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고운 책을 만났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나처럼 나뭇잎에 편지를 쓴 건가 하고 생각하는 분이 혹시 계실까봐 미리 말해두자면, 나뭇잎에 쓴 편지는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목판화 엽서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뭇잎 편지라고 했느냐며 딴죽 거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편지 쓰고 싶은 날이 많아서, 편지 받고 싶은 날이 많아서, 제 손으로 쓴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터넷 홈페이지 mokpan.com을 통해서 나뭇잎 편지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작은 엽서에 조각 마음을 담아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던 것이 책으로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의 고운 엽서를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건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다. 난 그런 홈페이지가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해도 좋지요. 그보다 더 좋은 건, 나눌 것 없이 적당히 가난한 살림살이가 아닌가 합니다. 제 인생의 목표도 그건데 잘 될까 모르겠습니다. 오늘 외출하면서, 아스팔트에 떨어져 있는 맥주 상자를 보았습니다. 작은 종이 상자에 담긴 맥주가 깨어져 있었습니다. 시대의 숨 가쁜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낙오하는 우리들의 자화상 같았습니다. 천천히, 내 호흡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25쪽
이 책을 읽으니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계신 법정스님이 떠올랐다. 책 제목에서 느껴지듯 그는 비움의 미학을 깨닫고 몸소 자족하는 삶을 살고 계신 분 같았다. 밥 한 그릇에도 행복하고 물 한 그릇에도 기쁠 수 있다면 무엇이 더 아등바등 필요하겠는가, 가만가만 이 작은 것들을 사랑하며 사는데 누굴 미워하며 으르렁거리겠는가. 책은 두 권이 세트로 되어 있다. 세트라는 1, 2의 표시는 없지만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라는 같은 소제목과 디자인으로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행복>은 2004년에,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은 2005년에 출간되었다. 엽서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그의 작품 속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나눔, 삶의 성찰, 세상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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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마음의 창을 깨끗하게 하고 보면, 세상은 환합니다. 더러운 마음 창을 그대로 갖고 사는 이들은 불행할 따름이지요. 힘과 돈과 기회를 부러워하기보다는, 내 삶에 모자라는 아름다움과 향기를 되찾는 일에 마음 쓰게 되어야지요. 추악한 정치 현실을 개탄하고 변화를 꿈꾸는 것은, 우리들의 고와야 할 인생이 그로 인해 망가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기대하면서, 이제 다시 우리 마음으로 돌아와서 나를 살필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98쪽
이철수님은 판화가다. 80년대 탁월한 민중 판화가로 이름을 떨친 그는 90년대 일상과 자연과 선禪을 소재로 한 새로운 작품에 몰두해왔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제천 외곽의 농촌에서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판화 작업을 하고 있다. 프로필에 담긴 사진을 보니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함과 섬세한 감각을 지닌 예술인의 서정적인 모습이 겹쳐진다. '그림으로 시를 쓴다'라는 평판이 자자하지만 내가 보기엔 몸으로 마음으로 시를 쓰는 분 같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탄생하는 그의 작품은 허구가 아니었다. 대부분 일상의 소소한 체험들이 그림으로 글로 쓰였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검소하고 소박한 삶과 내 삶을 비교하게 된다. 남을 생각하는 그의 사려 깊음에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겨울산은 깊고… 마음은 묵은 장마처럼 깊어질 줄 모른다. 매일 얼굴을 씻듯 마음을 씻더라도, 더 닦을 것 없이 그윽하고 조용한, 깊은 데서 울리는 적막한 소리는 따로 있는 법. 노인의 기침 소리처럼 왔다가는 소리. 겨울 추위와 적막 속에서 그 소리를 기다린다. 기다린다고?
오랜만에 보는 손 글씨가 참 정겹다. 고교시절, 이메일이 한창 유행할 때도 나는 직접 쓴 글씨가 좋아 밤새 편지를 써서 우표를 정성스럽게 붙여 우체통에 넣곤 했었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이젠 자주 쓰지 않아 비뚤배뚤해진 내 글씨도 보기 싫거니와 쓰다 틀리면 수정하는 게 귀찮아서 요즘에는 편지 쓰는 것도 잊고 산다. 그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단아해서 좋다. 판화로 찍어낸 그림의 여백에 쓴 그의 빼곡한 글은 어찌 보면 낙서같다. 내용이 보잘것없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또박또박 쓰인 글씨가 아니란 뜻이다. 그냥 펜 가는 대로 편히 휘갈겨 쓴 글씨는 성의없어 보이기도 하고 좋게 보면 털털해 보이기도 한다. 그 글 맛에 어느덧 중독돼 더디더라도 엽서 밑에 인쇄된 글 대신 엽서에 있는 글씨를 느릿하게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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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없으신지요? 인생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할 좋은 사람들 없으신지요? 이제 너무 멀어진 잊혀야 할 추억이나 그리움 말고, 조금만 가까이 있어서 부르면 대답하고 힘이되어주기도 할, 푹 죽지 않은 그리움 없으신지요? 아직 다 시들지 않은 소중한 사람들. 너무 늦기 전에 마음 담은 편지 한 통, 엽서 한 장 쓰면 대답할지도 모르는데…. 거기서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솔직한 그리움 담아서 배고픈 빨간 우체통에 넣어보세요. 저물어가는 겨울에 따뜻한 대답이 오실 텐데…. 안 그럴까요?
-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 131쪽
그의 작품은 판화보다 한 편의 그림시 같다. 아마도 모든 작품이 판화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에서는 주로 판화 작품을,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에서는 펜으로 직접 그린 컬러풀한 그림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단조로운 판화보다는 그림이 주는 다양한 색채와 자유로움이 좋지만 나는 판화로 새긴 엽서가 더 좋게 느껴졌다. 그가 목판에 새기면서 흘렸을 땀과 시간, 그 깊이 있는 중후함이 보기 좋았다고나 할까. 글의 내용은 모두 달랐지만 중복되는 판화 그림이 자주 있었고 대충 그린듯한 허접한 그림들도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지인들의 이메일 주소는 알아도 주소는 거의 모르고 사는 우리. '매월 말일은 편지 쓰는 날'이라는 옛 카피가 그리워지는 요즘, 그래서 이 책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2009/11/29 Written by Das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