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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도덕교과서를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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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관심갖고 있는 우리나라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교수였다가 대학에서 해직된 이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지내왔다.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을 거쳐서 현재 정책위원장으로 있다. 대학에서 해직된 교수가 다시 일거리를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 교수사회의 상식일진대 예외적으로 전남대 철학과 교수들의 배려(?)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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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관심갖고 있는 우리나라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교수였다가 대학에서 해직된 이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지내왔다.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을 거쳐서 현재 정책위원장으로 있다. 대학에서 해직된 교수가 다시 일거리를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 교수사회의 상식일진대 예외적으로 전남대 철학과 교수들의 배려(?)로 지금은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가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말만 철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철학자 상을 보여주고 계신 분이다. 학벌없는 사회 모임을 통해 그간 생각했던 것을 토대로 <학벌사회>라는 두꺼운 책을 낸 그가 이번에는 한국의 중고등학교 도덕교과서를 물고 늘어졌다. 나 역시 도덕,윤리 교과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도덕교과서의 문제점을 심각히 느끼고 있었던 바, 그의 책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 나는 그의 주장에 100% 동감하는 바이다.

 

 

-도덕교과의 변화

 

  도덕 혹은 윤리 교과 만큼이나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교과목은 없을 것이다. 수학, 국어, 영어, 컴퓨터, 기술 등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여러 교과목들이 입시제도에 따라 혹은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어떤 교과목도 도덕·윤리 교과만큼이나 변화를 겪은 것은 없다. 시대가 변한다고, 입시제도가 변한다고 수학 공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컴퓨터의 작동원리가 바뀌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다만 6차 교육 과정에서 7차 교육 과정으로 넘어오면서 수학은 수학Ⅰ과 수학Ⅱ 뿐 아니라 이과와 문과에 따라 기본수학과 실력수학으로 나뉘고, 그것이 또 세분화 되어 각각 수학 10-가, 수학 10-나, 수학 1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었다. 이는 윗세대들이 배워온 수학의 공식이 바뀐 것은 아니며, 다만 종류가 다양화되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변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어교과 역시 마찬가지로 예전엔 '국어'라는 하나의 과목만 있었지만 점차 '작문', '생활국어', '독서' 등의 다양한 영역들로 세분화되었을 뿐 우리가 사용하는 국어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과목들이 다 그렇지만 유독 도덕·윤리를 포함한 사회과 교과목들에 한해서는 정치적, 시대적 변화상에 따라 교과내용도 변화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 중 도덕교과는 여태 국사나 사회교과보다 그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 이승만 전 대통령에서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소위 말해 '군사독재'라고 묶을 수 있는 그 시절의 도덕교과는 지금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남과 북으로 나뉘고, 남한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들을 싸잡아 뿔달린 도깨비로 칭하는 교육을 해왔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선 정말 북한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모습 - 뿔달린 도깨비 -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것이 교육의 효과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부터 현재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민주화된 정부 아래 군사독재의 그늘은 걷혔고, 대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표방해왔던 '진짜 민주주의' 시대에 살면서 과거와 같은 황당무계한 반공교육을 받지는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도덕교과서는 과거의 반공주의 도덕교과서와 확연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교과는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 과연 과거의 그것과 오늘날의 그것은 확실히 다른가? 


  군사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 정부를 맞이한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도덕교과서가 기존에 다루고 있던 반공교육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분명 우리네 도덕교육은 과거의 그것과는 분명 달라졌다. 하지만 그 본질은 바뀌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았다. 학생들은 아직도 수업시간에 '나'보다는 '단체'와 '국가'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국가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 등과 같은 부분에서 단체나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그리고 도덕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반공'만 빠졌을 뿐 다른 내용은 군사독재시절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도덕교과의 성격

 

  도덕을 제외한 중·고등학교에서 다루고 있는 교과목들이 "객관적인 사실 자체로부터 합리적으로 어떤 바람직한 행위규범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도덕교과는 사실이 아니라 당위를 가르쳐야 하는 교과인 까닭에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거의 아무 가르침도 주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 습관적으로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진술을 늘어놓게 되지만, 막상 사회적 문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교과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나 성찰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당위규범만을 타율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주어지는 당위 규범들이 과거 국민윤리 교육의 잔재 때문에 지극히 수구적이고 때로는 반도덕적이기까지 하다는데 있다."


  우리네 도덕교과서는 기술·가정, 사회, 국사 등의 여러 교과목들이 짬뽕된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그 내용들이 체계이지도 않고, 지식을 전달해줄 만한 꺼리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내용들이 '객관적 지식이나 사실'을 배제한 행위명령만을 담고 있다. '행위명령'은 주어진 어떤 상황과 사건하에서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해답을 제공함으로써 던져진 상황과 사건에 대한 학생들 개개인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하겠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 행위명령의 기준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국민윤리'교과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앞서 '도덕교과의 변화'에서도 언급했듯 시대는 변화했으되 교과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결론

 

 우리나라 도덕교과는 외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안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고, 본래의 도덕교육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왔다. 학생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할 도덕교과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도덕성 함양이 아닌 반공성 함양이 목표가 되었고, 지금은 '반공'부분은 삭제되었지만 그 자리에 '국가'가 들어서 있다.

 

  도덕교과는 당연히 학생들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하고 이에 걸맞는 교육내용과 평가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교과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들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상황 제시를 통해 깊이있고 다양한 사고를 열어줌으로써 학생 개개인 스스로가 나름대로의 '자기도덕성'을 만들어 가야 할 진대, 우리네 도덕교과는 대신 행동명령을 내림으로써 답안을 제시하고 있어 그 중간과정은 당연히 생략되고, 결론 또한 미리 정해주고 있다. 교과서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학생들이 습득하고 따라야 할 행동의  표본이 되며, 그리하지 않을 경우 그에 반하는 행동들은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된다.

 

  가수 유승준이 병역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갔을 때, 국방부는 그의 국내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국가는 병역을 거부하고 국적을 포기한 자는 국내에서 이익활동을 할 수 없다고 규칙을 정하였고, 언론들은 선동적 기사를 찍어내 비난여론을 부추겼다. 그러나 과연 유승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도덕교사인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도덕교과서를 통해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고 배운 학생들은 당연히 군대를 안가는 유승준과 같은 이들을 비난하고 욕을 할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양심은 무슨 양심, 국가가 정하고 있는 의무를 거부하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그냥 놔둘 수 있느냐는 식으로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져있는 결론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덧붙이며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수업을 할 때마다 교과서의 애국주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 나부터 거부감을 일으키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왜냐면 나의 거부감은 나 개인의 의견이고, 월급 받고 일하는 나로서는 국가가 만든 교과서대로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교과서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교과서와 반대로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다만 선생님은 이런 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다른 의견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도덕교과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나뿐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이, 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명코 개정되어야 한다. 아니면 폐지하고 철학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d*****t 2006.03.24.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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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이라는 테마를 통하여 사회를 되돌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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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본문이 길어서 잘리네요. 전문은 여기에서 --> http://blog.naver.com/yangwooko/50001526571 (이하는 일부 발췌) 도덕에 대하여 내가 딴 나라에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만큼 도덕에 대하여 많이 얘기하는 나라가 있을까? 학교에서도 도덕을 독립된 교과목으로 가르치고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보다도 더 유교적 도덕 전통이 강하고 (아 참... 동성동본 금혼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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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본문이 길어서 잘리네요. 전문은 여기에서 --> http://blog.naver.com/yangwooko/50001526571 (이하는 일부 발췌) 도덕에 대하여 내가 딴 나라에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만큼 도덕에 대하여 많이 얘기하는 나라가 있을까? 학교에서도 도덕을 독립된 교과목으로 가르치고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보다도 더 유교적 도덕 전통이 강하고 (아 참... 동성동본 금혼제도는 이제 폐지되었나? 아직인가?) 집안에서는 가정도덕을 밖에서는 교통도덕을 설법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하지만 신문을 펼쳐보라. 아니면 밤늦게 유흥가를 가보라. 그것마저 귀찮으면 아침에 자가용 창문에 가지런히 꽂힌 야릇한 판촉물들을 보라. 우리나라 처럼 도덕이 비참하게 땅에 떨어진 나라가 있을까? (뭐 우리랑 풍습이 다르긴 하지만 성도덕과 성산업에 관한 한 일본도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 뒤지지 않는다). 입으로는 모두가 도덕을 외치지만 손발로는 아무도 도덕을 행하지 않는 나라.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일본에 출장을 가본 일이 있는가? 일본 만화나 게임 -- 그것도 야한 것들 -- 에 익숙한 남자들은 일본에 처음 출장갈 때 혹시 길에서 만난 세라복 입은 여학생이 원조 교제라도 하자고 달려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전혀 불필요한" 걱정을 하기도 한다. 실제 일본에서 만나는 일반인들의 삶은 너무 건조해서 기름칠이라고 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절제된 삶, 절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태도, 소박한 풍속이 출장간 내 눈이 비친 일본의 모습이다. (물론, 공중전화 부스마다 깔린 테레쿠라 찌라시는 예외로 하자.) 이렇게 절제된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그렇게 황당무계하게 야한 문화가 생산되는가? (잠시 출장 기간동안에 본)일본과 우리나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철저하게 욕망이 통제된 사회라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통제된다고 제거되지 않는다. 통제된 욕망은 분출구를 찾을 수 밖에 없고 그 분출은 통제의 강도가 강할 수록 변태적이 된다.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해보라. 과속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차들이 지나치게 느리게 간다. 대개 90킬로 전후. 카메라만 없으면 120, 130은 기본이다. 카메라를 더 촘촘히 설치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카메라가 없는 구간에서는 만회하기 위해서 140, 150으로 달리게 될 것이다. 통제가 강해질 수록 욕망의 분출은 강해진다. 하지만, 욕망이 없는 인간은 한낱 허깨비요 통제가 없는 인간은 망나니에 지나지 않을터. 그렇다면 묘수는 무엇인가? 어떻게 통제와 욕망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통제의 주체에 있다. 그것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통제일 때 즉 자신의 욕망을 그 지평 너머로 확대함으로써 우리 전체 온 생명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차원으로 사고함으로써 개인의 욕망을 저절로 통제할 수 있도록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조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대충 감이 오는가? 이러한 얘기를 진짜 고수의 입을 통하여 제대로 설명을 듣고 싶은가? 그럼 책 사서 봐라. (참고로 이 서평은 책의 내용을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요약도 아니다. 그러니까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인상을 나의 극히 개인적인 상념의 공간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이 맘에 안든다고 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말기 바란다. 그건 순전히 나의 잘못일 뿐이니깐 말이다.) 글 읽는 재미에 대하여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글이 있다. 어떤 글을 길고 어떤 글은 짧다. 어떤 글은 몰캉하고 어떤 글을 서걱서걱하다. 어떤 글은 말초적이고 어떤 글은 심연의 깊은 곳에 침투한다. 말초적이고 짧은 호흡의 글이 만연하는 현 시대에 이 책을 읽는 것은 흡사 해외 전지훈련과도 같다. 좀 어색하고 익숙지 않지만 다양한 호흡의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균형된 시각을 위해 좋은 일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정운영의 글 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도정일의 글 처럼 현학적이지 않고 에코의 글 처럼 말을 향연을 펼쳐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최인훈의 <화두> 처럼 시종일관 묵직하면서든 한 문장 한 문장은 오히려 경쾌하게 독자의 무지를 공격한다. 조 프레이저급의 흐름에 알리같은 공격이라고나 할까. 글을 닫으며 그렇다. 이 책 솔직히 재미없을 수 있다. (내가 취향이 특이한 지 몰라도 책이나 영화 추천했다가 욕을 곧잘 먹는다.) 하지만 좋은 책이다. 나의 서평이 의심스러운가? 그럼 장정일의 서평을 찾아서 확인해보라. 틀림없이 장정일 특유의 미사여구로 칭찬을 했을 책이다. (아님 말구.)
n****t 2006.02.0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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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도덕교육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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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본의 극우정치인의 역사관을 신문을 접하게 되면, 분노를 참을 수 없음을 느낀다.제국주의 전쟁 침략으로 조선을 외적내적으로 능멸한 가해자가 그 과거를 영광스러워 한다니.극우적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일본의 개개인들은 올바른 세계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소양을 갖지 못한 것일 게다.이것은 그만큼 일본의 교육체계가 극우의 헤게모니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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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본의 극우정치인의 역사관을 신문을 접하게 되면, 분노를 참을 수 없음을 느낀다.

제국주의 전쟁 침략으로 조선을 외적내적으로 능멸한 가해자가 그 과거를 영광스러워 한다니.

극우적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일본의 개개인들은 올바른 세계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소양을 갖지 못한 것일 게다.


이것은 그만큼 일본의 교육체계가 극우의 헤게모니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사회는, 다시금 그러한 전체주의로 회귀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그런 현상은 그 내부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시민들에게도 잠재적 위협이 될수 있다.

파시즘은 개인을 억합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을 경계해야할 의무를 가진다. 


그럼 우리 모습을 일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되돌아 보자.

우리는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의 도덕교육은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김상봉 교수의 진단은 '그렇지 않다' 로 귀결된다.

우리의 도덕교육은 공동체에 대한 복속을 우선적으로 가르친다.

이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누구보다 추구해야 할 우리의 덕목이 아닌가?

그런 헌신을 가졌던, 이들은 후대에 까지 깊이 칭송받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공동체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을 국가 교육차원에서 강요하는 것은 역시 파시즘과 통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상봉 교수의 지론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본디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 싼 외부인이 결코 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아닌

또 하나의 나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단계로 성숙해져야 한다.

그 뒤에는 주변인이 아닌 공동체로, 사회로, 국가로, 나아가 전 지구적으로

개인이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시민의 도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도덕교육은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맹목적인 공동체에 관한 헌신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도덕교육은 개인의 소중함을 모른체, 전체주의에 따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지양되어야 할 태도이다.


김상봉 교수의 특유의 통찰력이 빛나는 책이긴 하지만, 비약이 좀 심하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받은 도덕교육이 전체주의적인 것이라고 느끼기에는 내 지적 감수성이 상당히 둔감한가 보다.

그런 도덕교육을 받고 자란 나도, 물론 전 지구적으로 자아를 확장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내 주변인들의 아픔을 공유할 만큼 자아를 확장하기는 하였다.


아직 완벽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역시 지적 감수성을 키워서 그의 통찰을 좀 더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

그의 말대로, 그런 미세한 차이들이 조금 더 사회를 진일보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y******4 2012.03.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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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교과의 운명을 논하는 한 철학자의 책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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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교과의 운명을 논하는 한 철학자의 책에 대한 단상                                1. 배경 중등학교에서 사용하는 대개의 교과서들이 국정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뀌면서 교육 현장의 선택권이 넓어진 일은 우리사회의 교육환경이 전향적으로 개선되고 있음을 알리는 실질적 변화에 속한다. 이에 아직 국정으로 남아있는 도덕 교과의 경우도 검인정으로 전환할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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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교과의 운명을 논하는 한 철학자의 책에 대한 단상 


                             


1. 배경


중등학교에서 사용하는 대개의 교과서들이 국정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뀌면서 교육 현장의 선택권이 넓어진 일은 우리사회의 교육환경이 전향적으로 개선되고 있음을 알리는 실질적 변화에 속한다. 이에 아직 국정으로 남아있는 도덕 교과의 경우도 검인정으로 전환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필요한 절차와 진행을 거쳐 2010년에는 새로운 교과서 시스템이 선보이게 될 예정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2005년은 윤리학과 도덕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교과의 방향에서부터 구체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개편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졌던 해였기 때문이다.

이 논의 과정에서 각계의 입장 차이가 드러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조율과 타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특기할만한 일은 여기에 철학계가 참여하여 논의의 다른 한 중심축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현행 교과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진지한 성찰의 장을 마련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그간 윤리학과 도덕교육에 소홀함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철학계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모처럼 제몫을 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데 대해서는 선의로 이해함이 도리일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노예도덕을 넘어서’라는 부제가 달린 김상봉 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이라는 책이 2005년 10월에 출간되었다. 출간되자마자 각종 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빠른 시간 내에 유명한 책이 되었다. 우선 문제의식이 돋보이고 대중의 공감을 얻은 탓도 있겠지만, 도발적인 제목과 전투적인 목소리도 일조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현재 도덕교과서에 대한 개편논의의 과정에 임하는 철학계의 입장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책의 곳곳에서 현실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돋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작업에 들인 저자의 품과 노력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전폭적인 지지 아니면 전면적인 부정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채택했을 스타일로 인해 쟁점유발과 지적 환기 효과가 풍부할 수밖에 없어 생기는 현상이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패거리 만들기의 고착화라는 폐단도 우려된다. 따라서 건강한 비판의 소통형식이 전제되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소통을 기대하는 입장에 서서 몇 마디 거들고자 한다. 



2. 구성


책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비교적 분명하고 단호하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도덕교육은 제목 그대로 파시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주로 국가주의에 근거해서 자신에 대한 배려보다는 타인과 전체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가치들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도덕교육이 이루어지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1980년에 등장한 전두환 정권과 궤를 같이 한다. 5공 군사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데올로기 강화작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국민윤리’라는 이름의 과목과 학과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서울대에 설치된 국민윤리교육과는 도덕교사의 양성과 교과과정의 연구개발 및 교과서의 집필 등 모든 권한을 독점한 중심체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두환 정권의 유산인 “지금까지의 도덕교육은 이제 폐지되어야 하며, 참된 도덕교육이라는 새 술을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13쪽)”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아가 참된 도덕교육을 새롭게 실현하기 위한 형식과 내용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의 제시와 설명이 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크게 보아서 현행 도덕 교과의 문제에 대한 진단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의 논의라는 두 개의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 즉 이 두 개의 축을 씨줄과 날실로 삼아 결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양념 역할을 하는 에피소드들이 적재적소에 맛을 내고 있는 형태가 이 책의 모양새라고 하겠다. 아울러 논의의 방식은 콘텍스트(context)에 대한 비판과 텍스트(text)에 대한 분석이 안배되어 있다. 



3. 쟁점1 - 유교에 대한 오해


저자는 현재의 도덕교과서의 문제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예절교육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 예절이란 호혜적 존중과 배려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의 인용문들은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진술에 해당한다.


학생들에게 예절을 지키라고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도덕 교과서가 가진 심각한 결함들 중의 하나이다. …(중략)… 그런데 한국에서 예절이란 처음부터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규범이다. 아니 많은 경우 예절이란 사회적 약자에게만 요구되는 것이요, 사회적 강자에게는 처음부터 해당사항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교과서는 하나같이 사람들을 아래위로 나눈 다음,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공손히 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제도화한다. 이처럼 예절이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호혜적인 존중과 배려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사회적 공물(供物)이 될 때, 예절교육은 노예교육에 지나지 않는다.(37쪽 - 38쪽)


  고등학교 『전통윤리』 교과서는 효(孝)가 호혜적 윤리라 말하면서 그것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도 중시하는 것”(101쪽)이라 말하고 있지만, 이런 말은 그야말로 효도윤리의 봉건적 성격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교과서는 자녀의 의무를 장황하고도 구체적으로 열거하는데 비하면 부모가 지켜야할 도리가 무엇인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38쪽 각주15)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확대해석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방식의 어휘 구사가 책의 여러 군데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한번쯤 짚고 넘어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예절은 관계의 평등성을 전제로 호혜적이어야 한다는 판단은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진술 자체는 악의적이다. 비판하는 대상의 성격을 자의적으로 규정해놓고 의도적으로 비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런 식의 진술은 주장을 명료화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남용할 경우의 위험도 고려되어야 한다.

본문에서는 이런 방식의 진행이 무지와 오해의 상황으로까지 나아간다. 알다시피 이 땅에서 예절은 유교적 전통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저자는 그런 유교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물론 유교라고 해서 비판의 성역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저자의 그런 비틀린 시선이 무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유교의 관습을 무조건의 진리처럼 생각하는 입장을 만나면 그 궁색함이 안쓰럽다. 반면 무지에서 비롯한 판단을 마치 진보인양 고집하는 모양새도 답답하고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이다.

위의 예로 제시된 효(孝)는 유교적 사유의 근간이자 유교를 가장 유교답게 만드는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상당히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부모자식의 관계로만 한정해서 살핀다. 우선 유교 이론의 기본 전제는 상식의 강조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로 인해 유교는 소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대단히 유용한 도덕논의를 전개하는 특성을 보인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서로 사이좋은 모습일 때 보기에도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가 결코 쉽지는 않다. 대개는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만큼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길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일반적 성향이 이러한 측면을 가진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러한 성향은 유전자의 프로그램 결과일지도 모른다. 유교의 도덕이론은 주로 이런 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시도이다. 부모의 도리로 제시된 자(慈)는 굳이 채근하지 않아도 잘 드러나는 반면, 자식의 도리로 제시되는 효(孝)는 아무리 강조해도 기대만큼 실천이 따르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에서,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효(孝)를 강조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은 마치 오른손잡이에게 신체의 균형적 건강과 조화를 위해 왼손을 자주 사용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효(孝)의 강조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호혜성을 높이기 위한 대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저자가 효(孝)는 호혜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을 가한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저자의 비판이 효(孝)라는 텍스트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펼쳐진 효(孝)의 콘텍스트를 겨냥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훨씬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친구를 기만하고 배신한 사례들이 있다고 해서 우정이라는 가치까지 매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봉건적’이라는 용어의 사용도 거슬리는 부분이다. 장황하게 설명할 겨를이 없어 자세히 피력하지는 않겠지만, ‘봉건제’라는 역사적 경험이 전무(全無)한 우리 사회의 실상을 간과한 채 ‘봉건적’이라는 수식어를 남발하는 일은 자칫하면 오리엔탈리즘에 감염된 증세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쟁점2 - 근본주의와 본질주의의 함정 


도덕 교과의 내용 개편을 위한 논의과정에서 모(母)학문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저자는 이를 어미학문이라고 표현하는데, 도덕 교과의 경우 어미학문은 당연히 ‘철학’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일면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얼른 동의하기는 쉽지 않은 대목이다. 우선 이 주장 앞에서는 다른 의견들이 설 땅이 없다. 저자의 입장에 서면 모(母)학문의 자리에 ‘윤리학’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도덕교과교육학’이 자리해야한다는 이야기도 모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없게 된다. 아마도 저자의 논지가 근본주의 또는 본질주의의 입장에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근본주의나 본질주의의 접근은 나름대로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크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용설명서의 부가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접근을 시도하게 되면 논점의 선취는 물론 논쟁에 있어서 우월적 지위의 확보도 손쉽게 이루어진다. 그러면 더 이상 여타의 논의는 무의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미 파지(把持)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별학문들의 위상을 논할 때 철학이 점하는 지위는 언제나 첫머리에 존재한다. 학문의 기원과 계보를 말할 때 철학이 차지하는 자리는 언제나 그 시작점이다. 오죽하면 철학을 일컬어 ‘만학의 제왕’이라 칭하겠는가? 따라서 ‘철학’은 거명되는 그 자체로 후광효과를 가진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 근거를 훈장처럼 보듬고만 있는 것도 문제가 있다. 잘 알다시피 현대의 다양한 문명태가 이루어진 정황은 각종 학문들의 분화로 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윤리학 역시 독자적 영역으로 분기하였다. 더 나아가 인류의 문명전개과정에서 윤리학과 철학은 각각 독립적으로 발생했다는 다른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다른 학문에 비해 윤리학이 철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학이 철학의 하위영역으로 설정되어야할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럼에도 굳이 철학이 윤리학의 근원이라는 근본주의적 주장(윤리학이 철학이 아니라고 용감하게 말하는 이 놀라운 무지를 교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겐 하나의 실천적 투쟁의 과제인 것이다. 본문 113쪽)을 되풀이한다면 ‘철학무용론(哲學無用論)’같은 부메랑효과를 자초할 위험이 크다.    



5. 쟁점3 - 사실과 해석의 문제


사실은 사실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을 둘러싼 해석이다.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동일한 사실에 대해 각기 다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논쟁에서 발생하는 묘미도 이런 해석들의 차이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되면 자꾸 한쪽으로 쏠리는 연쇄 반응이 얼마간 불가피하게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정도의 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래의 인용문은 그 정도의 경계가 미묘하다.


「1983학년도 국민윤리 및 이데올로기 비판교육 평가연구보고」에 따르면, 당시 국민윤리 교육 전담교수 354명 가운데 정치학 전공이 88명으로 가장 많고 철학 전공은 72명이었다. 그 외에도 국민윤리라는 새로운 전공이 43명이었으며, 법ㆍ행정학 전공은 30명, 사회학 23명, 교육학 9명, 한국사 7명이었으며, 전공을 기재하지 않은 교수도 56명이나 되었다. 대학에서 국민윤리를 가르치는 263명의 강사들 가운데서도 철학 전공자는 38명에 지나지 않았다.(90쪽, 밑줄강조는 필자)


본문에 실린 이 부분은 홍윤기 교수의 「한국 도덕ㆍ윤리 교육의 이념적 혼돈과 정체성 위기 - 퇴행적 윤리의식의 국민교육적 원천」이라는 논문을 인용했다고 각주를 달고 있다. 따라서 원작자는 홍윤기 교수이다. 하지만 저자 역시 인용을 했기 때문에 의식을 공유한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문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한 수치의 단순열거에도 편견이 개입할 여지는 충분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위의 글을 아래와 같이 바꾸어 보면 맥락적 느낌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1983학년도 국민윤리 및 이데올로기 비판교육 평가연구보고」에 따르면, 당시 국민윤리 교육 전담교수 354명 가운데 정치학 전공이 88명으로 가장 많고 철학 전공은 72명으로 두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 외에도 국민윤리 전공이 43명이었으며, 법ㆍ행정학 전공은 30명, 사회학 23명, 교육학 9명, 한국사 7명이었으며, 전공을 기재하지 않은 교수도 56명이나 되었다. 대학에서 국민윤리를 가르치는 263명의 강사들 가운데서도 철학 전공자는 무려 38명에 달했다.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이유는 여기에 간과하기 어려운 왜곡적인 정서가 드러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사실 저자가 힘주어 비난하는 국민윤리의 성립과정과 진행에는 철학계의 인물들이 참여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따라서 비난의 화살은 이들에게도 겨누어져야 한다. 그래야 공정하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저자가 유독 철학계와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 식구 감싸기 같은 행태를 보이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는 그저 옹색하게 보일 따름이다. 아래의 인용문 역시 이런 혐의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미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내용적으로 노골적인 국민윤리 교육을 지향해온 도덕교육은 전두환 정권에 이르러서는 철학과의 동거관계를 법적으로 청산함으로써 그 뿌리에서부터 자유로운 비판정신과 완전한 단절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110쪽 - 111쪽) 


이어서 이런 일이 타락한 한 철학 교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곤혹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희생양 선택하기’처럼 보인다.



6. 유감 - 철학과 철학계를 향한


철학은 인류의 위대한 지적 전통이자 근거가 되는 학문이라는 사실에 이의가 없다. 나아가 먼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출현한 수많은 걸출한 철학자들의 노고로 인해 인류의 삶이 풍성해졌음을 인정한다. 단 몇 마디의 수사로 철학이 일궈낸 그간의 성과를 지적인 측면에서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철학의 본령에 서서 사유의 폭과 깊이를 다듬고 또 다듬는 동시대의 훌륭한 철학자들을 향해서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갖는다.

이런 태도를 전제하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의 철학계를 자칭하는 일반에 대해서 거북스러운 심기가 있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 않다. 저자와 그 주변을 특정해서 발생한 심사는 아니지만 내친 김에 솔직하게 그 일단을 드러내고 싶다. 이 부분은 필자가 아직 학문적으로 충분히 익지 않은 터라 공평무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토해내는 유감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 땅에서 전개된 근대는 그리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치른 대가도 상당하지만 지금도 갚아야 할 업보가 여전히 무겁다. 이런 무게를 벗어날 별다른 방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면죄부를 나눠주기도 곤란하니 다만 정면으로 안고 넘어야 한다. 아울러 공포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파시즘’이라는 불길한 이름도 따지고 보면 ‘근대’와 ‘이성’이 가진 얼굴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 땅에 근대의 여명이 펼쳐지던 과정에는 ‘philosophy’가 ‘哲學’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장면이 포함된다. 많은 찬사와 더불어 기대를 모았지만 별반 한 일은 없다. 돌아보건대 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철학계가 담당했었다고 평가할만한 성과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외피를 쓰고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며 권력의 주구가 되었던 흔적을 더듬는 편이 훨씬 풍부하다. 물론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를 상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소위 철학계에 대해서 그만큼 실망이 큰 탓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철학계는 철학의 위용에 어울리는 적실한 행보를 보인 적이 잘 없었다. 철학의 이름으로 골방에 안주하거나, 철학의 이름으로 수입유통업에 종사하거나, 대중에 다가선다는 명분으로 여성지를 무대로 에세이 철학을 설파하거나, 교육학과를 상대로 밥그릇 싸움을 벌이거나 하는 등 정작 시대가 요구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늘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며 보호받을 궁리에만 전전긍긍하는 옹졸한 모양새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자기성찰이라는 처방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영역은 바로 철학계라고 진단한다면 크게 빗나간 판단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이 부분이 정돈되고 나면 적어도 이 사회에서 만큼은 철학이 있어야 할 자리에 철학이 있게 되고, 철학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철학계가 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7. 기대 - 역지사지(易地思之)


쓰다 보니 글이 좀 한쪽으로 흐르게 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와 그의 저술에 대해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유익했다는 것이 전반적인 소감이며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대부분의 내용에 대해서 공감했으며 더러는 경청하고 더러는 감탄하면서 내내 진지하게 읽었다.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예를 들어 말미에 제안한 교과과정의 요건주의 항목(도덕교육의 교과과정과 교육내용은 대강의 요건만 규정되어야 하며 상세한 부분에서는 교과서 집필자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313쪽) 등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동의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에 대한 문제를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한 탓에 저자에 대한 인색한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적어도 나와 다른 목소리를 향한 존중까지 저버리지는 않았으며,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염두에 두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유의 지평 확대와 논의의 활성화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진정성과 열정과 공정함을 공유하면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상생의 바람직한 성취가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상황에서 도덕교육을 논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외형은 비교적 정형에 속하지만 그 내용은 무정형이어서 갈피를 잡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외부환경과 자극에 대한 항원항체반응이 워낙 다양한 탓에 콩 심은데 콩 나는 존재도 아닌 것 같다. 미리 김 빼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만큼 다채로운 시선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족을 달았다. 

 

* 이 서평은 <윤리문화연구> 2호(화남, 2006)에 실려있음

i****a 2008.03.0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국가의 욕망''으로 점철된 도덕교육
"''국가의 욕망''으로 점철된 도덕교육" 내용보기
작년(2005년) 10월에 출간된 이 책을 사놓고 연초에 방영된 의 소개를 본 후에야 읽다가 중간 중간 쉬다 읽다하다가 결국 9월 21일에야 다 읽었다. 사실 이 글을 읽기는 그리 녹록치 않다. 현실의 도덕 교육을 비판하는 1장과 2장은 수월히 읽히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3장부터는 철학적 논증에 의거한 조밀한 글들을 짚어가면서 읽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자 김상봉의
"''국가의 욕망''으로 점철된 도덕교육" 내용보기
작년(2005년) 10월에 출간된 이 책을 사놓고 연초에 방영된 의 소개를 본 후에야 읽다가 중간 중간 쉬다 읽다하다가 결국 9월 21일에야 다 읽었다. 사실 이 글을 읽기는 그리 녹록치 않다. 현실의 도덕 교육을 비판하는 1장과 2장은 수월히 읽히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3장부터는 철학적 논증에 의거한 조밀한 글들을 짚어가면서 읽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자 김상봉의 글은 철학자의 글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글이다. 철저하게 논증의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이 글은 비록 힘이 들기는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꽤 지적인 포만감을 줄만하다. 철학적 논증이 부담스럽다면, 1장과 2장이라도 읽어본다면 현재의 도덕 교육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상봉의 현재의 도덕 교육에 대한 비판은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한국의 도덕 교육의 문제점 전체를 통찰하고 있다. 단적으로 김상봉은 현재 한국의 도덕 교육을 ''노예를 기르기 위한 도덕 교육''으로 본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도덕 교육은 ''자기 부정의 도덕''이며 ''자기 긍정''이 선행되어야 할 ''도덕 교육''에서 복종과 훈육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도덕 교육''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은 도덕을 이기심과 대립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무조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도덕적 태도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부정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자기를 부정할 자기도 부정될 자기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도덕적으로 결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도덕은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의 발동으로서 언제나 강인하고 개성적인 주체성을 전제한다. 주체성의 본질은 자기반성으로서 자기에 대한 관심이다. (본문 p.43) 그러나 한국의 도덕 교육은 ''국가의 욕망''으로 점철된 내용으로 가득하며 ‘국가권력에 의해 규정된 관변 도덕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직 (전두환 정권에 의해 창조된)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만이 금과옥조와 같은 이 과목의 교과서 집필과 교과 내용을 전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교육학’이 (민주화 이후)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한 ‘학제적 접근’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분명히 ‘윤리학’의 어미 학문은 ‘철학’이 되어야 하며 ‘도덕 교육’이 ‘국가’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몸 담고 있는 ‘도덕 교육’의 본질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책의 3장, 4장, 5장은 현재의 ‘도덕 교육’의 대안으로서 철학에 기반을 둔 ‘도덕 교육’을 다룬다. 그것은 현재처럼 규범을 준수할 것을 강권하는 ‘도덕’이 아닌 자신의 삶을 서로주체성에 기반한 ‘삶의 주인’이 자신이 정립하는 ‘도덕’이다. 그리고 필자의 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재의 교육 체제 속에서 저자의 이런 사고가 통용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의 도발적인 문제 제기가 되어 현재의 도덕 교육에 약간의 균열이라도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상깊은구절]
사람들은 도덕을 이기심과 대립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무조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도덕적 태도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부정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자기를 부정할 자기도 부정될 자기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도덕적으로 결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도덕은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의 발동으로서 언제나 강인하고 개성적인 주체성을 전제한다. 주체성의 본질은 자기반성으로서 자기에 대한 관심이다. (본문 p.43)
YES마니아 : 플래티넘 p*****o 2006.09.2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