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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음악시간에 항상 들어야했던 클래식 음악 감상시간 가끔씩 듣곤했던 그녀의 목소리 비장하기도 하고 열정적이던 막상 나이가 들고 보니 그녀의 삶이 궁금해져왔다 대개의 음악가처럼 바람둥이일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사랑이 새삼 연애가 난무한 이시대에 더욱 빛을 내는듯했다 진실로 사랑했기에 아파하고 기다리던 그 열정의 여인 힘든 가족사의 이해받기 힘들었을 유년기를 거쳐 당당하게 삶을 지탱해주던 음악 ... 그녀의 자라온 과정과 사랑의 선택방식등을 통해 인간적으로 더 깊히그녀에게 빠져든듯싶다 책을 다 읽고도 가슴이 아팠던건 그녀의 죽음이 그리고 유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마치 우리의 탄생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없듯 죽음 역시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한동안 그녀가 내 뇌리에서 떠나지지 않을것이다 다시 그녀의 곡들을 음미해보아야겠다 이 겨울이 다 가기전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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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의 몇몇 자서전 중에서 이 책이 가장 현실성 있게 그녀를 서술한 책이기에 읽게 되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클래식 음악 마니아로서 마리아 칼라스를 20세기 가장 위대한 디바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성장과정과 삶을 총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성격이 매우 까다롭다거나 사생활에 문제가 많았다는 등 단편적인 가십거리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대단한 삶을 살았던 감동적인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대부분 시간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리아의 부모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마리아 칼라스의 어머니 리차는 아버지가 그리스의 장군이었으며, 마리아 칼라스의 아버지 게오르게는 집안이 변변치 않은 약사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집안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중상류층에 귀족의 후예였고, 리차의 오빠 중에는 장래가 유망한 시인, 군장교들과 정치가, 훌륭한 음악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리차는 무대와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광적으로 집착했다고 한다. 또한 언젠가 직접 무대에 서보겠다는 은밀한 꿈을 간직했으며, 이러한 꿈이 바로 마리아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를 무대로 몰아세웠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리차는 성실하고 잘 생긴 게오르게가 마음에 들어 결혼을 했으나 서로 생활방식이 안 맞아 후회했다고 한다. 또한 둘 사이에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지만 장티푸스에 걸려 바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리차가 또다시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분명히 죽은 아들을 대신한 또 다른 아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새로운 생활을 동경했던 게오르게는 리차와 상의 한 마디도 없이 전 재산을 팔아 미국 뉴욕으로 이주를 감행하게 되었다. 임신한 몸으로 그리스 땅을 떠나 뉴욕에 터를 잡게 되었지만 리차는 뉴욕이 부유한 그리스인들이 편안히 정착할만한 곳이 못됨을 알았고, 특유의 허풍스런 오만함을 가지고 뉴욕에서도 그리스식으로 살려고 애썼다고 한다. 뉴욕에 와서 아들이라 생각하고 출산한 아이는 딸이었다. 리차는 출산 직후 실망감이 밀려와 세상에 막 나온 딸 아이를 보고 저리 치우라고 이야기했다 한다. 신생아치고는 아주 컸다는데, 바로 이 아기가 마리아 칼라스였다. 위로는 언니 재키가 있었다. 마리아는 어린 시절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리차가 그리스에서 가지고 온 악보들은 고전 오페라 아리아였다고 하는데, 저녁마다 리차는 피아놀라 앞에 앉아 발로 페달을 밞으며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 사정은 넉넉하지 못했고 리차와 게오르게 사이도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마리아와 재키는 어머니의 심각한 우울증을 견뎌내야 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분노에 차 싸우는 소리들을 듣고 살아야 했다고 한다. 또한 리차는 아이들을 안아주거나 뽀뽀해주는 여자가 아니었고, 다른 아이들과 격리시키는데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으며, 늘 최고의 품행을 유지하고 언제 어떤 때라도 흠 없이 완벽한 모습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집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지만 훨씬 온유하고 친절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마리아는 언니에게서 사랑과 관심을 찾으려 했고, 언니 재키는 어린 여동생을 기꺼이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니가 학교에 가고 엄마의 우울증 발작이 날 때면 하루에도 몇 시간씩 혼자 방치되며 외로운 아이로 성장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약한 시력 때문에 안경을 꼈고, 상당한 과체중인데다가 내성적이라 친구들도 없었다고 한다. 마리아에게 가장 큰 기쁨은 조용히 앉아 몇 개 안 되는 레코드를 축음기에 걸고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리아는 겨우 일곱 살부터 레코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래를 들은 리차는 딸에게 재능이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훌륭한 목소리와 청음 실력,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가곡의 언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음악과 가사 모두를 이해하고 노래를 불렀다는데 있다고 설명한다. 언니 재키도 피아노 선생에게 레슨을 받고 있었고 상당한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레코드를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토요일 오후에 도서관에 가서 음악 자료실에서 레코드를 들었다고 한다. 남들 앞에 서기는 싫었지만 진심으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마리아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합창단원이었던 스웨덴 출신 이웃 존 에릭슨이 열린 창문으로 마리아의 연습 소리를 듣고 무료로 성악 레슨을 해주었기에 마리아의 목소리를 크게 망칠 수 있었던 수많은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리차는 두 딸에게 필요한 건 오직 그리스만이 제공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음악 교육이라 생각하고 비용을 마련해 남편만 뉴욕에 남겨놓은 채 그리스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처음 자신의 고향을 본 마리아는 뉴욕이 주는 장엄함과 흥분감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리차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리아를 아테네 음악원이나 국립음악원에 입학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든 음악계에 줄을 댈 수 있는 사람이든 딸의 경력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면 가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고 한다. 결국 아테네 오페라단 소속 젊은 테너인 자니스 캄바니스에 눈에 들어 그가 사사하고 있던 국립음악원 교수이자 아테네에서 가장 훌륭한 발성코치인 마담 마리아 트리벨라 앞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목소리보다는 그렇게 어린 소녀가 카르멘을 극적으로 연기해낸 데 더욱 깊은 인상을 받은 마담 트리벨라는 마리아를 국립음악원 장학생으로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마리아의 나이는 열 세 살이었고, 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열 여섯 살이 되어야 하기에 마리아의 출생증명서 날짜를 위조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열 세 살임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존재감, 훌륭한 피치, 감각과 개방적이고 정서적인 자질, 적당한 신체조건 등 진정한 오페라 가수의 자질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국립음악원에 입학한 이후 마리아는 공부에 매진하면서 사회생활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었으며 또래의 소녀들과 어울리는 일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제대로 앉아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일도 별로 없이 공부하는 동안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먹는 버릇도 이 때 더 심해졌다고 한다. 음식은 그녀에게 보상이자 결핍을 채우는 수단이었고 결국 1년이 채 못되어 어마어마하게 뚱뚱해졌다고 한다. 국립음악원 청년들 중 그 누구도 그녀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보이지 않았고, 훗날 마리아는 오로지 청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만 사랑 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한편 언니인 재키는 음악에 대한 자신의 꿈을 접고 힘든 날들을 이어가야 했다. 리차는 재키에게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서 마리아와 자신을 더 나은 생활수준으로 끌어올려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재키는 유명한 선박업체 가문의 밀튼 엠비리코스와 사귀고 있었고, 리차는 밀튼이 자신을 도와주면 재키를 정부로 삼는 걸 허락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재키는 마리아에게 목소리를 주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희생양으로 팔려간 것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밀튼이 대주는 소액의 생활비로 재키도 다시 피아노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자 적국 이탈리아 출신인 마담 트리벨라는 스파이라는 등 온갖 날조된 비난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마리아를 아테네 음악원으로 전학시켜 유명한 교수인 이달고에게 사사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오디션을 본 뒤 이달고는 성악적 기교는 완벽하다 할 수 없었지만 내면적인 드라마와 음악가다운 자질,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배어 나오는 어떤 개성이 자신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이달고는 자신이 최고 음역의 소프라노에 도전하는 현란한 아리아를 부르는 위대한 디바를 키워낼 수 있다는 사실을 오페라 세계에 보란 듯이 입증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반면 마담 트리벨라는 마리아의 발성 영역이 메조에 더 가깝다고 믿었다고 한다. 아테네 음악원에서의 생활도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연습실에만 있었다고 한다. 너무 자신을 혹사시켜 약간의 말더듬 현상도 생기고, 그리스어를 할 때 약간 외국 악센트가 새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이 그리스에도 드리워졌고 아테네에는 점령군인 독일군이 주둔했다고 한다. 그 당시 질병과 기아로 사망한 아테네인이 무려 30만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마리아는 군대에서 식량을 배급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는 이탈리아 장교를 소개 받고 그를 통해 많지는 않지만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리아가 적군과 동침했다고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음악원을 다니며 점령군이 부탁을 하면 소규모 콘서트에서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 나이 18세때인 1942년 8월, 아테네 오페라단에서 준비한 토스카 공연에 주역으로 데뷔했다고 한다. 청중은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 출신 점령군인이었지만 그녀는 이 공연으로 단번에 유명한 성악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마리아는 이탈리아 정보장교인 스타시오 소령을 사귀고 있었는데, 18세 처녀가 커다란 몸집의 40대 중반 사나이를 사귄 것이었다. 스타시오 소령은 한때 바리톤 성악가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도 한 오페라 광이었다고 하는데, 마리아 입장에서는 사랑 받고 싶다는 엄청난 갈증을 이 사람이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리차는 스타시오 소령이 전쟁 당시는 물론이고 전후에도 음악계에 인맥을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딸과의 관계를 묵인했다고 한다. 한편 마리아가 점령군 앞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계속하자 주변에서는 이것을 반역행위라 생각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한 번도 누구를 위해 노래 부른다는 걸 의식해 본적이 없으며 오직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만 관심을 쏟았다고 하는데, 적국이 이탈리아를 완전히 점령하고 이탈리아 정권을 무너뜨리자 스타시오 소령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음악원 교수회는 점령군 앞에서 노래를 부른 이적행위로 인해 마리아의 장학생 자격을 박탈시켰다고 한다. 그래도 이달고는 남몰래 마리아의 교습을 계속 진행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럽이 전쟁의 참화 속에 있을 때 언뜻 떠오른 생각은 마리아가 미국에서 출생한 미국 시민권자이니 미국에 남아 있는 아버지에게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와 이달고 선생은 먼저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결국 마리아는 혼자 미국에 가겠다고 선언하고 8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미국에서 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해주었지만 아버지도 다른 애인과 함께 살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집을 나가 호텔에서 숙박을 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혼자서 뉴욕에 있는 에이전트와 콘서트 매니저들을 찾아 다녔지만 안내 데스크를 넘어서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뉴욕에 있는 오페라단 중에서 아테네 오페라단 경력을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데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연줄을 통해 세계적인 테너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반니 마르티넬리 앞에서 리허설 공연을 했지만 그는 끝까지 냉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야외 공연장에서 열리는 아레나 디 베로나 여름 축제의 창립자이자 총책임자로 테너 조반니 제나텔라가 뉴욕에 와 같이 공연할 젊은 소프라노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는 이 공연 계약을 성사시키면서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위대한 이탈리아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의 지휘하에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는 세라핀과 평생에 걸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가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세라핀은 오래 전부터 마리아가 노르마처럼 극단적으로 유연한 발성과 폭넓은 음역을 요하는 벨칸토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달고에게 배운 콜로라투라 기법을 구사하는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세라핀은 이야말로 19세기 책에서나 읽어본 적이 있는 그런 가수라고 평한 것이다. 마리아는 노르마 역할로,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엄청난 음역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낮은 음자리의 F#에서 높은 음자리 보표 위의 E까지 세 옥타브가 조금 못 되는 음역을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목소리는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없지만 독창적이고 깜짝 놀랄 정도로 인상이 강한 목소리가 강력한 극 해석 능력과 결합되어 특출함을 보여준다고 언급한다. 세라핀은 일단 마리아의 잠재력이 인정받기만 하면 앞으로는 결코 오페라를 예전처럼 부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고음역을 단순한 장식음에 불과하게 표현하거나 지저귀는 새처럼 트릴을 노래 부를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음표에 붙어 있는 가사의 의미를 강조해 이야기의 극적 흐름에 부합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초의 콜로라투라 가수이기 때문이란 말이다. 이탈리아 베로나 공연 시 마리아는 극장의 실무를 맡고 있던 친구의 소개로 52세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메네기니는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고, 오페라에 깊은 애정이 있어서 베로나 원형극장에 찬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와 만남 이후 메네기니는 그녀에게 푹 빠져 많은 선물을 주고 사비로 발성코치까지 대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예술계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메네기니의 가족과 친척들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물론 메네기니도 마리아가 오페라 계에서 성공하게 되면 자신의 사업을 매듭짓고 풀타임으로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려 오페라 흥행사로 나서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메네기니의 청혼에 마리아는 1949년 4월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 당시 마리아의 부모는 딸의 결혼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마리아는 베로나 공연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에이전트나 오페라단 중에 그 어느 곳도 관심을 보이는 곳에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했으나 마리아의 맞수라고 할 수 있는 레나타 테발디와 불화를 겪게 되고, 결국 1951년 12월 주역으로 공식 데뷔하게 된다. 이 당시 마리아의 공연장을 자주 찾았던 영화 및 연극 연출자인 루키노 비스콘티와의 인연으로 인해 예술적 협력관계가 더 넓어질 수 있었고, 미국 진출 시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50년대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온 오드리 햅번을 보고 갑자기 다이어트에 돌입해 11개월 동안 34킬로그램을 감량했고,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 중 몇 사람이 마리아를 위해 화려한 의복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그 당시 유명 지휘자였던 번스타인 및 카라얀과 얽힌 이야기들도 등장한다. 동성애자인 번스타인은 완벽주의자였고 자신이 존경했지만 사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하며, 카라얀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존경했지만 오페라에 대한 카라얀의 시각적 개념은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카라얀은 우울하고 어두컴컴하고 그늘진 조명, 황량하고 양식화된 세트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비엔나 스테이트 오페라단 공연 계약 시 카라얀이 더 많은 출연료를 받자 출연료를 더 올려주지 않으면 공연을 거부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일화도 소개되고 있다. 미국에서 여러 차례 도전 끝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과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고, 이 때 의지했었던 비스콘티를 사랑했다고 한다. 물론 비스콘티는 동성애자라 그녀의 사랑을 거부했다고 한다. 마리아에게는 부모님의 불화가 늘 근심거리였는데, 아버지의 계속되는 불륜 때문에 자신도 남편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리아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자 어머니인 리차는 타임지와 인터뷰에서 마리아를 불쌍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를 비참한 삶에 빠뜨린 배은망덕한 마녀로 몰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치솟는 명성으로 인해 사생활을 포기해야 했고, 어느 때보다 더 고독해졌으며, 이 때문에 불면증이 생겼고, 다시 살이 찌는 걸 너무 두려워해서 식이장애도 발병했다고 한다. 유명인사가 된 마리아의 공연 리허설을 자주 찾아와 지켜보던 국제 사교계의 마술사라 불리는 엘사 맥스웰 때문에 그녀는 오나시스를 소개받게 된다. 오나시스의 입장은 오페라에 대한 열정은 없을지 몰라도 그리스와 관련된 모든 것에 강렬한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명사가 된 마리아에게 일종의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면서 레코딩 작업에도 열중했는데, 너무 무리를 했는지 가끔 성대에 격렬한 통증이 오기도 했다고 한다.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을 마치고 집에 오면 극도로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이탈리아 대통령 부처가 참석한 공연을 망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메트로폴리탄과 맺은 계약도 취소되면서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한다. 이 당시 남편이었던 메네기니가 자신이 번 돈을 개인구좌로 이체해놓고 상당한 거액을 메네기니의 가족들 이름으로 분산 배분해 놓은 사실을 알게 되어 부부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의지가 되었던 인물이 바로 오나시스였다고 한다. 오나시스라는 인물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여자들도 자신을 위해 이용해먹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선박업에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스타브로스 리바노스를 장악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 집안과 결혼하기도 했다고 한다. 마리아와 오나시스와의 관계가 들통나버리자 메네기니나 오나시스의 아내였던 티나 역시 각자 이혼소송을 준비했다고 한다. 한편 마리아는 처음으로 여자로 산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면서 자신의 경력과 노래보다 오나시스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나시스와 함께 할 수 없는 미국이나 남아메리카 투어는 될 수 있는 대로 계약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2년 4월, 모친의 자살미수 사건도 있었고 어수선한 시기였지만, 이 시기는 마리아에게 사색의 시기였다고 한다.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도 그렇고, 오나시스를 깊이 사랑하는 게 분명했지만 결혼 가능성이나 아기를 가질 가능성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잘 관리하기만 하면 적어도 수년 동안 목소리를 잃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도 생겨났다고 한다. 이 당시 마리아가 원했던 것은 오나시스와 진정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었다고 한다. 1963년에는 콘서트 일정만 잡아놓고 하반기 일정을 완전히 비워놓아 가능하다면 언제나 오나시스와 함께 지내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나시스가 자주 하는 요트 여행에 재클린 케네디의 여동생이 함께 하게 되었다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의 처제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오나시스가 잘 대해주었고, 사교계를 전전하던 그녀와 정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때마침 재클린 케네디가 낳은 셋째 아이인 패트릭이 태어나자 마자 죽자 실의에 빠진 재키를 달래주기 위해 호사스러운 요트 여행을 시켜준 덕분에 재키와 오나시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당시 마리아가 오나시스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나시스와 합의하에 병원에서 낙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철저한 비밀이었던 낙태 수술 후 퇴원한지 열흘 만에 공연 무대에 올라갔고 몸이 안 좋아 무대에서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모나코 통치자 레이니에 공과의 결투에서 패배한데다가 믿고 따르던 아버지 같은 처칠 경 마저 작고하자 오나시스는 큰 슬픔에 빠졌고, 마리아는 그의 슬픔을 지켜보며 자신의 일에 더 몰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아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사이에 오나시스는 극비리에 미망인이 된 재키 케네디를 만나고 있었고 곧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으로 충격을 받고 마리아는 칩거에 들어갔는데, 여기에 자신의 스승이었던 툴리오 세라핀의 별세 소식마저 들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재키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나시스는 다시 마리아를 만나기 시작했고, 오나시스가 병으로 사망할 때 몰래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오나시스가 세상을 떠난 이틀 뒤에 자신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비스콘티도 사망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목소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육체적 쇠잔함을 느끼면서도 1971년 뉴욕 줄리아드 음악학교의 초청을 받아 재능 있는 유망주들 앞에서 그 유명한 마스터 클래스를 주관했으며, 예술영화에도 출연했고, 유럽과 미국을 거쳐 전세계를 순회하는 공연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순회공연은 서울, 도쿄, 오사카, 히로시마, 그리고 삿포르가 마지막 공연지였다. 서울 공연은 1974년 10월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열렸고, 1974년 11월 11일 삿포르에서 행한 공연은 마리아 칼라스가 대중들 앞에서 한 마지막 공연으로 지금도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후반부는 그리스 출신 피아니스트인 바소 데베치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리아 또래의 여인으로 파리에서 칼라스를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려고 애썼던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마리아 칼라스가 어떻게 죽었고, 또 사후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나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놀랐다. 물론 내용이 분명치 않게 기술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항상 비위를 맞추고 마리아의 마음대로 해주며 마리아를 숭모하는 팬인 척 했던 바소가 수면제와 암페타민을 마음대로 처방해 마리아에게 주었고, 그걸 먹고 마리아가 죽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는데, 그게 아닌 폐 경색으로 죽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활동이 거의 없고 침대에 많이 누워 있으며 운동부족인 사람이 알약을 과다하게 복용하면 폐색전증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소가 마리아를 타살했다는 증거라 한다. 게다가 마리아가 죽은 이후 바소가 마리아의 어머니와 언니가 존재했음에도 대리 집행인이 되어 시신을 마음대로 화장했고 마리아의 이름으로 재단을 설립하게 해 상당액의 유산을 거기에 신탁하도록 계략을 꾸몄다는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 기금은 간판만 내걸었을 뿐 실체가 없었고, 실제로 혜택을 받은 성악가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기로 횡령한 돈도 어디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또한 마리아의 납골당 유골 도난사건과 유골을 바다에 뿌렸을 때 일어났던 일도 무척 놀라웠다. 이 책을 통해 마리아 칼라스의 삶은 현실에서 공연된 거대하고 열정적인 오페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단숨에 읽게 된 것은 작년 10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1막 무대가 되었던 산탄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토스카"는 원작이 5막짜리 연극이었고 푸치니가 이 연극을 보고 오페라로 활용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연극의 여주인공 역할을 했었던 사라 베른하르트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여배우였던 사라 베른하르트는 마리아 칼라스와 닮은 점이 많았다. 마리아 칼라스가 연기한 가장 유명한 배역들 중 상당수를 초연한 여배우가 사라 베른하르트였는데, 여기에는 토스카, 춘희(비올레타), 메데아와 멕베스 부인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심지어 베른하르트가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아 마리아 칼라스가 태어났다는 인연도 있다. 바로 사라 베른하르트와 "토스카" 때문에 이 책을 찾아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에서 "토스카"는 마리아가 그리 즐기는 역할이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살인까지 불사하는 여인과 마리아는 닮은 점이 많았다고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 유튜브를 통해 마리아 칼라스의 "토스카" 공연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