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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무엇인가? '죽은 자'를 눈으로 많이 보았다. 죽은 자의 몸에 손을 얹은 느낌은 '차갑다'. '산 자'가 '죽은 자'로 변화는 극적 순간도 옆에서 직접 경험하였다. 그럴지라도 아직 나이가 '죽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고민, 이성적 고뇌에 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죽음은 누구에게 찾아오는 필연이지만 우리네 인생은 자신에게는 '우연'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언젠가 필연으로 다가올 죽음을 한 번 정도 생각해봄직 하다.
유호종의 <떠남 혹은 없어짐- 죽음의 철학적 의미>를 읽어가면서 '죽음'이라는 단순한 단어적 의미뿐만 아니라 나에게 이성이 있다면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인식적, 정서적, 실천적 측면에서 죽음을 논하고자 하였다. 유호종은 우리 나라가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여 진지한 고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종교와 문학이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일반인과 특히 철학을 하는 이들까지 죽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말한다. 죽음을 과학적 사고로 '무'라는 개념으로 전락시켜 인간과 세계의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철학자들이 죽음을 방기하고 있다 일갈한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순교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여 나중에 바울 사도가 되는 사울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이다. 사울은 스데반을 공격하는 선봉에 선다. 나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깨닫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라면 스데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스데반은 교회를 위하여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울을 쓰신 것이다.
자 죽음은 나쁜 것인가? 유호종은 여러 예를 들어 죽음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죽음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함으로서 나쁘다. 죽음은 나의 것을 빼앗아 가기 때문에 나쁘다. 죽음이 외면 받는 이유는 어쩌면 '죽음' 저 편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까지 다다른 이들이 자신이 경험한 죽음 저편을 말하지만 사실 그 경험이 육체가 이 땅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죽음 저편을 알 수 없기에 사람은 죽음을 나의 모든 것을 배앗아 가기에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죽음이 보편적으로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가족, 물질, 명예, 생명까지도. 그럴지라도 죽음은 부정적만 가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의 고통보다 현재의 삶이 더 고통스럽다.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일까? 내 죽음은 내가 경험할 수 없다. 고민되는 일이다.
그럼 죽음은 축복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죽음을 이런 면에서 좋은 것으로, 나쁘지 않는것으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스데반과 같은 죽음. 절대자를 믿는 나로서 죽음 자체가 저주였지만 신의 한없는 사랑을 받은 나는 죽음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목이기에 축복으로 믿는다. 죽음 '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이라 규정하고 있다. 철학적 정의라 할 수 있겠다.
어떤 죽음이든 '죽음' 자체를 나쁘다 아니다로 규정하기 보다는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받아 들이고, 죽음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유호종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죽음을 나쁘게만 생각하니 육신의 장막이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존재를 기계를 통하여 연명하려고 한다. 종교적 신념과 도덕론, 현실론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 이런 논의 배경에는 죽음을 주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진다면 논란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 죽음이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일지라도 죽음 그 자체를 받아 들인다면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다.
"죽음 후는 지상에서 적용되는 적당함이나 마땅함의 관념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가령 천국과 지옥이 실제로 있다면 그곳은 지상의 기준으로는 매우 부정의한 곳이다. 선한 행위는 지나치게 크게 보상받고 악한 행위는 지나치게 크게 처벌받기 때문이다. 또한 가령 죽음 후가 무라면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을 것이고, 죽음 후가 브라만과 같은 절대존재와 하나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죽음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본문 133쪽) |
| 내 주위에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죽음이란 문제가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두렵고 막막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두렵고 무서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에 대해 알아야겠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아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 두려움도 없앨 수 없었고 죽음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아직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죽음에 관한 글을 읽는 동안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란 현상에 좀더 친숙하고 익숙해졌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죽음에 대해 세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인식적, 정서적, 실천적 측면이 그것이다. 철학적, 논리적 기술이 내겐 좀 까다롭게 느껴진다. 실천적 측면에서 논한 뇌사자에 대한 생사의 판단문제는 현실적이고 흥미로운 주제였다. |
| 개인적으로 죽음의 의미는 자신의 성찰에 있다고 본다. 물론, 타자의 죽음이든 자신의 죽음(완전히 죽는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볼 수 없으니, 자살의 실패와 같은 경우)이든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직시할 수 있는 어떤 문제제기와 판단의 장을 보여준다. 즉, 그것을 마냥 두려워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분명히 하자는 이면의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썼다고 해서 마냥 죽음을 관조적으로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제기하는 개인과 사회적 문제에서 시작하여, 의식의 소멸문제와 같은 첨예한 논제가 일단 앞부분에서 소개된다. 이것은 (현대) 철학적 논의를 쉽게 풀어쓴 것으로 흥미를 돋궈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책 중반에서는 죽음의 가치를 내재적 가치와 비교적 가치로 나눠 살펴보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인간이 언제 죽는지의 문제와 죽음의 존재적 의미, 실천적 의미를 이야기한다. 사실 살아있는 문제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선택은 바로 죽음을 넘어서 있거나 죽음과 같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 책은 그런 고민에 대해서 진지하지만 깊이 있는 이야기 상대자가 되어준다. 죽음을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고민으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의 생각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죽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
|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있어서 두려운 경험임에 틀림없다.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가 소멸한다는 것, 더 이상 ‘나’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그 두려움만으로도 한 개인에게 혹은 집단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얼마나 논리적으로 죽음의 과정 혹은 죽음이 갖는 의미를 잘 파악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한다. 오히려 특정 종교에 귀의하는 행위를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한다 는 식의 설명이 나에겐 더욱 잘 다가온다. 수많은 주제 중에서 죽음은 하나의 철학적 테제로 여겨질 정도의 웅장함을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죽는 그 순간 이미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라는 식의 허무주의적 논쟁도 가능하지 않나 생각된다. 저자가 죽음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나는 일종의 의도적인,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에 대한 주입을 꿈꾸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왜 틀렸는지를 밝히는데 주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난 죽음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어떠한 생각도 옳고 그름의 범주에서 파악할 순 없을 듯 하다. 실제로 육체이탈을 경험했거나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죽음은 우리에게 가까우면서도 멀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허무주의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과정, 그에 대한 논리를 하나하나 면밀히 철학적으로 고찰해보는 것 자체가 사치로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죽음의 경험과 죽음에 대한 수많은 논리들이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와도 같지 않을까 생각된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이 삶과 죽음 사이에 또 다른 과정을 만들어놓았고 그로 인해 죽음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졌노라고 이야기한다. 뇌사자에게서 장기를 적출하는 것은 허락하면서도 장례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금기시하는 것이 뇌사가 죽음과는 또 다른 상태라고 사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이며, 그러한 이유에서 본인은 뇌사 아닌 심폐사만을 죽음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합의는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며, 장례 지내지 않을지라도 장기적출을 허락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사람에게서 정상적인 혹은 이전과 같은 삶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된다. 살아있는 하지만 수술 후 아직 혼수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에게서 장기 적출을 하지 않는 것은 그가 언젠가는 깨어난다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사자를 그러한 믿음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장기 적출이 가능하지 않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또한 그것은 장기적출 여부를 넘어선 윤리적이며 기술적인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지금으로서는 뇌의 기능이 정지했으며 깨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이야기하나 의학기술의 발전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연적으로 죽는 것 조차 유예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뇌사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닐 수도 있으며, 삶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어질 수도 있다. 단순한 철학적인 함의만으로 죽음의 개념을 정의내리고 이것이 죽음이다 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없앨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출생과 더불어 인간에게는 단 한번만 존재하는 경험이라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닌 체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학문으로부터 시작된 피상적인 이해는 머리로는 동의하나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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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가기, 뛰어넘기, 함께하기 죽음은 철학에서 중심된 화두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가장 절박한 문제가 이토록 홀대당한 이유는 죽음이란 경험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지만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이유가 죽음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가로막는다.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이란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이다. 1인칭 죽음으로서 나의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이 산 자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려면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 이런 죽음은 2인칭 죽음으로 삶을 무겁게 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죽음의 기사는 3인칭 죽음에 불과하다. 우리 삶에 죽음을 고뇌할 진동을 유발하지 않기에 그렇다. 저자는 죽음을 유명한 철학자의 입을 빌려 전달하지 않는다. 앞서 거론한 세 질문에 자신이 고민한 답을 내놓는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앞선 두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은 고민해볼 거리를 던진다. 첫째로, 내가 죽은 뒤 나는 사라지는가라는 인식적 질문에 답한다. 죽음이 가져오는 의식소멸이 반드시 나의 존재가 무로 돌아간다는 결론을 이끌지 못한다. 칸트의 도식을 빌러 경험적 참은 절대적 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인식의 한계로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둘째로, 나의 죽음이 반드시 나쁜가라는 정서적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죽음이 나쁘다라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비교가치 또는 내재가치를 따져야 하는데 어느 비교도 죽음이 나쁘다라는 결론을 이끌 수 없다.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규정하기 보다 소극적으로 결론내린다. 이 정도의 결론에 만족할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죽음이 끝이 아닐뿐더러 나쁘지 않다는 희망을 이 책은 내비친다. 이 얼마나 희소식인가? 하지만 저자의 논증은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첫째, 인간 인식의 한계를 들어 죽음너머가 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내가 보기에 여전히 인간의 죽음 뒤에는 무가 올 가능성이 크다.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더 확실한 지식을 포기하는 게 합당할까? 둘째, 죽음의 가치판단이 힘들기에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은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선택한 삶의 양태에 따라 죽음의 가치는 달라진다. 우리의 선택하는 삶에 따라 죽음의 가치는 달라지는 문제이다. |
| 잠이 쉬 들지 않는 날 문고판 책 한권 정도면 밤이 금새 깊어진다. 그러나 책세상문고는 그리 가볍지 않다. 지은이 유호종은 우리나라에서는 죽음에 대한 논의가 문학이나 신학 그리고 종교학 정도에서 가끔 있었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논의는 거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철학이 논리학을 밑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이 책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간명하게 전달하려는 지은이의 노력이 돋보이긴 하지만 나같은 둔재가 쫓아가기에 숨가쁜 측면이 적잖이 있다. 쉽지 않다는 말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뇌사와 심폐사를 둘러싼 죽음의 기준에 대한 논리적인 결론이다. 산자가 죽은자로 되는 존재적 의미에서는 뇌사와 심폐사가 죽음의 기준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우리가 산자를 죽은자로 대해도 되게 만드는 사건이라는 실천적인 의미에서는 즉, 우리가 장례를 치를 수 있냐는 실천적인 의미에서는 심폐사만이 죽음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두가지를 종합하면 죽음의 기준은 심폐사라고 결론내린다. 그렇지만 뇌사자가 죽은 사람으로 보지 않더라도 장기를 적출할 수 있는 정당성은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부당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학습되어 체화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은 뿌리깊다. 이 책과 같이 삶이 아닌 죽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이야기해보는 다양한 시도가 앞으로 있었으면 좋겠다. 철학적으로 죽음을 규명하는 작업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만들고 현생을 살아갈만하게 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
| 최근 아주 가까운 분이 돌아가셨다. 그 전과정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어제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오늘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존재가 바로 사라져버리는 것인가? 그 사람이 남긴 기억과 쓰던 물건들은 변함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 이 책은 돌아가신 분을 잊지 못하는 분들을 위로하고 있다. 이 책 어느 곳에도 망자를 위로하는 직접적인 글들은 없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만큼은 그 어느 글보다 명쾌하다. 사실 죽음이란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나서 한번은 죽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산다면 역설적으로 삶은 보다 풍요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잘) 죽기 위해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