본적은 없다. 오히려 안보는게 나을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른 작품들은 아담이 눈뜰 때와는 달리 더욱 심오하고 난해하다. 어떤 부분은 나의 짧은 식견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잡힐듯 말듯한 느낌으로 굉장히 고민되는 부분도 있다. 그것이 또한 이 책의 묘미라 할 수 있을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글은 성과 관련된 묘사 혹은 더러움을 비롯한 저급하거나 우리들이 주위에서 가까이 하기 싫은 것들이나 가까워지기 싫은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가장 흡사한 우리들의 또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국문학교수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장정일의 글은 발표와 동시에 많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으며 많은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라고 한다. 난 그전에 그저 장정일이란 사람의 존재만 알았을뿐 그의 관하여 거의 모른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이사람의 소설을 읽어본 나로서는 찬사쪽에 가까운 입장이다. 과감한 표현과 성적 수위의 조절문제따위는 사실 논할것이 못된다는 생각이다. 흔히 하는 말로 표현의 자유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주장하나면 해결 될 문제 아닌가.
이 작가의 소설의 묘미는 복잡함과 난해함 그리고 현실적 풍자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러한 여러가지 특징들 속에서 하나씩 유추하고 되짚어보는 것이 가장 흥미로움을 느껴가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어떤 부분은 왠지 언젠가 다른 고전작품이나 유명학 작가들의 작품속에서 있는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정알 독특함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장정일의 글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 책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 본다. [인상깊은구절] 즐비하게 늘어선 빌딩을 보며 나는 두통을 느꼈다. 탬버린을 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빌딩 아래를 분주히 오가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하나씩의 탬버린의 들려져 있었다. |
|
이 작품은 총 7편의 중단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 작품의 경우 3개의 다른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아, 이 작품은 할 얘기가 좀 많다. 그러므로 나 스스로 정리를 하며 리뷰를 적어보아야 할 것 같다.
첫째, 이 작품에서 내가 처음 받은 느낌은 '헐리웃 키드' 라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문체가 우리나라 문학의 문체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담화도 그랬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랬다. 커피 한잔 하겠나? 아뇨, 괜찮습니다. 가야죠. 가만있게. 자네는 내 손님이야. P113 굳이 그런 담화의 예를 하나 뽑아보자면 상기의 것이 그것인데, 이것 하나때문에 헐리웃 키드가 떠올랐다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의 전체적인 문장 자체가 그런 느낌이었다.
둘째, 프랑스 영상처럼 감각적이고 섬세한 장면들이 군데 군데 그려졌다. 그 이국적인 느낌 또한 작품의 독특함에 한몫을 한다고 보여졌다. 이건 뭐랄까, 어떤 문학적인 묘사나 비유보다는 실제에 가까운 삶의 단면을 머무려 놓은 듯 한 것이었는데 그 예가 모두 외국의 사례였다는 점에서 그랬던 듯 싶다. [아담이 눈뜰 때] 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도어스라든가, 레드제플린, 야즈버드 등의 고전 록그룹이 가진 히피적인 색채가 작품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한국작가들과는 달리, 문장 자체가 그들의 것인 것 마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묻혀있었다는 것이다. 상기의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이 작품은 한국 작가가 아닌 번역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독특한 문장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셋째, 그의 작품 저변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요소가 깔려있는 듯 했다. 그 무의식적 성애를 기반으로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을 결부시켰고, 그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해 내었는데 그것이 또한 작품에서 풍기는 기괴함의 토양이 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단지, 차용이나, 인용의 차원이었다면 그 기묘함의 맛은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생각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풀어놓았다. 그러함에 위의 요소와 작가의 기묘한 상상력이 톱니처럼 잘 맞아떨어져 작품의 기괴함이 절정에 이른다. 실제로 나는, [제7일] 이라는 작품과 [아버지를 찾아가는 긴여행] 이라는 두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그 기묘한 분위기만이 영상처럼 머리속에 둥둥 떠다녔을 뿐이다.
넷째,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기괴하기만 한 작품인가. 그렇지 않았다. 작가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는 대목은 상당히 많았다. 오히려 그는 너무나도 확고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물샐틈 없이 견고한 것이었고, 또한 그 깊이가 얕지 않은 것이니 나는 그 모습에 이 작가는 "진짜' 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좀 미안한 예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외수의 [여자도 여자는 모른다] 라는 작품을 보고 엄청나게 실망을 했었다. 결국, 그 한편으로 이 양반은 작가라기 보다 연예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다시말해 그는 "가짜'라는 느낌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말하는 얘기들은 철학이 아니라 방송에나 적합한 멘트처럼 느껴지고, 그의 기행은 진실이 아니라 그저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이외수 작가 자체를 그렇게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나는 다른 작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책상위에 기다리는 [들개]를 읽어보고 나의 성급한 실망감을 추스려 볼 생각이다. 어쨌든, 장정일이란 작가에 대한 느낌은 "진짜" 라는 느낌이었다.
다섯째, 내가 읽은 한국 소설중에 가장 V 마킹이 많이 된 작품일 것 같다. 나는 마음에 드는 문구가 있는 페이지 위쪽에 V 체크를 하는데 그게 여간해서는 되지 않는 것들이라 신뢰는 더욱 깊을수 밖에 없었다. "솔직을 가장하여 곧이곧대로 내 치부를 다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나는 이런 놈이니 알아서 하라는 식의 과시밖에 아니며, 결국 나한테 너는 그리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다. 비밀이 필요한 곳에서 비밀이 옳게 지켜지지 않으면, 경박함 밖에 남는 것이 없다." P126 이 정도 깊이의 통찰을 문장으로 표현해 낼수 있다는 자체가 경이로울 뿐이다. 물론, 이런 통찰력있는 문장은 곳곳에 산재되어있다. 그러므로 나는 장정일이란 작가가 변태적인 성애에 집착하는 작가가 아니라 새로운 안목의 무언가에 도전하는 작가라는 것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여섯째, 인용과 차용을 자신의 것인 마냥 작품속에 잘 녹여 놓았다. 이를테면 어떤 부분은 분명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서 본 듯한 내용인데 작가는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잘 변형시켜 놓은 형국이 그랬다.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은 마치 독자의 마음을 읽고 있는 듯한 솔직함에서 비롯되었는데 [아이]라는 작품에서 그랬다. 그것은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때쯤, 작가는 카프카의 [변신]을 패러디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뒤이어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뽑아내는데, 그 연결이, 이야, 진짜 기가막히네.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러니까 그건, 작은 것을 내주고 큰 것을 해먹는 배포라고 할수도 있고, 유사한 것으로 유혹해서 뒷통수를 쳐버리는 느낌이랄수도 있었다. [아이]에서 말하고 있는 작가의 첫사랑론도 관심을 두고 읽어볼 만한 재미난 담론이었다.
일곱째, 이러한 상기적인 여러 이유로 인해 나는 작가가 우리나라 문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여느 작가와도 달랐기 때문이다. 문체며, 분위기며, 소재며, 모든 것이 그랬다. 만약 내 추측이 틀리다면 한국 문학 교육의 벽을 넘어서 버린 작가라고 둘러쳐버릴란다. 장정일과 유사한 분위기를 가진 딱 한명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백가흠. 그러나 나이를 봐도 그렇고, 등단시기를 봐도 그런 것인데 백가흠작가에게 묻고 싶다. 혹시 장정일작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전혀 없냐고. 그러나 이국적이고 기괴한 느낌은 역시 장정일만 하지는 않다. 뭐랄까 백가흠은 잘 정제된 기괴함이고, 장정일은 날것 그 자체였다.
작가가 다루는 소재가 드러내기 힘든 것들이라 그렇고, 표현 자체가 워낙 거칠고, 감각적이며, 원초적이라 다소 거부감을 가질수 있는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 같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거 미친 놈 아냐?" 그러나 나는 장정일이란 작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자의 내공의 깊이에 반했고, 그의 기이함의 실체가 [진짜] 라고 느껴져서 좋았다.
작가의 작품 특성상, 찬반의 시비가 클수 있는 것이라 감히 최고라 권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 개인적인 주관에 대해서만 묻는다면, 작가의 공력만 논하자면, 최상급 클래스라고 분류할 것 같다. 다시말해 기성작가라 해도 어진간히 노력해서는 장정일의 선까지 도달 할수 없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톡특함의 진수, 깊이있는 자신만의 철학의 진수, 기괴하고 이국적인 작품의 색채... 다 읽어 책꽂이에 꽂힌 한국 소설을 둘러봐도 김승옥 선생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보다 독특하다고 말할수 있는 작품이 없어보인다. 그건 아직 내가 한국 소설에 대한 내공이 부족해서 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놀랍고 대단한 작가를 한 명 알게 되었다. |
|
장정일, 아담이 눈뜰 때 문학 그리고 성스러운 3J와 뭉크의 사춘기 ‘내 나이 열아홉 살~’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 ‘나’ 가 가지고 싶었던 타자기와 뭉크화집 그리고 턴테이블을 갖게 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큰 의미 없어 보이는 이 물건들은 타자기는 문학(혹은 글쓰기로 볼 수 있겠다), 뭉크 화집은 그림, 턴테이블의 음악 이렇게 3가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나’ 는 여자 친구와 함께 섹스를 나눈 후 시를 쓰고 뭉크의 사춘기 그림을 보며 가슴 뛰며 성스러운 3J라고 표현하는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지미 핸드릭스의 음악을 듣는다. 마음이 맞는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하고 춤은 추지 않지만 디스코텍에 가서 춤추는 사람들을 감상하는 주인공의 청소년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즉 아담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을 문학(글쓰기)와 성스러운 3J, 뭉크의 사춘기라는 이미지와 함께 떠올려 생각해보자. 문학(글쓰기) 주인공의 첫 여자-라고 할 수도 있는- 은선이와는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주최한 시화전에서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모든 백일장에서 이름을 날렸던 과거가 있다. 주인공은 은선이 그 때 썼던 <열등생>이란 시 제목처럼 결국 지금은 은선이 앞에서 열등생이 되어 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백일장을 포기하고 공부했던 주인공은 지금 한낱 보잘 것 없는 재수생일 뿐이다. 은선과 함께 할 때는 늘 시와 섹스도 함께였다. 주인공은 재수 학원을 그만두고 시립도서관을 다니면서 정기 간행물 실에서 여성지부터 시사 월간지, 소설책을 보며 시간을 죽였다. 90년대 상황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더불어 변혁운동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영입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이에 문학 및 문화 제반의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 되고 있었다. 젊은 문학평론가의 강연 속에 이러한 현실들이 면밀하게 드러난다. 컴퓨터의 발달로 창작의 문외한도 소설과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 문학의 경우 출판, 인쇄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책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결국 예술가들은 마지막 남은 비전문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로젠버그의 말 속에 문학과 예술의 위기 모던시대의 종말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다. 90년대 초부터 컴퓨터의 보급으로 인해 전문성을 강탈당하고 예술은 반대로 비전문화 되어가는 추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념처럼 순수성, 개성적, 희소성 보다는 차용, 인용, 각색 등을 통해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예술은 잡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등록금의 일부를 덜어 중고 사벌식 타자기를 한 대 샀다. 빠르게 변화는 정보화 시대에 속에서 컴퓨터의 발달로 인한 예술과 문화의 위기 속에서 같이 발을 맞추려 노력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순수한 옛 것으로 회기 하는 주인공은 무엇을 쓰고자 한다. 진짜 창작을 말이다. 성스러운 3J 성스러운 3J란 짐 모리슨, 재니스 조플린, 지미 핸드릭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스러운 3J는 모두 반전의식과 히피 즘이 미국 전역을 물들이며 극도의 불안과 혼란에 휩싸였던 시기에 데뷔해 자신들의 음악과 삶 깊숙이 시대정신을 받아들였던 가수 이다. 이들은 미국식 정의에 거칠게 반항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화합, 평화, 사랑을 노래했다. 지미 핸드릭스의 무기는 파격과 실험으로 뭉쳐진 기타 사운드였고 재니스 조플린에게는 덜컥덜컥 가슴속을 건드리는 강하고 허스키한 보컬이 있었으며 짐 모리슨에게는 세상의 권위에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는 광기와 문학적 재능이 주어졌다. 현재와 주인공은 요즘 음악은 구역질나는 음악이라고 표현하며 이 세 사람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 현재와 주인공은 디스코텍에서 만난 후 섹스를 나누며 다시 만나자는 약속 없이 헤어지지만 주인공은 현재와 섹스와 음악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는 어찌 보기엔 부족함 하나 없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현재에겐 섹스는 환각과도 마찬가지의 것이다. 여기서 현재-섹스-환각-성스러운 3J의 음악과 이미지의 연결을 볼 수 있다. 섹스를 하면서 고입입시의 노이로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90년대에서의 섹스의 이미지는 사랑의 행위보다는 자기만족과 자기충족의 대상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여 지는 이기심에 불가한 것이다. 그것은 비윤리적인 것도, 나쁜 짓도 아닌 기브 앤 테이크 형식의 행위인 것이다. 섹스 후 음악을 듣는 현재는 좋은 음악을 누구와 공유하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만족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서 지극한 개인화가 되어가는 사회의 현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현재는 고등학생으로써 학교 공부와 시험공부에 극도의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있던 미국의 시대와 비슷한 상황이다. 부산 모텔에서 모의고사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을 담뱃불로 자신을 자학해서 표현한다. 늘 워크맨을 귀에 꽂고 다니는 현재는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하다. 음악과 섹스는 현재에게는 일상의 탈출이자 욕구불만의 해소로 볼 수 있다. 로이 부케넌의 죽음에 중고 기타를 사 추모식을 올리고 안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현재의 모습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고 싶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엉켜버리는 현대 사회 속 인간관계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한 편 턴테이블을 갖기 위해 게이에게 몸을 허락하는 주인공. 그 제의에 나쁘지 않는 제의라고 생각하며 똥을 누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신의 몸까지 함부로 할 수 있는 모습이다. 게이는 딱딱한 야간 침대에서 정신적 교감을 설득하며 사정한다. 하지만 이 행위에는 역시 사랑도 정신적 감정도 없다. 현재의 말처럼 게이는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주인공은 턴테이블을 갖기 위한 기브 앤 테이크만이 존재할 뿐이다. 현재와 사랑도 로션도 없는 섹스가 끝난 후 따끔따끔한 침묵 그리고 헤어짐과 지방 석간신문을 통해 현재의 죽음을 접하게 된다. 성스러운 3J 역시 무대 위에서 자신들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소모하며 인습과 위선을 거스르는 동안 세 사람의 삶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다들 27살의 나이로 약물 중독으로 사망했다. 현재의 자살 앞에 주인공은 마음을 열고 다가오려는 현재를 무관심하게 대했을 뿐이다. 비로소 현재가 꿈에 나타났을 때 큰 소리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주인공. 개인적인 고뇌 속 환각, 사랑, 이별 그리고 현재의 자살 앞에서야 주인공은 자신이 눈을 뜬 가짜 낙원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뭉크의 사춘기 주인공은 뭉크의 <사춘기> 그림을 보기 위해 수입도서 전문점에 들리곤 한다. 주인공은 뭉크의 <사춘기> 속 주인공을 보며 가슴 뛰어 한다. 그 그림을 보면서 폭풍을 맞아 떨고 있는 작은 새를 생각하며 청순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불안이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뭉크의 <사춘기>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 그림에는 벌거벗은 소녀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는 큰 눈은 강렬한 호기심, 불안감, 공포가 느껴진다. 소녀가 걸터앉아 있는 침대의 둔부 부위를 보면 하얀 침대보에 얼룩진 붉은 것이 보인다. 그녀의 손은 가지런히 아래쪽을 가리고 있다. 소녀 뒤에 드리워진 까만 그림자가 소녀의 모습보다 훨씬 크게 드리워져 있다. 소녀의 그림자는 성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나타나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가지는 그림자이다. 주인공 역시 어른이 되고 있다. 대입 시험을 치루고 나자 은선과 약속했던 섹스를 통해 어른이 되고자한다. 이를 오줌을 누듯이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섹스로써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은선과 주인공 역시 어른이 되는 섹스라는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만족하지 못한 마음으로 더 자주 섹스를 해 확인을 했던 것이다. 뭉크의 <사춘기>의 소녀의 붉은 초경처럼 은선이 첫 섹스 후 흘린 피를 닦아 낸 크리넥스 뭉치도 결국 어른이 되는 하나의 과정일 뿐 그 것으로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사춘기>의 소녀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어른이 되어갈수록 더 길어지고 더 짙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어떤 것일까? 하지만 답은 없고 진정한 어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이가 듦과 어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뭉크의 화집의 이미지와 화가인 그녀를 연상 시킬 수 있다. 디스코텍에서 만난 그녀는 파리와 뭔휀 그리고 뉴욕에서 유학을 했고 사랑은 썩었으며 섹스가 사랑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타인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자유인이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점점 개인화 되는 90년대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다. 집단적인 전망에서 탈피하는 그들의 생활은 타인에게서 점점 관심이 없어지고 고립되고 혼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타인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이해한다기보다는 점점 더 무관심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틀리에에서 볼 수 있는 만화영화의 애니메이션처럼 단순한 원색으로 그려진 그림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 때문에 탈이념이란 시대를 낳게 되고 후기산업사회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는 시대로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지는 경향을 낳게 된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보화 사회에 노출되어 있고 여자의 말처럼 광고에 의해 저항이나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채 조건반사적으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 팝아트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예술이며 뒤샹의 레디메이드처럼 대상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예술 역시 창조가 아닌 생산이 되고 결국 소비를 하여 소유하는 형태로 만들어 지고 있다. 결국 뭉크의 화집은 화가인 그녀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빼앗긴 대신 가져오지만 있어야 할 페이지의 <사춘기>는 찢겨나가 있다. <사춘기>의 그림을 보며 청순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불안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고 싶은 주인공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청순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같은 이미지는 이미 자신에게 부질없고 소비 되어버린 감정이기 때문이다. 기타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과 얽힌 큰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의 무료함과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전부다.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큰 사건이 일어나거나 우리가 일상에서 겪어 보지 못했을 일들이 일어날 법하지만 주인공의 삶과 생활은 우리 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여자 주인공들 역시 모두 좋은 집안에 아름다우며 유학까지 다녀온 전형적인 여인네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여자 주인공들도 서로 각자의 개인적인 고뇌 속에서 살아가며 누군가와 진실로 소통하는 것을 믿지도 않으며 손 내밀려고 하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소설과 실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의 모습도 개성적인 인물이 아닌 전형적인 소심하게 방황하는 학생의 모습이다. 옆집 사는 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어디선가 일어 날 법한 상황 속에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 역시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하루 종일 지하상가 화장실을 마대 걸레로 밀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느 드라마나 책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 그 자체다. 주인공의 형 같은 경우는 과도기적 인물로 보여 진다. 정치에 관심이 있던 형은 선거에 실패하자 새로운 물결을 타고 미국의 경제학을 배우러 떠난다. 곧 집에 쌓여 있던 형의 책들은 오천 원의 헐값이 고물장수에게 팔린다. 이것은 책이 팔렸다는 행위보다는 옛 날의 것이 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잊혀 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주인공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두렵고 무서워하고 있다. 코카콜라, 크리넥스, 성문종합영어, 남영나일론, 페라리, 포르쉐, 로터스 등 이미지의 나열만이 연속된다. 올림픽에 대한 뜨거운 열기 역시 반갑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몸이라도 팔아야하며 그렇게 해서 소비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져있다. 이 모든 것에 익숙해지려고 발맞추어 자신의 삶을 따라가고자 주인공은 결국 다시 입시 준비를 시작하고 작년에 떨어졌던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된다. 남자는 서울에서 탬버린 치는 남자를 떠올리며 두통을 느낀다. 정보화 사회 속에서 자신은 결국 정보의 홍수와 수많은 일거리에서 잊혀 질 것이며 빌딩 아래 모든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탬버린을 바라보며 고막이 터질 듯 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돈이 있다면 렌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빌리면 된다. 라는 쉬운 것이 생겼다. 이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정보를 알고 정보에 맞출 수 있다면 모든 세계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여자도 렌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여자가 자신의 욕망의 상처를 치료해주길 바란다. 결국 그녀의 질 속에 자신의 욕망을 사정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소비사회 속에서도 해결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소비사회 속에서 위로를 받으려 여자를 렌트하지만 결국 위로 받지 못한 주인공. 여기서 주인공은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 여자와 헤어지며 아날로그적인 이별을 생각한다. 꽃다발을 직접 선물해주며 현재에게는 해주지 못했던 아름다운 이별. 돌아오는 길에 육삼빌딩을 보며 발기를 해도 사정되지 않았던 자신의 성기를 생각한다. 감상 <아담이 눈뜰 때>를 보며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오버랩 되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의 상황이나 여자가 자살하는 부분. 의미 없는 섹스로 인해 서로의 욕망을 배설하려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한 부분일 것이다. 조금은 두 소설이 다른 점이 있다면 <상실의 시대>의 나는 결국 마지막까지 방황하며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할지.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 하지만 <아담이 눈뜰 때>의 나는 잃어버린 낙원을 찾았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 겸손과 인내를 찾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가 바라 던 서울대 등록을 포기하고 돌아와 타자기를 사는 주인공. 사벌식 타자기는 앞 서 주인공이 구했던 뭉크의 화집과 턴테이블과는 다르게 자신을 소비하며 구하지 않았다. 과거의 슬픔. 이별,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주인공은 모든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걸어 나간다. 자. 보라. 아담이 눈을 뜬다. |
|
장정일의 대표적인 소설이라 이 소설집에 여러 작품중에서 대표작이며 중편에 해당되는 <아담이 눈뜰 때> 작품만 읽었다. 1990년에 출판된 책이니 약 20년전의 소설이다. 당시 대표적인 소설은 <태백산맥>이 많이 읽힐 무렵이 아닌가 한다. 그때 이 소설을 읽었드라면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만 한데, 불행인지 그때는 인연이 아니었는가 보다.
이 소설에는 여러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로 통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아담 주변의 인물로 보면 어머니는 전통적인 어머니상이다. 대구에 하나 밖에 없는 지하상가에서 청소일을 하시면서 자식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서는 아끼지 않는 어머니상이다. 형은 실패한 혁명가로서 87년의 민주진영 두 인사의 분열에 의한 대통령선거 패배에 실망하여 한국의 모든 가치를 버리고 미국으로 가 버린다. 그가 남긴 많은 혁명과 철학에 대한 책들은 헌책방에 가치없이 버려지고 만다. 첫번째 여자 친구는 가식과 허영 덩어리다. 소위 잔기술에 의해 문단에 데뷰하지만 내공이 받쳐주지 않아 곧 좌절하고 만다. 두번째 여자 친구는 입시에 대한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그 밖에 기성세대로서 여성 화가가 등장하고 동성애자인 오디오기기상 주인이 등장한다. 이런 환경에서 아담인 주인공은 재수끝에 대학에 합격하지만 진학하지는 않는다.
<삼중당문고>란 시가 있는데 장정일 작가의 젊은 시절을 알 수 없다. 여기의 소설에서도 삼중당문고에 대한 애정이 보인다.
일본 화보책에 나온다는 뭉크의 <사춘기>가 이 소설을 지배하듯이 젊은 날은 결국 불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