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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의 동일자 논리와 파르헤지아 -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나치가 유대인 600만 명을 살해한 배경에는 아리안족을 ‘위대한 민족’으로 사고하는 차별 논리가 숨어 있다. 나치는 위대한 민족의 반대편에 유대인을 놓고 (위대한) 민족 건설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대인을 박멸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당대에 유행한 위생학적 관점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비(非)아리안족 사람들은 퇴치해야 할 바이러스와 같았다. 바이러스는 퇴치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사람’ 곧 아리안족 백인들이 그 위대함을 펼칠 수 있다. 나치가 내세운 차별 논리는 나치를 따르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치는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살아남은 집단-정당이다. 국민투표로 한 나라의 수반에 오른 히틀러는 대중 심리를 교묘히 조작하여 나치의 인종주의를 정당화했다. 나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과 같은 타자들은 단지 증오를 퍼부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던 셈이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다산초당, 2017)에서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하는 문제를 탐색하고 있다. “증오에는 절대적 확신이 필요하다.”(17쪽)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나치를 따르는 대중들이 유대인을 박멸해야 할 타자로 ‘확신’했기 때문에 나치의 대량 학살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타자’는 위험한 힘을 지녔거나 열등한 존재라고 근거 없이 추정되고, 따라서 그들을 학대하거나 제거하는 행위는 단순히 용서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조치로 추켜올려진다.”(18~9쪽) 타자가 실제로 위험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치가 유대인을 타자로 규정하는 순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을 타자로 규정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대량 학살은 그 근거를 ‘확실히’ 얻게 된다.
이 책에는 타자들을 향한 혐오나 증오의 사례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백인에게 흑인=타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미국의 어느 지하철에서 백인 남자가 흑인 소년을 밀친다. 바닥에 쓰러진 흑인 소년을 본 체 만 체 백인 남자는 제 갈 길로 그냥 가버린다. 흑인 소년은 백인 남자의 눈에는 ‘안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클라우스니츠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난민을 태운 버스를 가로막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버스 앞에서 “우리가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돌려 말하면 독일 국민이 아닌 난민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걸 그들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은 난민들이 마을에 분란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한다. 마을 여자들과 아이들을 괴롭히는 ‘위험한 인물’로 난민을 미리 규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기 나라에서도 쫓긴 난민들이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존재들인 것일까? 그날 버스에 탄 난민들은 한편으로 개개인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보편적인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각자 특유한 개인사와 경험, 특징을 지닌 인간 존재임을 부정당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타자로, ‘우리가 아닌 자들’로 규정됨으로써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섬뜩하고 혐오스럽고 위험한 집단이라고 낙인찍을 수 있는 특징들이 그들에게 투사된 것이다. 일레인 스캐리는 “기괴함과 비가시성은 타자의 두 아종”이라고 쓴 바 있다. “기괴함은 지나치게 가시적이어서 주의를 기울이는 시선조차 돌리게 만들며, 비가시성은 주의를 기울일 가능성조차 차단해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게 한다.” (62쪽) 난민들은 개개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닌’ 타자로 규정돼야 비로소 보이는 존재가 된다. 그럼 보는 주체들은 누구일까? 마을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로 난민을 우리 밖으로 내몬다. 우리 밖에 있는 모든 타자들은 위험한 존재이다. 난민들이 실제 위험한 행동을 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난민이라는 존재 자체가 위험한 바이러스다. 지은이는 이 사건에 개입하는 사람들을 구호를 외치는 이들,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 그리고 경찰관들이라는 세 부류로 나눈다. 구호를 외치는 이들만이 난민들을 거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주변을 서성이며 구경하는 사람들(침묵하는 다수) 또한 난민 수용을 마찬가지로 거부한다.
경찰관이라고 다를까? 경찰관은 약자인 난민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다. 경찰관은 구호를 외치는 마을 사람들을 보지 않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난민들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무기력과 속수무책의 중간쯤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듯한 경찰의 이도저도 아닌 태도는 버스를 막아선 시위자들에게 그런 행동을 계속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과 다름없다.”(73쪽) 타자에 대한 증오는 이렇게 한 사회를 공고하게 묶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다.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하나하나의 난민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난민들을 집단의 표상으로 본다. 개인으로서 난민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집단으로서 난민은 한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겠는가? 나치는 유대인을 위험한 집단의 표상으로 보았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조선인이라는 표상은 항시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타자들로만 비친다. 다른 건 없다. 위험하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다.
지은이는 타자를 배제하는 이념의 밑바탕에는 동질성-본연성-순수성으로 자신들을 치장하는 동일자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동질성과 본연성과 순수성은 어떻게 표현되는 것일까? 지은이는 성서의 「사사기(판관기)」에 나오는 ‘쉬볼레트Schibbolet’ 이야기에 빗대어 이를 설명한다. 길르앗인이 에브라임으로 가는 요르단 강 여울목을 봉쇄했다. 그들은 강을 건너려는 이들에게 ‘쉬볼레트’를 발음하게 한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 말을 ‘시볼레트Sibbolet’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쉬볼레트’라고 발음하면 살고, ‘시볼레트’라고 발음하면 죽는다. ‘쉬볼레트’와 ‘시볼레트’의 구분은 위대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 남자와 여자, 이성애와 동성애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번져 나간다. 이성애자면 살고 동성애자면 죽는다. 남자면 살고 여자면 죽는다.
지은이는 이슬람 과격주의자인 IS(Islami State)가 ‘순수성’을 기반으로 어떻게 자기 논리를 세우는지 정확히 보여준다. IS는 여성과 유대인, 동성애자, 시아파 이슬람, 그리고 배신자로 낙인찍힌 모든 무슬림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감행한다. 그들은 특히 서구 중심가를 테러의 대상으로 삼아 그곳에 사는 무슬림들을 고립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쓰고 있다. 서구인들에게 무슬림은 곧 테러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IS 스스로 심어주려고 하는 것이다. IS는 왜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자신들을 무슬림의 순수한 정통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구 여러 나라에 퍼져 사는 무슬림들은 자기들에 비하면 순수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순수하지 않은 무슬림들을 ‘순수하게’ 만들려면 서구에서 고립시켜야 한다. 서구인들에게 무슬림에 대한 증오를 심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서구에 사는 무슬림을 자기네로 이끄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IS의 증오에서 제일 눈에 먼저 띄는 특징은 평등주의다. IS 지하드의 전위에 가담하라는 부름은 (거의) 모든 이를 향한다. 이웃 아랍 국가들과 체첸,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으며, 피부색도 사회적 출신도 아무 의미 없고, 고등학교를 중퇴했든 졸업했든,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치하 이라크 군대에서 장교를 지낸 이든 군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든 상관없다. 가담을 원하는 사람, 알 바그다디가 선전한 교리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누구나 환영받을 뿐 아니라 그 보상으로 다른 이들에 대한 지배까지 약속받는다. “무슬림들은 모든 이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될 것이다.” (201~2쪽) IS의 평등주의는 타자를 배제하는 동일자의 평등을 의미한다. 평등이라는 말 속에 이미 차별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수리파 이슬람’이라는 동일자의 눈으로 자기 논리에서 벗어나는 모든 존재들을 ‘절대적 타자’로 멸시하고 단죄한다. “IS의 독단적 교리에서 보자면 사실 절대적 타자는 다원성, 다양한 종교들의 공존, 그리고 특정 종교와 분리된 채 수립된 확고하게 세속적인 국가들이다.”(208쪽)라고 지은이는 쓰고 있다.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명확성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들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나치를 비롯한 전체주의 세력의 논리를 지배한다. IS는 이리 보면 광신주의의 전형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동일자의 논리가 극단에 이른 상황을 이들은 정확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광신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계몽된 의심과 아이러니의 문화”(219쪽)를 제시한다. 광신주의에 또 다른 광신주의로 대항하는 건 광신주의의 운신 폭을 더 넓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IS의 테러에 더 강력한 폭력으로 맞서는 미국식 방법에 지은이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돌려 말하면 무슬림 전체를 ‘절대적 타자’로 보는 순간 IS와 같은 테러 집단은 끊임없이 양산될 수 있다는 걸 지은이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이 세계가 복수(複數)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단색의 통일체로만 이해하는 ‘우리’에게는 다양성도 개인성도 없다.”(221쪽) ‘우리’라는 말에는 ‘전체’라는 의미와 더불어 ‘개인성’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우리’라는 말은 그 자체로 복수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미셸 푸코가 주장한 파르헤지아parrhesia라는 개념에서 복수성으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파르헤지하는 진실을 말하는 자유를 뜻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자신들은 무슬림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민숙소의 권리를 침해할 생각은 없지만……, 증오와 폭력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말들”(238~9쪽)은 진실 말하기와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파르헤지하와는 거리가 멀다. 푸코는 진실을 말하는 파르헤지스트는 폭군에게 당당히 맞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파르헤지아의 원리에서 지은이는 타자에 대한 증오가 확산되는 상황을 타개할 해법을 찾는다. 지은이는 인간에게는 여전히 진실을 말하는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증오 범죄에 증오로 맞서는 시대적 조건 속에서 지은이가 말하는 파르헤지아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의 윤리를 시험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말로 이 질문에 답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인류는 핵폭탄을 사용함으로써 증오에 증오로 맞서는 논리가 얼마나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는지 이미 경험했다. 문제는 증오를 또 다른 증오로 없애는 게 아니라 인간의 윤리를 새롭게 세우는 일이다. 지은이는 파르헤지아라는 말하기 원리로 인간의 윤리를 다시금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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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 아이쇼핑을 하다가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예전부터 이 사회에 혐오가 만연한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관해 구체적으로 궁금증을 갖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사회현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다 보니 혐오가 왜 생기는지, 어떤 혐오가 있는지, 어떤 것들이 혐오를 가속시키는지 등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책을 독서모임에 추천했고 모두가 찬성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아무래도 번역이 되어있다보니 소설처럼 술술 읽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중 가장 밑줄을 많이 그은 책이 되었다.
원래 알고 있었던 내용도 많았지만, 새롭게 알게된 내용도 정말 많았다.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던 것도 많았던 것 같다. 독서 토론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반 정도밖에 읽지 못했다. 개강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권씩은 읽었는데.. 개강하고나니 하는게 너무 많아서 책을 잡기가 힘들다. 10월이 가기전에 꼭 다 읽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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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라는 이름의 퇴행주의, 반지성주의는 분명 우리 사회에 지나치게 만연해있다. 특히 SNS의 발달로 인해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지나치게 빠르고 세세하게 들을 수 있게 되어 나로서는 체감하는 피로도가 아주 극심하다. '순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찬미'는 제목 자체만으로도 아주 이채롭다. 화학자 로얼드 호프만이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에서 말한 것처럼, 애당초 자연은 절대 순수한 공간이 아니다. 많은 불순물들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것, 본연적인 것, 순수한 것, 올바른 것, 명확한 것 등은 그 자체로 누군가의 '이데올로기적' 필터를 거쳐 걸러진 하나의 인위적인 산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도 그런 것들을 조금씩 동경해왔던 것 같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피로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아주 편한 일이다. 생각을 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로해진 인간(그리고 사회도)은 자연스럽게 편한 것을 원하게 되고, 다른 관점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게 된다. 하지만 순수한 것에 대한 집착은 의미가 없고 현실에서 달아나는 일이며, 그 자체로 누군가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일이다. 이러한 자세는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사태는 왜곡되고 축소되어 상상력을 위축시키며, 대상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로써 박제되어버린다. 이렇게 사람은 감정을 이입할 능력이 상실된다.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증오와 폭력은 그 자체만 따로 떼어 비난하기보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구조, 조건, 형식들을 분석하고, 그것이 하나의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임을 이야기해, 이야기의 틀 자체를 전복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증오와 혐오는 퇴치할 수 없다. 하지만 솔직히 저자의 의견은 명확하고 구체적이진 못한 것 같다(그렇게 경계하라고 했지만서도 역시 이런 게 좋다!). 과연 이것으로 모두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왜 도덕인가?>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여담인데 혐오의 방식도 이 책에서는 이렇게 지적했다: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영광과 분노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도덕 감정이다.」 아주 정확하다) '생각하라'라는 것. 메시지는 늘 단순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밑줄과 함께] 「요즘에는 적대감을 과시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에 이른바 공적인 의미, 심지어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에 편승해 내면의 모든 천박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문명인이라 할 수 없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런 것에 익숙해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 결코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P. 22) * 읽고서 무척이나 감동받았던 문장이다. 종종 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무언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몰상식하게 싸우는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았다. 많이 지쳤고 많이 피로해졌다. 정신적으로 늙었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나도 옛날에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후 감당해야 할 몰지각한 반응들에 질려 포기했다. 저자의 이런 단호함에 나는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저자의 젊음과 용기가 부럽다. 「그것(증오)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이것이 분출되려면 미리 정해진 양식이 필요하다. 모욕적인 언어표현, 사고와 분류에 사용되는 연상과 이미지들, 범주를 나누고 평가하는 인식틀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셈이다.」 (P. 23) * 특정 지역인, 직업인, 성별, 인종 등을 비방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디서 듣고 보았던 '누군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양식을 토대로 증오 발언을 한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것 ㅡ 즉 생산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적대감을 과시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에서 생산적인 '의미'를 찾는 행동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혐오의 이데올로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증오에는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것,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 해체해야 하고 (...) 고찰해야 한다. (...) 증오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근원과 증오가 날뛸 수 있게 하는 구조, 증오가 작동하는 기제를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으면 그것에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증오에 동조하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자기확신을 잃게 할 수만 있어도 도움이 된다.」 (P. 25) 「증오하는 자들이 그 대상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문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P. 27) *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이 단호한 말에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던지! 「증오를 느끼려면 우선 증오의 대상이 실존적으로 중요하며 괴물 같은 존재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러려면 먼저 실제의 권력구도를 임의로 뒤집어야만 한다. (...) 엄청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되어야만 했다.」 (P. 62) * 증오는 이처럼 아이러니하다. 상대방을 부정하는 한편 상대방을 긍정해야 하는 대단히 모순된 감정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그 사람들이 한 말과 행동, 그들의 행위다. (...) 사람이 아니라 행위를 관찰하고 비판하면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분리할 수 있고, 그러면 스스로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 그 사람들이 다른 상황에 처하면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인정한다.」 (P. 64)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쉽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전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몹시 떨어지기 때문이다. (...) 감정이입을 할 능력을 상실한다.」 (P. 80) * 저자가 비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상상력이 고사되는 것이다. 일부를 과장하고, 이들의 소식만을 퍼다 다르며 전체를 유추할 수 있는 상상력을 고사시키는 사람들이 있는지, 본인이 그렇게 제한당하는지 아닌지 늘 의심하고 숙고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감정을 이입할 능력이 상실된다. 그렇게 박제된 증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어떤 일이든 저항하거나 반박하려면 자신의 상처를 먼저 언급해야 한다는 굴욕이 전제된다. (...) 그 말은 또한 자신이 누구로부터 공격당하는지 늘 자문해야 하고, 그런 다음 누구로서 말하는지도 맥락에 넣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22)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이 의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명확성이다. (...) 증오로써 증오하는 자와 대결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다. (...)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수단을 가지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 현대의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유럽은 공격을 받더라도 현대적이고 세속적이며 다원적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P. 217) 4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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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그토록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확신을 할수 있는 것일까. 증오한다는 건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말하고 위해를 가하며 살인하지 않을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멸시하고 모욕하고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증오하는 자에게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 점의 회의도 있어선 안된다. " 단순히 머리말 부분에서 나온 문장들인데 너무나도 공감가고 한마디 한마디가 강렬해서 이끌리듯 바로 구매한 책. 이부분들때문에 '아 띵문이야. 이거다.' 하고 구매했다 ㅇㅅㅇ 그리고 읽어볼수록 구매하길잘했다는 생각이 들며, 내용도 마음에들고 많은 사람들이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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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나도 무언가를 혐오하는데에 일조하고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했다. 세상에 혐오에서 조금 더 멀어지면 좋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어쩐지 그러기는 더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다. 씁쓸하다.
특히 이 대목을 읽으며 나의 행동들을 많이 되돌아보았던 것 같다.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많은 증오의 확장에 내가 가담하게 될까?
혐오 세력들에게 둘러싸여서 진행되었던 퀴어 퍼레이드가 생각나서 와닿았던 문장이다. 혐오자들은 어째서 성소수자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는지에 대한 의문의 해답같이 느껴졌다. 모임에서 트랜스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볼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트랜스인에 대한 혐오는 어쩌면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책의 후반부에 나온 문장. 성공한 저항적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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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린 엠케 작가님의 혐오사회를 읽었습니다. 최근에 정말 대상을 가리지 않은 혐오가 극성을 부리고 있어서 혐오, 증오에 대한 사회학적 요소를 다룬 책을 찾아보던 중 제목이 직관적인 게 마음에 들어서 읽어보게 됐습니다. 작가가 독일인이라 유럽의 상황을 주로 다루는데 한국의 상황에 대입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특히 클라우스니츠에서 난민들을 위협했던 사건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는데, 제가 그 현장에 있었어도 방관자들이랑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계속 공부하고 생각해보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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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이 책의 특징은 뭘까? 혐오, 증오는 확신이 아니라 사회적 무력감이 근원이다. 이 책의 장점은 아무래도 큰 틀을 이루고 있는 "혐오" 중, 난민, 인종, 성소수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집중력이다. 지은이가 성소수자로서 차별과 혐오를 받아 온 만큼 이 책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소수자혐오의 양상이 다른 혐오 현상과 어떻게 유사하고 또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나간다. 또 하나의 장점 혹은 특징은 통찰력이라 할 수 있겠다. 혐오와 증오의 가해자들, 차별을 선동하는 집단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것을 끝없이 분출케 하는 메커니즘을 찾으려 한다. 그중 하나가 수동적 동일시라는 메커니즘이다. 집단들이 결속하는 것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지 사명이나 이상에 대한 자각적이고 능동적인 동일시 감정은 아니라고 꼬집는다. 대단한 통찰력이다. 불평등에 대한 불만은 정치적 범주로 인정되지 못하기에 쉽사리 인종과 같은 집단적 범주로 묶여버리고만단. 수동적 동일시가 일어나기 쉬운 토양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 힘의 균형감각을 들 수 있다. 복잡한 사회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면 조악안 음모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한편으로 개념적 엄밀함에 천착하게 되면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기도 전에 지쳐버릴 수 있으나, 지은이는 나름대로 균형을 찾으려 한다.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문한다. 그들을 부러워해야 하는 걸까하고 때로는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떻게 그토록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어쩌면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것일까, 증오한다는 건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힞 않으면 그렇게 말하고 위해를 가하며 살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증오와 혐오근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의문을 갖는데, 바로 이 책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증오를 하는 자는 자기 확신있어야 하며, 추호도 한 점의 의심이 없어야 한다. 절대적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그 이상한 메커니즘을 포착한다. 바로 수동적 동일시, 사르트르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제한적이고 불리한 환경에 수동적이고 무반성적으로 적응하는과정을 통해 형성된 특정한 집단이 있다. 바로 이들 조직은 절대적 확신이나 신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환경과 질서에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이 무력감이 어느 누군가에로 향해지면 바로 증오, 혐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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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지은이 카롤린 엠케는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 전쟁과 사회적 폭력, 혐오 문제의 구조를 파헤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16년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할 사회적 실천에 앞장서고 있는 롤모델이른 평가와 함께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받은 바 있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이책은 3장으로 구성됐고, 1장에서는 사랑, 희망, 걱정, 증오, 혐오와 멸시 등 중요한 키워드로 구성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에 관하여 적고 있다. 이어서 2장에서는 동질, 본원, 순수, 이 3가지의 성질, 성격에 관하여 그리고 3장에서는 순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찬미로 마무리한다. 혐오사회’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이 (2장에서 말하는) 동질성, 본연성, 순수성에 대한 맹신에 있다면 그것을 멈춰 세우는 방법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즉 순수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고 옹호하는 데 있다. 지은이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자유와 다양성의 가치가 그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은이는 다른 것을 다르게 대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며, 혐오와 증오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상적,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사회구성원 모두가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늘 함께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2장 동질성, 본연성, 순수성에서) 이렇게 보고 있다. 2016년 6월 올랜도에서 있었던 끔찍한 총격사건이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증명했듯이 무엇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은 레즈비언과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간성間性, 퀴어를 모두 하나로 묶어준다. 나머지 경우에는 얼마나 서로 구분되기를 원하든, 개인으로서 얼마나 자신의 독특함을 원하든, 쉽게 다칠 수 있다는 그 감정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 언제라도 공개적으로 모욕이나 공격을 당하는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표준을 결정한다는 다수와는 뭔가 다르게 사랑하거나 다르게 갈망하거나 다르게 보이는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손을 잡고 거리를 걷거나 입을 맞출 때면 불시에 공격당할 수 있다는 것도 항상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증오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우리는 배제와 폭력의 대상임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게이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늘 이런 폭력의 역사가 음험하게 따라다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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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는 기준과 표준에서 잉태된 어두운 그림자다, 혐오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출발점이 될 이 책은 여성 혐오나 혐오 표현의 층위에 초점을 맞춘 논의에서 혐오가 발생하고 전염, 확산되는 근본적인 방식, 이른바 메커니즘과 그 작동에 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 한다. 인간무리, 즉 사회에서 혐오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통상적으로 특정 사회의 표준 내지는 기준에서 일탈됐거나 벗어난다는 이유로 멸시의 대상이 되거나 배제된다. 지은이는 이런 표준 내지 기준이라는 믿음 자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에 대한 맹신이자 폭력적인 편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는 마치, 노자(도덕경)가 말하는 기준이 갖는 폭력성과 같은 맥락이다. 자연이행의 원리처럼 다양한 흐름이 제 각각 존재하는데, 어떤 기준 내지 표준을 설정하는 순간, 배제가 작동하고, 이상적인 목표가 정해지며 이를 향해가는 어떤 절차 등이 정해지게 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거침없는 배제와 멸시 등이 당연히 생기는데 이는 이념이니 뭐니 하는 따위로 기준을 설정하는 순간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다. 다른 것을 다르게 같은 것을 같게 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자의 도덕경 되뇌이기, 기준, 표준이 없으면 혐오도 없다. 틀을 버리라. 지은이는 개인의 다양성을 지우고, 집단적 편견을 덧씌워 혐오하거나 증오해 마땅한 존재로 만들며 편견에 근거한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행위를 벌인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혐오해 마땅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노자와 공자의 테제/안티테제를 연상케하는 대목을 발견한다. 표준과 기준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무시, 배제, 차별, 편견을 낳게한다는 노자의 생각이 말이다. 공자의 틀의 세상, 이념과 기준의 세상, 당연히 어떠한 상태의 존재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프레임은 이미 근대사상이 됐다. 다양성, 자연성으로 존중하면 기준은 획일적이지 않게 되고, 때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며, 장애니, 차별이니, 배제니, 멸시니 하는 그런 혐오스런 것들이 일어날 수가 없게된다. 혐오사회를 읽으면서 노자의 사상을 생각한다는 라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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