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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와 틈새의 시간
"사이와 틈새의 시간" 내용보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매 순간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할 때, 끝없는 속박으로 끌어들이는 중력의 영(靈) 난쟁이가 나타나 그를 방해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한 중력으로 난쟁이가 되었지만,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모두를 ‘난쟁이’로 만들고자, 지금 이 순간에도 제도와 법, 관습과 도덕을 통해 우리의 사고를 강제하고 있는 사악한 악마다. 난쟁이는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지혜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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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매 순간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할 때, 끝없는 속박으로 끌어들이는 중력의 영(靈) 난쟁이가 나타나 그를 방해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한 중력으로 난쟁이가 되었지만,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모두를 ‘난쟁이’로 만들고자, 지금 이 순간에도 제도와 법, 관습과 도덕을 통해 우리의 사고를 강제하고 있는 사악한 악마다. 난쟁이는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지혜의 돌을 끊임없이 높게 던지는 차라투스트라를 부단히 유혹한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너는 다시 네 머리 위로 떨어져 너를 박살내도록 되어 있는 그 돌을 멀리도 투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은 다시 네 머리 위로 떨어지고 말리라!” 어차피 모든 시도는 부질없기에 시키는 대로 속 편히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난쟁이의 유혹을 물리친 차라투스트라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길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 뒤로 나 있는 이 긴 골목길. 그 길은 영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저쪽 밖으로 나 있는 저 긴 골목길. 거기에 또 다른 영원이 있다. 이들 두 길은 예서 마주치고 있다. 그렇게 여기 이 성문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 성문의 이름이 씌어 있구나. ‘순간’이라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augenblick)이라는 출입구 앞에서 만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현재야 말로, 지나간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것과 더불어 공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영감을 얻는다. 바로 현재(순간)를 통해 역사는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아닌, 새로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속에서 존재하는 미래를, 그리고 미래의 기초로서 과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 즉 순간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것의 생성 가능성이다.
아렌트 역시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다시 말해 지나간 것과 오지 않은 것의 간극(사이)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한다. 전통과 근대 사이의 다양한 분절 속에서도 생성, ‘시작’을 발견한 것이다. “산 자들에게 의미 있는 행위는 죽은 자들로부터만 그 가치를 찾는 법이며, 오직 그것을 계승하고 그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p.13)”

 

전통과 근대에서는 이전세기들과는 달리 비교적 분명한 단절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시기 인류는 산업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고전적인 정치 조건과는 상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천대받아 온 노동의 지위를 부(富)를 가져오는 유일한 원인으로 끌어올렸으며, 신분의 불평등이 아닌 보편적 평등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양화(量化)된 맑스의 표현대로 가치화되어 교환 가능해진 상품들은, 신이나 절대적인 선(善)과 같은 초월적인 가치, 이데아들을 평가절하 시켰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 조건 가운데 그는 노예가 된다.『임금 노동과 자본』”는 맑스의 명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특정한 조건에서 흑인이 노예가 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생산되는 상품 역시 수요/공급의 법칙의 다양한 조건에 따라, 그것의 질과는 상관없이 가격은 끊임없이 변할 수 있다. 때로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흑인이 노예가 되고, 어제는 비쌌던 물건이 오늘엔 폭락하듯이, 모든 것이 변해가는 과정에는 절대적인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늘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와 상대성만을 의식하게 된다. 그와 결부하여 그것 자체로 좋고 나쁨이 측정되던 ‘선’ 역시 영원하지 않다고 느껴지고, 심지어는 다른 가치와 교환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권위의 상실 또한 근대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권위의 문제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 왔다. 권위의 확립을 위한 플라톤의 눈물겨운 노력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선 그는 설득만으로는 인간을 진리로 인도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진리는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기에, 설득이나 논쟁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여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더욱 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득이나 논쟁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폭력 없이 진리를 보여줘야 된다는 딜레마는, 결국 그에게 『국가』 7장 동굴의 비유, 10장 ‘에르’의 지옥 신화를 개발하게 하였다.
확실히 이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지배자 계급은 절대적인 좋음의 이데아(진리)가 있다는 믿음 가운데, 폭력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진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철학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대중들은, 나쁜 일을 저지를 경우 사후에 영혼이 겪게 될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도 진리에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된다. 플라톤이 의도한 바대로 진리에 대한 권위는, 진리가 명령하기도 전에 사람들을 복속시킨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사고를 답습하여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로마인들은, 선조들로부터 전통을 전수받는 방식으로 권위를 획득했다. 건국의 원칙에 의지함으로서 권위의 뿌리를 과거로부터 두려는 로마인들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건국정신·헌법제정 정신에 충실하려는 대부분의 근대국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 이후 정치적 책임을 떠맡은 교회 역시도 진리의 강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종교는 그것이 인간사를 떠난 절대적인 무엇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이 좀 더 수월해 보인다. 이러한 이점과 더불어 교회는 초월적인 척도와 규칙이라는 그리스적인 방식(플라톤)과, 교회의 시조(始祖)인 사도들의 증언을 대대손손 전달한다는 로마식 방식을 통해 세련되과 독자적인 방법으로 권위를 도출하는데 성공한다.

 

여담이지만 무엇보다도 교회 권위의 정수는 다름 아닌 지옥론이다. 아렌트는 지옥에 대한 관념은 플라톤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단언한다. 지옥이 인간의 본능적인 종교적 심성이건, 신화적인 사실이건, 설령 진짜로 존재하던가와 같은 문제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막연하게 존재하던 지옥론은 기독교의 정치화와 발맞춰 하나의 정설이 된다.
교회 세력이 세속적인 영역으로까지 전면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대중적인 권위를 세우는 문제가 다시 발생하게 되었다. 성직자나 일부 독실한 신자들에게는 별 문제 없이 권위가 발생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대중의 경우엔 ‘믿음’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속적이지 않았던 시절에는 내세에 대한 추측과 상상은 자유롭게 방치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믿음이 부족한 신자들을 위해 또 다른 지옥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에 지옥론은 플라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바로 ‘영원한 죽음’이 그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사후 지옥과 비슷한 개념은 있었다. 그들에게 죽은 뒤 지하세계는 단순히 “힘도 기억도 상실한 채 핏기 없는 그림자의 모습으로 지하의 암흑 속에서 비참하게 계속 존재하는 것『세계종교사상사1』” 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음의 음침한 불쾌감을 생에 대한 쾌감, 삶의 애착으로 승화시켜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개념이 새로우면 그만큼 공포도 강해진다고 했던가. 교회는 이전까지는 없던 개념인 영원성 즉 영원한 저주, 영원한 죽음을 통해 세속권력의 폭력 없이도 신자들을 강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옥론은 그것의 성공만큼이나 수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과거에는 신 자체의 믿음만으로 고결한 신앙을 지킬 수 있던 성직자와 성자들까지도, 이제는 고결한 신앙 대신 저급한 지옥의 폭력을 즐기게 되었다. 심지어는 고상한 품격을 지닌 토마스 아퀴나스마저도 “천국에 있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지옥에서 벌어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의 광경을 바라보는 특권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스인들은 사후 지하세계를 통해 오히려 생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면, 반대로 중세시대 대다수의 민중들은 지옥의 엄청난 공포, 미래의 형벌 때문에 삶조차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지옥의 탄생으로 인해 예수가 우리에게 안겨 준 ‘기쁜 소식’, 즉 신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해 준 죄(원죄)가 사라졌다는 복음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어찌 되었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권위가, 로마인들에게는 건국정신의 권위가, 교회 역시도 신의 사랑과 지옥의 형벌이라는 신의 권위가 설 수 있었다. 지나치게 권위에 짓눌려 권위주의로 변질되는 것은 옳지 않으나, 우리가 발 디딜 공간을 만들어주고 나아가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는 측면에서 권위는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이 모든 권위가 사라진 것이다. 좋은 것에 대한 믿음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으며, 신의 계시와 지옥의 환상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시각각 변하는 자본에게 권위를 부여할 수도 없지 않는가. 근대인들은 어쩌면 권위의 부재로 인하여 늪지에 벽돌집을 쌓는, 그러기에 언제 무너져도 하등 이상할 바 없는 그런 집을 스스로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 없이 정치 영역에서 살아가는 일은, 신성한 신을 믿는 종교적 신념도 없이, 그리고 전통적이기에 자명한 진리의 보호 없이,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는 데 따르는 기초적인 문제들과 새롭게 직면하게 된다는 의미이다.(p.194)”

 

여기까지만 두고 본다면 과거와 미래 사이, 즉 틈새의 시간은 온통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 아렌트는 좋음의 이데아의 상실, 권위의 상실 뿐 아니라 역사관, 자유, 교육, 문화, 진리 등 모든 것이 상실되거나 위기상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양한 전통의 상실과 근대적 위기 가운데서도 기회는 분명 존재한다.
전화위복이 가능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과거와 미래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나간 것들은 이미 과거로만 존재하고, 앞날이 창창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바로 이 끝과 시작, ‘더 이상 아님’과 ‘아직 아님’ 사이의 전설적인 틈새이기에 인간은 희망을 가져볼만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틈새는 연속적인 흐름에서 이탈한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단순한 자동적인 과정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사이의 시간’, ‘순간’의 숭고함이 부여되는 것이다.

 

시간상으로 보면 지금 우리 자신이 서 있는 현재는 가장 늦게 온 손님이다. 가장 늦게 연회에 도착한 손님이라면 구석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연회의 상석에 앉고 싶다면, 그에 걸 맞는 일을 하면 될 것이다. 훌륭한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미래를 건축하려는 자만이 과거를 심판할 권리를 갖는다.『반시대적 고찰』”
아렌트가 『과거와 미래사이』를 통해 우리에게 기대한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여 미래를 보지 못하거나, 미래에 대한 환상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과거를 모조리 잊어버리는 근대인들. 그러나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이라는 이 책의 부제처럼, 우리가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서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배울 때, 비로소 정치의 본질을 찾은 인간의 삶은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a*****e 2007.09.04. 신고 공감 6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