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여행에 대한 욕구가 불끈 솟구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를 지닌 먼 곳. 이유는 모르지만 그 어딘가에 닿으면 꽉 막혔던 내 마음이 순간적으로 뚫릴 것만 같은 착각이랄까. 익숙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은 항상 준비된 듯 균열된 어딘가를 비집고 올라와 나를 뒤흔들곤 한다. 카메라를 지니게 되면서부터 그와 같은 욕구는 더욱 커졌으니, 매일 보는 익숙한 환경을 렌즈에 담을 때마다 이 곳이 유럽 어딘가 였더라면 혹은 삼림 우거진 남미나 아프리카 그 어딘가였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내가 여행에 도가 트인 것은 아니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여전히 나에게는 방문하지 못한 혹은 방문해야만 할, 우리나라의 수많은 곳들이 존재한다. 고층빌딩 가득한 서울 한복판도 사진을 위해서라면 좋은 소재가 되어줄 수 있을 터이고,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유명세를 타지 않은 곳곳이 나를 맞이할 준비에 분주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분주한 나의 마음에 발목이 잡힌 것일지도... 이렇듯 욕심만이 가득한, 하지만 실속은 없는 나에게 기행문은 일종의 대리 만족을 가져다준다. 특히나 생생하다 못해 눈 앞에 실물이 펼쳐지는 듯한 표현들을 만났을 때의 짜릿함은 기행문 아닌 여타 다른 종류의 글은 누릴 수 없는 사치인지라, 그 사치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글은 어느 한 시점에 고정된 존재이다. 인쇄된 평면 종이는 시간에 의해 누렇게 변질될지언정 그 내용의 가공을 허락진 않는다. 이런 글은 훗날 존재치 않게 되어버린 것들마저도 보호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으니,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은 말 그대로의 과거 어느 한 순간의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 책장 사이에 끼워놓은 은행잎이 바스라질 정도로 빳빳하게 시간을 머금는 것 마냥... 문명의 이기에 짓밟혀 사라진 것들조차도 한 편의 간략한 글에 의해 완벽히 복원되었으니, 50년 이상의 시간을 거슬러 광경을 음미하는 것은 책 읽는 이의 몫이렸다!! 일반적으로 일제 시대라 함은 유럽의 중세 시대에 버금가는 이미지를 풍기는지라, 그 시절엔 생존에 급급해 어떠한 낭만도 불가능할 것만 같은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치열함을 빗겨선 사람들, 그들의 외도(?)에도 낭만적인 기상은 넘쳤으니,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일제의 지배 방식이 변하면서 급작스레 주어진 알량한 자유도 일종의 달콤함을 지녔었나보다. 아니, 시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내 안에 너무 크게 자리 잡다 못해, 그 시절에는 아무것도 아니된다는 고집으로까지 번졌던 것일 수도... 급히 넘겼던 책장을 되돌려 천천히 음미해보니 글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감정이 단조롭지만은 않음을 깨닫는다. 복잡하다. 무엇을 또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시간을 거슬러 <개벽>, <삼천리> 등 1920,30년대 문화를 주름잡았던 잡지에 수록된 글들을 만났다. 지금처럼 부산하진 않았을, 하지만 한 국가의 수도로서의 임무는 여전히 수행하고 있었을 서울 상공을 수놓았던 안창남의 비행일지에서부터 책은 시작하고 있었다. 국토를 향한 애잔한 마음, 그것을 사랑이나 애국심의 차원에서 논할 수 있을까? 내 것이지만 이미 남의 것이 되어버린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촉촉히 젖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니산을 오르며 나라 잃은 무능함에 한껏 울어버리는 누군가의 글이 한없이 서글프다면, 식사마저도 일본식으로 변화를 준 주왕산 백련암에 대한 정현모의 글은 울먹이던 입술마저 잠재운다. 우리 땅 깊은 산 어귀까지 일본을 심은 이가 과연 누구일지... 하지만 논개의 절개를 울부짖던 김동환도, 한 때 글로써 젊은이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이광수도 모두 일본을 택했던 것을 생각하니 원망할 누군가를 찾는 것이 부질없음을 느낀다. 이 모든 복잡한 감정들은 책의 끄트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DK生''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남긴 ''한라산 모험기''에 서서히 누그러졌으니, 죽을동살동 산을 오르내렸다는 그 이야기 앞에서 애써 크게 한 바탕 웃음으로써 나는 과거와 화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차가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이다.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작은 바퀴를 굴리다 보면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어디를 못 가겠느냐마는, 꼬불꼬불 정리되지 않은 길이 주는 아찔함을 다시 느끼기엔 우리가 너무도 멀리 와버린 듯하다. 그 자리에 늘 있지만 우리로부터는 멀어진, 우리로서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 풍경들을 한 권의 책을 통해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나''라는 존재가 지구 아닌 다른 별에 잠들어있던 시간들을 만나기 위해 글과 함께 잠시 굽이굽이 접어 두었던 시간들을 펼쳐버리고는 2006년 2월에 다시 서 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는 풍경들이 있음을 생각하고 나니, 잊혀지는 것들을 추억하기 위한 기록이 하고 싶어진다.삼천리>개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