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신자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적 입장에서 이단을 믿는 것인가? 여기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딜레마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진화론을 거북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이론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입장에서 기독교인이 진화론을 받아 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편안한 마음을 안겨줄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 번 인류의 역사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보자! 종교와 신화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에는 종교의 교리와 일치하는지의 여부가 진리의 판단 기준이었기에 종교의 교리는 절대적이며 의심의 대상일 수 없었다. 이것에 반하는 어떠한 이론이나 의견도 이단으로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에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가 감히 종교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도전은 종교만이 아니라 과학도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근원적이며 총체적인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둘 사이에는 남달리 의견 차이와 대립의 소지도 많고, 반대로 공조와 시너지의 여지도 풍부하다 실상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살펴보면 갈등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타자의 입장에 전혀 관대함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이러한 갈등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듬해인 18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국학술협회 모임에서 월버포스 주교와 토마스 헉슬리 사이에 그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즉, 월버포스 주교가 헉슬리에게 유인원 조상이 할아버지쪽인지 할머니쪽인지에 대한 물음에 헉슬리는 ‘이렇다할 목적 없이 수사학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려놓고, 능변의 여담으로 종교적인 선입관에 대한 기술적 호소를 통해 청중들의 주의를 흐뜨려 놓는 사람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면 더 부끄러울 것’이라고 대답한다. 1802년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는 완벽성을 갖춘 척추 동물의 눈을 시계에 비유하며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시계를 주웠다면 이 복잡한 시계는 분명히 설계자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복잡한 눈도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 바로 지적 설계자 이론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약 그러한 시계공이 있다면 그는 눈먼 시계공이라고 그의 책에서 말하며 지적설계론에 반대의 칼날을 세웠다.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는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버틀러 법을 통과시킨 바 있으나, 존 스콥스라는 이름의 생물 교사가 금지된 진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스콥스는 100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지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되나 신문과 여론에서는 이 재판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근본주의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고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았다고 보고 있는데, 이 재판을 스콥스(Scopes) 재판 혹은 원숭이 재판으로 불리어진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 양상은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와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 간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다. 양진영은 반대편을 반드시 타도해야할 대상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화심리학의 경우는 종교의 존재를 유전자를 가지고 설명하기 조차한다. 즉 종교를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종교 측에서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이란 이름으로 마치 과학을 밑변에 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진화론 검증이 안된 가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반대로창조론이나 지적설 론을 사이비과학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종교와 과학 사이에 갈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나 종교는 신비로운 세계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둘은 상대방이 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양쪽 모두 진리를 독점하지 못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을 분리주의 입장이라고 한다. 또 다른 입장을 보면 종교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면 다윈주의와 신학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한 '설명'이 다른 '설명'을 반드시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종교는 과학 발견의 토대 위에 굳건히 서야 하며, 과학은 종교의 목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물론 종교도 과학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즉, 이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즉 그는 종교와 과학이 공조함으로 서로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그 공조의 주된 자리는 종교라는 뉘앙스에 은근이 강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신학 교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저자는 기독교 신자이면서 다윈주의자인 사람들에게 전혀 죄책감이 들지 않도록 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오히려 격려를 해주기도 하는 것 같다. 저자의 논리는 나 같은 선데이 크리스천에게도 부담을 덜어주고 있으며 안도감도 함께 주고 있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2005년 12월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된 이유가 될 것 같다.종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