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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집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는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노인들 ]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 오래된 서적 ]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 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을 생각도 못햇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 엄마 걱정 ]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무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그집 앞 ]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사랑 잃었네
[ 입 속의 검은 잎 ]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일이 터졌다, 얼마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럼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소/라/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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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더 생각나는 글이 이 시집 안에 있다. 추울수록 더 그랬다. 그래서 오래 전에 사 놓은 시집을 펴 보았다. 이런, 제본 상태가 위험하다. 자칫 책장이 떨어져 나올 것만 같다. 이 시집을 이렇게 다루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이 모셔 두는 것으로, 내겐 이게 보물이고 명품이므로, 늘 설레는 시간을 가져다주는 귀한 선물이므로. 안 되겠다, 한 권을 새로 구입해야겠다. 그래서 얻은 새 책.
그리하여 이 글은 사실 리뷰가 아니다. 자랑이고 허세다. 내게도 이런 책이 있노라, 곧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지만 인지가 붙어 있는 초판본이 있었더란다, 이건 소중히 보관하고 읽고 싶을 때는 새로 구한 이 시집을 펼쳐 보아야겠구나, 보잘것없는 자랑이어도.
115쪽에 '램프와 빵'이라고, 부제로 '겨울 판화6'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조금도 겸손하지 않은 채, 곧 눈이 내리겠다고 예보되어 있는 저녁에 나는 이 시 전문을 옮겨 본다. 어째, 이 시집을 펼쳐 놓은 동안에는 겸손하지 않은 내가 부끄럽지도 않다. 도리어 점점 더 뿌듯해진다. 눈발이 내리고 날리고 쌓이더라도 겸손하지 않은 이 순간에는 추위도 못 느낄 것 같다. 겨울 판화 1,2,3,4,5,7이 내 옆의 추위를 물리쳐 줄 것을 믿는다.
영원히 서른 살에 머물러 있는 시인, 살아 있을 때는 나보다 위의 사람이었는데 이제 나는 그보다 아주 많은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 시집을 볼 때면 그때의 어린 시절로 금방 돌아간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이 시집을 손에서 놓을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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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1일 1페이지 인문학 여행 한국편』을 보면서 기형도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만 스물아홉 생일을 일주일 앞둔 날 급성뇌졸중으로 숨진 시인 기형도, 그가 남긴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50만 부 이상이나 판매되며 시집으로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며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제대로 읽고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예전에 읽었는데, 집에 기형도 시인의 시집이 있었는데 어디 갔지?, 그런 생각들은 접어두고, 새 마음으로 새로이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어보게 되었다.
시인 기형도씨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했으며 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문화부·편집부 등에서 근무했다.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독창적이면서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89년 3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시집에서 기형도 시인은 일상 속에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로테스크 현실주의로 명명될 그의 시 세계는 우울한 유년 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여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 공간 속에 펼쳐보인다. (책날개 작가 소개 전문)
가장 먼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 「안개」가 첫 장에 실려 있다. 꽤 긴 산문시다. 이 시가 나온 지 4년 2개월 만에 기형도 시인은 세상을 떠났으니, 더욱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의 시는 어둡고 아프고 쓸쓸하다.
고통을 녹여낸 시 속에 피가 흐르는 듯하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 그때의 상황을 드러내는 시가 있다.
「엄마 걱정」이라는 시를 나는 몇 번이나 읽은 지 모르겠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아프고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서 가슴이 아려왔다.
널리 알려진 그의 시 「빈집」은 감상하는 시점의 마음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가 청춘의 고뇌와 쓸쓸함도 모두 어둠 속에 묻어버렸다는 심정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저렸다. 한참 행복할 나이에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슬픔을 뿜어내는 듯한 글들이 계속 연결되었다.
온전한 아픔으로 청춘을 마감한 기형도 시인, 청춘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생을 마감한 시인, 고통을 호소하며 살다 간 시인, 너무 이른 나이에 요절한 시인……. 더 많은 이야기가 연결될 것 같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다들 공감하며 아파할 듯하다.
예술가들의 삶은 행복한 것보다 고통스러워야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것 같아 처절하게 아프다.
이 책만 보아도 초판 24쇄 발행, 재판 68쇄 발행되었으니, 기형도 시인의 시는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며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형도의 세상은 눈물의 세상이었다. 그 세상을 이 책에서 만나본다. 마음을 울리는 시여서 감상의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직접 구매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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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좋아하던 시인 중 한 명 이었는데, '안개', '엄마 걱정' 같은 시는 공부를 하면서 자주 봤던 작품이라 그저 기억 속에 묻어두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문득 예전에 보았던 다른 시들이 생각났다. 이북으로 구매할까 싶었지만 소장하고 싶어 책으로 샀다. 투박한 표지와 두 손으로 넘겨보기 좋은 작은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기형도 시인의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는 '질투는 나의 힘'이다. 특히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가 가장 곱씹어보는 시구 중 하나다. 질투는 나에게 힘이 되었을지언정 정작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화자의 심정을 떠올려보게 된다. 그의 시에는 사무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녹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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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제목과 수많은 리뷰에 끌려서 정말 오랜만에 시집을 샀다 서점에서도 워낙 베스트셀러라서 시 부문에서 제일 앞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설과는 다른 맛이 있다 어려운 시구나 그런건없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내용과 담담한 위로를 담고 있어서 좋고 이 책이 왜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지 알거 같다 우리 사회가 지금 많은 아픔을 겪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긴장하고 힘든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정말 고생했다고 이 책이 토닥토닥 하고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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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에게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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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은 7, 80년대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 가난과 고통을 글에 녹여낸 한편 일면의 따뜻함과 희망을 노래한 시들은 많이 남겼다. 어릴적 아버지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셔 가장노릇을 못했고 둘째누나는 어릴때 요절한 터라 그의 삶은 어둠이 많았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도 그를 많이 힘들게 했을것이다. 그에게는 7, 80년대가 지옥같았을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그시대가 지옥같지는 않았을것이다. 본인은 범죄없고 통금이 있고 낭만이 있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 군부의 압박과 통제가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멋이있었다. 기형도 시인에게 지옥이었던 그시절이 내게는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あの頃は良かっ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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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메모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이 메모를 읽으며 시집에 수록된 시를 하나씩 반복해서 읽습니다. |
| 시집의 매력에 빠질 것만 같은… 기형도 작가의 시 너무 매력있네요……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인데 역시나 마주하는 하나하나의 시들이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다들 시의 매력에 푹 빠져보시는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