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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생문’ 일본어로 라쇼몽은 인간의 에고이즘을 적날하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서 에고이즘은 굶주림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진 인간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한다. 살기 위해 악행을 저지른 죽은 여편네, 노파, 그리고 하인 등이 등장하는데 각각의 에고이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실존이라는 문제 앞에서 ‘에고이즘은 정당한가’라는 물음과 함께, 선과 악은 실존이라는 문제 앞에서 무기력함을 내비치고 있다. 나생문은 짧은 단편소설이다. 물론 책의 내용도 금방 읽을 수 있을 만큼 짧다. 하지만 다른 소설에 비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래서 나생문을 읽기 위해 배경지식이 필요 한 것 같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내 자신도 살기 각박한 현실 속에 비도덕적인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지진, 폭풍, 큰불, 황폐해진 땅에서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또한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라는 말이 있듯이 비도덕적인 행동을 계속하다 보면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며 그 행동을 합리화 시킨다. 이 처럼 류노스케의 단편소설은 인간의 비도덕적 행동과 현실을 짧은 글 안에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다. 사회속에서 지금의 우리 모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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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생문’ 아니 ‘라쇼몽’은 일본 헤이안 시대의 도쿄에서 일어난 한 사내의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이고 잔인하다면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려 놓았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 작품은 그것을 돈으로 그려 놓았다. 나라가 크게 흔들렸던 헤이안시기 일본에서 일하던 집에서 마저 쫓겨나 돈을 벌 수 있는 수단도 그리고 현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돈 조차 없는 한 사내가 우연하게 비를 피하다 마주한 충격적인 사실은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미간을 찌푸리게 할 수 밖에 없다. 사내는 노파가 하는 일에 매우 성을 내며 뭐하는 짓이냐 몰아친다. 하지만 노파의 사정을 읽으며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 일은 소름끼치고 잔인한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하는 일이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있기에는 당장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노파는 남이 손가락질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변호하는 노파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노파의 너무나 현실적인 말에 실망과 함께 노인이 하는 일에 느꼈던 증오가 함께 솟아남과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사내 또한 굶어 죽거나 혹은 나쁜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장이라도 굶어 죽을 마당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당장에 필요한 것은 먹고 살 돈이다. 사내는 ‘정말 그래?’라는 말과 함께 노파의 옷을 벗겨 그것을 가지고 도망가 버린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은 ‘하인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로 끝이 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파가 하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몸을 떨 것 이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하여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가?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윤리관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죽을 만큼 배고프지 않고, 죽을 만큼 추위에 떨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이 글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으리라. 하지만 당장에 입에 넣을 음식을 살 돈도 그 음식을 훔칠 힘도 없는 노파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힘을 안들이고 얻을 수 있는 것을 파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노파의 상황을 이해하며 노파가 하는 일을 우리의 내면에서 합리화 시킨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노파의 상황이 우리와 비슷하여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에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몸뚱이 하나 누워 잘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지배하는 현실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좋아하는 일이 아니지만 돈을 위해 해나가는 현실을 노인의 상황과 오버랩 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상황, 이것은 ‘나생문’ 내부의 상황과 ‘현실’이라는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노파의 모습은 우리를 비추고 있다. 하인 이었던 사내는 윤리관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사내는 처음에 노파가 하는 일에 크게 분노한다. 분노하다 못해 노파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무기로 위협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 변하였는가. 사내는 현실적인 노파의 이야기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굶어 죽을 상황이니 노파의 옷을 벗겨 도주하는 도둑질을 하게 된다. 아니, 정확히 그 하인이었던 사내가 노파의 옷을 벗겨 그것을 팔아 살아남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도둑질을 선택하였다. 결국엔 자신이 먹고 살기를 선택한 것이다. 윤리관을 벗어나 돈을 선택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헤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는 그 찰나의 순간 다른 사람을 헤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이익을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동물의 본성을 이 사내가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생문’은 우리의 현실을 그 날카로운 펜촉으로 후벼 팠다. 아니 인간의 본성을 후벼 팠다는 말이 더욱 맞을 것이다. 결국엔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본성을. 우리가 노파의 바르지 못한 행동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사내가 노파를 재압하는 행동에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결국 노파의 옷을 훔치고 자신이 살기 위해 노파의 옷을 벗겨 도망가는 행동에 이럴수도 있겠구나 하며 인정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이 ‘나생문’은 그 어느 시대에 읽는 다고 하여도 사람들을 생각에 빠트리게 할 것이다. 지금 현실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며 이것은 점차 개인주의가 확대되고 황금만능주의가 남아있는 한 계속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먹느냐, 먹히느냐의 상황에 빠졌을 때 자기밖에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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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진웅기 옮김
'나생문' 또는 '라쇼몽'이란 제목으로 연극을 먼저 접했던 작품이다. 우연찮게 대학교 연극동아리 작품을 보고 내용이 흥미로와서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연극을 또 보았었다.
원작이 궁금해서 포켓사이즈 책으로 주문했는데 연극 내용은 '나생문'과 '덤불 속'을 합쳐놓은 것이었나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뛰어난 묘사력과 플롯구성이 감탄스럽다.
'나생문', '코', '두자춘', '밀차', '덤불 속', '지옥변' 이렇게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이야기가 흥미롭다.
'나생문'은 짧은 이야기지만 인간의 본성을 잘 묘사하고 있고, '코'는 해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며 사실적이다. '두자춘'은 흡사 김만중의 '구운몽'을 읽는 듯 속세의 덧없음을 보여준달까. '밀차'는 어린아이의 심리묘사와 간단한 이야기에 인생의 굴곡을 투사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느낌.
'덤불 속'은 연극에서의 감흥을 되새겨주었다. 한 가지 사건을 묘사하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는 같은 일이라도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우리가 보는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 수만큼 많은게 아닌지 되묻게 한다.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 아닌지.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고 설명하고 생각하고 그러는 중에 그것이 적어도 그자신에게는 객관적인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인지도.
'지옥변'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를 떠올리게 했다. 예술과 도덕의 갈등이라는 화두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꼼꼼하고 치밀한 묘사력이 돋보인다.
36세에 자살했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손바닥만한 단편집 한 권이지만 그 이야기들은 절대 손바닥만하지 않다.
범우사의 2001년 3판 2쇄까지는 2000원이었는데 새판이 나오려는가보다. 책서두의 작품설명은 책을 다 읽은 다음에 읽기 좋고, 책마지막부분의 연보도 작가에 대한 정보를 주어 좋았다.
작은 책에서 아른아른 지속되는 감흥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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