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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한 일이지만 이 책이 말하는 바를 파악할 수 없다. '말하는 바'라고 하기 보다는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 소설의 개요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이건 숫제 열린 결말을 추구하는 프랑스 소설의 모호성보다 더 희미하게 다가왔다. 이런 소설을 만나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독서에 있어서 만큼은 나는 간혹 지나친 호승심을 느끼곤 하는데, 이를테면 작가가 독자와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작품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아무리 꽁꽁 숨겨두었다 할지라도 나는 기필코 그 열쇠를 찾아내어 작가를 엿먹이고 말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하는 것이다. 사실 그 싸움에서 내가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누가 크게 기뻐하거나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한다. 단지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나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책을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하여 읽는 경우가 있다. 시간을 무한정 낭비하면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단 한 번 읽었을 때는 '이게 뭥미?' 하는 느낌밖에 없었다. 정말 그랬다. 그렇다고 이 얇디 얇은 책을 설럴설렁 읽었던 것도 아니다. 하나하나의 단어에 대해 어떤 상징성이나 함축적 의미를 파악하려는 나름의 시도도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읽어서인지 소설을 이루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구조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젠장, 나는 작가에게 지고 말았다는 열패감을 감출 수 없었다. 책이 얇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해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책의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나갔다. 간혹 의미를 두지 않고 넘어갔던 문장들이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내 시선을 붙잡았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시간은 더 걸렸으리라. 그러나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이것이다!' 생각할 만한 강한 느낌이 없었다. 근 일주일 동안 책의 순서를 신경쓰지 않고 제멋대로 읽었다. 예컨대 '1부 샤비'를 읽고 '4부 카롤리나'를 읽는다거나 '2부 알렘'을 읽은 후 '5부 튀라'를 읽는 식이었다. 때로는 '3부 발레리아'만 하루 종일 읽었다.
'뭔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으세요?'하는 질문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받았는지... 사람들은 내가 이 책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쉬워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도통 뭔 내용인지 알 수 없어서 그래.', 변명할 수 없었다.
2010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타이무르 압둘와하브(Taimour Abdulwahab)라는 남성의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이 책은 이민 2세대인 작가에게도 각별한 작품인 듯했다. 전 세계에서 일상처럼 흔한 일이 되어버린 테러, 그와 함께 확산되는 인종차별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 그리고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백색테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소수자, 약자, 혹은 혐오 대상자의 불안과 공포, 그 밑바탕을 이루는 정신적 기조에 대해 주인공 아모르를 통해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아모르, 한 가지 기억해 둬. 나는 홀을 향해 걸어갔다. 증오는 증오로 멈춰지지 않는 법이야. 신문 1면에는 부서진 자동차와 접근 금지 테이프, 연기, 그리고 제목이 보였다. 증오는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될 수 있어. 이게 영원한 규칙이야." (p.41~p.42)
소설은 친구 샤비가 주인공 아모르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 시작된다. 술에 취한 채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던 새벽에 말이다. 대화의 내용은 논리를 벗어난 듯 모호하다. 마치 술에 취한 두 사람이 각자 상대방의 얘기는 배제한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곧 이어 알렘의 전화를 받고, 또 발레리아의 전화를... 주인공이 전화를 받는 대상뿐만 아니라 전화를 받는 장소 또한 계속해서 바뀐다. 클럽에서 집으로 집에서 다시 테러 현장으로 시내로, 다시 집으로... 그러나 주인공의 동선 역시 구체적이지 않다. 실제와 의식 사이의 어느 한 지점인 듯, 현실과 의식이 한데 뒤섞인 플라즈마의 상태인 것처럼 혼란스럽다.
"나는 그의 머리색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 이걸로 충분해. 그래서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나의 걸음은 납이었고, 나의 눈은 네온이었고, 나의 팔은 비소였다. 그리고 경찰들이 등지고 서 있는 그 남자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는 나의 형제였다." (p.117~p.118)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미래에 대한 예측도, 적과 친구의 구별도, 심지어 이곳과 저곳의 경계 또한 구별하기 어렵다. ‘주류 사회’에 속한 이민자의 삶은 그 경계를 더 모호하게 한다. 공포와 경계심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네 발을 지녔건, 날개가 달렸건, 비늘이 있건, 아니면 털이 있건 간에 개개의 생명의 고유함에 대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P.107)
작가는 그 모든 상황을 전통적인 서사적 기법으로 보여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주인공 아모르가 처한 상황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심리를, 그리고 주인공이 스쳐가는 익숙한 환경을 주인공 아모르의 의식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의식을 통과하여 흐르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소설을 '나'(아모르)에 의해 전개되는 1인칭 시점이 아닌, 작가 자신의 의식을 통과하여 배출되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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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충돌이 낳는 긴장의 세계를 하루동안 말하다.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는 2010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제로 일어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나'라는 인물을 통해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누군가를 지칭하는 메세지들이 문자처럼 짤막한 단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스웨덴이라는 나라를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라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는데, 그 곳에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나면서 수면이 잔잔하고 평온했던 스웨덴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라 그 어떤 사건보다 더 큰 동요가 많았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전쟁을 겪지 않았던 나라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고통과 아픔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세계 여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지 실제 스웨덴이라는 나라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온하고 조용했던 나라는 한 사건으로 인해 혼란과 불안으로 점철되어 폭탄 테러를 감행했던 사람들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관계없는 아랍계 이주자인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나'를 절실힘 절감하고 있다. 아모르는 사건을 전해 받으며 용의자와 비슷한 인상착의 때문에 모아지는 시선이 그를 향하고 그는 이 일과는 전혀 무관한데도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눈초리 때문인지 혼란과 불안을 겪으며 진짜 내가 저지른 사건인 것처럼 스스로 망상에 빠져든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서 살았던 적이 없기에 인종차별에 대해 느껴본 적도 없고 이민자 사회의 갈등과 불안 또한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토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주하며 살고 있는 스웨덴에서 주류가 아닌 이민 2세로의 살아가는 삶은 너무나 힘이 든다고 들었다. 나라에서 뿌리를 박지 못하고 타국에서 이민자로서의 삶과 주류사회에서 느끼는 공포감이 서서히 배가 되어 그 사건과 관련이 없어도 소수자들을 바라보는 주류사회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사건을 저지른 범인도 아닌데 같은 동족이라는 이유 만으로 그들의 시선을 따갑게 받아내고 편견이 가득한 곳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약자의 내면을 그려냈다. 요나스 하센 케미리는 제임스 조이스가 쓴 작품처럼 나 아모르의 의식적인 흐름을 24시간, 하루의 이야기를 담았다. 의식적인 흐름 속에서 느껴지는 불안이 나인지 나와 같은 친구들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계속해서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처럼 반복, 또 반복하며 불안과 혼돈의 심리가 점점 더 심화된다. 150페이지가 안되는 얇은 책이지만 스톡홀름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더 냉혹해지고 보이지 않는 벽이 둘러쳐진다는 것을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사회의 돌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보여지는 이민의 삶과 두 문화의 충돌이 겪는 이단적인 모습이 스웨덴 사람과 스웨덴에 이민을 온 소수자와 약자 사이에 삶의 간격을 더 크게 벌이는 사건으로 각인되었음을 나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적인 불안감을 투영시켜주고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회 내에서도 주류와 비주류, 이민자와 약자 사이에서 야기되는 사건과 불안이 어느 사회에서도 존재하고 있음을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얇은 책이지만 다소 모호한 문장이 '나'라는 인물이 말하는 것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의미들이 맞는 것일까 하고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주인공의 불안함이 결국 혼돈의 결과를 가져왔고, 그것이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통해 의식적인 흐름으로 풀어낸 것 같다. *** 아모르. 한 가지 기억해 둬. 나는 홀을 향해 걸어갔다. 증오는 증오로 멈춰지지 않는 법이야. - p.41 무서운 일이 일어난 후에 너와 네 친구들을 휩쓸고 지나갈 거라고 위협하는 거칠고 험악한 바람. 아모르, 넌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어야 할 거야. 곧 조사 시간이 임박해 오니까. - p.43 가족은 가족이며 가족끼리는 서로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너는 내가 너를 돌봐 준 것과 똑같이 네 형제들을 돌봐 줘야만 해. - p.46 아니야, 사실이잖아. 그때 넌 약간 예의 바른 마르네슘이어서 지루한 알루미늄으로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로 나는 기억해. - p.50 아니. 내가 무슨 명언을 읊조리며 끊지는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저기 다른 나라에 발을 딛고 서 있고, 네 아버지는 같은 방에 있는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말이야······난······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슬퍼져서 명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기분이 들뜨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런 다음 끊었지 뭐. 그게 다야. - p.57~58 (생략) 전철에서는 소곤소곤 얘기하고, 극장에서는 조용히 웃고, 마치 보이지 않는 가스처럼 변해서 행동하도록 해. - p.60 언어는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만들어 내고 자신만의 뒤틀린 논리를 따라가게 된다. - p.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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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경험. 소설은 꼭 지문은 모조리 생략된 채, 대화만 나와 있는 희곡 같다. 스웨덴의 기대주라는 요나스 하센 케미리라는 작가의 소설이다. 제목은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우리 나라 명동과 같은 스톡홀롬의 드로트닝가탄에서 실제로 일어난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아모르. 그는 아랍 청년이다. 소설은 온전히 그의 내면으로만 채워져 있다. 전화로 자살 폭탄 테러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불안에 떤다. 테러는 자기와 같은 아랍인의 소행이었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 테러범으로 오인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현재 규정의 폭력을 당하고 있다. 아랍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아모르가 가진 모든 개성은 말살당하고 오롯이 그들이 규정한 '아랍인'의 틀에 끼워 맞춰진 형태로만 존재하게 되는 폭력. 아랍인에 의한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아모르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되어 그런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모르가 실제 그런 폭력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의심과 감시의 시선 그리고 경멸과 냉대가 그를 따라다니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오로지 그의 내부에서만 일어난다. 요나스 하센 케미리가 소설의 형식을 이렇게 만든 것도 바로 그래서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규정의 폭력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이제 그것이 너무도 깊이 내면화된 나머지 외부의 공격이 없어도 자신이 먼저 자기 검열부터 하게 되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자의 내면인 것이다. 마치 조건 반사와도 같은 그 과정을. 그렇게 아모르는 분단된다. 온전한 자신과 규정당한 자신으로 폭력적으로 갈라진다. 그 규정에 저항하고자 그는 친구와 옛 애인과 전화를 하면서(실제로 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내 생각엔 그 모든 대화가 실은 환상인 것 같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인한다. 친구 샤비를 헬륨이란 원소로 부른 그는 샤비가 그럼 너는 어떤 원소냐고 묻자 우눈트룸이라고 대답한다. 그게 뭔데? 합성 원소인데,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이야. 원자번호는 113이야. 원소 기호는 Uut (p. 22) 그는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 확정이 아니라 임시의 존재. 규정의 그물을 바람처럼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더이상 자기 검열로 인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 그가 스토킹했던 옛 여자 친구인 발레리아가 그에게 한 말 그대로 자신을 도시의 똑같은 일부로 만드는 규정의 마비 가스로부터 달아나려 한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넌 계속해서 집착하고 있는 거야. 나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그 사랑을, 이제는 바로 네가 끝내야만 해. 나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나를 고정관념으로 만들어 놨어. 그러는 바람에 상상 속에 만들어 놓은 나와 실제의 나는 결코 대응이 안 되는 거야, 알아듣겠어? (p. 86) 알아듣겠어? 발레리아가 아모르에게 하는 말은 사실 작가 케미리가 스웨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헤닝 만켈의 쿠르드 발란더 형사 시리즈가 잘 보여줬듯이, 또 스티그 라르손이 '밀레니엄 시리즈'가 여실히 드러냈듯이 스웨덴의 인종 차별은 뿌리가 깊고 심각한 상황이다. 이웃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한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한 이민 자녀 학살극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만한 사건이 아닌 것이다. 케미리의 이 소설은 실제 일어난 테러로 인해 더욱 심각해질 인종 차별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이렇게 규정의 폭력을 당하는 자의 내면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에 대한 모든 규정이 당하는 자들에겐 얼마나 묵직하고 둔중하게 영향을 끼치는 지 경험할 수 있도록. 정체성의 분단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념의 혼동 그리고 해소할 길 없는 불안. 이런 것들 모두가 신체의 멍과도 같은 정신의 상흔이 되는 것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런 규정의 폭력을 행하는 자들 또한 당하는 사람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내비친다. 당하는 자들과 똑같이 가해자들 역시도 자신의 고유함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자신이 개체성을 보존할 수 없듯이 가해자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늘 똑같은 연기를 해야만 하므로 개체의 고유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아모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난 맹세해. 너희같이 비겁한 사람들은 모두 색깔을 고백하지 않고 스며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 너희를 심판하는 날이 올 거야, 기다려 봐. 너희를 박살내고 말 거야. 알아들었어?(p. 110) 케미리는 인종 차별을 행하는 사람들 역시 처한 상황은 피해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분리 보다는 포용을, 증오 보다는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전화가 나타나는 이유이며 소설 전부가 대화로 이루어진 것의 까닭이다. 분명 낯선 형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그런 생경함이 이 책을 끝까지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갈등을 낳는, 하여 본질이라고 불러도 좋을 차별에 대해서 포를 떠서 말린 오징어처럼 오롯이 드러나는 당하는 자의 심리를 통해 공감을 바탕으로 천천히 실타래를 풀듯 조금씩 우리의 사유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설령 이야기나 문장이 암호문 같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낚시 바늘처럼 꿰어 이끌어내었을 저의는 우리도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정황을 가리켜 나를 거기에 대입시키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 소설이 꼭 인종차별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계층, 서로 다른 성별,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세대 간에도 얼마든지 통용 가능하다. 그 모든 지점마다 규정의 폭력은 쉽게 자행될 수 있으므로. 그런 곳마다 이 소설은 경고의 표지판을 세우려 한다. 타인을 향한 규정의 폭력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불과 136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지만 여운은 제법 오래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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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좀 난해하다. 꼭 지문없이 대사만 있는 희곡같은데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장면이 상상이 된다. 작가의 탁월함이 여기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다. 읽기 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해하기 어렵고, 특별한 묘사가 없는데도 주인공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독창적인 소설이다.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제 일어났던 자살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주인공 아모르(아랍계 이주민이다)는 친구 샤비에게 전화로 자살 폭탄 테러 소식을 듣고, 사건 발생 현장에 간다. 폭탄테러 소식을 뉴스로 접한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한다. 아모르. 한 가지 기억해 둬. 나는 홀을 향해 걸어갔다. 증오는 증오로 멈춰지지 않는 법이야. 신문 1면에서는 부서진 자동차와 접근 금지 테이프, 연기, 그리고 제목이 보였다. 증오는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될 수 있어. 이게 영원한 규칙이야. (41-42쪽) 아모르는 테러범이 아닌데도, 자신의 이름과 머리색깔, 피부색, 복장, 말투로 인해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자신을 잠재적 테러범으로 보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 수배자로 지정돼 미행이 따라 붙은듯한 느낌, 심지어 자신이 테러범이라 착각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 바로 지금이야.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면도를 해. 옷을 제대로 깔끔하게 챙겨 입어. 특히 주의할 것. 옷은 익명성을 적당히 보장할 수 있는 것으로.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오히려 평범함으로 튀게 하면 절대 안 돼. 팔레스타인 두건 '케피예'는 집에 놔둬. 의심을 살 만한 가방 같은 것은 들고 오지마. 집을 나서면 너희는 더 이상 너희가 아니야, 바로 그 순간 너희는 대표자로 바뀌는 거야, 그러니까 주변에 녹아들 수 있도록 집중하는 것이 특히 중요해. 어떤 것에든 그리고 누구에게든(애완동물과 쇼윈도 마네킹을 포함해서) 미소를 보여주도록 해. 최대한 정상적으로 걸어. 누가 문을 잡아주기라도 하면 감사하다고 크게 말해. 너희 때문에 미안하다고 사과해. 전철에서는 소곤소곤 얘기하고, 극장에서는 조용히 웃고, 마치 보이지 않는 가스처럼 변해서 행동하도록 해. (59쪽) '하산'이란 미들네임에서도 드러나듯이, 저자도 튀니지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랍계다. 이민자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소재로 한 소설을 주로 썼는데, 작가 본인의 경험이 투영된 자전적 이야기인 것 같다. 아랍,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은 유럽에서 골칫덩어리 이민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된다. 특히 폭탄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범죄가 일어나면 더더욱. 한편으로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모든 외국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가령, 미국 백인 남성이 국내에서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모든 백인 남성만 보면 손가락질하고 피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테러리즘은 없어져야 할 범죄임을 일부 극단주의 종파를 제외한 대다수의 아랍인이 인정하고 있고,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닌데, '이슬람=테러'라는 인식이 왜 이렇게 굳게 자리잡혀 있는 것인지, 오히려 선량하고 힘없는 소수에 대한 폭력은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유럽의 마이너리티인 아랍계 이민자 화자의 입을 빌려 풀어낸 이야기라는 점에서, 요나스 하센 케미리의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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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인데 문장이 띄엄띄엄 되어 있어 읽기가 편했다.
테러범의 몽타주가 자신,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과 닮은 아랍계 이주자 그대로였다.
소설의 진행은 주인공 아모르의 의식에 따른 흐름.
근무하는 학교에 다문화 아이들이 상당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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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자살 폭탄 테러입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시내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소설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2010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작가는 튀니지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짧은 이야기입니다.
스톡홀름 시내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나, 아모르에게 친구가 전화를 합니다. 형제 같은 친구 샤비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그래서 아모르는 신문 1면을 봅니다. 그리고 사건 발생 장소를 찾아갑니다. 자살 폭탄 용의자는 이라크인입니다. 아랍계 이주자인 아모르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불안과 망상에 빠져듭니다. 그렇게 실제로 혹은 상상 속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겁니다.
작가는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를 ‘꿈의 연극(Ett Dromspel)'이라고 짧게 정의했다고 합니다. ’꿈의 연극‘은 스웨덴의 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가 1902년에 쓴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세계 연극의 극작과 공연에 표현주의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가가 이 작품에 자신의 작품을 비교했다고 합니다. 읽어보니, 희곡 같고, 주인공의 망상이 있으니, ’꿈의 연극‘이라는 정의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모르의 24시간, 그 혼란과 불안의 내면을 자세히 그린 연극이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아랍계 이민자는 어떤 존재일까요? 소수자, 약자, 주변인, 이방인. 때로는 혐오 대상자이겠지요. 아랍계의 자살 폭탄 테러가 있고 난 후는 그들이 바로 혐오 대상자일 겁니다. 그 시선이 고통이 되겠지요. ’비록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찼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는 것으로도 역시 가득 차 있다‘라고 합니다. 헬렌 켈러의 말입니다. 시각 장애인이었던 그녀. 그녀도 약자였습니다. 그렇지만, 불안의 고통을 극복하려고 한 그녀. 스웨덴의 아랍계 이주자인 그들도 고통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 내면의 소리를 자세히 들어야겠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을 읽고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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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 이야기 2015-130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요나스 하센 케미리 / 민음사 이 소설은 주인공 아모르의 내면 모놀로그 형식으로 되어있다. 첫 장을 열면 두 사람이 책 제목에 시사되었듯이 그들의 형제(친구)들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이 묘사된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 방금 전 정말 황당한 일이 일어났어. 들었어? 한 남자가 있었는데 말이야. 차가 한 대 있었는데 말이야. 두 번이나 폭발이 일어났어. 시내 한 가운데서..”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 아니, 아무도 잡히지 않았어. 의심받는 사람은 없어. 아직은 아니야. 그런데 이제 시작한다. 너희 준비해.” 이 작품은 2010년 12월 11일 서울의 명동거리나 마찬가지인 스웨덴 스톡홀름 드로트닝가탄에서 실제로 일어난 자살폭탄테러가 배경이다. 용의자는 스웨덴에 이민 온 이라크 출신 압둘와하브로 밝혀졌다. 폭탄을 채워놓았던 압둘와하브의 자동차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붐비던 시내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압둘와하브는 폭탄을 넣은 백팩을 메고 배에 폭탄을 두른 채 백화점과 상점이 운집한 시내 중심가를 뛰어가던 중에 폭탄이 터져서 죽었다. 이백년 넘게 어떠한 전쟁과 분쟁도 겪지 않은 중립국가인 스웨덴이었기에 그 내부적인 파장이 더욱 컸다.
“에이, 빌어먹을, 샤비한테 대체 뭘 기대한 거야? 놀랐어? 우린 인종차별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쟤네들이 인종차별주의 정당에 투표하는 게 당연하잖아.” 소설의 주인공인 아모르는 친구 샤비로부터 자살폭탄 테러 소식을 접한 후 사건 발생 장소를 찾아간다. 아모르는 실제로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스톡홀름 시내와 거리에서 자기 피부색과 머리 색, 이름 때문에 심한 자의식을 느낀다. 마치 자신이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몹시 혼란스럽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 한다 : 며칠 납작 엎드려 있어. 집에서 나오지 마. 불은 꺼 두고, 문은 꼭 잠가. 차양을 비스듬하게 쳐서 밖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너희들은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잘 조절해 둬. 텔레비전 케이블은 빼 두고, 전화기는 꺼 두고, 신문은 바로 재활용 통에 갖다 버려. 모든 게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 아모르는 스웨덴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이 소설의 작가 요나스 하센 케미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1978년생인 작가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튀니지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003년에 발표한 「빨간 눈」이 이듬해 베스크셀러가 되면서 스웨덴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급성장한다. 「빨간 눈」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는 작가가 공연을 염두에 두고 쓴 희곡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이 출간되고 나서 2013년 1월에 말뫼 시립극장에서 초연된 후 꽤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다. “어제는 지나간 역사, 내일은 알 수 없는 신비, 하지만 오늘은 선물이라네..” (이 부분은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 나오는 대사다.)
“집을 나서면 너희는 더 이상 너희가 아니야. 바로 그 순간 너희는 대표자로 바뀌는 거야. 그러니까 주변에 녹아들 수 있도록 집중하는 것이 특히 중요해. 어떤 것에든 그리고 누구에게든(애완동물과 쇼윈도 마케팅을 포함해서) 미소를 보여 주도록 해. 최대한 정상적으로 걸어. 누가 문을 잡아 주기라도 하면 감사하다고 크게 말해. 너희 때문에 미안하다고 사과해. 전철에서는 소곤소곤 얘기하고, 극장에서는 조용히 웃고, 마치 보이지 않는 가스처럼 변해서 행동하도록 해.”
짧지만 몰입이 필요하고, 임팩트가 강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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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설레임이 바로 즐거움인 것이다. 오늘 만난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바로 이 소설 또한 기존과는 다른 시각의 소설이다. 익숙하지 않기에 처음부터 쉽사리 머리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익숙해져가면서 새로운 것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네요. 하루동안의 주인공 아모르의 머리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편안한 상태의 머리속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써의 불안감과 혼동의 머리속으로 들어가는 까닭에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주변 상황을 이해하면서 그런 혼란이 오히려 이해가 되네요. 스톡홀름 시내에서 발생한 폭발 테러사건과 그 사건의 주범은 주인공과 동일한 유색인종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쏠리는 불신과 의혹에 가득찬 눈초리를 받는 것만으로도 엄청한 위축을 받는다. 자신의 고향에서 동일한 사건이 발생하였다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일상생활에 문제도 없겠지만, 이주한 이곳에서는 주위와 다른 외모로 쉽사리 눈에 띄고 더불어 범죄자로 오인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생각한다면 마음을 짓누르는 그 감정은 사회적 소수자의 입장을 격어보지 않으면 짐작은 하겠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네 발을 지녔건, 날개가 달렸건, 비늘이 있건, 아니면 털이 있건 간에 개개의 생명의 고유함에 대해 모두가 존중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동물의 권리라는 단체에서 걸려온 통화로부터 들을 수 있는 이 말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어떠해야 하는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마지막에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방금 아주 미친 일이 일어났어. 집으로 가는 길에 대단히 의심스러운 사람을 봤어. 머리가 검고 예사롭지 않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얼굴은 팔레스타인 숄로 가리고 있었어.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게 내 모습이라는 걸 알아차리는데 1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았어." 머리속에서 희망하는 것과 달리 현실에서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물에게는 권리를 소수자에게는 비난의 눈길을....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하는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지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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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비주류 이슬람의 설움을 토해 낸 독특한 형식의 소설~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로 시작해서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한다.’로 끝나는 소설이다. 시종일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받는 내용만 담겨 있기에 사건의 추이는 대화의 내용으로만 짐작해야 한다.
도심에서 한 남자가 벌인 듯 한 자동차폭발 사고를 본 샤비는 주인공 아모르에게 다급히 전화를 한다. 가족처럼 여기는 친구에게 의심받는 행동을 하지 말도록 말이다. 이들이 사건과 연루되지 않았지만 몸을 사리도록 서로 전화를 하는 습관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생존기술이다.
아모르는 형제 같은 친구 샤비로부터 자살 폭탄 테러 소식을 접한 뒤 사촌인 알렘에게서도 같은 전화를 받는다. 집에서 나오지 말고 전화기도 꺼 두고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불 꺼진 집에서 숨 죽이고 있으라고 한다. 아모르와 그의 친구들은 피부색이나 머리 색 등 인종적인 특징 때문에 미행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에 강도, 도둑, 폭발사고의 관련자들로 지목되는 현실 앞에서 저항하기보다 일단 피하라는 메시지들을 주고받는다. 스웨덴 사회의 비주류인 이슬람인들이 받는 인종차별, 을의 위치에 선 소수자의 비애가 전화선을 타고 흐른다. 결국엔 테러범이 자신이라는 착각까지 들게 만드는 현실이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자살폭탄 테러가 빈번해진 요즘, 폭탄테러의 주범들은 주로 이슬람 계다. 그래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이슬람인들을 범인 취급하는 분위기다. 다문화 사회인 스웨덴 역시 매 한가지인가 보다. 이슬람 계 사람들이 잠재적 자살 폭탄 테러범으로 인식하게 되는 분위기, 집단적 증오의 대상이 된 이야기가 폐부를 찌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메르스 사태로 해외를 여행하던 한국인들이 받은 오해처럼 말이다. 이슬람 계통의 사람들이 더 이상 자살 폭탄 테러를 벌이지 않는 그 순간까지 어쩔 수 없이 계속될 오해가 아닐까?
이 소설은 2010년 12월 11일 스톡홀름의 쇼핑 거리 드로토닝가탄에서 발생한 타이무르 압둘와하브의 자살 폭탄 테러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압둘와하브의 손에 쥐고 있던 압축폭탄이 먼저 터지면서 시내가 엉망이 된 사건 이후 이슬람 이주민들은 혐오 대상으로 몰리는 설움을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편견과 오해의 이야기다. 이민자, 이슬람계, 소수자는 혐오대상으로 내몰리는 현실을 다루며 약자들의 설움, 비주류의 슬픔, 왜곡과 편견에 대한 경종 같다. 그래도 이슬람인들이 더 이상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하지 않는다면 오해는 사라지고 편견은 줄어들 것이다. 어쨌든 비주류 이슬람의 설움을 토해 낸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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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글로 쓰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소설들을 좋아했다. 이런 생각은 도스트옙스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노파를 죽였다는 하나의 사건은 이미 결말이 나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전개는 사건이 아닌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 된다. 나폴레옹과 같은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는 자기정당성에 대항하여 자기 안에서 쏫아나는 죄의식과의 싸움이 쏘름끼치게 글로 표현되어 있었다. 당혹스러웠고, 놀라웠다. 이 소설이 그렇다. 이 소설은 스웨덴에서 발생한 차량 폭파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그로 인해 아랍계 사람들이 의심을 받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 아모르의 친구 샤비가 그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용은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몇 일 동안 집 안에만 처박혀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주인공은 여러 사람들과 전화를 한다. 이 소설은 구성은 주인공이 전화를 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전화대화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화가 아니다. 대화는 모호하고, 말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1차적인 대화를 주인공의 의식에서 한 번 걸러서 2차적인 대화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전화상의 대화는 두 사람의 대화라기 보다는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같다. 그리고 그 의식의 흐름은 폭파사건으로 인해 부당한 의심과 모멸을 당하고 있는 주인공의 분노와 불안을 따라가고 있다. 소설은 전화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전기드릴을 바꾸러 가는 과정, 같은 아랍계 사람이 검문을 당하는 과정등을 통해 느끼는 분노와 불안을 표현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의식은 단순히 분노와 불안에서 점점 폭파사건의 용의자와 자신을 점점 동일시하게 된다. 폭파사건 용의자를 향한 사람들의 집단 분노가 결국 자신과 같은 아랍계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방금 아주 미친 일이 일어났어. 집으로 가는 길에 대단히 의심스러운 사람을 봤어, 머리가 검고 예사롭지 않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얼굴은 팔레스타인 숄로 가리고 있어어. 나는 내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게 내 모습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1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았어." (P137) 주인공이 느꼈던, 아니 저자가 느꼈던 의식의 분노와 불안을 독자들도 경험하게 하는 당혹스러운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