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향이라는 작가를 <물레방아>와 <벙어리 삼룡이>로만 기억했다. 그리고 두 작품은 기억에도 아스라이 멀었다. 20년도 더 전에 읽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다 최근에 두 작품을 모두 읽을 기회가 생겼다. 중학교 1학년인 딸아이의 국어 책에 <벙어리 삼룡이>가 실려 있어 함께 읽었고, 내친 김에 <물레방아>도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이 요절한 작가의 성격 묘사가 얼마나 극단적이면서도 개성 넘치는가, 또한 얼마나 시대를 초월해 공감적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물레방아>에서 이방원의 아내는 물욕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애정이나 결혼을 도구로만 여기는 속물이고, 이방원은 무지렁이지만 그 사랑만은 순수하다. 그래서 일방적 사랑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춘희>에서부터, 등장인물의 신분이나 시대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런 구도를 차용한 소설, 드라마,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는 달리 예를 들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이야기다.
<벙어리 삼룡이>는 또 다른 지극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삼룡이라는 인물은 신체적 장애나 신분 때문에 사랑할 기회에서조차 차별당하는 모든 소수자의 상징적 인물이다. 더불어 이 소설에는 시대의 질곡과 개인적 고통, 사회적 모순과 사랑의 슬픔이 잘 버무려져 있다. 그래서 오래된 시대배경에, 문장의 표현도 낯설고, 지금과는 사뭇 다른 정서를 표현한 듯 보이는 이 단편소설 또한 보편적 공감을 획득하고, 기어이 중1 교과서에 실려 초등학교 학생들의 독서목록에까지 올랐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러고도 이 소설의 의미하는 바에 공감하지 못했던 걸 생각해 보면 초등 고학년에게 읽히기 좀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과연 처음 삼룡이를 읽어주며, 나는 뜨악한 아이들의 표정에 주눅이 들었다. 아이들이 공감하는 부분은 오로지 삼룡이가 주인 아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장면뿐이었다. 잠자는 삼룡이의 입에 똥을 넣었대, 이 장면에서만 우~ 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적어도 아이들의 흥미를 끌었다. 나는 이미 나 나름대로 해석한 의미를 첨가해 가며 작품을 소개했다.
-삼룡이는 주인어른인 오생원의 집과 그 가족을 자신이 뼈를 묻을 생의 유일한 장소로 여긴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이고, 땅딸한 키에 머리가 어깨와 딱 붙어 보이며 입이 유난히 크고 빈약한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충성스럽고 힘세고 부지런하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스물셋의 청년이다. 그런데 삼룡이가 바보이냐, 아니냐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쪽이든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그에게 세상이 오생원 집뿐이었으므로, 그 집에 새로 들어온 새색시, 즉 고약한 주인 아들의 아내는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동지였을 것이다. 주인이 충직한 개를 아끼듯 아껴주었으나 그것으로 행복이 담보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색시는 그 집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생활할 수 없는 국외자이기는 마찬가지였고, 돈에 팔려오다시피 시집왔으며, 여자였기에 매를 맞고도 하소연할 곳 없는 사회적 약자라는 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삼룡이의 사랑은 사회 제도와 관습 때문에, 처음부터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일방적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사랑이었을 수 있다. 마치 새색시에게 삶의 질곡이 이 세상에서는 결코 놓여날 수 없는 굴레였던 것과 같다. 불길 속에서 새색시를 무릎에 뉘인 채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삼룡이의 모습이 가슴 아프다. 그러면서 다행이라 싶기도 하다. 자유롭고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으로 그가 떠났으므로.
만약 그가 외딴 숲속의 높은 나무에 목을 맸더라면, 감동은 많이 줄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지 않고, 마지막까지 삶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주인영감을 들쳐 업어 밭에 내려놓아 그의 목숨을 구하고, 새색시를 안고 끝까지 불길을 헤쳐 나가보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행복한 미소로 죽음을 기꺼이 맞이했다.-
자, 초등학생들에게 <벙어리 삼룡이>는 신분이나 신체적 장애 때문에 부당한 대접을 받고 불쌍하게 죽어간 한 인물의 이야기, 주인아씨를 짝사랑하다가 불이 나서 함께 죽어 버린 어느 비참한 사랑의 이야기로만 그치기가 쉽다. 물론 이 소설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시대, 사회, 제도, 관습, 인간의 존엄성, 사랑,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삶의 태도 등 매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그중에서도 삼룡이의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의 죽음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신세 비관 자살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이야기에 더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리하여 삶의 어떤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도 싶다.
<벙어리 삼룡이>, 너무 어둡고 어려울까? 초등 고학년들에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올리버 트위스트>나 <레미제라블>, <노트르담의 꼽추>도 못지않게 어둡고, 난해할 수 있다. 게다가 장편이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가 그렇게 쉽고 밝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일전에 소개한 오스카 와일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 어른들이 우리 단편소설을 별로 재미있게 여기지 않아서 아이들에게도 소개하기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닌가, 논술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단편소설은 아이들의 독서에서 좀 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차제에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