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소설이라기보다 "현대 문명 비판서"로서 의미있는 책이다. 그런점에서 "1984"와 많은 부분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소설 속 공간은 '오세아니아'처럼 통제적이고 삭막한 환경은 아니다. 단지 책에 관한 모든 일을 금하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1984"가 스탈린주의가 만들어내는 전체주의를 극단적 예를 들며 비판하는 책이라면 "화씨 451"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대중획일과 인간 소외 등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문제를 짚어내는 책이다. "미래소설"이라지만 읽다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비슷한 서술이 많아 놀라게 된다. 사람들은 자꾸만 사람과 책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텔레비젼(광범위한 대중매체라고 해두자)에 둘러싸여 순간순간의 쾌락을 즐기며 웃고 잡담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 누가 정치를 하던 전쟁이 발발하던 말던 텔레비젼 앞에 희희낙낙하는 것이 우선인 '우매한' 대중이 되어 버린 사람들... "1984"에서는 국가권력이 계획적이고 강압적, 조작적으로 사람들 머리속에서 "생각하는 힘"을 지워내려 했다면, "화씨 451"의 국가권력은 보다 약삭빠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머리속에 온갖 쾌락과 잡설 그런 것들만 주입시킴으로 해서 "생각하는 힘"을 제거시켜 버렸다. 그렇게 사는 삶이 "행복"이라고 느끼게 하며... "생각하는 힘"과 관계된 "책"은 모두 불태워져 버린다. 작가는 그런 비인간적이고 말도 안되는 세상,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감응하는 인간을 오히려 미치광이요 반사회인으로 매도하는 허위에 가득찬 세상을 비판한다. 그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국가권력이 만들어내는 우스꽝스런 허위의 벽을 부수라고 충고하고 있는 듯하다. "자유"를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고삐에 걸린 짐승과 같이 먹고 자고 싸고 성행위하며 주인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이게 "행복"이라고 느끼는 짐승의 자유. 고삐를 끊는 일을 두려워하는 자유, 아니 복종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어 버린 "화씨 451"의 미래인들.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하고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상의 내용이 "화씨 451"에 담긴 주된 내용이다. 이런 상황을 우연하게 깨달은 주인공이 어떻게 실천에 옮기는가가 이 책의 줄거리이다. 서술이 딱딱하고 좀 지루한 면이 느껴지는 문장이니 정신 바싹 차리고 읽어야 할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의미심장한 구절들이 많은 책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책이 "연극"으로 만들어지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왜 이 책을 우리나라에서는 禁書로 지정하지 않았을까? 꽤 "불순"한 책일텐데...^^) |
| 사람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뒤돌아보았을 때 그렇지 않았던 적이 어디 한번이라도 있었을까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저 살아가기에 급급해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귀찮고, 고통스러우며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의 순간마다 온 혈관을 열어 위기를 경고하고 비판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도는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가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의 전설을 미래 사회로 옮겨 놓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도 인문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된 시대, 책들은 당연히 소거되어야 하며 소방수들은 현실의 불을 끄는 대신 책을 태웁니다. 부와 번영으로 모두가 풍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의 위험이 바로 눈앞에서 도사리고 있고, 무엇이든지 안방에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어떤 것도 경험하거나 소통하지 못하는 [화씨 451도]의 시대는,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처럼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늘 광고와 말을 걸어오는 벽걸이 티비, 라디오 프로그램 속에 갖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스스로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인생은 공허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공허를 채우기 위해 다시 티비와 이어폰, 스포츠카를 찾게 됩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고리 같아요. 그러나 이런 고리는 아주 작은 만남, 혹은 깨달음에 의해서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책을 태우는 일이 직업인 몬태그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당장 눈을 충족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자연의 비밀과 근원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경이를 간직한 이상한 소녀, 클라리세는 몬태그의 무기력하고 닫혀 있는 내부를 조금씩 일깨워 마침내 그를 도시에서 빠져나오게 만듭니다.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결국 책은 인간이 쌓아올린 경험과 정신사의 압축으로, 인간이 만들어 온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몬태그의 각성은 책을 읽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깨달음은 오랜 시간에 걸친 갈등과 번민, 탈출구를 찾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에서 쌓아올려진 것이죠. 위대한 책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 쓰여 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몬태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자신이 책‘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후회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생각하기를 원할 때 그가 기억하고 있는 ’전도서‘처럼 그 사람들에게 빛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화씨 451도]는 빠른 전개와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는 얄팍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얇지 않으며, 절망만큼이나 강한 희망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실 같지 않은 전쟁이 발발하고, 이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한 오늘, [화씨 451도]는 우리가 왜 계속 생각해야 하며, 왜 우리 자신을 책‘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지를 진실한 어조로 강변하고 있는 좋은 소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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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도 그러니까 레이 브래드배리의 작품중 초기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가장 유명하며 그의 묘비에도 적힌 작품이다. 그러니까 자세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몰라도 저자가 일단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인정한 거라고 할까.
(글쎄, 왜 사망년도는 새기지않았는지...찾아봐야겠다)
글쎄, 그의 단편들의 통과하는 핵심이 표현되어있다. 단편들은 정말로 시와 같았는데 그러한 서정성이 약간 줄어든 장편이지만, 내용은 매우 상징적이고 여러부분에서 곱씹을만한 문제를 던져준다. 제국주의적 침략과 팽창, 진보된 과학기술에서 인간을 배제한듯한 공격성과 화려함으로 무장한, 일련의 SF와 달리 그의 작품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한다. 과거와 현재에 지니는 이러한 자세를 계속 가진다면, 아무리 발전된 문물이 있더라도 파괴적이고 소멸적임을 되집어준다. SF를 문학적으로 존경받게 만든 작가란 말에 공감 백배를 하게 만든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내용을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영화 [이퀼리브리엄 (Equilibrium)]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다.
인간이 감정을 느낄 수 없도록 약물로 지배하며, 서로를 감시하며, 과거의 예술, 문학을 파괴하여 분쟁의 씨앗을 없애 평화를 유지하려는 미래의 국가 리브리아에서 크리스챤 베일은 존 프레스톤이란 이름으로, 클레릭이란 사법권을 가진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고발하고, 자신의 아이들로부터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어느날 개와 그림, 베토벤에 충격을 받고 일말의 변화를 겪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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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방화수 (fireman, 소방수는 fire fighter이다)의 직업을 가진 그는 책이 있는 곳이면 출동을 해서 태워버리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아내인 밀드레드 (애칭은 밀리)는 하루종일, 일전에 레이 브래드버리가 예언하여 실현된 10가지 과학기술 중 하나인 플랫스크린 TV가 벽으로 장식되어 [일러스트레이티드맨]의 '대초원에 놀러오세요, the veldt'에서 입체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듯, 여기선 양방향 방송을 즐기며 또 예언했던 (Ray Bradbury's 10 predictions that came true) 이어폰 라디오를 듣다가, 이들 세대의 최대 취미로 보이는 고속의 자동차 질주만이 전부이다.
일종의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아닌, 여기서는 일종의 역사왜곡의 보여주며, 불이 날 수 없는 방화주택은 처음부터 있었으며 벤자민 프랭클린의 그 최초의 fire fighter라는 둥 역사적 인물들의 업적 등을 부정한다. 이것도 일종의 새로운 세계의 창조인가.
어느날 자신의 책 속에서 타죽기를 자청한 노부인의 죽음을 보고 퇴근하던 그는 자기 집 근처에 사는 17살의 소녀 클라리세 맥클런을 만나고, 일종의 공공의 위험인물인 그녀로부터 불은 태우기 위함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태우지않기 위해 끄는 것이며, 현관의 포치는 쓸데없는 시간의 낭비라 건축가들이 없애고 부정한 공간이 아닌 가족들이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공간임을 언급한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사랑, 책, 산책, 의미찾기를 다시 새겨본 그는 몰래 가져온 책들을 읽는다.
그에게 경고하듯 방문한 비티서장의 말은 정말 곱씹고 반박하다가도 공감하기도 하고 매우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긴 고전을 읽기싫어 요약을 원하고, 책이나 예술에 대한 선호와 해석이 달라 싸우고 하는 것들이 싫어, 그저 TV를 보고 즐기기 위해 분쟁의 소지들을 모두 태워버렸더니 행복하다는.
...우리 전부가 똑같은 인간이 되어야 했거든. 헌법에도 나와있듯 사람들은 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는 거지. 또 ..전부 똑같은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지지. 우린 모두 서로의 거울이야. 그렇게 되면 행복해지는 거지. ..스스로 대립되는 판결을 내리는 장애물이 없으니까..우리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하수꾼으로..사람들은 말하지. 난 행복해지고 싶어라고 말야. 글쎄, 사람들은 불행한가? 우리는 사람들한테 감동과 즐거움을 제공했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도 그게 전부고...분통이 터지겠지? 그럼태워버려. 안정과 평화...10분뒤에 검은 잿덩어리고 남고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어떠니 저떠니 하는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두세. 잊어버리라고. 모든 추억을 태우ㅝ버리고 모든 걸 태워버리는 거야. 불은 현명하고 깨끗하지... 그애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알고싶어했지. 정말 골치아픈 일이지...정치적으로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않는다면 양측면을 가진 질문을 해서 그 사람을 걱정하게 만들지말고 대답이 하나만 나올 수 있는 질문만 던지라고. 물론 아무것도 묻지않는게 제일 낫지...'사실'을 주입시켜야돼. 새로얻은 정보 떄문에 '훌륭해졌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되고..행복해지는거야...침울하고 황량한 철학의 물길이 우리 세계를 집어삼키지않도록 말이야....지금 우리의 행복한 세계에서... (p.80~92).
과연 그 어떤 분쟁도 없는 것이 나을까. 단 한가지만이 존재한 것이 나을까. 인용된 후반부는 이미 트위터 등의 정보포화로 인한 최근의 한 기사와 연구결과와 정확히 일치하기까지 하다.
1990년도 이후 핵전쟁이 두번이나 일어난 미래의 이 세계에서 이 비티소장의 말은 무언가 공감을 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무조건 비판만을 위한, 상대방을 상처주기 위해 교묘히 선택된 단어로 인해, 감정따위는 필요없다는 식의 논리로만 무장된 그러한 답답함과 좌절이 계속된다면, 일종의 독재자처럼 과학기술과 시스템을 독점한 소수가 전세계의 평화를 위한다며, 모두가 공평하고 생각없이 즐기기만 하는 이러한 인위적 평온한 세계를 구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Absolute Equality + Tranquility = Happiness????
하지만! 이렇게 인류를 포기할 수 없다. 마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대심문관처럼, [Les Miserables]의 과거혁명가 노인과 주교와의 대화처럼, 이 모든 회의와 혼란스러움을 정리해주는 대화가, 과거 영문학교수였던 파버에 의해 이야기된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오. 지난날 한때 책 속에 들어있었던 그 무엇이오. 똑같은 것을 요즈음의 벽면 텔레비젼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그렇지못하고 있소....우주의 삼라만상들을 어떤식으로 조각조각 기워서 하나의 훌륭한 옷으로...부족한 것은 세가지가 있소. 우선 첫번째, 당신은 이와 같은 책들이 왜 중요한지 알고 있소? 왜냐하면 이런 책들은 좋은 '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짜임새...아주 세밀하게 짜여진..자기나름의 뚜렷한 생김새..세밀하게 엮인...현미경을 통해 당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진실한 삶의 이야기...책들이 증오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는지?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안타이오스는 어머니인 대지에 발을 딛고 서있는 한 절대로 싸움에 지는 법이 없었따고..헤라클레스는 그를 번쩍 들어 두다리가 땅에서 떨어지도록 한뒤 손쉽게 제압했다고 하오...첫번째가 좋은 질, 정보의 짜임새가 얼마나 좋은가...두번째는...여가시간이지..텔레비젼은 '현실'이기 떄문이지. 그건 즉각적이고 말초적이고..거기서 말하는게 모두 옳은거 같고 모두 옳아야만 할 것 같고 그것은 너무나도 깔끔하고 즉각적으로 결론을 내려주니까 당신의 마음은 미처 생각해보고 반박할 여유도 갖기못하오...세번째는 지금말한 그 두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얻어지는 우리의 배움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권리요...p.116~p.131
아, 저자는 정확하게 종이책과 신문의 몰락과 더불어 텔레비젼 등의 압도적이고 즉각적인 미디어와 SNS와 인터넷 등으로 얻는 정보에의 맹신을 경고해주고 있다.
과연 쉽게 얻어지는 정보가 시간의 낭비를 막아주는 걸까, 일방적인 의견에의 몰입과 믿고싶은 것만을 더욱 믿는 강화 (난 참 답답한게, 일부의 미디어매체가 망해야한다며 그 대상의 의견을 알아보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일부가 아니라면 그 전체가 없어져야 하는걸까? 그게 매카시즘과 뭐가 다른걸까? 자신이 믿는 것이 틀릴 때에도 오히려 음모론을 제기하는 태도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그저 맹목적인 종교와 다른게 뭔가) 가 자신이 사유해서 얻는 원칙을 대신해줄 수 있는 걸까. 과연 모든 분란이 없어진 상태를 평온이라 말하며, 행복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걸까?
1950년대에 이 작품을 내놓아 미래의 세상에 환호하지않고 오히려 미리 되집어보게 했기에, 정말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써놓은게 아닌가 할 정도로 감탄스러웠지만, 생각해보니 이러한 것들은 또 미래의 어느시점에 가서도 일부의 구체적인 대상만 바뀔뿐 계속되어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싶다. 문명과 문화, 문학과 창조, 다양성과 자신의 의지, 사유 등에 대해.
그리고, 이는 책을 읽는 속도보다는 사는 속도가 더 빠른, 책소유에 집착하는 나에게도 경고를 보내준다. 책을 통해 얻으려는게 과연 무엇인지, 정신적 허기를 양적인 독서로 달랠 수 있을런지를..
...끈끈한 우정이 언제 어느 순간에 완전히 맺어지는가를 정확히 알수는 없다. 거대한 배에 물이 한방울 한방울씩 스며들다가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이 더해짐으로서 가라앉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우정이란 것도 서로 주고받는 친절함이 계속된 끝에 어느 순간엔가 두 사람의 가슴이 하나로 만나는 것이다...p.101~102
..표지만 보고 책을 평가해서는 안된다오....p.209 (익숙한 문구지만, 이 책에선...읽어보면 이 말이 얼마나 기발한지 알게된다.)
참,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는 이 책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정말 의외였다. 역시나 장르문학을 과소평가한다. 나라면, 1001권에 꼭 넣었을 것이다.
p.s : 1966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감독맡아 영화를 제작했다.
글쎄 기대했던 특수효과들은 실망스럽지만, 중요한건 테마의 전달이니까. 번역자는 이 작품을 훗날 외국에서 보았다며 의외로 작품이 문학이 아닌 책에 집중한듯 다소 실망스러웠다고 말하고 있다. 아, 그 구분을 통해 뭐랄까 줌업되었던 내 시선이 줌아웃된 듯한 느낌이다. 파버교수가 말했듯, 중요한 것은 책이 아니다. 그 물리적인 종이의 책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새겨진 내용, 문학이다.
내용중에 나온다. 화씨 451는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의미하며 그의 유니폰에 새겨진 숫자이다. 얼핏 한글로 새겨진 책도 나오더라.
그리고 그가 건져서 몰래 플랫스크린의 TV 불빛에 읽는 책은, 찰스 디킨즈의 [데이비드 커퍼필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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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없는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인 원시고대사회가 떠오르나요? 그럼 현대는 어떤가요? 책이 없는 세계가 아닌가요? 물론 주변에 책은 많습니다만 실제로 읽는 책은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보자구요.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들도 일부 있겠지만 가장 책을 많이 소비하는 요즘 학생들은 입시를 위한 책 외에 다른 책을 읽나요? 물론 읽긴 하겠지만 만화나 영화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자꾸만 질문을 던져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쉽고 편한 것만을 찾는 현대사회에는 계속 생각해야만 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보다는 텔레비젼 뉴스나 신나는 영화, 자극적인 CF가 더 많이 팔린다고 생각됩니다. 거기다 한가지 더! 1984년에 나오는 빅브라더와 같은 권력자가 정보를 통제한다면 그래서 정부가 원하는 정보만 현대사회에 적합한 매체로 소개하고 기존의 책들은 모두 없애버린다면, 마치 진시황때 분서갱유처럼요.
화씨 451도는 종이가 타기 시작하는 온도라고 합니다. 종이로 책을 만들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만든다는 의미겠지요. 이 소설은 처음에 말씀드린 것 같은 책이 없는 세계입니다. 고대사회라 책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절대권력자가 책을 없애버린 세계입니다. 국가가 원하는 정보만 텔레비젼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방송됩니다. 국민들은 그냥 신나게 즐기면 됩니다. 짜증나게 책을보면서 고민할 필요도 없지요. 정부가 권력자가 국민의 정신과 마음을 만드는 세상입니다. 책이 아니라요.
물론, 이런 설정을 계속 파고들면 누군가는 정보를 통제하기 위해 설명서나 자료집같은 것을 볼 필요도 있을 것이고, 전문기술자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책은 그런 설정을 정교히 묘사하기 보다는 억압된 사회와 통제된 정보만 주어지는 상황에서 그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한 개인이 각성하면서 겪는 갈등을 다루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책을 태우는 방화수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겪는 갈등이 주요 내용으로 복잡한 플롯도 없고 기막힌 반전도 없이 밋밋한 구성으로 화려하고 자세한 묘사가 넘치는 별로 길지않은 소설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정말 재미없고 짜증나는 소설이 될 수도 있고, 탁월하고 묘사로 문장마다 씹어 읽는 명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쪽이 될는지는 읽는 분에 취향에 달려있겠죠. [인상깊은구절] 빨리 부으면 부을수록 바짝 마른 모래알들은 금속성 휘파람을 불며 거침없이 체를 빠져나가 버렸다. 두 손이 기진맥진해지도록 타는 듯한 모래를 퍼담어 붓고 붓고 또 부었다. 그러나 체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칠월의 한가운데 타오르는 백사장에 앉아, 그는 양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안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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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 책이 불타는 온도 책을 소지하고, 독서가 범죄가 되는 세상. 생각이 통제되어 빈곤해지는 세상을 다룬 디스토피아 소살이다. 흥미로운 소재가 현 세상에 던지는 물음표. ”모든 추억을 태워 버리고, 모든 걸 태워 버리는 거야. 불은 현명하고 깨끗하지.“ "사람들은 전부 똑같은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지지. 우린 모두 서로의 거울이야. 그렇게 되면 행복해지는 거지. 움츠러들거나 스스로에 대립되는 판결을 내 리는 장애물이 없으니까.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이야! 책이란 옆집에 숨겨 놓은 장전된 권총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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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불온물품인 책을 불태우는 직업, 방화수다. 가이 몬태그의 방황, 혼란, 불안을 통해 반지성주의 디스토피아의 삶을 그려낸다. 나라의 지배층은 나라를 아무렇게나 주무르고 싶을 때 우민화 정책을 편다. 이 소설은 책을 거부하고 멸시하고 두려워하는 사회, 뻔하고 얄팍한 자극들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반지성주의가 만연한 사회의 몽롱한 좀비 같은 상태를 잘 보여준다. 나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책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는 것, 종국엔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한 명의 책이 된다는 이야기가 낭만적으로 좋다. 게다가 이 책 속 사회의 모습이, 도파민 중독에 빠진 현대인들이 책을 멀리하는 모습과 닮아 있어 섬뜩하기도 하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상상력이 현실화되는 것이 놀랍다. 그렇지만 동시에 좀 복잡한 생각아 든다. 이 소설 속에서 ‘책’이 그저 책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류의 유산이자 지혜의 정수이자 사색 무ㅓ 이런 걸 의미하는 건 알겠지만… <화씨451>은 거의 책 예찬가라, 개인적으론 책이 그렇게 우월한 매체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도 조잡하고 말초적으로 흘러갈 수 있고 영상물이라고 해서 다 둔한 것도 아니지 않을까. 게다가 <화씨451> 속에서 나오는 책들이 그렇게 신성불가침의 고전 리스트라는 생각도 안 들고 작가의 말을 읽고서는 더더욱 생각이 복잡하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작품에 손을 대려는 모든 시도를 반대하는 것 같은데(흑인민권운동가, 백인우월주의자, 여성해방론자 등 각계각층에서 지적을 해온 것도 일종의 검열시도로 본 듯한데 이게 검열이란 것도 납득은 안가고) 작품이 오ㅐ 그렇게까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있어야 하는지 공감가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수정되어 마땅하고 어떤 작품은 시대가 흐르면 가치가 없어지기도 하는 게 아닐까? 독서나 책이 그정도의 의미가 있는 행위일까…? 난 걍 재밌어서 봤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