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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도서 제공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세기 말에 유행했던 유머가 있다. 이 유머는 화장실의 한 낙서에서 시작된다. "신은 죽었다. -니체-" 그러자 누군가가 댓글을 단다. "니는 나한테 죽었다. -신-" 그리고 마지막 댓글이 달린다. "너네 둘 다 나한테 죽는다. -화장실 청소부-" 이 유머가 내게 니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해준 계기였다. 물론 너무 어린 시절이었으므로 책을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문장 하나가 머리에 남았다. "신은 죽었다." 유명한 철학자인 니체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신은 죽었다"라는 명문장을 남겼고, 왜 이 문장이 철학사에 있어서 이렇게 유명했을까. 시간은 흘러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지적 허영심에 가득 차 있었다. 아마 당시에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자 상위 10% 안에는 들었지 싶다. 이제 철학이라는 학문을 접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했다고 생각하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등을 찾아 읽었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그저 달달 외우기에 급급했던 그 문장들의 배경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란. 그러다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바로 니체의 대표 저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그렇게 나는 철학은 내 길이 아님을 꽤나 일찍 깨달았고(?!), 그 책은 본가 어딘가에 꽂혀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20페이지를 채 읽지 못했다.) 을유문화사에서 '을유사상고전' 시리즈를 출판하면서 양질의 철학서들이 나오고 있다. 이번에 새로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출간되어 좋은 기회로 다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어려운 내용이었다. 수많은 비유와 아포리즘으로 가득해 사전 지식 없이 이 책을 이해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은 유튜브에서 이 책과 관련한 명강의를 클릭 몇 번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인터넷에도 이 책을 쉽게 풀어주는 다양한 글이 있다. 그래서 내게도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위버멘쉬(Übermensch)'이다. (≈ Over + man) 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긍정할 줄 알기에 고통마저도 자신의 성장 동력으로 삼으며, 외부의 힘이나 절대자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자를 함축한 단어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니체는 책의 주인공 격인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위버멘쉬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다양한 예를 들어 언급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은 현재의 삶보다 내세를 더욱 좋은 것으로 보는 이원론적·종교적 가치를 뒤집고, 현세의 삶과 나 자신에 집중하는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강력한 표현이다. 어쩐지 강력한 표현만 남고 그 속뜻은 다들 잘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 듯하지만 말이다. 위버멘쉬는 어떤 완성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고통을 웃음으로 극복해낸 위버멘쉬가 되었더라도, 그 자리에 머물면 다시 안락한 삶에 안주하는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이 되기에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부단한 과정이 필요하다. 니체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극복해서 힘을 손에 쥐었을 때, 그것을 내려놓고 다시 다른 무언가를 극복하는 삶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니체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로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자 동시에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문장을 썼다. 모든 이들이 위버멘쉬의 길을 걸었으면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일종의 도발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위버멘쉬라는 이상향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최소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니체의 저서를 쉽게 풀어놓은 책들이 많다. 그러나 원문이 가지는 깊이와 사색의 순간까지 쉽게 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책은 곁에 두고 조금씩 곱씹어가며 읽어보는 맛이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궁금해질 때, 내가 문득 인간말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길 때, 이 책은 등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을유문화사 #을유사상고전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니체 #철학책 #신은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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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지원]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을유문화사 #을유사상고전 -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가 살기를 바란다.” ㅡ 이것이 언젠가 위대한 정오에 우리 최후의 의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ㅡ [p.110] -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다.[p.199] - ㅡ 좋은 취향도, 나쁜 취향도 아닌 것, 하지만 나의 취향, 내가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도 감추지도 않는 것이다. “이것이 ㅡ 그러니 나의 길이다. ㅡ 너희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나 이렇게 내게 “길이 어딘지” 묻는 자들에게 대답했었다. 바로 그 길 ㅡ 그런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p.252] - 춤을 한 번이라도 추지 않은 날은 없는 날이 되기를! 또 큰 웃음 하나 담겨 있지 않은 진리는 우리에게 거짓이라 불리기를![p.270] - 바로 가장 보잘것없는 것, 가장 약하고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 소리, 숨결 하나, 순식간, 찰나의 순간 ㅡ 최고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이런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조용히 하라![p.349] ✍🏻실질적으로 읽은 올해의 첫 책이다. 많이들 그렇듯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미루고 있던 수많은 책들 중 한 권이었다. 니체는 이 책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서사시적 형식을 통해 위버멘쉬(초인)와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에 대해 말한다. 예언자적 화자인 차라투스트라는 시를 읊듯 모호하게, 그리고 명령하듯 이야기한다. 영원회귀, 윤회가 아니라 매일 똑같이 살아도 좋을 정도로 살아갈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니체는 니힐리즘을 넘어서는 삶의 형식을 창조할 것, 그래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 가볍고 긍정적으로 살 것을 권고한다.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이자 해체의 철학자로 모든 규율을 부수기 위해 노력한 자다. 현대사회는 니체가 예언한 대로 무엇 하나 고정되는 가치가 없고, 기존의 질서들은 믿을 수 없게 됐다.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곧, 절대적 기준, 도덕과 진리의 종말이다. 다만 우리는 살아 오던 관성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믿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귀를 믿는다. 니체가 정의한 인간의 위치로 끝없이 흔들리고 답이 없는 생의 이유를 짐작한다. 우리는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린 하나의 다리다. 인간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말에 진동하는 삶을 받아들이고자 각오해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계속해서 실패하고 시험 받는다. 이렇듯 차라투스트라 역시 끊임없이 시험 받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리고 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계속된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리듬에 춤추며 물구나무를 서라! 외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무거운 몸을 끌어올려본다. 그런 과정에서의 실패와 고통은 필연적이다. 이를 견뎌낸 자만 웃을 수 있고 깊은 심연 위에서 웃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고귀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 춤을 춘다는 것은 무게와 함께 균형을 잡는 것이다. 웃는 것은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위에 서는 것! 다만 초인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인은 그저 찰나의 순간 이뤄지며, 차라투스트라는 그 사실을 깨달은 자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지속적인 낙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순간의 용기를 권한다. 아이와 같은 천진함과 순수함으로 무한히 시도해볼 수 있는 모습을 꿈꾼다. 자정에도 춤출 수 있는가? 긍정은 결코 고정되지 않기에, 인간은 극복해야 하는 무엇인 것이다. 깊이를 극복해야 높이로 갈 수 있으니, 모든 교차점 위에 우린 계속 서있어야 한다…! 이를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연결 지으면, 삶의 찢어짐까지 포함하는 긍정의 철학이 되는 듯하다. 디오니소스는 고통을 제거하지 않고 고통까지 축제로 만들었다. 디오니소스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신으로 양 극단을 반복하는 신이다. 삶을 설명 없이 긍정할 수 있는지? 이는 차라투스트라가 실패했듯, 전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쉽게 읽히지 않았고, 어쩌면 너무 소비해버린 문장들 탓에 이시대의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결국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고민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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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서평 >>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어렵고 난해한 철학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번역본은 니체 철학 연구자인 홍사현 교수가 원전의 문체와 리듬을 살려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이론서라기보다 한 편의 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읽힌다. 니체는 논리를 차근차근 설명하기보다 비유와 상징으로 독자를 생각의 바다에 빠뜨린다.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니체의 사유를 툭툭 던진다.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만날 때 나름대로 해석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책이었다. 읽는 동안 문득, 부처와 예수의 말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초역’ 책들을 읽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인간의 언어를 빌렸지만, 어딘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의 말처럼 빛나는 문장들. 니체의 문장 역시 설명보다는 질문에 가까웠으며, 이해보다 공감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이야기는 산속에서 은둔하던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으로 내려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곡예사, 거지, 교황 같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인간, 삶, 죽음, 가치에 대해 말한다. 그 과정에서 니체 사상의 핵심인 ‘위버멘쉬(초인)’가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초인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 아니다. 낙타–사자–어린아이로 이어지는 인간 정신의 변화처럼, 초인은 스스로의 삶을 시험하고 기존의 기준을 의심하며, 마침내 놀이하듯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질문이 생긴다. 과연 위버멘쉬는 일반적인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일까. 즐기듯 살아가고,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삶은 모두가 꿈꾸지만 쉽게 닿지 못하는 정상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책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불가능해 보이는 그 삶을, 나도 살아보고 싶어진다. 이 책은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독자를 자극한다. 고통과 실패를 피하지 말고 감당하라니, 회피에 익숙한 현대인에겐 또 다른 숙제였다. 읽는 동안 많은 문장이 퇴적물처럼 쌓여갔다. 밀려가는 것 하나없이 마음과 머리 속을 가득 채운다. '나는 과연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고 있는가.' 이 책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긴 시간을 소요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몸소 경험하게 한다. 정답을 주지 않는 대신, 본인의 삶으로 돌아가 생각하게 만드는 책. 새해의 시작이나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싶은 순간에, 이 책을 펼쳐보시길 추천한다. >> >밑줄_p21 보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위버멘쉬가 바로 이 바다이며, 그 안에서 너희들의 큰 경멸은 가라앉아 사라질 수 있다. >밑줄_p101 많은 사람이 너무 늦게 죽는다. 그리고 몇몇은 너무 일찍 죽는다. "제때에 죽어라!"라는 가르침은 여전히 낯설게 들린다. 제때에 죽어라, 이렇게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친다. 물론, 한 번이라도 제때에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결코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야 할 일이다. >> 이 서평은 을유문화사(@eulyoo)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프리드리히니체 #을유문화사 #을유사상고전 #고전문학 #니체 #위버멘쉬 #신간도서 #책추천 #고전추천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서평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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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묻는다, “너는 네 삶의 주인인가?” 을유문화사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쉽지 않은 책이라고 익히 후기들을 읽고 시작했다. 니체가 10년에 걸쳐 완성한 이 철학 산문시는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을 담고 있어 역시 어렵게 다가왔고, 설교나 논증이 아닌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채워있다. 🔖용감하고 흔들리지 않고 삐딱하고 거칠기를, 지혜는 우리에게 그러기를 원한다. 지혜는 여인이고 언제나 전사만를 사랑한다. 58p 🔖이슬은 밤이 가장 깊은 침묵 속에 있을 때에야 풀잎 위로 떨어지는 법이다. 194p 🔖큰 경멸을 하는 자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337p 페이지터너와 같은 책을 아니지만, 이 책의 구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졌다.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독백, 우화가 짧은 단락으로 나뉘어 있어 매일 짧은 단락들을 필사하며 사유하기 좋은 시간들이었다. 각 단락은 독립적이면서도 ‘신의 죽음’ 이후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수렴된다. 니체는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변화하는 정신의 3단계를 보여주며, 기존의 도덕과 관습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가치를 만들어가라고 제안하고 있다. 기록하는 해를 만들기로 했던 새해다짐 속에 한 단락씩 읽으면서, 오늘 내가 선택한 것들이 진정 나다운 것인지 질문하게 되었다.🖊️관성적으로 살아가기 쉬운 시기, 이 책은 불편한 각성을 선물한다.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프리드리히니체 Thanks to @euly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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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을유문화사로부터 책을 지원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짧게 돌아다니는 니체의 글들을 참 좋아했다. 니체의 글에서 파생된 책들, 일력과 필사 책, 그리고 온라인에 떠다니는 명언들. 그럼에도 원전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아직까지도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좋은 것은 가장 마지막에' 취하고 싶어 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까지 안 읽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실은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하며 가장 처음으로 산 책이 을유사상고전의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이었지만, 이 역시 아직도 새 책인 상태로 책장에 꽂혀있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외에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등의 훌륭한 고전을 꾸준히 내고 있는 을유문화사의 브랜드 「을유사상고전」에서 드디어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나왔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책 뒤표지에 강조한 문구들을 보니 그만큼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던 걸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특히, '원전의 문체와 운율감을 살린'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그동안 파편적으로 읽었던 니체의 문장을 한 번도 산문시라고 여겼던 적이 없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 니체의 의도에 맞춘 읽기와 사유에 집중한 번역과 편집 * 저자의 사유에 다가가도록 돕는 해제와 옮긴이의 말 * 니체 철학 연구자의 '원전의 문체와 운율감을 살린' 완역본 / 차라투스트라는 삼십 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고향과 그곳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고독을 즐겼으며, 그렇게 십 년을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마침내 변화했다. ─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는 아침놀과 함께 일어나 태양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보라! 나는 마치 꿀을 너무 많이 모은 꿀벌과도 같이 나의 지혜에 물려 있다. 내게는 내밀고 있는 손들이 필요하다. 나는 선사하고 싶고 나누어 주고 싶다. 그리하여 사람들 가운데 지혜로운 자들은 또 한 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사람들은 또 한 번 자신들의 부유함을 기뻐할 때까지. 그러기 위해 나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태양 그대가 저녁마다 그리하듯이 바다 너머로 가서, 심지어 하계에도 빛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 너무나도 넘쳐 나는 천체여! 내가 내려가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하듯, 나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몰락해야 하는 것이다. (…) " ─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P.17,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몰락한 차라투스트라가 군중을 향해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여러 편의 철학적 산문시로 이루어져 있다. 원전이 되는 책을 읽으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진리 ─어쩌면, 진리가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만 유효하는 그런 말이겠지만─에 최근에 접한 추상 예술들이 떠오른다. 추상화 그림을 보고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가 다시 보았을 때에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프리스타일 연주를 들으며 멜로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처럼, 니체의 철학도 허공에 떠있다. 신은 죽었고, 차라투스트라의 말은 때론 절대적 진리처럼 다가오다가도, 어느 순간 반박하고 싶어지기도, 그리고 지금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먼 미래에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렴풋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철학'이나 '사상'이란 키워드에 여전히 겁이 많은 편이지만, 번역가의 노력 덕분에 물 흐르듯 읽힌 책. 더 나아가 처음으로 원전을 읽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간이 흐르면 꼭 다시 펼쳐보고 싶은 고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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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번에 ‘정복’할 자신이 없었다. 예전에 몇 번 들춰보다가, 유명한 문장 몇 개만 잡고는 결국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책이 어렵다는걸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문장을 마주하는건 완전히 다르다. 글자는 읽히는데 의미가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느낌… 그게 차라투스트라 책에서는 자주 온다 ㅠㅠ 그래도 이번에 을유문화사 신간을 다시 집어든건, 이번엔 어떻게 나왔을까? 읽힐까? 호기심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첫인상은 조금 달랐다. 뜻이 술술 이해된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나에게는 어려웠다. 그런데 문장이 이상하게 ‘입에 붙는다’는 느낌은 있다. 니체가 이 책을 단순한 철학 설명서가 아니라 어떤 ‘시’나 ‘연설’처럼 썼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 번역은 그 결을 꽤 살리려 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예전처럼 첫 장부터 겁먹고 멈추기보다는, 일단 페이지가 넘어갔다. 물론 난해함은 그대로다. 비유와 상징이 계속 튀어나오고, 갑자기 하늘로 붕 떠버리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보통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한다. 그 자리에서 붙잡고 씨름하다 지쳐 덮거나, ‘모르는 채로’ 일단 꾸역꾸역 글자를 읽어가며 넘어간다. 을유판은 주석이 없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후자를 선택하게 됐다. 의외로 이게 나한테는 장점이었다. 주석이 있으면 자꾸 참고 자료를 따라가다가 흐름이 끊기는데, 주석이 없으니 '일단 가자' 모드로 읽게 된다. 대신 그만큼 ‘나중에 다시 정리할 시간’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중'을 담당해주는것이 책 뒤에 있는 해설과 옮긴이의 말이다. 나는 원래 해설을 먼저 안 보는 편인데, 중간쯤에서 진짜 길을 잃은 느낌이 들어서 뒤를 펼쳤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아까는 그냥 지나쳤던 문장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해설이 모든 문장을 친절하게 풀어주는 건 아니다. 그런데 큰 줄기를 잡아주니까, 내가 어디에서 헤매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그다음부터는 ‘이해’가 아니라 ‘연결’이 조금씩 생겼다.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이 책은 위로를 주는 책이라기보다, 내 안의 변명과 안락함을 들춰낸다. '너는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 같은 말이, 멋있게만 들리는 게 아니라 묘하게 따끔하다. 내가 요즘 피하고 있는 것들, 적당히 미뤄두고 넘어가고 싶은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읽다가 가끔 멈춰서 생각을 곱씹어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친절한 입문서'라기보다는 '흐름을 타게 해줬다'에 가깝다. 문장이 생각보다 읽히고, 본문에 몰입하게 만들며, 뒤쪽 해설이 그 몰입을 현실적인 이해로 한 번 더 끌어올려 준다. 완벽히 이해하고 끝내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삶이 답답하거나 머릿속이 시끄러운 날, 아무 페이지나 펼쳐 한 문장씩 읽게 되는 책에 더 가깝다. 나는 아직 다 알지 못하고, 솔직히 이해도 많이 안된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펼치고 싶고, 그 뒤에는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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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책이면서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 니체의 대변인이자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 새로운 사유를 알리는 자.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읽었다. 수수께끼 같은 그의 말에는 공부가 필요했고, 중간부터 413쪽의 해설과 함께 읽었다. . 표지의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이다. 십자가 무늬 옷을 입은 왼쪽의 해골은 평온한 얼굴로 서로 엉켜있는 남자, 여자, 아이, 노인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해골은 몽둥이로 보이는 둔기를 들고 서 있지만,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아, 죽음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구나. 죽음은 삶을 지켜보고 있다. 언제나 곁에 있다. 하지만 삶의 온기를 나누는 이들은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공포에 떨며 움츠러들지 않는다.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는 듯, 우리는 너보다 강하다는 듯. .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죽음을, 자유로운 죽음을 칭송하며 권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 오는 바로 그 죽음을 권한다. (101쪽,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 표지도 책과 글의 일부임을, 표지야말로 글의 얼굴임을 다시금 느낀다. - 나는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20쪽,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외치며 우리에게 초인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신은 죽었으니, 우리는 가만있을 수 없다고. 신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지 대중과 우리에게 묻는 듯 보인다. . 위버멘쉬, 즉 초인. 이는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을 말했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는 글을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 그들이 그렇듯, 니체도 삶의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반복하여 말한다. 자기 삶은 스스로 정해라, 삶을 긍정해라. 이것이 나의 삶이다. . 너, 바보여, 그래도 이제 헤어지면서 나 이런 가르침을 너에게 주겠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 그때는ㅡ그냥 지나가야 한다!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고, 그 바보와 큰 도시를 지나갔다. (231쪽, 지나쳐 가기에 대하여) . 입에 거품을 문 바보는 그토록 혐오하던 염치를 모르는 자들, 소인배들의 도시를 떠나 차라투스트라를 따라나선다. 나도 이 바보와 다를 게 없구나, 어쩌면 바보만큼의 용기조차 없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했다. 도시를 떠나 다리 너머의 초인에 닿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팔과 다리가 자유로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 모든 글이 추상적이지만 굉장히 직설적이어서, 깊게 박히는 외침을 되뇌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을 깊게 이해하라는 숙제를 얻었다.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삶은 힘들 수밖에 없겠구나. 이 돛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아는 자만이 또한 어떤 바람이 좋고, 또 순풍인지를 알 것이다. (345쪽, 그림자)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프리드리히니체 #을유문화사 #을유사상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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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프리드리히니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책입니다. 초인, 영원회귀, 신의 죽음이라는 사상을 통해 독자에게 도전과 해방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 책 속의 말 씨앗 > 1. “신은 죽었다.” 2.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3.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운명을 사랑하라.” 4.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5.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걸쳐진 밧줄이다.” 6. “영원히 되풀이되는 삶을 사랑하라.” 7. “가장 깊은 고통 속에서 가장 큰 기쁨이 태어난다.” 니체는 이 책을 철학 소설의 형식으로 썼습니다. 차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를 등장시켜 그의 설교와 대화를 통해 사상을 전개합니다. 문체는 시적이고 은유적이며, 단순한 철학 논문이 아니라 문학적 울림을 지닌 작품입니다. - 신의 죽음: 기존의 기독교적 가치와 도덕이 더 이상 인간을 지탱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허무주의의 시작이자 새로운 가치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 초인(Übermensch): 인간은 단순히 현재 상태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고 창조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초인은 자기 운명을 사랑하고, 삶을 긍정하는 자입니다. - 영원회귀: 모든 사건과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사상입니다. 이 반복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진정한 힘의지를 발휘합니다. 니체의 메시지는 단순히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그는 독자에게 “당신은 지금의 삶을 영원히 반복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자기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자기 긍정과 창조적 의지를 실천하라는 도전입니다. 또한 차라투스트라의 설교는 마치 현대의 자기계발서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깊이는 훨씬 더 심오합니다. 단순한 성공이나 행복을 넘어, 삶 전체를 긍정하는 철학적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여전히 허무주의와 가치 혼란 속에 있습니다. 니체의 사상은 “새로운 가치 창조”라는 메시지로 여전히 유효합니다. 특히 자기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말은 오늘날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쉽지 않은 책입니다. 그러나 삶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 극복을 꿈꾸는 분들께 반드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철학적 난해함을 넘어서는 순간, 이 책은 독자에게 삶을 긍정하는 가장 강력한 힘을 선물합니다. 이 서평은 을유문화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저의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북러버의독서노트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을유문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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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먼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니체를 잘 알지 못하는 내가 아는 것은 제목과 ‘신은 죽었다’는 문장뿐이었다. ‘신’은 추상적인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인격체인 '신'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올림포스나 에덴, 극락 등에서 살아간다고 이야기되는 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인격이 있는, 인간과 닮았다는 신을 굳이 지울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특정한 신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라면 이 문구가 이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두 번째 생각은 특정한 신이 아닌, 인간이 숭배하는 추상적인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말을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생각보다는 그럴듯했지만 여전히 정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얄팍한 상상력으로는 그 이상 생각해낼 수 없었다. 답을 찾으려면 고민보다는 책을 읽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아, 이쯤에서 생각을 마무리하고 책장을 펼쳤다. #연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