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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자체에 대해서 논하기에는 비트겐슈타인 및 철학에 대한 지식적인 측면이 많이 부족한 관계로 느낌과 알게된 것을 정리한다. 1. 『논고』의 저자는 언어의 엄청난 다양성을 알아차리는데 실패했으며 언어의 작은 가지 하나 -과학언어-가 언어 전체를 포괄한다고 잘못생각했다. 이것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놀이가 크리켓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크리켓이 우리가 '놀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현상들의 한 예에 불과한 것처럼 과학적 담론은 '언어'라는 이름하에 모은 무한히 확장가능한 실천들의 수집품 중 한 경우에 불과하다.45 2.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그림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설명을 제시했다. 언어의 임무는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있는 세계 내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사실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명제는 가능한 사태나 실제 사태에 대한 언어적 표상이 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 만일 발화가 그림이라는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면, 즉 만일 그것이 세계와 그림으로서의 관계를 갖지 못하면, 그 발화는 참도 거짓도 아닌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57 3. 기독교 신학자의 삼위일체라는 말을 의미결여된다고 간주된다. 언어와 대응되는 실재를 가진것 혹은 세계의 대상을 연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참이다 거짓이다를 논하기 전에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대응하는 실재가 없다라는 종교를 비판하는 새로운 무기를 가진다. 만일 그렇다고 『논고』가 반 종교적 비판서라고 한다면 가장 기괴한 방식으로 비판하는 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 글을 보자.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는 더 높은 존재에게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실증주의가 아니라 시간과 무한의 변증법을 역설하는 바르트의 정식이나 '신과 인간 사이에 무한한 질적 구별'을 강조하는 키르케고르의 정신에 가깝다. 66 4. 비트겐슈타인이 반대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그리고 침묵하고 경의를 표해야 마땅한 것들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인간의 경향이다. 71 언어의 한계에로의 자신의 온갖 충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실제로 신에 대한 모든 말은 침묵의 영역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신비적인 것이 말해질 수는 없지만 보여질 수는 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낸다. 물론 그렇게 하는 한 가지 방식은 행위, 즉 특별한 삶의 방식을 통해서이다. 91-92 우리는 이러 방식으로 행동하며 그리고 만족을 느낀다. 원초적인것은 사유가 아니라 행동이다. 122 5. 주술이나 의식의 이유는 의식적인 믿음이 아닌 그저 행동의 무의식적인 표현일뿐이다.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주술적인 사유 방식에 이끌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예정설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보인다. 믿음이 예정된다는 것을 마치 선거에서 보수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것인지 아닌지를 믿는 사람들의 차이로 여겼다. 신의 전지함이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종교적 믿음에 대해 생각한 것처럼, 종교적 믿음의 명백한 도덕적 성격을 표면화하는 것이다. 131 음....... 뭐 이런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의 주장을 모두 이해하기는 힘듭니다만 그가 언어를 놀이에 비추어 이야기 하는 점은 굉장히 인상깊습니다. 종교철학이라는 주제에 맞게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에 대해서도 소개가 되어있는데 종교 또한 이 언어와 놀이를 통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어서 집어온 책이어서 열심히 보기는 했지만 역시 어렵습니다. 일단 이녀석도 입문서이기는 하지만 더 입문서부터 봐야할듯 싶습니다. 뭐라고 덧말을 붙이고는 싶지마는 저도 이해되는게 없어서 일부분을 인용했습니다. 5번이하로는 뭔말인지ㅜㅜ 이해력 부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