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토양인 학대와 외상의 경험은 결코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독은 선택의 병이라고 한다. 중독을 치유 받고자, 하나님의 도우심에 협조하고자 내가 선택할 수 있다.
학대와 외상의 토양에서 수치심, 두려움, 분노, 외로움, 비탄 등의 왜곡된 감정을 뿌리 삼아 온갖 중독의 열매들이 맺힌다고 한다. 4주차 강의에 의하면 모든 중독의 핵심적인 뿌리는 ‘수치심’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나는 2, 3주차에 바로 이 수치심을 직면하면서 엄청난 감정의 역동을 치러내야 했다. 실제적으로 나와 내가 맺은 관계들을 면밀히 지배하던 수치심이 성령님의 은혜로 치유되면서 수용과 격려가 내면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회복의 사이클을 시작했다.
내 삶의 중독의 열매를 맺게 한 중독의 토양 자체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하지만 뿌리가 박혀 있는 토양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밖에서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주어도, 토양이 그대로인데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먼저는 그리스도의 토양 안에 심겨 뿌리를 내리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근본적으로 중독이 치유되지 않는다. 토양이 바뀌면 뿌리도 건강해질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수치심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뿌리부터 치료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가 심겨졌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요즘 경험하는 감정은 주로 두려움이다. 표면적으로는 장래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의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데서 말미암음이다.
중독인지 아닌지, 그리고 어떤 중독인지를 판별하는 것 또한 결국 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중독일 수 있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삶의 양식일 수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말, 행동, 표정만으로는 중독을 판단할 수가 없다. 오직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모습으로 섰을 때, 하나님께서 분별할 수 있도록 정직함과 지혜로움을 주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숨겨진 중독의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지원그룹에서는 자신의 중독을 스스로 발견하고 자신의 입으로 밝힌다는 생각이 든다.
동반의존이 중독과 밀접한 관련은 있지만 그 자체는 중독이 아니라고 한 부분이 어려웠다. 동반의존으로 알고 있는 많은 경우는 잘못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순한 애착을 넘어 집착에 가까운 잘못된 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다. 잘못된 사랑에는 나의 존재 자체를 무너뜨리는 파괴력이 있었다. 하지만 중독의 최종 목적이 “자극시키든 진정시키든, 깊은 내면의 감정을 올바로 느끼거나 경험하지 못하도록 우리 감정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비춰 보더라도, 나는 잘못된 사랑을 했던 것이지 중독에 빠졌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 속에서 내면 밑바닥에서부터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생생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때 느낀 감정들은 비참함, 안타까움, 억울함, 분노, 외로움 등이었다. 고통스런 감정을 느꼈지만, 그 잘못된 사랑에 수반된 생각이나 행동을 즐겼던 건 아니다. 그 감정들이 내게 고통을 주었지만, 나는 그 감정들을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감정들이 내 안으로 독화살처럼 향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적절하게 표출하지 않은 감정은 내 속에 들어와 깊은 우울증과 홧병을 만들었었다. 비록 치유되긴 했지만, 여전히 재발할 여지가 내 성향 안에 있음을 알고 있다.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점은, 내가 사랑과 관계 중독이며, 또한 거기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과 관계 중독은 성 중독의 한 부류에 속해 있다. 풀어서 말하면 사랑과 관계 중독이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성 중독이다. 잘못된 사랑의 실패를 계기로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신화는 깨어진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남자란 결국 믿을 수 없다는 생각, 이런저런 이상적인 남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여전히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환상이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을 보면서 현실은 안 그렇다고 내뱉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겐 왜 저런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며 어느샌가 주인공을 대리만족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결혼한 여자란 아무리 잘나 봤자 그저 부엌때기나 애를 낳아 주는 몸뚱이에 불과한 게 아닌가, 했던 내 깊은 마음 속 불안감을 현실화시켜 주었던 그 사람을 생각하면, 이젠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 입장에서는 웬만큼 이해도 되지만, 결국 사랑이란 것도 현실 앞에선 무너지고 만다, 아니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씁쓸하긴 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여자가 어떻게 혼자 살 수 있는가, 이래저래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는 남자가 필요하긴 하다는 발칙한 생각도 있다.
요즘 들어 내가 지속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과 초조함이다. 많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시간 낭비 없이,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하게 보여주신 소명을 향해서 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참으로 권태롭기 쉬운 시간, half-time을 허락하셨다. 조만간 경제적 자립을 이뤄야 하는 현실의 압박으로 인해 초조해졌다. 하나님께서 아직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때론 장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이 찾아오지만 비교적 잘 견디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내겐 하나님 안에서의 쉼과 교제가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고자 힘쓰지 않을 때, 아드레날린 중독과 음식 중독과 인터넷 중독 등의 중독 성향이 다분함을 인식하고 경계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성경 읽기, 기도,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 등의 긍정적인 욕구를 갖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계신다. 나 자신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참을 수 있을 때, 중독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