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라면, 한국은 일제강점기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하지만 그 시기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이 있었고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의 라듐 발견이 있었다. 20세기 초라면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니며, 그 당시의 유럽은 굉장히 발전적인 시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무지했고 거칠었으며 그들이 안다고 생각한 만큼의 반도 몰랐다. 그것은 어느 시대고 마찬가지긴 하겠지만.
마리 퀴리의 지독한 사랑. 원제는 블랑쉬와 마리의 이야기라는 다소 평범한 제목이다. 누구나 마리 퀴리를 알지만 블랑쉬 비트만은 거의 모른다. 히스테리 환자의 여왕이자 영매였다는 모호한 설명으로는 그녀가 정말 누구였는지 알 수 없다. 하긴 마리 퀴리 역시 그저 노벨상을 두번이나 받은 과학자였다는 설명만으로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책은 단지 마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원제가 이 책에 더 어울리는 제목인 것 같다.
실제로 블랑쉬 비트만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녀는 샤르코 박사와의 일화와 신경학 계의 기이한 기록, 그리고 그림 한 점을 남겼지만 그뿐이다. 그녀는 분명 불안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불행했다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작가는 이 블랑쉬가 병원을 나온 뒤, 마리를 만났고 퀴리 부부의 실험실에서 조수로 일했다고 허구화했다. 블랑쉬는 마리와 친구였으며 피에르가 죽음으로 사라진 뒤 그녀의 말로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리는 라듐으로 영광을 얻었지만 그 방사능으로 아름다운 손을 잃었고 끝내 그로 인해 얻은 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블랑쉬는 죽기 전에 방사능으로 인해 토르소가 되었다. 그녀의 다리와 팔은 잘려져 나갔고 그녀의 키는 겨우 120센티미터였다.
어린 시절, 마리 퀴리의 위인전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교실에 있었던 몹시 낡았고 매우 두꺼웠던 책 한권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번역본이었을) 그 위인전은 마리 퀴리가 러시아에 맞서 조국 폴란드를 지키려 했던 열혈 애국소녀였으며 프랑스로 유학해서는 영양실조에 걸릴만큼 가난한 환경에서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공부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피에르 퀴리를 만나 라듐을 발견하고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짓고.. 뭐 이러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여덟살인가 아홉살인가, 그 당시엔 꽤 길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처녀적 성, 스클로드프스카 라는 긴 이름을 난 막힘없이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남편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타고 그리고 피에르 퀴리가 갑작스러운 마차사고로 사망한 뒤 마리 퀴리는 혼자서 자신만의 힘으로 노벨 화학상을 탄다. 하지만 그 과정은 그 위인전에 상당히 생략되어있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조금 커서였다. 그 당시 마리는 프랑스를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
마리는 피에르가 죽었을 때 마흔도 안 되었고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그 나이에 사랑을 버리고 학문과 두 딸에게만 애정을 쏟길 강요했다면 그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나쁜 상대를 택했다. 아니 택한 것이 아니라 나쁜 상대와 사랑에 빠졌다. 마리는 소설에서 말한다. 그녀는 강하지만 상대는 약하다고, 하지만 사랑한다고. 마리의 상대는 아이가 넷이나 딸린 유부남 폴 랑주뱅이었다. 그의 아내인 랑주뱅 부인은 그 둘의 외도에 당연히 격노했고 마리가 폴에게 보낸 편지들을 언론에 공개했다. 마리는 공격받았고 위기를 맞았다. 마리는 그저 마리 퀴리가 아니었다. 마리 '살로메' '스클로드프스카' 퀴리였다. 그것은 한 외국인 여자, 게다가 유대인 여자가 프랑스의 가정을 깸으로써 공화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때문에 그녀가 제 힘으로 얻어낸 두번째 노벨상 수상마저 위태로웠다.
서두의 말을 다시 번복하자면 이 책은 블랑쉬와 마리 이야기라기보다는 블랑쉬의 마리 이야기에 가깝다. 책을 다 덮고난 지금도 도대체 블랑쉬 비트만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기 그지없다. 다만 마리 퀴리가 어떤 인물이었고 블랑쉬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얼마나 아꼈는지에 대해서는 알겠다. 하지만 정작 블랑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샤르코 박사를 사랑했고 샤르코 박사에게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고 방사능으로 인해 사지가 절단되었다는 것 외에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녀는 왜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인물이 살았던 삶이 꼭 그 인물을 정의해주진 않지만 그 삶조차 모호하다면 우리는 그 인물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블랑쉬와 마리는 불안했으며 강하거나 나약했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건 사랑이나 또다른 무엇 때문이었건 그들은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아파했을 뿐. Amor Omnia Vincit.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하기 때문이었을까.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다만 그 질량과 같은 무게의 아픔을 남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