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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고 음울하던 분위기는 다 어디 갔을까? 물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전부다'라고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편혜영의 글에 중독된다면 단연 글이 묘사하는 장면과 분위기에 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눈살찌푸려지는 설정과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단계 합숙소에 관한 묘사, 철거 직전 101호에서 끓여지는 장어, 고시원의 생활과 같은 모습들 말이다. 우리사회가 생산해내는 어두운 면들도 다양하게 소재화 되어 있다. 네트워크 마케팅 조직의 사육, 사채업자와 독안에 든 쥐마냥 발버둥 치는 채무자의 지독한 관계, 절도와 하극상 그리고 폐륜, 자살과 타살 잊혀지는 죽음 등 그러나 선의 법칙에서 주목할 만한 것들은 오히려, 마트생활에서 세오가 느끼는 안정감, 틱틱대던 수호의 어머니가 세오에게 열었던 마음의 발로, 기정이 하정의 죽음 이후 통찰하게 되는 하정의 살가움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존재론적 입장에서의 주체적 판단을 중시하기 마련이다. 관계론적 관점에서 주체는 결국 주체가 전제되는 타자에 대한 시선과 관심 그리고 연대에 있다. 고립과 자기착취가 극대화되는 조건(다단계와 사채 추심, 그리고 보람도 존경도 없는 교단)에서 악의는 더욱 확대 재생산된다. 세오는 미연에게 받아서, 부이에게 전달한다. 수호는 팀장에게 받아서 채무자들에게, 기정은 가정환경과 어머니의 기대라는 부담에서 시작해 악의적인 학생에게 발현시킨다. 그러나 주체와 자아는 타자와 관계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인식하면서 그러한 악의는 선의를 전환될 수 있다. 내가 세상에 향하여 가지는 태도를 선의를 바꿀때 선의 법칙은 완성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수호의 어머니를 죽임으로서 수호에게 자신의 고통을 그대로 전달하려던 세오는 마트에서의 안정감을 뒤로하고 다짐하지만 쉬이 결행하지 못한다. 팀장에 맞서려던 수호는 주저하고 만다. 그리고 언제 당하더라도 납득 안될 것 없던 복수를 당하고 만다. 기정은 하정의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나서 어머니가 하정에게 보인 감정이 악의만이 아니었음을, 자신이 하정에게 발산한 감정이 악의에 가까웠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관계는 점과 점을 잇는 선과 같다. 그 선의 성질이 무엇이어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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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너무 쉽게 아프고 무너진다. 돈 때문에 아프고 가까운 이의 죽음에 아프고 흘러가버린 시간에 아프고 가려진 진실에 아프다. 작은 따뜻함에 치유받기도 하지만 대게 산산히 부서진 조각을 한 켠에 묻어두고 산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또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얼마나 이런 감정을 잘 처리하느냐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잘 숨기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어째서 인간은 자신을 부서트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집착하고 슬퍼함에 또 다시 부서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