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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해서만 굴러간다./-모든 이가 의견 일치를 하는 것은 바로 보편적 오해에 의한 것이다./-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면 불행하게도 결코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보들레르를 읽는 것일까. 참혹하고 끔찍하며 슬픔에도 불구하고 왜 보들레르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보들레르를 이해하고 감동받는 이라면 분명 그는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나는 살아간다는 것,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히 말해 살아가면서 보들레르를 읽는 것 말이다. 보들레르의 유려한 독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긴 이런 질문보다 먼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보들레르의 이 산문집은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에게도 권하지 않고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은 이 책을 읽고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아니면 쓰레기같은 동경을 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들은 보들레르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내려갈 때의 고통이나 번민,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은 누가 읽어야하는 것일까.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마음먹은 사내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즉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할 것이다. 자고로 책은 먼저 쓸모가 있어야하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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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대화방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채팅을 하다가 보들레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보들레르의 정치성에 대해 묻자 상대방은 '보들레르는 그냥 시인'이라고 일축해버렸던 기억이 난다. 글쎄, 그럼 시인은 정치적일수 없다는 소리일까? 게으른 시인이라면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보들레르는 아니다.
'정치적 잠재성은 브레히트의 교훈극보다 보들레르의 시한구절에 더 강력하게 들어있다'는 아도르노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보들레르의 시에 나타나는 혁명적 미학은 브레히트의 그것보다 훨씬 용맹했으며(그는 시를 쓰고 법정까지 갔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들레르의 시를 읽고 새로운 충격은 커녕 식상함만을 느꼈다면(그도 그럴것이 이미 긴 세월이 흘렀으니까)이 산문집을 권하고 싶다. 기존의 관념을 벗어난 보들레르의 예술과 진보에 관한 통찰을 좀 더 명료하게 접할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온갖 폐혜를 목격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오히려 기술적 진보가 한창이던 때에 반(反)진보를 주장한 보들레르의 선각자적인 면에 감탄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선각자적인 면때문에 평생을 인정받지 못한채 괴로워했고 어쩌면 바로 그때문에 인간성을 꿰뚫는 혜안(慧眼)을 지니게 되었을지도 모를일이다. [인상깊은구절] 진보의 법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이 그 법칙을 창조하기를 원했어야 했으리라[한다].즉 모든 사람들이 진보하는 데 열중하게 될 그럴때에야만, 비로소 인류 전체가 진보할 것이리라. 이런 가설은 자유와 운명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관념들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단지 진보가 있어야만 자유와 운명 사이의 동일성이 장차 생길 것이란다. 그러나 이런 동일성은 언제나 존재해왔다.이 동일성은 바로 역사로서, 국가와 개인들의 역사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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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제 : [Journaux Intime]
먼저 이런 귀한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것에 내심 기뻤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걱정이 된다. 출판사(혹은 역자?)가 붙인 제목은 <벌거벗은 내="" 마음="">이다(이 <내면의 일기="">에는 보들레르가 하나의 책으로 구상하고 썼던 <폭죽 불꽃="">과 <벌거벗은 내="" 마음="">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제목은 눈에 잘 띄지 않을 뿐더러 책의 성격을 분류하기 힘들게 한다. 차라리 <보들레르의 일기="">라는 선명한 제목을 붙였다면 독자들도 다르게 보지 않을까? 그리고 책 앞표지의 어정쩡한 디자인도 책이 '덜' 눈에 띄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초상화나 사진이라도 넣었다면... 문지스펙트럼에서 나온 책들 중에 좋은 기획의도와는 달리 사장되고 절판되는 책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개인적으로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2. 퀴즈 : 영국에 셰익스피어, 독일엔 괴테, 러시아엔 푸쉬킨, 이탈리아엔 단테가 있다면, 프랑스엔?
1)샤토브리앙 2)위고 3)라마르틴느 4)프랑수아 비용 5)보들레르
- 지드의 답: 아! 위고나 될까....?
- 보들레르의 답: (속으로는 5번이었을 것이다...)
- 그리고 우리 세대의 답은?
3. 그의 야심
"2년전부터 계획해 온 두꺼운 책 <벌거벗은 내="" 마음=""> 속에 나의 모든 분노를 빽빽이 적어놓겠어요. 아! 이 책이 발간되는 날,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따위는 빛을 잃겠지요." - 1861년 4월 1일 모친에게 보낸 편지
원래 그의 목표는 루소의 <고백록>에 비견할만한 모랄리스트적인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겠지만, 파스칼이 그랬듯 이 <내면 일기="">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미완성이라고 해서 걸작의 반열에 오르지 말란 법은 없다. 더 널리 읽혀야 한다. [인상깊은구절] 사랑의 행위에는 고문이나 외과수술과 몹시 흡사한 데가 있다.내면>고백록>고백록>벌거벗은>보들레르의>벌거벗은>폭죽>내면의>벌거벗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