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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동막골 OST를 듣다가 리뷰 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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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가수라는 말이 있듯이 국면영화라는 말을 붙인다면 아마 이 영화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우리나라의 아픈 현실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희망을 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소개하면 섭섭할 것이다. 이 영화는 재미있다. 그리고 신선하다. 촬영기법과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다. 연합군의 비행기를 향해 사격을 가하는 약간은 도발적인 대본도 관객들이 잘 소화해 내게 무난히 처리했다. 특히 영화의 장면장면에 나오는 스틸촬영같은 슬로우 모션들이 주는 느낌이 압권이다. 팝콘장면도 그렇고 멋돼지를 사냥하는 장면도 그렇다. 그런 장면들은 극적 긴장을 해소되는 곳에 잘 배치되어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여러면에서 잘된 영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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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 있지만 떨어지는 지휘력과 판단력으로 많은 부하들을 잃게 만든 인민군 장교 정재영.
타고난 지휘력과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민간인을 구하기 위해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탈영한 국군장교 신하균.
그리고, 더 이상 갈 곳 없는 이들이 만나게 된 동막골의 사람들.
분단된 조국만큼이나 아픈 과거속에 혹시 있었을지도 모를 유쾌한 상상속의 마을.
처음 만드는 장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잘 짜여진 내용전개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이 느껴지는 화면들은 박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려지게 합니다.
2005년 최고의 한국영화라고 하기에 손색 없는 작품이고, 한 가지 dvd 타이틀에서 아쉬운 점은 삭제된 장면이 없다는 점 정도 입니다. 꼭 출연진들과 박감독이 제공하는 음성해설로 영화를 다시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인상깊은구절] 마이 아파... 여일이 인민군들과 처음 만났을때 했던 말이기도 하며, 죽기전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기도 합니다. 같은 말이었지만 전혀 다르게 가슴으로 느껴졌던 짧은 대사입니다. |
![]() -문제적 주인공과 세계 사이에 놓인 특별한 사인성(私人性)의 자리 여러 사정으로 개봉관을 자주 찾지 못하는 필자의 영화보기는, 그래서 대부분 커다란 스크린이 아닌 좁은 브라운관 혹은 엘시디 모니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극장가에서 필름이 내려진 후에 보게 되는 영화에 대한 감상이나 촌평 같은 것을 쓴다는 것 역시 시의적절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스크린을 꽉 채운 영상과 디지털 음향으로 그 감동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주는 영화관에서의 영화보기를 하지 못한 채, 남들 다 본 후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은 영화란 꿈이며 전망이며 감동이기 때문이다. 현대 산업사회의 영화가 아무리 상업자본의 돈벌이 수단으로 비춰진들 영화는 본질적으로 작가적 상상력과 빛으로 빚어지는 예술이며 어둡고 꽉 막힌 세상에서 환한 빛으로 열리는 커다란 창(窓) 같은 것이다. 그럼으로 막 내린 영화 한 편을 내 취향대로 골라보는 재미란 내 삶의 방안에 새로운 창 하나를 가지는 기쁨이기도 하다. 오늘 바로 그 창을 열어 특별한 시공간으로 자리하고 문제적 사건과 문제적 인물들이 새롭게 일구어 놓은 또 다른 세상을 구경해보자. 시대가 비껴가고 사건이 지나쳐 간 곳 - 동막골 (2차 세계대전) 전후 국제적인 힘의 질서가 동강내고 이념의 골이 남북으로 토막 낸 50년에 우리의 땅에서는 동족상잔의 무서운 전쟁이 발발한다. 인민군의 남침과 연합군의 북진으로 우리네 피가 내를 이루고 처참한 살점이 강토를 부패시키던 와중에도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전쟁이 언제 터졌는지도 모르며 살아가는 곳이 있었다. 동막골이다. 그 곳으로 패전하여 도주 중이던 인민군 병사 셋이 우연히 찾아든다.
공교롭게도 국군 병사 둘도 하필이면 그 때 동막골에 이르고 (동막골로서는) 참으로 재수 없게도 미군의 전투기가 동막골 산중턱에 추락하는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남북의 대치, 곧 동막골에 전선(戰線)이 펼쳐진 것이다. 이질적인 두 집단의 대립과 경계 그리고 서로 화해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영화 속 삽화들(헤프닝)은 생략하기로 하자. 오늘 보는 영화의 독법은 그 줄거리에 있지 않은 까닭이며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시대와 사건으로부터 비껴나 있는 동막골이란 공간이며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동막골에는 분단도 이념도 적과 아도 없다. 다만 사람과 그들이 살아가는 원초적인 삶이 있을 뿐이다. 인민군과 국군이 마을에서 조우하는 장면을 보면 그 사실은 극명해진다. 평상에 앉아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로 대치한 인민군 병사와 국군병사, 그 사이에서 어리둥절한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구경꾼이 되어 그들을 바라본다. 그저 편안한 일상의 모습이다.
긴장한 눈빛과 땀이 흐르도록 두려운 공포는 단지 두 집단 간의 문제일 뿐이다. 영화를 만든 이는 능청스럽게 마을 사람들의 눈을 빌어 그들을 비웃는다. 이는 우리의 삶을 참혹한 죽음과 만신창이 된 정신으로 피폐하게 만들었던 지난 시대에 대한 조소이며 여전히 이념의 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에 대한 지독한 야유다.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인 수류탄도 동막골 사람들에게는 그저 옥수수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재수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수류탄의 폭발음은 그 옛날 시골장터의 튀밥기계에서 들리던 ‘펑’하는 소리에 다름 아니며 옥수수 낱알들은 고소한 팝콘이 되어 스크린을 비산한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배꽃과도 같이 천천히 비산하는 팝콘에서는 맛난 냄새가 그윽하게 풍기는 듯하다.
이렇듯 동막골에는 증오와 죽음과 살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수류탄 고리를 손 가락지처럼 끼고 팝콘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일(강혜정)의 맑은 눈동자에서 전쟁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다. 동막골이 이처럼 사람들이 모여 사람다운 삶을 사는 공간이라면 여일은 그 순수하고 원초적인 삶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약간 모자라거나 정신이 나가 있는 것처럼 영화 속에 투사 된다. 그러나 정작 미친 것은 여일이 아니라 바깥의 대립과 참화를 묻혀 들어온 제복 입은 인물들임을 영화는 강하게 주장한다.
인민군과 국군이 진정으로 화해하며 이념의 외투를 벗어 던지는 때는 그들이 제복을 벗고 마을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은 때이다. 인민군복과 국군복은 한 줄의 빨래줄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는 이념으로 혹은 타인(타집단)의 강제에 의하여 끊어지고 갈라졌던 한 핏줄이 마침내 이어지고 서로 화해해야함을 은연중 암시하는 영화적 복선이다. 문제적 주인공이 되어 지켜낸 특별한 사인성의 자리 - 동막골 그렇다면 그들이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지키고자했던 동막골은 어떤 공간이며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막골은 단지 전쟁이라는 시대의 사건이 비껴간 곳이기 이전에 인류가 늘 다다르고자 하는 잃어버린 그 곳, 낙원일 수도 있을 것이며 우리의 본향 혹은 이상향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 본래의 것이 아닌,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으로 우리의 정신을 고형화 시키면서 살육과 상잔으로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세상이 아닌 초월적인 세상, 관념의 세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독한 현실로부터도 동 떨어져 있고 (이념의 강제와 통제가 이루어지는) 국가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는 특별한 사인성(私人性)의 자리가 동막골인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문학작품(특히 소설)이 <문제적 주인공>에 의한 ‘타락한’(루카치는 ‘악마적’이라 함) 추구과정을 통해, 다른 양태로 타락한 세계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서사구조를 가진 영화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독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문제적 주인공’들로 주인공과 세계 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단절 사이에 놓인 인물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들이 그들만의 연합군을 구성해 동막골을 지키고자 나서기 전까지는 <문제적>이지 않다. 즉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주인공들 역시 현실의 높은 벽에 혹은 깊은 골로 인해 세계와 단절 되어 있는 인물일 뿐이다. 표소위(신하균 분)는 한강 폭파 명령을 받은 이후 부대를 탈영한 인물이고 인민군 장교인 리수화(정재영 분) 역시 그 험상궂은 얼굴과는 달리 인정을 저버릴 수 없는 당성 약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부상병들을 죽이고 가자는 하급사관의 말에 리수화는 끝내 동의하지 않음으로 국군의 추격에 곤란을 겪는다. 이 장면은 그의 됨됨이를 단적으로 시사해준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의 시대에 뚜렷한 소신으로 시대를 감당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대에 이끌려 다닌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국군에 의한 북침으로 알고 전쟁에 참여한 인민군 소년병사의 물음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종로의 아가씨를 그리워하는 위생병이나 그저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욕망 밖에는 없는 인민군하사관에게 전쟁이란, 또는 분단이란 더럽게 재수 없이 빠져든 개펄에 불과하다. 그런 그들이 동막골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동막골 사람들의 삶을 통해 비로써 이데올로기 이전의 저 위대한 사랑, 인류보편에 대한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니 곧 인류애라 할 수도, 휴머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사이의 신뢰와 인간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이제 <문제적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으로 지켜야할 것은 이념이 아니라 동막골 사람들과 그 안의 삶인 것을 깨달은 것이니 어찌 죽음이 두려울 것인가? 엔딩 장면의 전투씬은 바로 그런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충분하다. ‘웰컴 투 동막골’의 매력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에 대한 숭고한 믿음과 고귀한 사랑이라는 가치, 곧 동막골을 전쟁의 포화 혹은 전쟁의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 속에서 지켜낸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이름을 드높인 아무개가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겁 많고 졸렬하고 우유부단하며 심신이 약한 바로 우리 같은 이들이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그들이 무자비한 연합군의 폭격에도 굴하지 않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동막골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 즉 사람 사는 마을에서 경험한 인정의 자연스런 발로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길목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인류 보편의 가치를 위해 산화해간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역사는 늘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진정으로 <문제적>이었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의 희생에 빚지고 있는 허울뿐인 사람들일수록 역사의 묘지에 커다란 비문을 새겨둔 경우를 종종 본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문제적 주인공인양 행세하는 많은 문제아들을 만난다. 이 곤혹스러움을 벗어난 진정한 사인성의 자리, 동막골을 가기 위해 우리 모두는 많은 날을 불면해야 하고 어두운 방안에서 새 창을 열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