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스펜스는 그의 책에서 강희제의 모습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과거의 현명한 군주를 이야기하는 책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을 미화하여 사람들은 과거의 군주국가에 관한 환상을 지니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결여된 절대왕정시대는 명백히 제도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군주가 강희제와 달리 폭군이라면 절대왕정국가에서는 그를 견제할 어떤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펜스의 책에서 우리가 더 관심 있게 봐야할 부분은 절대왕조시대의 현명한 황제 강희제가 아니라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인간적인 지도자 강희제인 것이다. 우리는 강희제가 통치하는 청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유럽인이 갖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의 오류를 알게 되었다. 사실 계몽주의나 합리주의가 널리 확산된 곳이 유럽이기는 하나 유럽을 제외한 많은 국가에서도 자기들만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럽인들은 ‘나’와 다른 ‘모두’는 암흑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방식대로 그들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들을 방문하기 이전에 이미 이런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모습이 정확히 보일 수 가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이성으로 유럽인들은 왜 아시아인들의 생활습관이 자신의 것들과 다른지 분석하지 못한 채 오류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강희제가 보여준 모습은 유럽의 계몽주의자를 능가할 정도로 이성의 이점을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었다. 한 때 자신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명의 황제에 대한 역사 편찬에서도 오직 냉철한 정확성만을 강조한 강희제에게 절대왕정이 지닌 비합리적인 요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유럽인이 지닌 선민의식이 얼마나 비합리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강희제는 유럽의 편견을 뛰어넘음과 동시에 유럽의 한계,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성은 절대선이라 믿던 유럽인들은 결국 합리적인 이성이 만들어낸 기계로 서로를 죽이는 비합리적인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현대 사회역시 이성을 바탕으로 더 큰 물질적 이득과 효율성만을 강조하면서 물질주의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압도하게 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이들과 달리 이성이라는 가치를 명백히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P.238)"라고 이야기 한다.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거대 담론에 휩싸여 그것을 신봉한 것이 아니라 그는 단순히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방법을 추구하며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맹목적 이성이 갖게 되는 한계를 바라볼 수 있었고 감성의 요소를 적절히 사용한 것이다. 니체의 이야기도 등장하기 훨씬 전 과도한 이성의 문제점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필요하면 이성의 한계-의학이 할머니를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다는 것-를 받아들이고 감성의 요소-하늘에 기도를 드리는 것-로 감정을 발산하는 그의 모습은 오직 이성에만 매달리고 있는 유럽인과 현대인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니체는 훗날 이성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유럽을 치유한 의사에 비유된다. 미국이 급속한 속도로 합리주의에 대한 맹신이 퍼져나가 경제 대공황은 물론 정신적 공황을 겪은 것과 달리 유럽에는 니체와 프로이드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이성의 한계를 깨닫고도 많은 사람들이 공황을 탈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강희제가 어떻게 청의 기틀을 마련하고 아들과 손자가 이어갈 청의 황금시대를 시작한 황제가 된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는 기존의 청에 존재하고 있던 비합리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성의 중독성도 잘 경계했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청에는 니체와 같은 의사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도 죽은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 승리자의 칭호를 거부하는 강희제를 훗날 니체가 만나게 된다면 니체는 그를 유럽의 편견과 이성의 불합리성을 뛰어넘은 진정한 초인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9월의 추천도서 <룽산으로의 귀환>을 통해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 교수를 알게 됐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중국사 전문가로, <룽산으로의 귀환>을 비롯해서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왕여인의 죽음>, <반역의 책> 그리고 이제 이야기할 청나라 네 번째 황제 <강희제>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방대한 고증을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치기간 기록을 가진 강희제의 삶을 재구성한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부황 순치제의 갑작스러운 죽음(23세)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강희제는 자그마치 61년 동안이나 제위를 지켰다. 치세 초기에는 보정대신의 간섭을 받던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무를 숭상하던 만주인의 피를 이어받은 강희제는 잦은 사냥으로 철저하게 중국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첫 번째 장인 <사냥과 원정>에서 강희제의 이런 모습을 조너선 스펜스는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는 청조 이전의 이민족 왕조인 금나라와 원나라가 한화(漢和)되면서 멸망했다는 사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말을 달리며 활을 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강희제는 짐승을 쫓는 사냥과 자신에 반대하는 정적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원정을 동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8년간 청조를 뒤흔들었던 우싼구이(吳三桂)가 이끄는 삼번의 난과 1696-1697년 2년간 세 차례에 걸친 준가르부 갈단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태평성세의 기초를 닦는다. 한편, 강희제는 국가의 안정을 위해 무력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피를 토할 정도로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문치주의의 기틀을 닦았다. 만주귀족과 한인 관료의 갈등을 조절하면서도, 훗날 자신의 황태자 인렁의 후계 문제로 파당이 결성되었을 때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두 번째 ‘치세’(다스림)편에서는 ‘훌륭한 정치란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치세 원칙을 설명한다. 백성과 신하의 의견을 듣기 위해 주접제도를 활용한 강희제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상주의 본질을 꿰뚫는 명철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사대부들이 상주를 정적을 음해하고 보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수없이 중앙으로 올라오는 상주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일은 엄청난 정력과 집중력을 요구했다. 한편, 명대 말기 환관의 발호로 국정이 어지러워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강희제는 환관의 본연의 임무 외에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게 했다. 삼번의 난 진압 시, 투항한 적을 다룰 때에도 철저하게 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희제는 난이 아직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한 반란군을 주살하면, 남은 반란군이 철저하게 항전하리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온건한 유화책을 채용했다. 물론, 반란이 끝난 다음에 반란 주모자들은 모두 주살시키는 냉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강희제는 형벌은 앞으로 벌을 내리지 않게 집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치세 동안 문자옥으로 벌을 받은 사람은 다이밍스(戴名世) 하나뿐이라는 선언은 자화자찬처럼 들린다. 반란 진압으로 소요되던 재정은 반란이 진압되면서, 막대한 흑자로 전환되면서 비로소 강희제 치세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강희제 역시 의전과 전례로 많은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평생 황성인 자금성을 떠나지 않았던 명나라 시대의 황제들과는 달리 백성을 돌보고 각종 치수 사업 등을 시찰하기 위해 각지로 순행에 나서기도 했다. 각성을 다스리는 순무와 총독에게 명령을 내려, 철저한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재정확보의 내실을 도모했다. 인재 등용에서도 기존의 과거제의 폐단을 지적하고,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였다. 능력이 뛰어난 인재라면, 과거에 합격한 진사가 아니라도 등용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보여주기도 했다. 60년에 걸친 치세를 함께한 노 대신의 은퇴 요청에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었다. 실무는 젊은 관료에게 맡기게 하고, 국정에 대한 조언자로서 역할을 당부했다. 대신들의 건강을 고려해서, 조정에 출석하는 의무와 공적인 책임까지도 면제해 주는 세심한 면도 보여준다. 진시황처럼 영생불사라는 허황된 꿈 대신, 생로병사라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잘 알았던 강희제는 생전에 상유라는 이름의 유조를 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영명한 군주였던 강희제 역시 후계 문제에서는 황태자 인렁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하늘 아래 절대 권력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말해주듯이, 황태자 인렁 편에 서서 파당을 결성했던 세력은 모두 강희제에 의해 불벼락을 맞았다. 인렁이 폐위된 후, 수많은 황자 가운데 자신과 가장 비슷하다는 인전이 후계자로 내정되고 강희제의 뒤를 이어 청나라의 다섯 번째 황제 옹정제로 등극하게 된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강희제>에서 1인칭 관점으로 강희제 자신이 직접 말하는 양식을 취한다. 강희제는 내외의 적들을 쉴 새 없이 토벌하여 국가안보를 확보하고, 치수와 농업생산을 장려하여 국가 재정을 소위 말하는 강건성세(康乾盛世: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황금기)의 기틀을 닦았다. 수많은 자손을 두고, 최고 권력자로서 수십 년간 제국을 통치한 군주였지만, 할머니 황태후의 병환을 직접 간호하는 충실한 손자였고, 원정길에서도 황성에 남은 가족들에게 진귀한 과일을 보내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많은 현명한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국가정책을 정했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황제 자신의 몫이었다. 실패한 인재 등용이나 자신의 실수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참된 위정자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이런 위정자가 다스리는 태평성대가 재현될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젖어본다. |
이 책은 강희가 직접 자신의 치세와 생각을 직접 기술하는 자서전 형식을 띰으로서 우리가 강희를 직접 대면하고 그에게 교훈을 얻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나 또한 이 책에 내용을 훗날 나의 자녀에게 소개하는 방법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아들아..! 세상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이 아버지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훗날 너희들이 커서 다른 사람을 인도할 때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를 강희제가 갖추었던 덕목과 생각을 빚대어 가르쳐 주고자 한다. 아이들아 지금은 너희들이 어려서 많은 스승에게 배우고 지식을 쌓아가지만 언젠가 너희들의 지식이 남들보다 많이 차서 그들을 가르치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잘 할 때 이 아버지가 강희에 생각과 행실에서 배웠듯이 너희도 그랬으면 하구나.. 너도 중국사를 학생때 배워서 알 것이다. 중국 청대의 번성을 이루며 백성을 태평성대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던 중국의 황제중 한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단지 그의 치세만 배웠을뿐 그가 가졌던 고뇌와 고민 그리고 생각과 관념에 대해선 너희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강희제"란 이소설을 읽고서 지도자가 되기에는 얼마난 많은 고난이 따르는지 그리고 얼마나 노력하고 정진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물론 너도 이 아버지의 서평을 읽고 이 책을 경험하라 이 글을 쓰는것이니 필히 시간이 날 때 책을 읽고 옳은 것을 배우도록 하여라.. 이 책은 6장으로 강희가 직접 기술하는 자서전의 형식으로 집필하였다. 물론 강희가 직접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강희에 개인적인 편지와 실록 그리고 많은 자료를 토대로 작성했기 때문에 강희가 직접쓴 자서전이라 봐도 무관할 듯 싶구나. 너희들이 알다싶이 강희는 광활한 중국 제국을 다스린 황제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함부로 남용하지 않았으며, 죄인의 대해선 엄중했지만 반면 자애로웠다. 많은 지식을 갖추고 그 누구보다도 현명했지만 신하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고 항상 경청했으며, 신하의 잘못을 탓하기 보다는 살펴줄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늙어 기력이 없어지고 기억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서 항상 중요한 것을 기록하려고 했으며 늙어 죽는 것을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또한 충신과 간신을 가릴 줄 알았고, 엄한 아버지이면서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항상 할머니를 공경했던 효자였다. 강희는 "황제에겐 휴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죽을 때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존재이다"라는 말과 함께 인생을 마감할 때 까지 항상 새롭게 정진하였다. 그를 통해 이 아버지도 언제나 올바른 지식을 얻으려 노력할 것이고 강희가 아들 옹정제에게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사유를 통해 알리려 했듯이 아버지 또한 나의 지식을 너희들에게 남길 것이다. 아버지는 개인적으로 너희들이 지도자의 풍모를 갖추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책을 통하여 61년동안 광활한 중국을 부강케하고 백성에게 태평성대를 안겨주었던 강희에게 너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배우길 원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언제나 너희의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안중근 의사께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는다" 했듯이 언제나 책을 가까히 하고 책속에서 많은 지식을 얻기를 바란다. 또한 항상 게으름 없이 정진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거라.. 그러면 강희가 그랬듯이 너희도 세상에서 이름을 떨칠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행복하고 대단한 일은 세상의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이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작은 바람일 것이다. |
강희제(康熙帝)는 순치제에 이은 대청제국 2대 황제이다. 8세에 제위에 오른 후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간 최장기간 중국을 다스렸다. 그는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통치를 완성했으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3대에 이르는 강건성세, 청의 전성기를 연 황제였다. 장수를 보내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타이완을 점령하는 한편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북 변방지역(준가르, 갈단) 정복 전쟁에 나서 현재 중국의 강역을 성립시키기도 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군주였으며 각 분야에 걸쳐 문화 사업을 지원하였다.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한편 주접제도라는 1대1 직통 비밀통신체계를 통해 지방 관료들의 부패와 태만을 직접 감시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정조를 합친 이미지라고나 할까. 그래서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인물을 저자는 흥미롭게도 사학자답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조명한다. 즉, 강희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지난 삶과 가치관을 회술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이런 형식으로,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이 유명하다) 어지간한 자신감과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감히 시도조차 못할 일. 저자는 학자로서 당연히 알고 있었을 강희제의 삶을 재구성하고 그 당시 그가 가졌을법한 생각, 그가 느꼈을 법한 느낌을 그가 생전에 남긴 실제 편지와 유조를 통해 그의 어투를 복원해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290년을 건너뛰어 정복 왕조의 수성을 꾀하는 한 왕이 사냥을 통해 선조의 기상을 어떻게 유지하려 애썼는지, 자신의 신민들을 어떻게 공정히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도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비록 천자이지만 늙어 약해가는 일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어떻게 돌봤는지, 그리고 세상을 다 다스려도 결코 자식들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한 아비로서 아들들의 후계자 분쟁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대청제국의 늙은 황제에게 직접 듣는 호사를 누렸다. 즐거웠다. 아,,,갈수록 스펜스 교수에게 빠져들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끝 부분에서 "한 시간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향기와 소리와 계획과 분위기로 가득 찬 꽃병이다."라고 했고, 이어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감각과 기억 사이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운 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한 사람의 역사가인 나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 꽃병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단편적이고 제멋대로 널려 있는 사료들 때문에 결코 '조화로운 관계'를 포착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가 질린다는 것은 핵심에서 빗나간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내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강희제를 다시금 찾아내는 한 그는 이 책 속에 살아 있다. - 본문 43쪽에서 인용
위와 같은 매력적 문장으로 독자인 나를 질리게 만든 이 책은 강희제와 청 초기 역사에 대해 연대순으로 배경 설명은 하지 않는다. 저자는 강희제의 내면 세계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그러므로 어느정도 배경 지식이 있는 독자가 보아야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얇팍한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곧이어 강희제의 준가르 정복을 다룬 <중국의 서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 원래 중국 황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강희제의 경우, 상자 안에 봉해진 편지가 자금성 안에 있다가 신해혁명 이후 발견되었기에 남아 있는데,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 왕조가 멸망하고 다음 왕조가 성립하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되었다면 이런 일상적인 문서는 다음 왕조의 관찬 역사서가 출판되자마자 파기되어 없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기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혁명 후, 공화국이 된 중화민국의 사학자들은 그들의 선배 역사가들에 비해 얼마나 행운아인가! 나는 이런 점도 기본적인 이 책의 독서와 더불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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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의 개혁, 개방이후로 고속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초유의 실험이 진행중인 중국. 빈부의 격차, 중앙과 지방과의 갈등, 농촌과 도시와의 모순, 소수민족과 중국정부와의 미묘한 관계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 모두가 현대 중국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말들이다. 중국의 현재 모습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이 종합적인 질문에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을 지라도, 최소한 현재 중국의 크기에 대한 답이라면 분명하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현재 모습은 청대(淸代)에 와서 이루어진다. 중국의 마지막 전제왕조인 청(淸)은 만주족이라는 이민족에 의해서 세워진 국가이다. 당대(唐代)에는 물길(勿吉) 혹은 말갈(靺鞨)이라 불리다가 그 뒤 여진(餘塵)으로 알려지고, 청 태조인 누르하치가 이 지역의 부족을 통합하여 만주(滿洲)로 개명했다. 누루하치는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세운 후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다. 청(淸)은 과거 중국의 역대왕조 사상 최대의 판도를 만들어낸 왕조였는데, 그 초석을 닦아놓은 인물이 바로 강희제였다. 순치제의 뒤를 이은 강희제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에는 내외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그는 삼번의 난을 진압했고, 타이완을 점령했다. 또한, 러시아 군대를 패퇴시키고 알바진 요새를 공략하였으며 준가르부를 패퇴시켜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많은 안정을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이 책은 이런 강희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안문>이나 <현대 중국을 찾아서>를 읽어 본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이 책 역시 조나단 스펜스 교수의 독특한 힘이 담겨져 있다. 과거 강희제가 살아나와 자서전을 쓰는 듯,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는 펼쳐진다. 보통 역사관련 서적은 배경지식이 없거나 읽어야 한다는 모종의 의무감이 없으면 읽기에 지루함이 생기기 쉽다. 하지만, 수 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문헌이 보여주듯, 실증된 사실들에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그의 능숙한 솜씨는, 과거 속에 박제되어 있던 강희제를 현재로 끌어내기에 충분한 듯 하다. |
이 책은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 6장으로 갈수록 그의 신체와 사고는 점점 약해짐을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아무래도 2장 강한 군주의 특징이 그렇듯 그의 다스림에 대한 철학은 ‘훌륭한 정치란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하는 것이다.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p115)’, ‘가장 좋은 징조는 풍년이 드는 것과 만족해하는 백성이다(p111)’에 나타나듯 세상의 황제임을 자각하지만 백성이 근본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의 사고 또한 열린 마음으로 배우는 자세를 늘 잃지 않았다.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타인의 장점을 배우고 객관적인 사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송나라 역사를 편찬한 원나라의 사관들은 송나라의 역사를 비웃었고, 마찬가지고 원나라의 역사를 썼던 명의 사관들은 원나라의 역사를 조롱하였다. 나는 이것을 금하였다(p156) 거대한 중국 땅덩어리를 61년 동안 유지했다는 것은 그의 사고방식과 다스림이 일정 정도 올바르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를 낮추고, 인사에 있어 탕평책을 펼칠 만큼 인재를 고루 등용했고, 인재등용의 기준도 재능이 아닌 德을 더욱 중요시 하였다. 이는 현대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GE의 회장이었던 잭웰치도 사람의 재능을 중요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능이 있고 기업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조직에 가장 큰 장애물이며 신속히 퇴출시킬 제1 우선순위였다. 이는 기업성과도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성과가 높은 것이 아님은 이미 증명되었다.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면 주위의 칭찬에는 솔깃할 수도 있는데 |
십수년 전까지 이 조그만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하던 군부 독재자들을 찬양하기 위해 한심한 우리 언론들과 소인배들은 날마다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치기에 급급해하던 비굴한 모습들이 지금도 뇌리에 남겨둔 채로 강희제를 읽었다.
그가 누구던가 ? 세계의 반쪽을 장악하고 하늘의 아들로 불리던 청나라의 황제가 아닌가? 천하를 호령하는 그의 모습보다는 인간적인 면모가 물씬 풍기는 이 책은 그래서 더 정겨웠던것 같다. 거대한 제국의 황제로 살면서 겸손함과 솔직함, 자애로움과 측은지심을 가졌던 그였기에 후대에 이리도 칭송을 받는게 아닌가 싶다.
그는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조금도 과장하지 않았고, 숨기지 않았던것 같다. 중국대륙을 다스리는 천자의 힘이란게 이런게 아닌가 싶다.
이제 그 후손들이 다시한번 천하를 호령하려고 하고 있다. 이 작은 책만으로도 벌써 그들이 두렵기 시작했다.
이전에 나는 강희제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다. 물론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 그에 대해 뭔가 대단한 것을 알게된것도 아닌것 같다.
하지만, 황제 강희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면모, 성품에 대한 것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 같다.
진정한 성군은 정치를 잘하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이 많음으로 되는것도 아니며,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탄생되는 것은 더더욱 아닌가 보다.
신하들의 옆에서, 백성들의 옆에서 살가운 모습으로 같이 아파하는 군주가 진정한 성군이 아닐까 ? [인상깊은구절] p.86 사람의 좋은 면을 찾아내고 나쁜 점을 들추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만일 네가 항상 남을 의심하면 남들 역시 너를 의심한다. p.100 황제는 자신의 온몸에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귀를 가득 채우는 칭찬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 그런 칭찬이란 이른바 '보약'만도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첨은 맛있는 음식처럼 온갖 영양분이 다 갖춰져 있는 듯하지만 깊이 빠져들면 사람이 점차 병들게 된다. p.127 어릴 때부터 나는 스스로 깨우치려 하였고 모를 때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을 만날때마다 그들이 쌓은 경험을 물어 보았고, 그들이 말해준 것을 잊지않고 기억해 두었다. |
강희제, 당태종과 더불어 중국 사상 최대의 명군으로 불리는 황제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유럽에서도 명성을 얻었고, 곧잘 무협지나 역사소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름이 상당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 [강희제]와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를 읽어보면, 강희제가 우리 세종처럼 '천재', 또는 '성인' 타입의 군주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학문을 좋아해서 한학에서부터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공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설에서처럼 대단한 수준에 올랐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그도 그럴 것이, 강희제는 청조가 중국을 장악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황제로, 어려서부터 편안하게 공부나 하며 세월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즉위하자마자 오보이 등 권신들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부심해야 했으며, 오삼계 등 한때 청조를 도왔던 변방 세력들이 일으킨 '삼번의 난'을 진압하느라 수십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도 다시 러시아와 몽고 세력과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는 대범하면서도 치밀하고,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이었다. 이후 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백년의 부흥이 이루어지고 소수민족이 세운 청조가 수백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강희제에 힘입은 바 컸다. 그뿐이 아니다. 역사적 공과 문제를 뛰어넘어 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황제라고 하는 직분에 대해 보여준 성실함과 겸허함에 있다.
수억의 백성을 다스리는 오직 한 사람,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권력자였던 중국의 황제. 이런 권력을 어지간한 사람이 맡으면 마음껏 권력을 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거나, 너무 큰 부담에 지쳐 종교 또는 향락의 세계로 도피하기 쉽다. 로마제국의 칼리귤라, 네로, 송의 휘종, 명의 무종 등. 그러나 강희제는 황제의 자리에 앉은 이상 그 직분을 힘 닿는 데까지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마치 프로테스탄티즘의 소명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제갈양의 [출사표]에 나오는 "鞠躬盡췌(몸을 굽히어 최후까지 노력한다)"라는 말을 즐겨 썼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그것은 신하의 말로, 폐하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고 하자, 강희제는 "짐은 하늘의 신하가 아니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무에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몰두하면(그의 아들 옹정제처럼), 심신이 피로해져서 일찍 죽지 않으면 까다로운 독재자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강희제는 어느 정도까지만 최선을 다해 국사에 임하고, 자신의 여가 활동, 가족과의 생활, 개인적 공부 등을 할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따라서 남은 정무는 신하들에게 위임되었다. 옹정제는 이런 방식이 황제의 권력을 불철저하게 만드는 것이라 하여 비판했지만, 그처럼 하루 종일 서류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려는 통치방식은 오래 가기 어렵고, 웬만한 현군이 아닌 이상 적응할 수 없는 방식이다. 근무시간에는 성실히 일을 하고 퇴근해서는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는 모범적 직장인의 모습을 닮은 강희제의 방식이 보다 현실적이다.
강희제는 인간적으로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다. 어려서부터 온갖 음모와 권력다툼을 겪으며 성장해야 했고, 황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를 없애고자 일찍부터 황태자를 세웠으나 이번에는 황태자를 "떠오르는 태양"으로 알고 아부하여 부귀를 누리려는 사람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온갖 부패상을 다 연출했다. 강희제는 스스로 사랑하는 아들을 두 번 씩이나 폐위시켜야 했고, 그 가운데 믿었던 신하나 다른 황자들의 검은 속내를 알고 실망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그런 인간적 고뇌를 꿋꿋이 극복하며 자기 직분을 수행했고, 난폭한 통치를 하거나 종교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죽음을 염두에 두면서 작성한 유훈에서 당당하게 "나는 최선을 다해 이 나라를 통치해 왔다"고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더구나 그가 무엇이든 맘대로 즐길 수 있는 절대권력자였다면 더더욱 흔치 않을 것이다.
정식 역사기록과 황제의 서신 등을 종합해서 만든 이 전기에 황제의 연애 이야기는 없다. 전근대 동양 사회의 성격상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의례적으로 비빈들을 대했던 것이 아니라, 진정 가족으로서, 부부로서 정을 느끼고 대했던 것 같다. 원정을 마치고 예정보다 일찍 돌아간다는 사적 편지를 보내면서 "공연히 시끄러워질테니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단 비빈들에게만 살짝 귀띔해줘라"고 한 것이나, 순행길에 맛있는 과일을 먹고 그 과일과 먹는 방법을 궁궐의 비빈들에게 전하면서 "물건은 비록 보잘것없지만 마음은 참으로 먼 곳에서 전하는 것이니 비웃지 말라"고 은근히 수줍은 듯 말을 보태는 황제의 모습. 진정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면서, 진솔하게 살아간 한 남자의 모습이 아닌가. [인상깊은구절] 옛 사람들은 언제나 "제왕은 마땅히 일의 크고 중요한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을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대, 백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작은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마침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므로 짐은 매사를 꼼꼼하게 살펴 왔다. 만일 오늘 한두가지 일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내일은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 더 많아진다. 내일도 다시금 편안하고 한가롭기만을 힘쓴다면 훗날에는 처리해야 할 일이 더욱 많이 쌓이게 된다. 황제가 처리해야 할 일은 지극히 중요해서 미루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짐은 크든 작든 모든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상주문에 한 자라도 틀린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고쳐서 돌려준다. 모든 일을 소홀히 못하는 것은 짐의 천성이다. |
"修身齊家治國平天下" 황제가 된자가 어떻게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잘 알게해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월하의 강희대제(전12권)를 먼저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으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를 읽고 나니 강희황제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에 걸쳐 우리 민족에게 호란을 겪게했고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강희의 할아버지(청태종-홍타이지)에게 삼고구궤의 예를 올린 일이 결코 치욕적으로 생각되지 않고 그에게 푹 빠져버린 내 자신을 바라볼 때 나는 나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타산지석이라고 했던가... 황제로서 통치술과 인간으로서 한계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그를 접한 사람들에게 존경하지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들...특히,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로장생을 꿈꾸는데 하물며 절대권력의 황제인 그가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할 수도 있었을 건만(진시황제처럼)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조심스럽게 먹고 마시며,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월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물이 빠지고 바위가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는 하늘의 대리자이기 전에 유한한 인간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참으로 현명하며 그가 해야할 일을 무엇이고 하지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던 참으로 멋진 사람이었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한 이탈이아인은 내가 로마시대에 태어난다면 카이사르 밑에서 백인대장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나 또한 미관 말직이라도 강희황제 밑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 [인상깊은구절]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여덟 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며 - 중략 -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
우연인지 주요일간지에서 동시에 다룬 두권의 책이 있었다. "강희제"와 "옹정제" 평소에 이산에서 나온 책이라면 거의 사보았던 내가 신문을 보고 두 책을 모두 주문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우선 펼쳐든 책이 "강희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은이인 Jonathan Spence가 쓴 "현대 중국을 찾아서","천안문"보다 이 책은 재미없다.
특이한 점은 이 책은 황제의 독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독백이라는 형식으로 써 놓았으니 나는 책 읽는 내내 강희제가 보낸 240페이지의 조칙을 읽는 기분이었다. '짐은 어려서부터 강건하였고....어찌 집착할 수 있겠는가?' '짐은 나이가 쉰일곱이 되었을 때....' 이런 문구들이 계속되니 글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게 되었다.
서양인이 중국에 대해 쓴 글은 스펜서가 '칸의 제국'에서도 얘기했지만 서양인이 바라는 중국인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 이 점을 '강희제'를 읽으며 다시 확인했다. 책의 내용은 비교적 충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울림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은 아마도 강희제가 파란눈을 가진 사람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책속에서 만난 강희제는 매우 훌륭한 군주였다. 그리고 최고의 권력자에게는 드문 열린 마음과 관용을 가졌고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백성들의 삶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이 그들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가 탁상공론을 일삼은 관료들을 꾸짖는 부분에 이르면 마치 오늘 우리 사회의 누군가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듯 시원하기까지 하다. 그런 황제가 더욱 위대해 보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 답답하기 때문인가보다. [인상깊은구절] 점쟁이들이 종종 나쁜 징조는 못본체하고 지나가지만 나는 그들이 점친 결과를 이중으로 점검하고 나서 진실을 왜곡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한번은 흠천감에서 온화한 남동풍이 불고 있다고 하였지만 궁궐내에 있는 관측기구로 풍향을 재어보니 불길한 북동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흠천감의 관료들에게 우리 청조는 나쁜 징조를 꺼리거나 회피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또 관찰한 징조를 해석하는데 상상을 보태거나 과장하지 말라고도 주의를 주었다. 인간사는 일식과 월식이 야기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일식과 월식이 언젠지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보다도 우리가 이로 인한 곤란을 막고 평안함을 얻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메뚜기 문제는 백성들이 먹고 사는 것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도 백성들에게 메뚜기는 없앨 수 있는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메뚜기 알이 부화되더라도 땅속 깊이 쟁기질을 하여 부화하는 메뚜기를 죽이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듬해의 추수도 풍성해지길 기약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