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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론 – 조나단에드워즈 전집 제 7권/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양낙홍 옮김/부흥과개혁사
[강추]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성령과 부흥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
-최고의 부흥신학자 에드워즈의 저서-
-부흥을 사모하는 청년 대학생들의 필독서-
권 지 성
조나단 에드워즈와의 만남
서평을 쓸 때마다 항상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그 책을 사서 읽고 싶은 욕구와 흥미를 일으키는 것이 목표이지만, 때로는 글을 쓰는 나 조차도 진부한 내용의 서평을 써서 올릴 때, 그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영적 괴물에 대한 글을 쓸 때는 늘 그렇다.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필자에게 성경의 말씀을 정확히 보는 영적인 해안과 깊이를 더해 주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시며, 그 분의 위대하심에 비하면 나는 먼지와도 같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깨달음을 주는 인물이다. 에드워즈의 자서전과 일기를 읽으면서, 거룩한 삶에 대한 갈망과 죄에 대한 분투하는 삶이야 말로 내가 필생에 씨름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신앙 감정론”을 읽으면서는 내 영혼 속에 이러한 영적이며 신적인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도대체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구속사”를 읽으면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의 계획이 거대한 역사의 뼈대 속에서 어떻게 연출되어가는지를 발견하는 희열을 맛보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의 글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가 무엇이며,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에 참 의미를 깨우치게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 3가지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이다."고 20세기의 대 설교가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한 바 있다. 교단과 교파를 막론하고 많은 영적 거장들 조차도 왜 읽기도 어려운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글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크게 3가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째,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의 사고 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글들은 물론, 철저히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며, 철학적이지만, 최종적인 서술에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내며, 그 스스로가 18세가의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와 이성주의에 맞서서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지켜낸 저술가이기도 하다는 근거에서 그렇다. 둘째, 확실히 그는 체험적이며 경험적인 신앙에 그의 신앙과 신학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를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만큼 자신의 죄악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투쟁하며, 간구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만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만큼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한 사람이 있을까?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성의 사변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단연코 아니며, 하나님을 깊이 맛보아 아는 체험적이며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셋째, 역사상 가장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전인격적인 신학을 가진 거룩한 성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오랜 시간 공부만 한 사람은 지성주의에 빠지기가 쉽고, 경험적인 체험만을 추구한 사람은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에 빠지기가 쉬우며, 변화된 실천과 운동만을 강조한 사람은 강압적인 행동주의로 치우치기 쉬운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에드워즈를 보면서 영적인 균형을 보게 된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체험과 뜨거운 가슴으로 영혼들을 섬기고 사랑했던 목회자이자, 날카로운 붓으로 알미니안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시대를 풍미한 대 학자이자 지식이었으며, 자신이 믿고 있는 참 그리스도인의 기준과 교회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투쟁한 개혁가였다.
21세기 한국 교회의 부흥주의
이안 머레이라는 작가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로 넘어가는 2차 대각성의 분위기 속에서 알미니안 사상의 침투와 찰스 피니의 등장으로 이른 바, 부흥주의라는 것이 영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오늘 한국 교회에의 영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며, 지금 우리는 부흥주의를 표방한다. 모든 기독교 부흥 집회는 마치 콘서트 현장이나, 월드컵 응원 경기장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스스로 연출함으로써, 대단히 인간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갖가지 전략과 전술, 그리고 성장에 대한 테크닉들이 다채롭게 동원되고, 새롭게 도입된 아이들이 신선하다. 마치 구원이 우리의 열정으로 이루어 낼 수 있고,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는 듯하다. 주님의 날을 우리가 받아 놓고, 부흥의 날을 우리가 정해 버리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에 대해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이른 바, 사람에 의해 조작된 부흥주의이다. 부흥의 원인도 우리이고, 부흥의 결과와 영광도 우리라면, 부흥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행사와 집회를 사모한다면, 무엇 때문에 부흥을 원하는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이 아니라면, 부흥을 왜 원하는가? 부흥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경험하며, 자신의 죄악을 온 인격으로 경험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는 것이다. 사람이 많이 와서, 분위기가 광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부흥이라면, 싸구려 콘서트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인상깊은구절] "하나님꼐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