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책을 처음 접한지 5년이 되었다. 처음 읽었을때와 지금 이책을 읽을때.. 느끼는 점이 너무나 많이 다르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므로.. 인생이란 참으로 자유스럽다.. 겉에서 본다면 ..우리가 좀 떨어져서 본다면..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본다면... 저녁 아무도 없는 방에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도 너무 휩쓸려 있었구나... 그저 조용히 있으면 편한것을...이책을 읽고 마음이 조용해 지면 이유없는 행복이 느껴진다. 옳고 그름이 없고 그러면서 모든것이 옳고 모든것이 그른 이 세상속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면... 이책은 그 문중의 하나가 될것이다... |
| 현대 물질문명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물질에 둘러싸여 있으며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주위에는 무수한 물질이 범람하고 있으며, 사치스런 것만 찾지 않는 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입수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해졌다. 또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많은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넣고자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풍요한 물질에 둘러 싸여 있고,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다 해서 과연 행복할까? 참으로 우리는 산다는데 기쁨을 느끼고 있을까? 많이 가진 것이 행복한 것일까? 나 뿐 아니라 우리의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기쁨과 충족감을 느끼기는커녕 하루 하루의 생활을 마치 기계처럼 단조롭고 무미 건조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심지어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조차 역겨움을 느낄 지경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 문명에 있어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크르슈나무르티는 이렇게 불행한 우리의 삶에 목마름을 해결해 줄 해답을 이야기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닌게 아니라 문명에 찌들은 우리 현대인에게 조금더 주의들 둘러 보라고 충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자유를 갈구하고 자유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것이라는 명제는 누구나 동감하는 바일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스스럼없이 선택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명제에 대한 확인하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라고 사료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자유란 무엇이며 이는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일까? 내 미천한 사유의 공간에서는 크르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책에 나와 있는 자유라는 의미만을 갈구하기에 나는 더 속박된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상식과 일상적인 생각을 단숨에 뒤 업어 버린 것은 사실이다. 난 인도의 대 스승인 크르슈나무르티를 만나기 전까지 자유를 찾기 위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나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앎에 대한 나아가 지식추구에 대한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빠르게 변하는 현대 정보의 홍수를 누구보다 빨리 빠져 나오려 노력해야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가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쏘았지는 지식과 정보를 익히느라 밤샘을 하는 불쌍한 현대인들을 내 주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들이 자유를 갈구하기 위하여 속박에 틀에 자신을 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쉽게 내릴 수 없는 해답일지라도 난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라는 책을 덮는 순간 그들이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고 홀로 확신했다. 그들은(어쩌면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문명인들) 자신의 자유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진정한 자유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 이에 크르슈나무르티는 우리에게 쏘아지는 정보의 홍수에서 자유를 찾기보다 자신 안에 있는 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에 분석철학을 빌리지 않아도 내 그늘진 생활에서 크르슈나무르티의 경고를 무시한 사례들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책가방을 들러 매고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 속에 나를 맡겨 버리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활용하기 보다 권위 있는 사람에 말에 더 기를 기울이는 나.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누구보다 많이 알아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아갈려고 애쓰는 미련한 나 자신. 이 모든 모습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다. 나 자신에 대한 진정한 고찰은 내 생활에 있어 아주 미천한 부분이나마 차지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는 삶에 대한 무조건적인 도피나 일탈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처절한 혁명이다. 이 한 권의 책을 마감하면서 나는 내 스스로 지금의 삶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난 나 스스로 아주 작은 존재임에 분개했고 보다 많은 지식을 알지 못하는 것에 슬펐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은 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론 이제 내 인생을 버려 두는 일은 조금씩 그 가능성을 잃어가고 있다. 난 나 스스로 나만의 진정한 진리를 찾고자 내 안의 혁명을 일으킬 것이며 이 혁명을 동력을 제공해 준 크르슈나무르티에게 감사를 드릴 것이다. 그리고 후에 내가 가르칠 아이들에게 내가 누린 이 한 권의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
| 그는 나를 버리라 한다 모든 욕망의 시작이 나이고 모든 공포의 시작이 나라는 것이다. 나를 버림으로서 기존의 모든 우리의 인식의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나를 버림으로써 욕망을 버린 것이고 욕망을 버림으로써 공포를 잊은 것이고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무(無)안의 나를 찾는 것이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찾은 거이라 하는 그의 논리이다. 그는 이처럼 그의 논리를 이해하는 나의 행위도 결국 머리로써 행하는 또 다른 나의 속박이라 할것이다. 이세상에 그렇게 외부로부터 주어진 질서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신의 본질로 눈을 돌리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그는 가능하다고 보고있지만) 가능하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을 깨닫는 순간 또 다른 질서를 발견 하므로써 그가 말하는 생각의 뒤틀림끝으로 또 밀려나는 것은 아닌지 ... 긍정하면서도 다시 부정하는 의구심을 멈출 수 없게 하는 책이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아는 것은 결국 전적으로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이므로.... 그러나 그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사로잡는다. 사랑에는 어떠한 의무도 책임도 없다는 것인데, 지금 이글을 읽고 있는 많은 독자들은 반발할 것이다. 왜 의무와 책임이 없느냐? 어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냐하고요. 그러나 사랑 본연의 문제에 관하여 생각하여 본다면 금방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가 대단한 정신적 세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은 간혹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런말을 종종 하곤한다. <정말 뭐가 씌여도 씌였어...눈에 콩꺼플이 덮혔지>라고. 그렇듯이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비난없이 질투없이 분노없이 비교가 없이 사랑하여야만 한다.그리고 의무적으로 하는 어떠한 일에 우리는 애정을 가질 수도 없다.그러므로 사랑에는 의무를 동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은 언제나 그렇듯 능동적인 현재이여야 하는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고 오로지 내 자신의 본연의 정신상태에 충실할 수 있는 죽음의 문턱에서야 알게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책임 또한 동반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 함께 영위할 수 있는 복잡한 사랑이 더 마음에 든다. 함께 분노하고 기쁨을 나누고 고통받으며 누더기처럼 헤어진 치열한 사랑을 꿈꾼다. 그 또한 능동적인 현재이지 않을까? 그러한 사랑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또 다른 사물의 정수를 토해내기도 하니까. 사랑이란 끊임없이 생성되기도 하며 또한 움직이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발자국(그 아름다움 문학작품들, 열정적인 그림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음악들....)들을 남기는가 말이다. 한 인간의 철학을 생각해 본다. 그가 생각하는 어떤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그는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했을까?그렇게 탄생한 한 인간의 생각은 어쩌면 괘변일지도 모르고 아주 집요한 본연의 진리일지도 모른다. 늘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아오니까. 이 책 또한 한 크리슈나 무르티라는 한 인간의 궤변이여도 좋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목소리에 우리는 귀 기울이므로써 매일같이 혹사당하며 수많은 우리의 정신적 난기류를 극복하려는 가상한 우리의 삶에 일종의 반환점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우리의 내적인 혁명을 도발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