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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편, 같이 씁니다. 1월: 첫 그렇다. 내가 그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어쩌고 저쩌고를 늘여놓은 큰 아들놈 말이다. 그녀가 나에게 “‘첫’이 ‘석상’이래”라고 말하는 순간, 당연히도 나는 내 얄팍한 상식 외부에 존재하는 책을 500권은 더 읽어야 알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있는 단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내가 아는 그 의미의 석상이라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나도 그녀와 같은 엔도르핀이 치솟았다. 이 무슨 흥미로운 소리인가. 조금 더 속된 내 스타일대로 표현하자면 ‘이 뭔 개소리야’라고도 할 수 있겠다. 허나 그녀는 엄연히 사람이기에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기에 개의 소리가 나올 순 없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석상이라는 말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었다. 아마 내가 엔도르핀을 분출한 원인이, 이 이유이지 않나 싶다. 감히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아! 그럴 수도 있구나!’라고 감히 생각하게 하는 부분 말이다. 이제 술자리에서 앞사람이 첫 연애썰을 풀어보라면 ‘첫 의 어원이 석상이래’라고 말하리라. 나는 찐따(?)가 되겠지만, 한번은 기필코 그리 말하리라.
2월: 준비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복싱계의 전설 마이크 타이슨이 한 말이다. 흔히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오고 준비된 자들만이 그 기회를 잡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부인의 여지없이. 다만 나는 ‘준비된’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나에게 다가오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밤새 잠을 설쳤다. 사실 구라다. 어떻게 방에 들어왔는지, 결제 내역에 찍힌 1,900원은 물인지, 소주인지. 단 일말의 기억조차 나지않는 그런 잠을 잔다. 갤럭시 특유의 부드러우면서 띠꺼운 알람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술똥이 불러온 복통과 함께 오늘은 그런 날이다. 교수님, 선배들, 동기들 볼 준비도 안된 채 기숙사를 나간다. 엘베 속 거울을 보고 술이 만든 여드름을 짜며 말한다. ‘뭐...언제는 준비되고 봤나?’ 몰골이 말이 아니든, 옷이 거지같든, 완벽히 챙기고 꾸몄든 항상 100%의 준비 따윈 없었다. 준비는 그냥...믿음이다. ‘준비가 어쨌든 하기 나름이지 뭐’ 오늘은 아니 매일이 그런 날이다.
3월: 꿈틀 버스를 탄다. 시외버스를 탄다. 시내버스를 1시간 이상 탄다고 하면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그때그때 다르겠지만...10명은 넘을 듯하다. 시외버스에서 내 옆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오직 한 명 뿐이다. 나와 출발지와 목적지만이 온전히 같은 그 단 한 사람. 그 점만으로도 나의 호기심을 일으키기 위한 조건을 충족한다. 그러나 스쳐지나 가는 낮선이의 향수 냄새 딱 그 정도의 호기심일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아니었다. 스쳐가는 이에게서 나와 같은 향수 냄새가 난다면 그때는 그저그런 호기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외버스 옆자리를 차지한 그녀도 그렇다. 우연히 그녀의 학생증을 보지 않았다면, 그저 싸구려 향수 정도의 호기심이었겠지만, 스마일 라식이 너무 잘 된 탓인가. 그 짧은 순간에 학생증 속 인적사항이 머리에 박혔다. ‘아, 세상 진짜 좁다’ 나와 같은 대학교, 동갑, 같은 단과대였다. 고속버스안에서 1시간 30분가량의 그녀을 주제로한 셀프 스무고개 똥꼬쇼가 벌어졌다. 허나 이것 또한 그뿐, 목적지에 내리자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일상 중 내가 동아리 면접관인 면접에 그녀가 들어선다. 모든것이 ‘꿈틀’거른다. 3월, 곧 봄이구나.
4월: 나른 과연 나른함이였을까? 그대가 느낀 무기력함, 피로감 그리고 권태감은 나른함 때문인건가?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나른함과 식곤증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인가. 나른과 식곤. 사실 차이가 없지 아니한가. 춥지도 그렇다고 덥지도 않은 온도감. 맛있는 걸 먹었다는 포만감. 그 모든걸 아우르는 큰 걱정없는 포근함. 이렇게 보면 나른함이란 궁극적으로 참 좋아 보인다. 사실 나른함 자체는 나쁜게 아니다. 나른함이 불러오는 잡다한 잡생각이 그 균열을 만들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나른함과 식곤증을 구별하지 못한 채.
5월: 따스함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 따스한 봄의 마지막 몸부림을 느낄 수 있는 시기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중간고사와 몸부림치는 시기이기도하다. 어째서 햇볕은 지금 가장 부드러우며, 꽃들은 어찌나 그리 고개를 빳빳이 드는지. 그것도 정확히 내 시험기간에. 참말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나는 또 선택을 할 것이다. 떠나가는 봄의 미련없는 자태를 좆을 것인가. 서서히 드리우는 그림자 같은 시험을 맞이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내 나이 스물하나. 이제 시험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짬(?) 좀 찼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안다. 시험을 택하면 지나가버린 나의 봄을 그리워하며 후회한다. 그래서 공부가 안된다. 이것은 결코 자기 합리화 라던가 변명이 아니다. 2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욕심 때문이 아니라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절대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라는 날개달린 토끼가 날아서 도망가는데 어찌 잡으란 말인가. 그럼 따스한 봄빛을 띄는 토끼라도 잡아야지, 암, 이게 맞지. 나는 오늘도 그 토끼를 잡으러 간다.
6월: 비 비는 외롭지 않다. 어떨때에는 먼지와 함께 내려가고, 지금은 꽃잎과 함께 내려간다. 간혹 내 마음도 같이 데려가기도 한다. 오늘은 그런 비가 내렸다. 그래서 낮술을 깠다. 엄마가 이 글을 보면 한마디 하겠군. 아무튼 고추장 불고기를 안주로 소주를 따른다. 나와 술친구 모두 2시간 후에 수업이 있기에 간단히 반주만 하기로 약속한다. 그 약속도 비와 함께 흘러내려간다. 비가 인싸라서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찡한 초록병이 적당히 쌓여갈 무렵 비가 그쳤다. 우리도 가게를 나와 물웅덩이를 피하여 수업을 간다. 반쯤 취했기에 물웅덩이도 반쯤 피한다. 콧구멍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흘러나오는 알코올 기운을 억누르며 자리에 앉는다. 다행히 강의가 아니라 이번 시간은 영화감상 시간이었다.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상영되었다. 신파와 어떻게든 눈물을 흘리게 만들려는 감독의 의도가 느껴지는 흔해 빠진 슬픈 가족 영화였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차린 나는 평소라면 절대 울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아마도 술이 이유였을것이다. 아마도. 술을 탓하며 눈에서 알코올을 흘려보낸다. 비는 눈물도 함께 데려간다.
7월: 파랑 ‘Blue is a colar. foot ball is a game. We are the champion~’ 첼시 FC의 응원가 첫 소절이다. 파랑이라는 색을 쓰는 축구팀 중에서는 가장 인기 있으며 유일무이하다. 한때 내가 미쳐있던 것 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복기해보면 공부를 제외한 모든 시간이 축구, 그 중에서 첼시였다. 마냥 파랗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였다. 그랬다면 민주당(?)도 엄청 좋아했겠지. 지금 돌아보면 왜 그렇게까지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렇게 잘 했던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 시절이 싫지는 않는다. 항상 그래왔다. 레고에, 마블에, 너프건에 더 떠올려보자면 파워레인져에 미쳐있을 때. 그래, 그런 시절이 행복하고 유독 기억에 남는다. 요즘은 음... 돈에 미쳤던가? 그건 아니다. 공부에 미쳤던가? 당연히 아니다. 여자에 미쳤던가? 이것도 아닌것 같다. 아, 다시한번 순순하게 미쳐보고싶다. 첼시가 내 심장을 푸르게 물들였듯이 또 한번 백지 심장에 물감을 떨궈주기를...
8월: 쉼 휴대폰 속 캘린더에 ‘본가’라는 글자를 남긴다. 본가에 내려가기로 예정 된 주말 2 주전에 캘린더에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기록을 남긴다고 끝이 아니다. ‘본가’라는 단어 위로 또 다른 큼지막한 단어들이 쌓인다. ‘동아리’, ‘과제’, ‘후배 밥약’ 등 그렇게 ‘본가’는 어느샌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다. 고요하고 잠잠히. 눈을 감는다고 쉬는 게 아니고 잠을 잔다고 쉬는 게 아니다. 타지에서 생활한지 1년도 넘었지만 충분히 내 방도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우리 집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알 수 조차없는 무언가가 집에는 있고, 여기에는 없다. 내 대학교 동기들은 진정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제대로 쉰, 잠을 푹 잔 얼굴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 완전한 내 얼굴은 집에서만 볼 수 있다. 나 또한 내 얼굴을 못 본지 오래다. 휴대폰 속 캘린더 2주후 주말에 ‘본가’라는 글자를 남겨본다. 우선은.
9월: 어중간함 드디어 때가 왔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어쩌고 저쩌고를 늘여놓을 때 말이다. <중용: 지나침과 모자람이라는 두 가지 악덕 사이의 적절한 상태. 어중간함이 어찌 보면 중용이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오히려 어중간한 사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윤리적 탁월성을 이루는 관계인 셈이다. 나도 어중간한 사이가 많다. 내 인생이 의도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듯이 이 관계들 또한 의도하지 않았다. 친구와 연인사이의 어중간함, 썸과 연애 사이의 어중간함, 심지어 밥친구와 썸 사이의 어중간함도 나에겐 존재한다. 이 모든 관계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사실 모든 어중간함의 문제는 나의 어중간함에 있었다. 나의 인간관계는 현수교를 지탱하는 케이블이 아니라 오직 거미만이 그 위에서 자유로운 거미줄이다. 탯줄이 끊어졌을 때부터 나는 느꼈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이는 없으며, 나를 온전히 아는 이도 없다는걸.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거미줄은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 5배는 강하다. 케이블의 굵기와 거미줄의 굵기가 같다면 거미줄이 훨씬 견고하다. 허나 거미줄이 케이블 굵기일 필요는 없다. 나도 그런 삶을 사는 중이다.
10월: 쓸쓸함 아... 이 ‘쓸쓸함’ 챕터는 괜히 읽었다. 한동안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그 놈이 기지개를 펴는 듯하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시공간을 불문하고 항상 쓸쓸함이 존재해왔다. 이 세상 아무도 온전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점이 태초부터 쓸쓸함을 마음속에 자리 잡게 했다. 최근에는 워낙 바빴기에 놈을 자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이 놈을 깨웠고, 이제 마음속이 아니라 내 얼굴 바로 옆에서 항상 함께 한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반가웠다. 나에게 놈은 사색의 시간을 주웠고, 가을을 실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 속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이에 놈도 떠나갔다. 쓸쓸함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는 광활한 우주에 본질적으로 나홀로 뿐이라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사실 또한 떠나가 다시 정신없는 현실로 돌아오겠지만. 다소 걸릴 듯하다. 11월: 아! 벌써? 뭐든 처음이 가장 빠르다. 눈을 뜬 직후의 시간이 가장 빠르게 흐르고, 일요일은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지나가며, 1학년은...뭐야, 벌써? 지나가 버린지 오래다. 가지말아야 할 것은 금방이며, 제발 갔으면하는 것들은 끝까지 남아있더라, 아무리 인생이 역설과 모순의 연속이라하더라도 너무 심하지 않나싶다. 나에게 아, 벌써? 는 사형 선고와 같다. ‘벌써’라는 생각이 들면 대체로 이미 늦었다. ‘다음주에 시험이야’, ‘곧 개학이야’, ‘이제 입대야’. 아 십팔 벌써? 아주 욕이 절로 튀어나온다. 벌써는 끝이라는 걸 알기에 그 어떤 형용사보다 욕이 더 잘 어울리는 몇 안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갑자기 앞서 언급한 술과 함께 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떠오른다. 흔한 한국 영화였는데 생각보다 인상 깊었나보다. 후회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감독이 나에게 ‘후회하지 말고 잘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벌써 후회한다. 이모티콘 ‘딸깍’이아니라 바로 전화드리지 않은 것을. 얼굴보고 허리 어떠냐고 묻지 않은 것을. 다시 말하지만 벌써=끝이다.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다.
12월: 돌아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의지로 글을 썼다. 숙제도, 과제도, 뭣도 아닌 내 의지로. 물론 글이라고 보기엔 짧고 하찮은 생각정리에 가깝긴 하지만. 아무튼 뭐든 썼다. 쓰는 내내 생각 이상으로 즐거웠다.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파민 비스무리한걸 느꼈다. 나는 조금도 제대로 된 작가가 아니기에 일말에 스트레스 따위없이 글을 싸지른다. 이렇게 천박한 단어를 굳이굳이 고르며 살짝의 자아도취에 빠지며 말이다. 이 책은 스스로 영광인 줄 알아야만 한다. 내가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된 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이 책을 세상에 나오게 해 준 작가님들께 먼저 감사를 표한다. 짧은 내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앞으로의 삶을 생각케 할 기회가 되어주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책을 쓸 날을 꿈꾸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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