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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관심갖고 있는 우리나라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교수였다가 대학에서 해직된 이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지내왔다.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을 거쳐서 현재 정책위원장으로 있다. 대학에서 해직된 교수가 다시 일거리를 얻기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나라 교수사회의 상식일진대 예외적으로 전남대 철학과 교수들의 배려(?)로 지금은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가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말만 철학자가 아니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철학자 상을 보여주고 계신 분이다. 학벌없는 사회 모임을 통해 그간 생각했던 것을 토대로 <학벌사회>라는 두꺼운 책을 낸 그가 이번에는 한국의 중고등학교 도덕교과서를 물고 늘어졌다. 나 역시 도덕,윤리 교과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도덕교과서의 문제점을 심각히 느끼고 있었던 바, 그의 책은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 나는 그의 주장에 100% 동감하는 바이다.
-도덕교과의 변화
도덕 혹은 윤리 교과 만큼이나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교과목은 없을 것이다. 수학, 국어, 영어, 컴퓨터, 기술 등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여러 교과목들이 입시제도에 따라 혹은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어떤 교과목도 도덕·윤리 교과만큼이나 변화를 겪은 것은 없다. 시대가 변한다고, 입시제도가 변한다고 수학 공식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컴퓨터의 작동원리가 바뀌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본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다만 6차 교육 과정에서 7차 교육 과정으로 넘어오면서 수학은 수학Ⅰ과 수학Ⅱ 뿐 아니라 이과와 문과에 따라 기본수학과 실력수학으로 나뉘고, 그것이 또 세분화 되어 각각 수학 10-가, 수학 10-나, 수학 1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었다. 이는 윗세대들이 배워온 수학의 공식이 바뀐 것은 아니며, 다만 종류가 다양화되었을 뿐이라는 점에서 변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어교과 역시 마찬가지로 예전엔 '국어'라는 하나의 과목만 있었지만 점차 '작문', '생활국어', '독서' 등의 다양한 영역들로 세분화되었을 뿐 우리가 사용하는 국어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과목들이 다 그렇지만 유독 도덕·윤리를 포함한 사회과 교과목들에 한해서는 정치적, 시대적 변화상에 따라 교과내용도 변화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그 중 도덕교과는 여태 국사나 사회교과보다 그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도덕교과의 성격
도덕을 제외한 중·고등학교에서 다루고 있는 교과목들이 "객관적인 사실 자체로부터 합리적으로 어떤 바람직한 행위규범을 이끌어내려 하지만, 도덕교과는 사실이 아니라 당위를 가르쳐야 하는 교과인 까닭에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거의 아무 가르침도 주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든 습관적으로 반드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당위적인 진술을 늘어놓게 되지만, 막상 사회적 문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교과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실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나 성찰도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당위규범만을 타율적으로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주어지는 당위 규범들이 과거 국민윤리 교육의 잔재 때문에 지극히 수구적이고 때로는 반도덕적이기까지 하다는데 있다."
-결론
우리나라 도덕교과는 외국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안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고, 본래의 도덕교육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왔다. 학생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할 도덕교과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도덕성 함양이 아닌 반공성 함양이 목표가 되었고, 지금은 '반공'부분은 삭제되었지만 그 자리에 '국가'가 들어서 있다.
도덕교과는 당연히 학생들의 도덕성 함양을 목표로 해야 하고 이에 걸맞는 교육내용과 평가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오늘날의 도덕교과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들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상황 제시를 통해 깊이있고 다양한 사고를 열어줌으로써 학생 개개인 스스로가 나름대로의 '자기도덕성'을 만들어 가야 할 진대, 우리네 도덕교과는 대신 행동명령을 내림으로써 답안을 제시하고 있어 그 중간과정은 당연히 생략되고, 결론 또한 미리 정해주고 있다. 교과서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학생들이 습득하고 따라야 할 행동의 표본이 되며, 그리하지 않을 경우 그에 반하는 행동들은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된다.
가수 유승준이 병역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갔을 때, 국방부는 그의 국내 출입을 금지시켰으며, 국가는 병역을 거부하고 국적을 포기한 자는 국내에서 이익활동을 할 수 없다고 규칙을 정하였고, 언론들은 선동적 기사를 찍어내 비난여론을 부추겼다. 그러나 과연 유승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도덕교사인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도덕교과서를 통해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고 배운 학생들은 당연히 군대를 안가는 유승준과 같은 이들을 비난하고 욕을 할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양심은 무슨 양심, 국가가 정하고 있는 의무를 거부하고 있는 그들을 어떻게 그냥 놔둘 수 있느냐는 식으로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져있는 결론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덧붙이며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수업을 할 때마다 교과서의 애국주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 나부터 거부감을 일으키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왜냐면 나의 거부감은 나 개인의 의견이고, 월급 받고 일하는 나로서는 국가가 만든 교과서대로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교과서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교과서와 반대로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다만 선생님은 이런 부분은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다른 의견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도덕교과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나뿐 아니라 많은 선생님들이, 많은 학자와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명코 개정되어야 한다. 아니면 폐지하고 철학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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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본문이 길어서 잘리네요. 전문은 여기에서 --> http://blog.naver.com/yangwooko/50001526571 (이하는 일부 발췌) 도덕에 대하여 내가 딴 나라에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만큼 도덕에 대하여 많이 얘기하는 나라가 있을까? 학교에서도 도덕을 독립된 교과목으로 가르치고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보다도 더 유교적 도덕 전통이 강하고 (아 참... 동성동본 금혼제도는 이제 폐지되었나? 아직인가?) 집안에서는 가정도덕을 밖에서는 교통도덕을 설법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하지만 신문을 펼쳐보라. 아니면 밤늦게 유흥가를 가보라. 그것마저 귀찮으면 아침에 자가용 창문에 가지런히 꽂힌 야릇한 판촉물들을 보라. 우리나라 처럼 도덕이 비참하게 땅에 떨어진 나라가 있을까? (뭐 우리랑 풍습이 다르긴 하지만 성도덕과 성산업에 관한 한 일본도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 뒤지지 않는다). 입으로는 모두가 도덕을 외치지만 손발로는 아무도 도덕을 행하지 않는 나라.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일본에 출장을 가본 일이 있는가? 일본 만화나 게임 -- 그것도 야한 것들 -- 에 익숙한 남자들은 일본에 처음 출장갈 때 혹시 길에서 만난 세라복 입은 여학생이 원조 교제라도 하자고 달려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전혀 불필요한" 걱정을 하기도 한다. 실제 일본에서 만나는 일반인들의 삶은 너무 건조해서 기름칠이라고 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절제된 삶, 절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태도, 소박한 풍속이 출장간 내 눈이 비친 일본의 모습이다. (물론, 공중전화 부스마다 깔린 테레쿠라 찌라시는 예외로 하자.) 이렇게 절제된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그렇게 황당무계하게 야한 문화가 생산되는가? (잠시 출장 기간동안에 본)일본과 우리나라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철저하게 욕망이 통제된 사회라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통제된다고 제거되지 않는다. 통제된 욕망은 분출구를 찾을 수 밖에 없고 그 분출은 통제의 강도가 강할 수록 변태적이 된다.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해보라. 과속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차들이 지나치게 느리게 간다. 대개 90킬로 전후. 카메라만 없으면 120, 130은 기본이다. 카메라를 더 촘촘히 설치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카메라가 없는 구간에서는 만회하기 위해서 140, 150으로 달리게 될 것이다. 통제가 강해질 수록 욕망의 분출은 강해진다. 하지만, 욕망이 없는 인간은 한낱 허깨비요 통제가 없는 인간은 망나니에 지나지 않을터. 그렇다면 묘수는 무엇인가? 어떻게 통제와 욕망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문제는 통제의 주체에 있다. 그것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통제일 때 즉 자신의 욕망을 그 지평 너머로 확대함으로써 우리 전체 온 생명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차원으로 사고함으로써 개인의 욕망을 저절로 통제할 수 있도록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조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대충 감이 오는가? 이러한 얘기를 진짜 고수의 입을 통하여 제대로 설명을 듣고 싶은가? 그럼 책 사서 봐라. (참고로 이 서평은 책의 내용을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요약도 아니다. 그러니까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인상을 나의 극히 개인적인 상념의 공간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이 맘에 안든다고 책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지 말기 바란다. 그건 순전히 나의 잘못일 뿐이니깐 말이다.) 글 읽는 재미에 대하여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글이 있다. 어떤 글을 길고 어떤 글은 짧다. 어떤 글은 몰캉하고 어떤 글을 서걱서걱하다. 어떤 글은 말초적이고 어떤 글은 심연의 깊은 곳에 침투한다. 말초적이고 짧은 호흡의 글이 만연하는 현 시대에 이 책을 읽는 것은 흡사 해외 전지훈련과도 같다. 좀 어색하고 익숙지 않지만 다양한 호흡의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균형된 시각을 위해 좋은 일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정운영의 글 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도정일의 글 처럼 현학적이지 않고 에코의 글 처럼 말을 향연을 펼쳐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최인훈의 <화두> 처럼 시종일관 묵직하면서든 한 문장 한 문장은 오히려 경쾌하게 독자의 무지를 공격한다. 조 프레이저급의 흐름에 알리같은 공격이라고나 할까. 글을 닫으며 그렇다. 이 책 솔직히 재미없을 수 있다. (내가 취향이 특이한 지 몰라도 책이나 영화 추천했다가 욕을 곧잘 먹는다.) 하지만 좋은 책이다. 나의 서평이 의심스러운가? 그럼 장정일의 서평을 찾아서 확인해보라. 틀림없이 장정일 특유의 미사여구로 칭찬을 했을 책이다. (아님 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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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본의 극우정치인의 역사관을 신문을 접하게 되면, 분노를 참을 수 없음을 느낀다. 제국주의 전쟁 침략으로 조선을 외적내적으로 능멸한 가해자가 그 과거를 영광스러워 한다니. 극우적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일본의 개개인들은 올바른 세계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도덕적 소양을 갖지 못한 것일 게다. 이것은 그만큼 일본의 교육체계가 극우의 헤게모니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사회는, 다시금 그러한 전체주의로 회귀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그런 현상은 그 내부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시민들에게도 잠재적 위협이 될수 있다. 파시즘은 개인을 억합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파시즘을 경계해야할 의무를 가진다. 그럼 우리 모습을 일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되돌아 보자. 우리는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우리의 도덕교육은 올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김상봉 교수의 진단은 '그렇지 않다' 로 귀결된다. 우리의 도덕교육은 공동체에 대한 복속을 우선적으로 가르친다. 이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누구보다 추구해야 할 우리의 덕목이 아닌가? 그런 헌신을 가졌던, 이들은 후대에 까지 깊이 칭송받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공동체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을 국가 교육차원에서 강요하는 것은 역시 파시즘과 통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상봉 교수의 지론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본디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기본으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 싼 외부인이 결코 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아닌 또 하나의 나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단계로 성숙해져야 한다. 그 뒤에는 주변인이 아닌 공동체로, 사회로, 국가로, 나아가 전 지구적으로 개인이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시민의 도덕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도덕교육은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맹목적인 공동체에 관한 헌신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도덕교육은 개인의 소중함을 모른체, 전체주의에 따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지양되어야 할 태도이다. 김상봉 교수의 특유의 통찰력이 빛나는 책이긴 하지만, 비약이 좀 심하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받은 도덕교육이 전체주의적인 것이라고 느끼기에는 내 지적 감수성이 상당히 둔감한가 보다. 그런 도덕교육을 받고 자란 나도, 물론 전 지구적으로 자아를 확장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내 주변인들의 아픔을 공유할 만큼 자아를 확장하기는 하였다. 아직 완벽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역시 지적 감수성을 키워서 그의 통찰을 좀 더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 그의 말대로, 그런 미세한 차이들이 조금 더 사회를 진일보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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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05년) 10월에 출간된 이 책을 사놓고 연초에 방영된 [인상깊은구절] 사람들은 도덕을 이기심과 대립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무조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도덕적 태도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부정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자기를 부정할 자기도 부정될 자기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도덕적으로 결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도덕은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의지의 발동으로서 언제나 강인하고 개성적인 주체성을 전제한다. 주체성의 본질은 자기반성으로서 자기에 대한 관심이다. (본문 p.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