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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드 그루트의 《유전자의 기억》을 읽으며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게 있다는 걸 알았다. DNA 염기서열을 이용한 많은 고인류에 관한 연구들은 역사학에 속하는가? 혹은 역사학에서는 얼마나 깊게 인정하고 있는가? 나는 그런 연구들을 ‘과학(science)’의 분과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역사학을 압도하는 과학의 힘에 대해 지나치게 우위를 인정하면서 그 연구들이 품은 역사학의 질문을, 내지는 역사학 자체를 무시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제롬 드 그루트의 《유전자의 기억》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DNA, 또는 유전자, 나아가 유전학은 역사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역사학자는 너무 고리타분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물론 유전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역사학의 분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좁은 분야에만 천착하는 역사학자도 그렇게 많은 것 같지도 않다. DNA는, 유전학은 과거를 읽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역사 이해의 범위를 넓혀왔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도 바꿔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유전학의 영향에 관해서 일관적으로 정리해놓은 책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유전학의 세례를 받고 있으면서도 굳이 굳이 그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니면 유전학의 분석 방법에 대한 무지로 인해 유전학의 역사 읽기에서 이루어가는 성과를 겉핥기로만 이해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그런 의미에서 박정재 교수의 《한국인의 기원》과 같은 책은 정말 훌륭하다). 제롬 드 그루트의 《유전자의 기억》은 DNA 연구, 유전학이 역사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전면적으로 분석한 매우 드문 책이다. 그는 여섯 개의 개념(공공, 실천, 정치, 윤리, 상상, 자아)을 토대로 여섯 장으로 나누고 있고, 그 개념에 관련된 유전학, DNA 연구를 논하고 있다. 그것들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공공의 역사적 상상력에 DNA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유전학 데이터를 통해 역사적 실천에 도전하는 방식. 유전학적 지식이 현대와 과거의 정체성과 자아에 관한 규범적 이해에 도전하는, 말하자면 DNA 연구의 정치적 성격. DNA를 역사학에서 증거로 삼을 때 나타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논의 예술가들이 DNA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식 그리고 유전자 검사와 계보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가 현대인의 자아를 어떻게 구성해나가는지. DNA라고 하는,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로운 분자는 현대의 상징과도 같다. 이를 이용한 분야는 과학에만 그치지 않는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DNA 연구와 역사학의 관계에 대해서, 나아가 문화나 지식의 생산과 관련해서 깊게 파헤치지 않아 왔다. 이 책은 왜 그럴 필요가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추적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도 한 가지 아쉽다면,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는 책이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유전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전학의 범위를 정하지 않은 채 논의를 시작하다 보니 ‘DNA(의 염기서열) 분석 = 유전학’이라는 좁은 이해 속에서 유전학을 파악하고 용어를 쓰고 있다. 나름 감안하고 읽으면 되지만, 내내 거슬렸다. 그리고 동어반복이 많다. 같은 얘기인 것 같은데, 용어를 달리하고, 용어의 조합을 달리한 표현이 많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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