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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태생인 라파르그는 프랑스계 유대인 어머니와 스페인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소 혼혈임을 자랑으로 여겼다 한다.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하다 마르크스의 딸 '라우라'와 엥겔스를 증인으로 세워 결혼한다. 69세 나이에 아내 '라우라'와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가족사와 이력은 저자를 궁금해하기에 충분하다.
라파르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대중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대중 연설을 잘한 그의 사상은, 물론 종국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만 그렇다고 장인이 주장하는 노동자의 권위와 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본주의하에서 노동 자체를 금지하자는 주장을 편다. "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성직자, 경제학자 그리고 도덕가들은 이처럼 정신 나간 생각에 반대하기는커녕 노동의 주위에 성스러운 광채를 드리우고 있다. (27쪽)" 온갖 지적 타락을 가져오는 원흉이며 키우는 말보다 못하다 주장한다.
책 전체에 흐르는 주장은 자본주의하에 노동은 길들여 지는 것이며, 노동을 거부하자고 한다. '노동을 강요하지 말자'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금지를 외쳤다. 일할 권리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 노동을 거부하자는 주장! 16시간을 일하던 그 당시, 8시간 근무를 법제화를 위해 애썼던 라파르그. 실제 본인이 생각하는 노동은 딱 3시간이며 나머지 시간은 게으르게 먹고 마시며 창조적인 일을 하자고 주장한다. 어쩌면 이 소책자가 라파르그가 감옥에 있을 때 쓰인 것이 이해 되는 게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저자는 그를 추종하는 관리자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책을 썼다고 한다
썩 기분 좋은 독서는 아니었다. 라파르그가 주장을 던졌던 이 당시 시대와 지금 시대를 비교하면 지금이 얼마나 뛰어난 생산 기술 발전을 이룬 사회이며 노동자의 숙련도는 또 얼마나 뛰어난가.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자신이 쓰고도 남을 만큼 여러 소비재와 필요 재화를 만들기 위해 부끄러울 만큼 많은 시간을 노동과 노동을 위한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자본가는 또 얼마나 많이 생필품 소비를 부추기며 노동의 굴레를 벗어 나지 못하게 하는가.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깊숙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하고 행동할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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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노예들’을 위한 권리 선언 -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이솝 우화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개미는 한여름에도 열심히 일해 차가운 겨울을 넘길 식량을 모았다. 베짱이는 개미 곁에서 일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다가 한겨울에 먹을 게 없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 겨울이 오자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가 노래를 부르는 대신 음식을 구걸한다. 열심히 일한 자는 살아남고, 일하지 않은 게으른 자는 비굴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진리(?)’가 이 이야기에는 담겨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개미가 교대로 움직이며 일한다는 건 이미 밝혀졌다. 개미가 결코 부지런하지 않다는 얘기도 개미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온다. 개미들은 서로서로 일을 나누어 하니 적은 시간을 일하고도 생산량이 많은 구조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개미가 하루 종일 일을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개미를 쉬지 않고 일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답다. 개미 사회에서 게으른 개미라도 발견한다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희생양을 만들 것이다. 베짱이는 어찌 보면 개미를 하루 종일 일하는 존재로 규정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희생물인지도 모르겠다. 베짱이는 노래로 노동을 했다는 반론은 사실 상당히 진부하다. ‘노동’이라는 맥락에서 베짱이를 보는 건 동일하기 때문이다. 개미는 개미대로 자기 삶을 살았고, 베짱이는 베짱이대로 자기 삶을 살았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모든 생명들이 개미처럼(?) 일만 한다면 생태계는 어떻게 될까? 인간 사회에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일만 하고 있다면 사회는 과연 제대로 돌아갈까
폴 라파르그가 지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8)에는 ‘현대의 자발적 노예들과 고결한 미개인들에게 고함’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은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온갖 형태의 지적 타락을 가져오는 동시에 모든 생명체를 기형으로 만드는 원흉”(28쪽)이라고 이야기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들은 노동을 경멸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노동은 노예의 표징이었다. 자유인이나 귀족들은 한가한 마음으로 신이 보내준 선물인 게으름을 만끽했다. 노동하는 사람이 노예라는 생각은 노동을 신성한 행위로 인식하는 자본주의 철학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철학자들은 노동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과업으로 보았다. 막스 베버가 말한 대로 자본주의는 노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근간으로 세워진 체제였다. 근대사회의 풍요로움을 부지런한 노동의 결과로 볼 만큼 노동은 자본주의를 이끄는 핵심으로 여겨져 온 셈이다.
라파르그가 자본주의 노동(지은이는 자본주의 초기를 산 인물이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데는 노동을 할수록 더욱 가난해지는 노동자들의 실제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노동자들은 기계가 노동자들을 대체하는 산업혁명 속에서도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을 해야 했다. 기계는 노동자를 쉬게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을 늘린 것이다. 지은이는 빌레르메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것은 일이나 작업이 아니라 고문이며, 게다가 6~7살 난 아이들에겐 고통일 수밖에 없다. 이 매일 매일의 기나긴 고문이 방적 공장 노동자들을 소진시키고 있다.”(42쪽) 6~7살 어린아이까지 노동 현장에 나서는데 정작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간다. 고문과 고통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을 하니 나라는 부유해진다. 하지만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예전보다 먹고 살 만해지지 않았느냐는 말로 이 상황을 호도하지는 말자). 도대체 왜 이런 모순이 벌어지는 것일까
하지만 상품의 과잉 생산과 제조 과정에서의 질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을 달라! 일을 달라!고 애원하며 시장을 가득 메웠다. 이처럼 일손이 엄청나게 남아났기 때문에 이들은 열정을 억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갑작스런 폭발이 빈발하게 되었다. 즉 일단 일할 기회가 생기면 모두 와 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에 대한 게걸스러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12~14시간의 노동을 요구한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노동에 대한 이러한 집착을 다시 부추길 수 있는 음식물 하나 얻어먹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쫓긴다. 매년 철 따라 모든 공장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한 생물체를 파괴하는 과잉 노동 다음에는 두 달 혹은 넉 달 동안의 절대적인 휴식이 이어진다. 그리고 일을 멈추면 당연히 그나마 벌어들이던 약간의 수입도 끊기게 된다. 노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쁜 버릇은 마치 악마처럼 노동자 가슴에 착 달라붙어 있다. 노동의 요구는 다른 모든 자연스런 본능을 억누르고, 사회가 요구하는 일의 양은 필연적으로 소비와 원자재 공급에 제한된다. 그런데 왜 1년 동안 할 일을 반년 만에 해치우나?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 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빼앗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 (68~69쪽)
노동자는 다음 날 다시 노동할 힘을 얻기 위해 오늘 노동을 한다(물론 이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다. 자본은 자본가가 갖고 있으니 노동자는 자본가를 ‘신’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10시간이든 16시간이든 그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노동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몸은 망가진다. 자본가들이야 대체할 노동력이 많으므로 노동자의 건강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지은이는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배하지 않고, 또 6개월 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 일하도록 하지 않나?”라고 묻고 있다. 자본가는 생산을 중시한다. 대량 생산으로 최대한 이익을 남기려고 한다. 당연히 짧은 시간에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을 취한다. 그러다 상품이 남으면 손해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손해를 만회하는 길이 있다.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제국주의로 가는 길이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나아가는 이유는 이렇듯 남아도는 생산품을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밖으로 뻗어 나간다.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제압해야 하니 자연 무기 산업이 발달한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군수산업만큼 이익이 남는 장사가 어디에 있는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무시한 채 노동자들이 부지런하게 일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를 편다. 기업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덤이다. 사회경제가 좋지 않으면 ‘귀족노조’니 하면서 으레 노동자들을 탓하는 언론들을 생각해 보라.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인 노조 활동을 귀족노조로 매도하며 비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자본의 논리가 깊이 배어 있다. 그들은 자본가가 노동자들보다 많은 이윤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노조 활동을 일하기 싫어하는 노동자들의 게으름으로 치부한다.
폴 라파르그는 자본가와 그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에 맞서 노동자들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세기 동안이나 굶주림이 이들의 내장과 뇌를 산산조각 내왔다. 오! 게으름이여 이 오랜 고통에 자비를 베푸소서!”(84쪽)라는 말에 게으름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게으름은 노동의 고통을 치유하는 단서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게으름은 노동 자체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그는 노동 시간을 3시간으로 줄여도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생산력에 인류가 도달했다고 이야기한다(1880년대에 이런 얘기를 했으니 지금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노동 시간이 준다고 해서 생산력이 주는 건 아니라는 얘기겠다. 여기에는 기계가 노동을 대체할 거라는 믿음이 숨어 있다. 즉, 지은이는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기계로 대체하면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본가들의 윤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은이는 노동자들이 행사하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자본가들과 대항할 윤리적 단서를 찾는다. 잘 알다시피 지은이의 이 주장은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무한 경쟁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게으름’은 범죄와 마찬가지로 인식된다.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은 ‘무한 경쟁’이라는 신화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은폐하는 데 급급하다. 이 책이 발간된 지 13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자본주의는 공고한 체제로 사람들을 홀리고 있다. 자기 몸을 혹사하면서 성과를 이루려는 욕망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로잡혀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부익부 빈익빈 현상만 더욱 깊어졌을 따름이다. 자본에 대한 저항 자체가 체제 내부로 수용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자본주의 사회를 ‘경쟁하며’ 사는 나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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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자발적 노예들과 고결한 미개인들에게 고함" 이 책의 부제는 도발적이다. 라파르그의 생애처럼. 문제는 그 도발적인 메세지가 대중에게 환기될 것인가 인데, 이 책이 출판될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 시민의 이목을 끄는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 라니? 백수로 놀겠다는 건지, 벌만큼 벌었으니 은퇴하겠다는 건지, 게으르게 일하라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의 지도자께서 주60시간 이상의 노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와중에 국민들이 게을러 지면 되겠냐고 말이다. 라파르그가 주장하는 '노동자의 게으름'이란 자본주의의 무제한적인 욕망에서 기인한 인간 노동시간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동시간과 생산성이 정비례하리라는 근대적 사고를 정면반대하고 노동효율성을 재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로 노동시간을 규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19세기 말에 이미 주장하였으니 이 얼마나 발칙한 '인간'인가 말이다. 또, 골수 '마르크스 주의자'인 그가 인간의 노동을 경시하고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역설하니 이 또한 얼마나 전복적인가!
그의 주장은 시대를 압도한 선견지명이다. 그의 탁견은 인간 복지의 등대이다. 약 100년 후에나 이 땅에서 이슈가 될 일을 이미 그는 한 권의 책으로 절창하고 있다.
'노동숭배 지도자'를 모시고 있는 2023년, 오늘 우리 모두 이 책을 탐독하여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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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에 집필 한 소책자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통렬하다 대한민국의 노동조합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채찍질을 가할 수 있는 내용이며 임금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내용 이기도 하며 레저에도 양극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중요한 지침서 이기도 하다. 다만, 전문적인 사회용어가 난무하고 프랑스 역사가 색 다르므로 읽기에 약간은 난잡하여 아쉽다. 재판에서는 양이 길어지도라도 친절하게 쓰인다면 많은 이들이 생각을 전환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잠시라도 생각 해 보는 하루다. * 임금을 바라보지 말고 노동을 바라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