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에 리뷰를 쓰신 다른 분이 상당히 자세히도 쓰셨네요... 저는 간략히 보다 감상에 초점을 두고 쓴다면... 상당히 마음에 드는 좋은 책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순수한 학술적인 딱딱한 리포트 같은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장되게 인간사회를 대조시켜 지나치게 심각함을 ''연출''하려는 책도 아닙니다. 따뜻하고 무리없는 문장 속에서 부담없이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하면서, 인간사회라는게 우리 종(種)의 특성에 맞추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유인원 사회라는 평범한 사실을 차분하게 느끼게 해주는 책입니다. 인간에 가장 가까운 두 종인 침팬지와 보노보가 서로 다른 사회 구조를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곳곳에서 따뜻한 저자의 유머도 간간히 발견할 수 있고요... 부담없이 책 읽는 재미도 느끼면서 가볍게 지식과 성찰의 계기도 제시하는 좋은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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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은 아마도 아주 오래된 이야기 주제일 것이다. 철학에서 시작해서 현대의 생물학,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적 호기심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까지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우리 인간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고고학적으로 풀어낸 것은 화석을 통해서이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 발견된 많은 화석은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도 우리와 닮은 인간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으며, 현재에도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수렵 채집 사회는 우리 조상들의 과거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모습이나 사회에 대해서는 얼마간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부분은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 우리는 우리와 닮은 영장류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20세기 중반의 침팬지 연구에서부터 보노보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위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다. 호모속(屬) 사이엔스종(種)에 속한 동물이고 또한 영장류에 속하는 동물이다. 같은 영장류에 속하는 동물들을 보면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과 우리 인간이다. 이들은 진화 시간으로 보면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에 우리와 분리된 동물로서 특히나 침팬지와 인간은 유전자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거의 98퍼센트가 동일하다고 한다. 하지만 보노보와는 98퍼센트가 동일하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보노보가 우리 인간에게 알려진 것이 침팬지보다 훨씬 최근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침팬지를 통해서 본 우리의 모습은 제인 구달이란 사람에 의해 많이 밝혀졌다. 그분의 야생 상태 침팬지 연구를 통해 침팬지란 동물에 대해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이 많이 잘못되었으며 또한 이를 통하여 진화상에서의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나타난 우리 인간 군상의 모습이란 대체로 동생을 죽인 카인의 모습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타성 속에는 잔인한 ‘피의 화신’이 우리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듯 비교 동물학의 존재 이유는 분명해진 것이다.
하지만 침팬지와 또 다른 우리의 사촌인 보노보는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1929년에 벨기에 식민지의 한 박물관에서 발견된 보노보는 처음에는 침팬지인 줄로 알았다. 그래서 보노보의 다른 이름은 피그미 침팬지라고도 한다. 그래서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우리 인간을 ‘제3의 침팬지’라고 했었던 것이다. 늦게 시작된 보노보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의 저자인 프란스 드 발에 의해 이루어졌다. 드 발은 침팬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우리 사촌을 발견했다. 난폭함이나 공격적인 침팬지와 평화주의자인 보노보는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욱 많았다.
Ape는 ‘꼬리 없는 원숭이’를 뜻한다. Ape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은 데스몬드 모리스의 책 <털 없는="" 원숭이="">의 영문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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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불평등. 무엇을 지향할 것이냐. 평등/불평등과 역사 지난 몇 천 년 간의 인류 역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다툼/투쟁이 있어 왔다. 그 다툼의 근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평등을 지향하는 자들과 불평등을 지향하는 자들 간의 알력이 표면화된 것이었다. 이런 타툼/투쟁 하에서 인간 사회는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전진해왔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과연 그럴까? 개별 사회로 살펴보면, 확실히 진보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회(국가라 해도 무방하다)는 권리와 분배를 제도적으로 공고하면서 수긍할만한 평등을 달성했다. 그 대표격은 유럽, 특히 북유럽 사회다. 우리나라는 저들보다 못하긴 하지만, 또 신자유주의 바람에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예전ㅡ조선시대 ㅡ보다야 평등해졌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세계적인 양상을 보아하면, 저 견해 위에는 떡하니 물음표가 찍힌다. 서구 사회의 평등이 제3세계의 불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세계경제의 중상부에 위치한 우리나라도 그 수혜자 중 하나다. 아프리카나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체제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여, 온몸으로 서구 사회의 풍요에 기여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불평등의 양상은 국가 내에서도 엿볼 수 있다. 70년대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겪던 착취와 수모는 국내의 외국인노동자에게 고스란히 이전되었지 않나. 이런 점에 비추어보건대,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사회만 관찰하면, 그 사회 내 구성원끼리는 제법 평등하게 느껴진다. 그건 사실이다. 허나, 그렇다고 평등을 전 세계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불평등 스펙트럼이 전 세계에 걸쳐지면서, 불평등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을 뿐이니까. 결국 서구 사회에서 위대하고 원대한 꿈에서 시작된 평등의 쟁취를 위한 투쟁들은 일견 자신의 사회 내에서는 불평등을 줄이는 데는 일조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다른 사회로 그 불평등을 이전했을 뿐인 것 같다. 아니, 전체적으로는 불평등이 심화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아는가? 문명화되기 전에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사회가 대체적으로 평등했을지도. 지난한 저항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불평등은 끈질기게 존재하는 것일까? 일단 평등/불평등 대립의 본질을 파악해보자. 거칠게 말하자면, 어느 사회든 항상 두 무리가 갈등을 일으켜왔다. 하나는 불평등을 수용하고 지지는 자들. 여기엔 기득권을 가진 자들과 기득권에 편승하려는 자들, 그리고 기득권을 쟁취하려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 무리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두루 속해 있다. 다른 하나는 평등을 선호하고 지지하는 자들. 이들은 지배 권력을 분산시키고,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자들이다. 여기에는 보통 못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다. 한 사회의 제도는 이들 세력간 힘의 균형점, 양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세워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수정되고 재생산된다. 인간은 언제까지 이런 대립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하는가? 나는 그 답이 ‘아마도 인류가 생존하는 한 계속’이라 생각한다. 이들 사이의 지난한 투쟁은 끊임없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위계질서에 대한 선호도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서 유래한다(여기서 인간 본성이란 생존과 번식에 근거하여 진화한 감정 및 동기를 말한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나 위계질서를 강화하려는 성질이 강한 사람과 위계질서를 약화하려는 성질이 강한 사람, 양 측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 간의 대립은 끊이지 않는다. 평등/불평등과 인간본성 인간 본성에는 이러한 대립을 초래하는, 평등/불평등을 지향/지속하게 하는 여러 가지 면들이 있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여기부터는 이 책의 내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불평등을 촉진하는 인간 본성은 권력의지, 집단주의, 희생양 찾기 등이 있다. 권력의지는 높은 지위에는 더 많은 자원과 더 훌륭한 배우자가 따라왔기 때문에 발달한 심성이다. 권력을 지향하는 성질(특히 남자)는 도처에서 발견되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집단주의와 희생양 찾기는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해왔다. 이 둘이 드러나는 양상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굳이 구별하자면, 앞의 성질은 외지인/외국인에 대한 끝없는 차별에서 드러나고, 뒤의 성질은 재해 때 외지인/외국인에게 분노가 쏟아지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의지는 집단 내의 지배 관계를 공고화 해왔고, 집단주의와 희생양 찾기는 집단 간의 지배 관계를 공고화 해왔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를 상쇄시킬 만한 축복받은 본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평등을 촉진하는 인간 본성에는 공정성과 정의감,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등이 있다. 공정성은 상호주의에 기반하여 자원을 정당하게 배분하면서 진화했다. 정의감은 개인적인 갈등이나 원한을 사회적/공공적으로 해결하면서 진화했다. 예컨대, 고대에는 개인적으로 행해졌던 보복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한 것이 법이다. 그리고 공감은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공감은 기쁨보다는 고통에 대해 일어난다. 즉, “우리는 남의 고통을 보고 듣는 걸 싫어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왔다.” 공정성과 정의감은 집단 내의 불평등/부패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하여 평등을 추구하게 한다. 공감은 집단 내의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게끔 한다. 이 감정들은 집단 밖으로도 퍼져나갈 수 있는데, 특히 외집단의 불행에 공감하기만 하면 집단 간의 불평등은 완화될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문화, 제도는 이런 본성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다. 문화와 제도는 축적되고 전래된다. 이것은 그 사회가 처한 자연환경과도 연관되어 있다. 풍부한 자원을 지닌 아메리카와 한정된 자원을 지닌 유럽의 차이랄까. 하여간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한 사회의 평등과 불평등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다. 현실과의 접점 언제나 어려운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단계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순 없다. 어려운 만큼 중요하기에 연결을 시도해야 한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항상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이 책의 내용을 검토하려면, 이보다 앞서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나는 불평등과 평등 중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 흠,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각자 대답해보시길. 일단 나의 입장을 서술하며 미래를 타진해보겠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치열하고 혹독한 경쟁 사회다.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인데) 금전적으로 상위 3%ㅡ대략 100억 이상 재산의 소유자ㅡ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아래 97%를 ‘돈’으로 좌지우지하는 사회다. 실제로 돈에 의식주 문제가 직결돼 있으니까.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한국은 태생적으로 계급을 부여 받는 사회이다. 부동산과 주식 신공이 거의 막힌 지금에는, 노력만으로 계급을 넘어서기란 대단히 어렵다. 부자들의 자식이 다시 그 지배계급의 자리ㅡ자본가, 대학총장, 정치인, 빌딩주 등ㅡ을 채우는 현실이야 익히 아는 바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상위 3%의 부르주아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불평등과 평등 중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변주해볼 수 있겠다. “불평등을 수긍하고 경쟁에 뛰어들어 기득권을 쟁취할 것이냐, 또는 97%의 이들과 연대하여(또는 그들을 부추겨)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신할 것이냐.” 이것은 체제복종적 또는 체제저항적인 태도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와도 동일하다. 첫 번째 선택지부터 검토해보자. 내가 경쟁 사회에 뛰어들게 된다면, 지금 내 처지로 보건대 회사나 정부에 들어가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평생 더 높은 지위를 갈망하며 미친 듯이 달릴 것이다. 이런 타입의 인물로는 홍정욱, 강용석, 고영 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본가나 고위공무원(이들은 자본가에게 복무할지도)의 아래에서 피 토하게 일해야 할 것이다. 분명 내가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는 못 할거다. 나는 오너가 아니라 일개 노동자일 뿐이니까. 하지만 누릴 것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래 조직의 사람들에 비해선 우위에 선 입장이니까. 철저한 갑을 관계로 이루어진 현실(예컨대, 대기업과 하청업체, 정부와 대기업)에서 득을 보여 살아갈 거다. 이를 통해 나는 소소한 우월감을 느낄 것이며, 경제적으로도 자그마한 풍요를 누릴 거다. 그리고 좋은 성과를 내거나, 승진하거나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거다. 하지만 이런 삶에는 필연적으로 불안과 불만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생존과 번식에 직결되는 ‘자원’과 ‘배우자’라는 요소는 둘 다 경쟁에서 획득해야 하는 배제적 요소다. 일단 경쟁에 처한다면, 마음 상태는 절대로 평온할 수 없다. 지위의 사닥다리를 오르게끔 추동하는 힘은 바로 불안/불만이니까. 또한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해야 한다면, 그것은 강렬할수록 좋다. 그래야 경쟁에 필사적이 되니까. 결국 인간은 생존과 번식에 목숨 걸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한계를 받아들인다면, 이런 상황에서 평생 평온한 행복을 누리는 것은 힘들 거다. 그래, 이런 심리적 불안정은 자그마한 풍요의 대가라 생각하자. 이게 다 부르주아로 태어나지 못한 ‘내 탓’이다. 허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내게는) 좀 더 핵심적인 문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예속/굴종 이다. 즉 윗사람에게 복종하고 조아려야 하는 것. 속된말로 ‘똥꼬를 빨아야’ 하는 것. 보라. 경쟁 사회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산다면, 평생 동안 내 위엔 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평생 동안 윗사람 눈치를 봐야 할거다. 때문에 배우자보다 스트레스와 더 오랜 시간 붙어 지낼 듯. 또 다른 하나는 지적 성장의 즐거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앎/깨달음에 대한 욕구는 내게 사랑/관심에 대한 욕구와 함께 최상의 가치로 놓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살면 앎/깨달음을 포기해야 할 소지가 다분하다. 회사원/공무원의 처지에 정신적 성장을 위한 독서가 가당키나 한가? 기껏해야 실용 독서에 머물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식으로 살면 생존/번식을 위한 자원은 충분히 축적할 수 있을 테니, 사랑/관심에 대한 욕구는 제법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두 가지 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기에, 이쪽으로 마음이 확 기울지는 않는다. 이것 역시 부르주아로 태어나지 못한 내 ‘원죄’이다. 그래서 내가 좀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삶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삶이다. 이것은 사회의 인정에 무심한 채, 사회의 인정이 부여되는 방향과는 살짝 틀어진 방향의 삶이다. 해서, 이것은 자동적으로 부르주아와 적대적인, 체제저항적인 삶이 된다. 따라서 이것은 평등을 삶 자체가 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진보적인 입장과 불가분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으로는 니어링부부, 법정 스님, 한비야 등이 있다. 또한 안철수, 스티브잡스도 이에 포함된다(이들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류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안철수는 의대교수에서 벤처기업가로 전향했고,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했다.) 이 방식이 맘에 드는 이유는, 경쟁 사회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입장이라 육체적/정신적으로 상당히 평온하고 안정될 것 같아서이다. 니어링 부부처럼 먹을 만큼 농사짓고, 책 읽고 글 쓰고, 이웃과 교류하며(육체노동4-내적성장4-사랑우정4 법칙!) 인간으로써 가장 균형 잡힌 삶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는 한비야나 스티브잡스처럼 마음의 소리를 따라 산다면 자아실현의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지 않겠나? 분명 이런 방식의 삶은 앎/깨달음에 대한 욕구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렇게 살면 되지 않나?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제법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주류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건 언제나 두려움을 유발한다. 그 두려움을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주변 사람들의 인정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사실 한국 사회의 대부분은 (의도치 않았지만) 경쟁 논리를 열렬히 내면화한, 부르주아’적’ 주체이지 않은가. 이들에겐 자본을 축적하지 못하면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해서, 평생 사랑/관심에 대해 욕구불만에 시달릴 소지가 있다. 사실 제3의 길도 있다. 제3의 길이라니! 왠지 멋져 보이지 않는가? 이 길은 내게 매혹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앎/깨달음에 대한 욕구와 사랑/관심에 대한 욕구 둘 다 제법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바로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것! 이런 부류의 이들로는 고미숙, 이진경 등이 있다. 허나, 여기에도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살림이 조금 곤궁할 것 같다. 하긴 뭐 이거야 감수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학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라는 거다. 논문 쓰고 책 쓰고 번역하고는 것이 생존과 직결된 일이 된다면, 분명 스트레스를 아니 받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이 가장 전망이 있어 보인다. 허나 아쉬운 건, 아직 확 꽂히는 학문 분야가 없다는 거다. 일단은 부지런히 책을 읽고 있다. 지금 내 관심사로 보아 하면, 아마 평등의 편에 힘을 실어주는 학문을 할 것 같다(체제순응적이며 체제보전적인 학문, 기득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학자란 뭔가 빈곤하지 않은가?) 물론 강단-좌파가 될지 재야-좌파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얘기가 심하게 옆길로 샌 것 같은데, 본론으로 돌아가자. ‘평등과 불평등 중 무엇을 택할거냐?’라는 질문! 여기에는 이렇게 답해볼 수 있겠다. 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는 태생적 조건 때문에, 그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성질머리 때문에 평등의 편에 서게 될 확률ㅡ자유로운 삶이든, 학자로의 삶이든ㅡ이 높다고.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매일 그걸 고민하고 있다.) 사실 세 가지 길 다 아직 가보지 않았기에, 지금은 대략 스케치만 해볼 뿐이다. 만족스런 그림을 그리겐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아마도 간접적/직접적인 경험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좌파/진보주의자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진정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좌파/진보주의자라면, 자기가 속한 사회의 불평등에만 분노하고 저항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관점에서 불평등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전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포섭된 상태에서, 각 나라는 세계 경제서열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나 아프리카의 노동자나 미국의 금융자본가들에게는 동일한 착취의 대상이지 않은가! 따라서 나 그리고 우리나라 불평등의 궁극적인 해소는 곧 전 인류의 불평등이 해소될 때마다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인식하고 집단주의 넘어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정리 지금 우리 학교 중앙도서관 1층에는 추천도서 70권을 배치돼 있다. 얼마 전 둘 셋 씩 뽑아서 서문을 포함해서 대략적인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 때 여러 권을 독서목록에 포함시켰다. 이 책도 그 중에 포함된 책이다. 다른 책들에 비해 좀 빨리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 전부터 진화론 관련 서적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정말 감동이었다. 길가다 우연히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느낌이 이럴까? 유인원의 습성 X 진화론적 분석으로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이 저서는 정말로 탁월하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우리가 우리의 본성 중에서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측면들을 강화하고 권장하도록 사회를 어느 정도까지 설계할 수 있는지도 살펴볼 것”이라는 목적을 세웠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것을 더없이 훌륭하게 달성하였다. 지금까지 인류학, 진화심리학, 생물학 분야에 축적된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인간 본성의 다면성을 유인원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훌륭하게 분석해냈다. 이 책을 통해, 무엇보다 평등/불평등의 대립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위의 글은 이 책에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다. 또한 나는 이 책에서 도덕심, 공정성과 정의감에 대한 진화론적 토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 단어들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정립할 수 있었다(이 사유의 결과물들은 다음 리뷰인,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의 감상에서 반영될 것이다.) 그리고 공감의 힘과 유용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공감의 활용도는 실천하면서 좀 더 알아갈 작정이다. P.S. 사실 아직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줄여야겠다. 능력 부족으로 인한 표현의 한계는 점점 더 나를 죄여온다. 기실 지금 써놓은 내용도 제대로 내 생각이 반영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나의 ㅡ파편화된 생각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내지 못하는/버거워하는ㅡ 미진한 능력이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아유. 구절 “높은 지위가 주는 혜택은 상당히 많다. 그렇지 않다면 진화를 통해 그토록 무모한 야심이 발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물계에서는 개구리로부터 쥐와 닭,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높은 지위를 원하는 욕망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높은 지위는 일반적으로 암컷에게는 먹이, 수컷에게는 짝짓기 상대와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 (수컷이)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느냐 아니면 전혀 퍼뜨리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서열로 결정된다. (...) 현대 사회에서도 권력과 섹스 사이의 연관 관계를 말해 주는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남자에게 권력은 궁극적인 최음제이며, 거기다 중독성까지 있다.”(p84~p89, 부분발췌) “과학자들은 사람의 목소리에서 500헤르츠 이하의 주파수대를 의미 없는 잡음이라고 간주하는데, 더 높은 진동수를 제거하고 목소리를 여과해 보면 저음의 잡음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저음의 잡음이 무의식적인 사회적 도구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저음의 잡음을 서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에는 둘 다 단일한 저음을 내게 되는데, 항상 서열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의 소리에 맞추게 된다. (…) 196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치른 여덟 차례의 선거에서 대중의 투표 성향은 목소리 분석 결과와 일치했다. 다수의 유권자는 음색을 상대방에게 맞춘 후보보다는 자신의 음색을 유지한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p97~p98) “서열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서열 같은 것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화합을 위해서는 안정이 필요한데, 안정은 결국 잘 확립된 사회적 질서에 바탕하고 있다. (…) 서열을 분명히 하는 것은 효과적인 협력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대기업이나 군대처럼 가장 협력이 많이 필요한 인간 조직일수록 계급과 서열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민주주의보다 일련의 명령 체계가 훨씬 효율적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자발적으로 좀 더 서열이 분명하게 나누어진 형태로 전환한다.”(p102~p104) “평등주의는 상호 간의 사랑이나 소극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제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를 인식하면서 적극적으로 유지되는 조건이다. 평등주의자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매일같이 맞닥뜨린다. 이러한 평등주의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은 제도적으로 억제를 받고, 남성의 자부심은 비난을 받는다. (…) 지도력이 전혀 없이 살아가기는 힘들기 때문에 평등주의자들은 종종 한 사람에게 동등한 사람들 중에서 우선 역할을 맡도록 허락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허락한다’는 것이다. 전체 주민 모두가 권력 남용에 대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채택한 우리 혈통 특유의 사회적 도구들은 영장류 친척들과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 아무리 잘은 사회라 하더라도, 사람은 완전한 평등을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서열을 평준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는 투쟁인데, 우리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기질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평등주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단결하여 자신의 이익을 감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우리는 지도자를 뽑을 때, 사실상 “당신은 우리에게 유익한 동안만 그곳에 머물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민주주의는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두 가지 경향을 동시에 고상하게 만족시킨다. 두 가지 경향이란 권력에 대한 의지와 그것을 견제하려는 욕구를 말한다.”(p122~p129, 부분발췌) “왜 우리는 가끔 난자를 수정시키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것보다 더 많은 파트너와 섹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타고날까? (…) 그보다 훨씬 적은 횟수의 섹스로도 충분히 생식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카톨릭 교회에서 섹스는 오로지 생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섹스의 즐거움은 이러한 견해에 의문을 품게 한다. 만약 섹스의 유일한 목적이 생식이라면, 섹스가 그렇게 즐거워야 할 이유가 없다. (…) 성감대로 알려진 부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신경 말단, 예를 들어 좁은 클리토리스 한 군데에만 8,000여 개가 집중되어 있는 신경 말단은 뇌의 즐거움 중추로 직접 연결돼 있어, 우리 몸은 성욕과 성적 만족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이 섹스에 탐닉하는 첫 번째 이유는 생식이 아니라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이다.”(p153~p154) “우리 조상들은 아주 가혹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들은 밀림의 보호를 포기하고 탁 트이고 건조한 사바나로 걸어 나왔다. (…) 우리 조상은 오히려 포식동물의 먹이였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하이에나와 큰 고양이과 동물, 또는 밖의 위험한 동물들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이 무서운 장소에서 아이를 거느린 여성은 가장 취약한 존재였다. 포식 동물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던 그들은 남성의 보호가 없이는 숲에서 멀리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동작이 민첩한 남성들이 전체 무리를 보호하면서, 긴급 상황에는 어린아이들을 옮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침팬지나 보노보의 사회 제도를 고수했다면,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아무하고나 섹스를 하는 남성은 책임감이 별로 없다. 또 누가 진짜 자기 자식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쏟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남성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사회 제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의 사회 조직은 첫째 남성끼리의 유대, 둘째 여성끼리의 유대, 셋째 핵가족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결합돼 있다. 첫 번째 요소는 침팬지와 공통되고, 두 번째 요소는 보노보와 공통되지만, 세 번째 요소는 우리한테만 있는 것이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고, 성적인 질투심에 사로잡히며, 수치를 알고, 프라이버시를 추구하고, 어머니상뿐만 아니라 아버지상을 찾고, 안정적인 부부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모든 것에는 남녀 간의 밀접한 관계가 전제되는데, 동물학자들이 ‘암수 쌍(pair-bond)’이라 부르는 것이 우리의 핏속에 들어 있다. (…) 우리 종의 사회적 질서는 이 모델을 중심으로 구축되었으며, 우리 조상에게 양성이 모두 기여하면서 안전을 느낄 수 있는 협력 사회를 건설하는 기초를 제공했다.(…) 우리 조상이 유목민 생활을 접고 정착 생활을 하며 물질 재화를 축적하기 시작하자, 남성이 지배력을 행사해야 할 동기가 더욱 커졌다. 이제 후손에게 유전자뿐만 아니라, 재산도 물려주게 되었다. 양성의 몸집 차이가 남성들 간의 협력으로 인해 우리 종은 처음부터 줄곧 남성 위주의 구도가 유지돼 온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유산 상속 역시 부계를 따라 이루어졌다. 모든 남성은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이 자기 후손에게 제대로 돌아가길 원했기 때문에, 처녀성과 정조에 지나치게 집착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가부장제(patriarchy)는 단순히 후손의 양육을 남성이 도와주던 것이 확장된 제도라고 볼 수 있다.”(p170~p174) “우리 사회는 생물학자들이 ‘협력 양육’이라 부르는 것을 위해 세워져 있는데, 다수의 개인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는 사회를 말한다. 여성들이 어린아이를 함께 돌보는 것 외에도 남성들은 사냥과 집단 방어처럼 전체를 위해 서로 협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체 공동체는 들소 떼를 낭떠러지 너머로 몬다거나 거대한 그물을 끌어당기는 일처럼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협력은 모든 남성에게 생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에서 비롯된다. 모든 남성은 그러한 협력을 통해 얻은 결과물에서 각자 자기 몫을 챙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각자 전리품을 가져다줄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남성들 사이에 서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며칠 혹은 몇 주일이나 가족을 떠나야 할 때도 있다. 그동안에 자기 마누라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남성들은 전쟁이나 사냥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성의 경쟁자들 사이에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하는 딜레마는 핵가족 제도로 단번에 해결되었다. 이 제도는 거의 모든 남성에게 생식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럼으로써 공동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다. 따라서 인간의 암수 쌍은 우리 종에게서만 볼 수 있는 유례없는 수준의 협력을 이끌어 낸 열쇠라고 볼 수 있다. 가족과 가족을 둘러싼 사회적 관습은 남성 간의 협력을 다른 영장류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올려놓았다.”(p193~p194) “초기의 인간 사회는 가족과 잠재적 보답자를 겨냥하여 ‘친절한 사람이 살아남는’ 분위기를 크게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이런 의식이 생겨나게 되자, 그 적용 범위가 점점 확대돼 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하면서 인간의 도덕성과 종교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고, 가난한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돌보라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친절을 강조하는 종교는 이미 우리 인간성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던 측면을 실행하라고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종교는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능력을 더 많이 발휘하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p262~p263) “나는 도덕에 대해 다소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데,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도덕은 남을 돕거나(Helping) 해를 끼치는 것(Hurting)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H는 서로 관련이 있다. 내가 만약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사실상 그에게 해를 끼치는 셈이다. 내가 도움을 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도덕적인 결정이다. (…)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도덕성에서 최상의 관심사인 자원의 분배와 관계가 있다. (…) 항구에서 배의 입출항을 기록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알고 있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는 도움으로 보답하고,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손해로 앙갚음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두 H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불필요한 불균형을 원치 않는다.”(p289, p299, 부분발췌) “사람들은 식탁에 놓은 음식의 양 차이와 같은 자원 분배에 매우 신경을 쓴다. (…) 이 모든 것은 결국 공정성 문제로 귀결된다. 항상 그런 문제로 부각되진 않지만, 사실상 2H에 관련된 도덕적 문제이다. (…) 부당한 대우를 받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 자신이 적게 가진 것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하여, 자신이 더 많이 가지면 남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고, 결국에는 불공정이 보편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선언으로 끝이 난다. 이렇게 해서 공정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p308~p314, 부분발췌) “보복이 중간 단계들을 거쳐 어떻게 정의에 이르렀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 수전 자코비는 <야생의 정의Wild justice>라는 책에서 인간의 정의가 어떻게 변형된 보복에 기초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살인 희생자의 친척이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정의를 구할 때는, 비록 자신의 대의를 좀 더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필요에 이끌려 그런 행동을 취한다. 자코비는 어떤 문명의 복잡성을 평가하는 한 가지 척도는 고통받는 개인과 복수 충동이 주는 만족감 사이의 거리라고 믿으며, “파괴자 역할을 하는 무절제한 복수와, 정의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불가피한 통제된 복수 상의 끊임없는 긴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p314~p315) “우리는 동물학자들 사이에서 의무적 군거성 동물로 알려진 범주에 속한다. 즉, 서로 함께 모여 살아야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 한구석에 추방에 대한 깊은 공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추방은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운명이다. 성서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진화는 어떤 무리에 들어가야 할 필요성과 거기서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우리 속에 심어 놓았다. 이처럼 사회성은 우리의 뼛속까지 스며 있다.”(p329) “우리 종이 성공을 거둔 것은 의심할바 없이 어린 포유류의 창조성과 호기심을 어른이 되기까지 유지한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놀이하는 유인원’이란 뜻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별명을 가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게임과 노래와 춤을 즐기며, 소설을 읽거나 대학 강좌를 들음으로써 지식을 축적한다. 우리가 마음을 젊게 유지해야 할 필요성은 아주 크다. 인류가 연속적인 생물학적 진화에 희망을 걸 수 없다면, 이미 물려받은 영장류의 유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느슨하게 프로그래밍된데다가 진화가 제공한 젊음의 묘약을 마신 이 유산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아주 유연하다.”(p341~p342) “사람들은 더 큰 이익을 위한 자신의 희생을 거부한다. 우리는 공동 이익에 민감하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 우리의 가까운 친척들의 집단생활에서는 자본주의의 경쟁 정신과 잘 발달된 공동체 의식을 모두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최선의 것으로 보이는 정치 체제는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야 한다.”(p342, p344~p345) “어떤 정치 체제든 시민의 육체적 행복을 지키는 데 실패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가 이데올로기와 인간 행동의 불일치 때문에 붕괴한 것과 마찬가지로, 극소수의 물질적 행복을 위해 나머지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접하는 자본주의는 계속 지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인생을 지탱하게 해주는 기본적인 단결을 부정한다. 그것은 진화를 통해 발달해 왔고, 우리의 협력적인 본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평등주의의 긴 역사하고도 배치된다. 영장류 실험 결과는 혜택을 모든 구성원 사이에서 공평하게 나누지 않으면 협력이 붕괴한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인간 행동도 같은 원칙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p346) →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너도 열심히 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라는 판타지로 인해 불만스러운 분배에도 불구하고 체제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족을 사회의 분배가 아닌 개인의 노력에서 기인했다고 믿도록 유도한다 -.- “우리 사회는 아마도 우리 조상들의 소규모 공동체에 가깝게 모방할 때 가장 잘 굴러갈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나 낯선 사람들과 부딪치고, 어두운 골목에서 그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그들 옆에 앉고, 차가 막힐 때 손가락질하며 욕을 하는 대도시에서 살아가게끔 진화하지 않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응집력이 강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보노보처럼 우리 조상들도 매일 얼굴을 보며 잘 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갔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 질서가 있고 생산적이고 비교적 안정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러나 도시 계획자들은 모든 사람이 모든 아이의 이름과 집을 알았던 옛날의 공동체 생활에 가까운 도시를 설계하도록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p347) → <오래된 미래>, <작은 것이 아름답다>도 어서 읽고 정리하자. “우리는 작은 공동체에서 수백만 년 동안 빚어져 온 인간 심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이러한 심리가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 주변의 세상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 자신의 상호주의와 공감의 장으로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다른 대륙에 사는 사람들을 우리의 일부로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본성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에 기초하여 세상의 구조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종류의 사회를 건설할지, 그리고 전 세계의 인권을 어떻게 보장해야 할지 (…) ”(p348~p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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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잊어버리고 있다가 근래 들어 찾아보게 되었다. 결과는? 무척 재미있다. 수컷들이 지배하는 사회인 침팬지들은 아주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지만, 암컷이 사회의 우두머리인 보노보노들은 성을 적극 활용하며 평화와 조화를 중시하며 연대를 이끌어낸다고 한다. ㅋㅋ 유인원 사회의 현상과 인간 사회를 빗대어 서술한 부분들에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다.
이런 유인원들... 물론 유인원 뿐 아니지만, 영장류를 비롯한 동물들의 세계가 인간의 이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 가슴 아플 따름이다. 누구나 꼭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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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장류를 통해 바라본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인간의 초상'이 이 책의 부제목이다. 우리가 흔히 접했던 침팬지는 폭력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 보노보는 평화적인 성향을 지녔다. 인간은 이 두 부류의 성격을 지닌 야누스적인 존재이며, 이 책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특성을 살펴봄과 동시에 인간의 특성을 반성해보게 하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유인원의 기본적인 특성을 설명하는 첫장에 이어, 권력, 섹스, 폭력성, 친절의 장을 거쳐 양 극단의 성격에서 균형 잡기의 장으로 마무리를 하는 이 책은 작가의 뛰어난 글솜씨덕인지, 이해하기 쉽다. 이 네 부분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서로 다른 특성을 밝히는 점에서도 유용하지만, 인간의 특성을 밝히는 점에서도 유용하다.
권력적이며 폭력성을 띈 침팬지와 섹스를 좋아하며 친절한 보노보의 모습. 하지만 이 같은 모습이 침팬지와 보노보를 대변하지 않는다. 이 두 영장류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두의 성격을 지닌 존재이기에, 우리는 침팬지와 보노보로부터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깨닫고 배운다.
"강한 것이 약점이다"라는 모습을 침팬지의 2대1 관계에서 설명했는데, 일인자인 A와 이인자인 B와 그의 동조자인 C. 이 같은 관계 속에서는 A는 B와 C의 공격대상이 되곤 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도 적용된다. 자신만이 강하며, 자신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공격의 대상이 된다. 강한 것이 약점이 되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회는 혼자만의 사회가 아닌 다수의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주며 서로를 배려해주는 모습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조화와 경쟁 중 어느 것에 더 가치를 두는가?라는 물음은 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대답을 염두해 준 질문이다. 조화관계보다 경쟁관계에 돌입하는 인간이라면, 폭력성이 이면에 깔려있다. 침팬지의 서열경쟁은 필연적인 폭력사태가 일어나며, 그런 서열화는 침팬지 수컷사회의 필수요소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폭력성이 깔린 경쟁을 해야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경쟁심리가 조화심리를 넘어선다면, 폭력적인 인간의 성향이 부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침팬지보다 더 잔인하고 보노보보다 공감 능력이 더 뛰어난 우리는 양극성이 가장 심한 유인원이다. 우리 사회는 완전히 평화롭거나 완전히 경쟁적이었던 적이 없다. 또한 순전한 이기심에 지배당한 적도, 완전히 도덕적이었던 적도 없다. 순수한 상태는 자연의 방식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 적용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도 적용된다. 우리에게서는 친절과 잔인성, 고상함과 저속함을 모두 발견할 수 있으며, 때로는 같은 사람에게서도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모순덩어리이지만, 대부분의 모순은 길들여져 있다. p331
양극성이 가장 심하기에, 우리는 균형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머리로 배우는 것은 가슴으로 실천하라는 말이 있듯이, 배움으로 진화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더불어 침팬지와 보노보를 통해 인간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책이기에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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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적으로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침팬지는 권력과 피에 굶주린 가부장적 동물로 정평이 나 있다. 반면 최근에야 그 독특한 본성이 연구되고 있는 보노보는 침팬지만큼이나 인간과 가까운 유인원이면서도 평화를 추구하는 가모장적 동물로 알려져 있다.그렇다면 인간은 권력을 갈구하는 침팬지와 평화를 추구하는 보노보 중 어느쪽을 더 닮았을까. 인간과 무척 가까운 친척으로 알려진 침팬지는 이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마스코트였다. 일반적으로 침팬지는 수컷중심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데다 폭력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동물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이같은 통념에 저항하기 위해 내세운 동물은, 인간의 또 다른 친척으로 판명된, 보노보이다. 암컷중심의 에로틱하고 낙천적인 데다 평화적인 천성을 지닌 ‘히피족’이다. 지은이는 각별히, 침팬지가 권력으로 성문제를 해결하는데 반해 보노보는 성으로 권력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을 돋을새김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인간의 침팬지적 속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침팬지와 우리의 유사점은 부정할 수 없고, 은근히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단, 침팬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바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원숭이인 네 종의 유인원 가운데 가장 늦게 발견된 것은 보노보다. 침팬지와 선후를 다툴 정도로 인간과 유사하다는 이 유인원은 섹스를 매우 즐기는 영장류로 특히 유명하다. 침팬지가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데 반해, 보노보는 폭력과 갈등, 분노와 다툼을 잠재우기 위해 섹스를 이용한다. 인간은 때로 분명히 섹스에 탐닉하는 영장류지만, 보노보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다. 보노보는 풍부하고 쾌락적인 성 생활을 즐길 뿐 아니라, 동성을 포함해 가능한 모든 파트너와 섹스를 나눈다. 저자는 침팬지 연구와 함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보노보’의 존재를 인류의 진화연구에 복권시킨다. 관찰결과에 따르면 침팬지 수컷들은 홀로 있는 다른 집단의 침팬지들을 발견하면, 협력하여 그 뒤를 쫓아 제압해 죽인다. 확실히 죽이고, 나중에 이를 확인까지 한다. 이들은 또 사회집단을 이루어 다른 집단과 전쟁을 벌인다. 연구팀은 사육하던 침팬지들을 숲으로 돌려보내려고 시도했지만, 야생 침팬지들이 너무나도 사나운 반응을 보여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인 구달이 인류 최초로 발견해 보고한 내용 중에도 침팬지의 육식, 도구 제작과 활용, 집단폭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침팬지 사회에선 유아살해도 종종 자행된다. 반면 250만년 전쯤 침팬지와의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보노보는 폭력하고는 거리가 먼, 평화를 사랑하는 동물처럼 보인다. 설령 충돌 직전까지 가도 섹스를 통해 타협하고 긴장을 해소한다. 보노보는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섹스를 즐기며, 신이 인간에게만 준 체위라고 하여 ‘선교사 체위’란 별칭이 있는 정상위는 그들에게도 ‘정상위’이다. 보노보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도덕적 감성을 갖춘 동물이다. 실험결과 정상적인 보노보들은 자신들과 아무런 가족적 관계가 없음에도 심장병을 앓고 있는 보노보를 도와 지속적으로 안내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자신에게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이타적 행위는 적자생존이란 자연의 법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두 영장류는 550만년 전 인간이 갈라지기 전까지는 인간과 같은 조상을 갖고 있다. 결국 유전학적 계통수에서 침팬지와 보노보에 앞서 갈라져나갔던 인간의 본성엔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대조적인 이 두 가지 성격이 불안하게 결합돼 있다. 역사적으로 자행된 수많은 야만적 전쟁,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엽기적 범죄는 분명 침팬지의 폭력과 권력 성향을 닮았다. 반면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고, 지하철에서 취객이 떨어지면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구하는 본성도 지니고 있다. 그중 우리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의 중요한 결론은 우리가 지닌 양면성을 우리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즉 한쪽 면이 다른 쪽면 보다 더 표출될 수 있도록 환경이나 동기를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쌍방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를 만듦으로써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유럽공동체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은 후 이같은 상호의존 개념에 바탕을 두고 창설되었다. 인간은 서로의 도움에 바탕을 둔 소규모 사회에서 진화해왔는데, 저자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다시 만들어내야 하는 조건이 바로 그런 사회다. 직업과 학업 등을 위해 매일 장거리를 이동하며 주거영역과 활동영역이 분리되어 구성원간의 상호작용이 단절된 도시생활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더 나아가 범죄의 증가를 낳는다. 반면 같은 구역내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소규모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도시를 설계한다면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내부에 있는 유인원을 선택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본성의 유전적 프로그램을 맹목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전자는 실마리와 암시만을 줄뿐, 우리는 ‘즉흥 연기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세계화의 광풍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양극화 현상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지금 본성의 거울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침팬지일까 보노보일까.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더불어 살아가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지평이 열릴 터이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내안의 유인원''(이충호 옮김)에서 인간과 가까운 유인원인 ''침팬지''와 함께 ''보노보''를 등장시켜 인간의 잔인함과 공격성만을 부각시켰던 진화생물학의 낡은 인간관을 비판한다. 권력과 피에 굶주린 가부장제의 침팬지와 평화적이고 평등주의적이며 가모장적인 보노보는 모두 인간과 가까운 친척이지만 지금까지 나온 책들은 인간의 본성에서 침팬지의 ''도살자 유인원''의 측면만을 부각시켜왔다. 이 책은 그러나 인간이 성공을 거두는 과정에서 경쟁과 이기심뿐 아니라 보노보의 협력 정신과 이타주의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역설한다. 저자는 "인간은 내부에 폭력적인 침팬지와 평화를 사랑하는 보노보를 모두 지닌, 즉 이중적인 본성을 지닌 종"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지닌 양면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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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없이 책을 골랐으나 '털없는 원숭이'를 뛰어넘는 잔잔한 감동과 충격을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글들이 가득했다. 인간이 동물 보다 우월하다거나 인간이 지구에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회의를 느끼고는 있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발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유인원 및 기타 동물들이 보여준 협동과 친절, 이타주의, 공감 능력 등의 실례들은 인간만이 가진 것처럼 생각되었던 많은 덕목이 유일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만심이 얼마나 근거가 희박한 것임을 되새기게 해주었다. 이성 보다 감성을 강조하는 책들을 근래 많이 접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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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과 한 조상으로 묶을 수 있는 유인원은 침팬지, 보노보, 오랑무탄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인간과 사촌쯤 되는 침팬지와 보노보의 생활양식을 살펴보면 인류의 먼 과거와 또 현재의 많은 인간행동양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까마득히 먼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남아있는 얼마안되는 화석과 유적을 가지고 판단하기에도 추즉정도일뿐이지, 그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하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진실에 저 너머 베일에 가려 있다.
하지만 침팬지와 보노보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그냥 무시하기에는 인간과 너무나 흡사한 생김새(?)부터 시작해서 감정, 느낌을 공유하고 있어 긴 진화의 실타래를 잡고 올라갈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영원한 호기심의 동물인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을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적인 위치에 올려 놓고 그 사실을 즐겨왔다. 아니 즐겨왔다기보다는 그것이 마음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무이하게 인간만의-”라는 많은 신화는 바로 침팬지와 보노보에 의해서 무참히 깨어졌다.
가령 자기인식이나 도구제작, 미래예측등은 지금껏 인간만의 능력으로 알아왔으나 침팬지등도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며 나뭇가지등을 도구로 이용하여 굴속의 개미등을 잡아먹는다. 또 미래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현재를 인내하고 기다릴줄도 안다. 그렇다고 사람과 보노보등이 같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 같이 몸이라는 육체안에 생리적인 욕구를 담고 조건주어진 환경속에서 살아가야하는 동일한 운명으로 볼 때는 비슷한 점이 많을뿐더러 이를통해 우리의 행동에 대한 동기양식을 이해하는 렌즈의 역할도 해 주는 것이다.
가령 침팬지가 호전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가 막강하다면 보노보는 평화를 사랑하고 오히려 암컷이 수컷위에 군림하는 체제라고 한다. 그리고 그 중간지점에 인간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의 자연선택은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각각에 환경에 맞게 최상의 번식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이 저자주장이다.
유인원의 삶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한다. 가령 침팬지 수컷은 우두머리로 등극하면 다른 암컷들의 새끼들을 목졸라 살해하기도 한다. 이런 같은 종안에서의 살해는 유전자입장에서 볼 때는 타당한 결론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는 다른 수컷의 유전자가 들어있는 새끼들은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새끼를 보호하고 있는 암컷과 교미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트리게 된다.
이러한 비극을 보노보는 섹스를 통해서 해결한다. 보노보는 특이하게 이성뿐 아니라 동성간에서도 섹스를 즐기는데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함에 있어서 난교에 가깝다고 한다.(그러나 결코 부모와 자식간에는 섹스를 하지 않으며, 가까운 친척간의 섹스를 막기위해서 성인이 된 암컷보노보는 다른 무리로 떠난다) 그 결과 수컷은 무리안에 있는 새끼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새끼를 죽이지 않게 된다. 즉 자신의 새끼일수도 있는 것이다. 보노보는 이러한 자연선택을 통해 종족살해라는 비극을 피하는 현명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왠지 새끼를 살해하는 침팬지나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는 보노보는 인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침팬지나 보노보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마음 깊숙한 무의식속에는 난교와 영아살해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인간은 이러한 방법보다 다른 방법으로 종족살해라는 문제를 해결했을 뿐이다. 그것은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를 통해서 였다. 즉 남자는 자기자식이 누구인지 비교적 분명히 알 수 있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정착함으로서 영아살해를 막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물론 결혼제도는 진화적관점만이 아닌 사회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또 유인원들은 다른 무리와 대결을 통하여 같은 종을 살해하기도 한다. 이런 영토싸움은 집단내의 갈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결과를 빚는다. 이들은 다른 집단의 침팬지를 의도적으로 죽이며 적의 피에 흥분하기도 한다. 반면 보노보는 다른 집단과도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며 그 갈등을 푸는데는 역시 섹스가 주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보노보는 섹스를 단지 번식만이 아닌, 적절한 쾌락을 통해서 긴장을 완화시켜 전체 집단의 평화적으로 이끄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게 재미있는 특색인 것이다.
우리 인간 역시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고 적을 고문하는등 잔인함은 침팬지를 닮아있다. 그러나 또 한편 다른 국가와 교류하고 합력하며 평화를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보노보와 닮아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좀더 인간적이고 평화롭게 사느냐? 아니면 약육강식의 삶을 살아가느냐?하는등은 우리 선택의 몫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우리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희망으로 보면 침팬지나 보노보내에서도 평화와 애정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생각되던 친절이나 도덕적인 개념까지도 유인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침팬지는 동물원 우리안으로 잘못 떨어진 인간 아기를 다른 침팬지로부터 보호한후 인간어른에게 보내 주었다. 또 다른 보노보는 동물원에 잘못 떨어진 새를 보호하기도 하였으며 아파하고 고통받는 동료에게 다가가 감싸 안으며 위로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이타주의 혹 상호호혜주의라고 불리우는 서로 도움주고 받기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도와주고 도움받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유전자 번식에 도움이 된다는 원리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보노보를 도와주는 다른 보노보의 행동을 통해, 허약한 보노보를 도와주고서 얻을 아무런 댓가가 없다는 사실앞에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마찬가지로 최재천교수는 대담이라는 책에서 한국의 고아를 입양하는 미국인들의 행위 역시 유전자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실토한다.
어쨌든 사회적인 동물인 유인원과 인간은 종집단 안에서 서로가 의지해 가면서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다. 어느 집단에든 소속되지 못한채 홀로 있을 때의 불안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그 원초적인 불안감은 우리에게 친절과 이타주의와 도덕이 발생한 원인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지도 모른다. 진화의 실타래를 밟고 올라가보는 것은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호기심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늘의 우리를 더 자세히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내일의 인간사회를 더 낳게 개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희망과 오랜 원죄 비슷한 죄의 습성이 교차하면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
| 침팬지와 보노보라는 유인원을 통해 폭력, 경쟁심 과 화해, 평화로 대비되는 인간의 양면성을 설명한다. 또 인간 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온 동정심, 미래에 대한 인식등이 인간만의 것이 아님도 이야기한다. 프란스 드 발이라는 이 동물학자는 유인원의 습성으로 인간의 정치 활동도 설명한다. 먹이, 섹스가 가족과 사회적 구성의 중요한 인자 임을 암시적으로 주장한다. 끝에가서는 미국사회 통합문제, 시장 경제, 세계화 문제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가지 성질이 경제문제, 정치문제를 움직이는 근원적 원인이라는 작가의 인식이다. 도덕성이란 것도 이성이나 문화, 종교의 영향보다는 진화적 입장에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오랜 세월에 걸처 내재된 결과라는 주장이 이채롭다. 작가가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서구사회가 근세에 한가지 경향(침팬지적 경향)으로 경제, 정치문제를 풀어왔으며 진화론적으로 양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양자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평이한 결론이다. 진리는 간다하고 평이한 것이란 생각을 다시한번 생각하게한다. 그렇지만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지는 말아야한다. 진리가 간단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단순화하여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므로... 아무튼 흥미롭고 재미난 책이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한 분야를 깊이있게 연구하는 사람은 세상의 여타 진실을 그것으로 풀어 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요즘 말하는 통섭이론과 같은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