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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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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수 없다 ]   이슬 내린 풀밭을 걷다 뒤돌아보았다 이슬길이 나 있다 내 발등이 어제보다 무거워졌다 내가 디딘 발자국을 가만가만 되찾아 디뎌야 집에 닿을 수 있다     [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잘 왔다 어제와 이어진 이 길 위에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준다 해야 바람아 흰 구름 떼야 내 자리를 찾아온 여러 날이 오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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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수 없다 ]


 

이슬 내린 풀밭을 걷다 뒤돌아보았다 이슬길이 나 있다

내 발등이 어제보다 무거워졌다

내가 디딘 발자국을 가만가만 되찾아 디뎌야 집에 닿을 수 있다

 

 

[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잘 왔다

어제와 이어진


이 길 위에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준다

해야 바람아 흰 구름 떼야

내 자리를 찾아온 여러 날이 오늘이다

알 수는 없지만

어느, 고요에서 태어난 바람이 온다면

가벼이 날아오를 수 있다

기다려라 마음이 간 곳으로 손이 간다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둔다

 

[ 내 눈에 보이는 것들 ]


 

누구도 불행하게 하지 않을 마른 낙엽 같은 슬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새들의 얼굴에 고요

 

누구의 행복도 깔보지 않았을, 강물을 건너가는 한 줄기 바람

 

한 번쯤은 강물의 끝까지 따라가봤을 저 무료한 강가의 검은 바위들

 

모은 생각들을 내다 버리고 서쪽 산에 걸린 뜬구름

 

그것들이 오늘 내 눈에 보이던 날이었다


 

[ 눈 오는 강에 나가 서는 날에는 ]

 

눈보라 속에

나무들이 서 있다

등에 눈이 쌓인다

강물 속에 앉아 있는 바위들은 눈을 받아 머리에 쌓고

흰 도화지 같은 눈보라 속을 찾아온 새들이

눈 위로 나온 마른 풀대에 모여들어 풀씨를 쪼아대다 눈 속에 빠진다

그것은 모두 배고픈 하얀 그림

새들을 불러야 할까 말까 주머니 속

쌀을 만지작거리다가
 

눈 속에 발등을 묻으며 눈 오는 강에 가면

눈 날리는 강에 나가 서는 날에는

나는 그것이 번민이어서

휘어지는 등에는 눈이 쌓이고

그것은 또 사랑이어서

눈 오는 강에 나가 서 있는 날에는

그런 날 밤에는

내가 자는 방 처마 끝에서

고드름들이 길어지고

마루에 쌓인 눈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온 새들의 희미한 발자국들이

어지러웠다

 

 

[ 일어설 수 있는 길 ]


 

오래된 길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꿈꾸는 모습

아버지와 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녔던 발자국이

햇살 속 바위에 벽화처럼 짐의 무게로 희게 남아 있다

돌들은 자국을 쉽게 지우지 않는다

아버지의 길은 나의 현실이 되어간다

홀로 걷는 산길, 아버지의 외로운 발걸음은 지금 보아도 외수가 없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는 족제비와 바위 굴 속 다람쥐

낙엽이 쌓여 썩은 바위틈이나 나무 밑동, 바람이 지나가고

햇살이 들었다가 금새 사라지고, 빗물이 고였다가 마르고,

눈이 쌓여 있다가 녹던 곳


마른 나뭇잎 뒤 축축한 곳이 발 많은 곤충들의 집이다

새들이 날아가는 나뭇가지 사이,

별들이 바스락거리며 지나다니는 그곳

내가 꿈을 꾸는 곳, 보행자의 길

거센 바람에 휘어졌다가 일어서는

힘으로 이기고 선 눈 매운 나뭇가지들처럼

눈을 씻고 다음 발길을 옮긴다

잊은 다음을 잊어야 다음이다

토끼와 노루와 수꿩이 앞서 지나간 길

보폭이 보인다

쓰러진 풀잎을 뛰어넘고 어린나무들 비켜 돌아간 긍정의 길

나뭇가지에 얹혔다가 자유를 누리며 다시 떨어지는 수긍의 눈송이들, 그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내가 꿈꾸는 모습


다람쥐가 바위를 딛고 다음 바위를 딛는 믿음

작은 벌레들이 마른 참나무 잎을 넘어가는 소리

돌들이 없다면 어둠은 어디서 오고

물고기들은 어디다가 정든 집을 지을까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간다

 

 

...  소/라/향/기  ...

s******8 2021.09.18. 신고 공감 28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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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은 파렴치해 보이고 조율은 언제나 실패하니... 김용택,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타협은 파렴치해 보이고 조율은 언제나 실패하니... 김용택,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내용보기
무너져 내리는 고통의 더미들에는 여러 종류의 허접한 감정들이 있다. 그러니까 애매한 억울함이나 단단해지지 못하는 분노, 불편한 죄책감과 금세 날아가버리는 가벼운 슬픔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폐허가 된 나란 존재를,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물끄러미 바라보면, 어느새 시간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벽에라도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 멈춘다.
"타협은 파렴치해 보이고 조율은 언제나 실패하니... 김용택,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내용보기

  무너져 내리는 고통의 더미들에는 여러 종류의 허접한 감정들이 있다. 그러니까 애매한 억울함이나 단단해지지 못하는 분노, 불편한 죄책감과 금세 날아가버리는 가벼운 슬픔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폐허가 된 나란 존재를,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물끄러미 바라보면, 어느새 시간은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벽에라도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 멈춘다. 


 
   날개 곁으로

 

  아침이 아침으로 밤이 밤으로 그리하여 너를 지나 드디어 내가 돌아가고, 돌아가고, 돌아가는 그곳,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다 가는, 모든 것들의 곁, 바람 같은 봄날이 나비 나는 봄날을 지나 산제비꽃 핀 몇 개의 무덤을 지나 검은 바위 넘어 바람이 쉬는 날개 곁으로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들은 앞으로도 알아차리기 힘들 것들이다. 홍제천 머리 위를 지나는 내부순환로를 지탱하는 교각들에는 꽤나 크게 (아마도) 프린트된 명화들이 붙어 있다. 교각들 사이로 오리가 헤엄치고 명화들을 뚫고 왜가리가 날아간다. 강아지풀이 거칠게 자라고 튀어나온 바위에 숨은그림처럼 자라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아이들은 큰 걸음으로 징검다리를 건너 간다.

 

  “나비는 얼마나 먼 데서 달려오다가 날개를 달고 날아 올랐을까요” - <나비가 날아오르는 시간> 중

 

  한동안 나는 책을 읽는 척만 하고 있다. 시집을 읽을 때는 먼 산을 겨냥하고 소설을 읽을 때는 어떤 바다를 가늠한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풀이 자라고 자갈이 굴러다닌다. 멈출 생각이 없는 성장이고 움직임이며 멈추도록 해야겠다는 의지도 박약하다. 눈에 띄는 활자가 없으면 박제된 텍스트를 현재로 소환하기도 하였는데, 이제 그런 적이 언제 있기라도 하였나 시치미 떼고 허송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버린 시간

 

  사람들이 버린 시간 속에 산다
  담요로 무릎을 덮고
  강 쪽으로 앉아 시를 읽는다
  지붕에는 눈이 쌓이고
  눈을 안고 물속으로
  가라앉는 돌이 되어

 

  가면을 쓴 채로 삶에 들이닥치는 많은 손님들을 환대하였다. 정돈되지 않은 표정들은 대충 구석에 던져 놓고 천 쪼가리로 덮어버린 것이다. 들춰서 드러내려고 한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적당히 교체하였고 어느새 패턴이 생겼으며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패턴에서 벗어나거나 타이밍을 놓치면, 과거에는 주로 머리를 쥐어뜯었고 이제는 고작 머리를 부여잡는다. 

 

   꿈을 생시로 잇다


  
  달빛으로 시를 썼다
  달빛이 견디기 힘들면 가만가만 집을 나와
  달이 내려준 산그늘까지 걸어가
  생각을 접어주고
  발자국을 거두며 돌아왔다
  가난하고 가난하여서
  하나하나가 일일이 다 귀찮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시를 쓰다 잠이 깨면
  연필이 손에 꼭 쥐어져 있어서
  꿈을 생시로 잇기도 하였다

 

  모두에게 단어가 있고 문장이 있고 말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 나는 한 번씩 모두를 모아놓고 단어며 문장이며 말이며 이야기까지 모아놓고 한꺼번에 부서지는 모양을 상상한다. 내가 이미 대면한 것들을 무너뜨리고 아직 대면하지 못한 것들을 흥미롭게 기다리고 싶다. 타협은 파렴치해 보이고 조율은 언제나 실패하니 삶에 걸맞는 칭추는 여태 찾지 못하였다.

 


김용택 /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문학과지성사 / 88쪽 / 2021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22.07.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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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나부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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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보이는 시인의 맑고 밝은 감정이나 사랑시를 이야기할 때 보이는 엄청난 감정의 깊이가 이 시에서는 가끔 비친다. <서정시>를 읽고서도 한참을 생각하고 1985년에 나비와 나부 사이에서도 한참을 생각한다.        시인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도, 봄과 가을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문장들 속에서 산문과 다른 시문장이 주는 생각의 끝이 무한대로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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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보이는 시인의 맑고 밝은 감정이나 사랑시를 이야기할 때 보이는 엄청난 감정의 깊이가 이 시에서는 가끔 비친다. <서정시>를 읽고서도 한참을 생각하고 1985년에 나비와 나부 사이에서도 한참을 생각한다. 

 

    시인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도, 봄과 가을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문장들 속에서 산문과 다른 시문장이 주는 생각의 끝이 무한대로 열린 듯 하다.

 

    시란...그냥 읽히는 것도 그냥 읽는 것도 아닌 글자를 보고 한참을 생각하고 생각하며 다시 생각하는 것임을.

YES마니아 : 골드 n********y 2022.04.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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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흥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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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변화는 마치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다시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도전과 노력, 변화를 통해야만 좋은 시를 쓰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읽은 김용택 시인의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를 보면서 변화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아는 김용택 시인이라면 섬진강 시인이라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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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변화는 마치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다시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도전과 노력, 변화를 통해야만 좋은 시를 쓰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읽은 김용택 시인의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를 보면서 변화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아는 김용택 시인이라면 섬진강 시인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있고 서정적인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예쁘기는 하지만 재미가 없는 시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를 보면서 시인의 시에 대한 변화를 상당히 체감할 수 있는 한 권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이미지를 털어내며 한 편, 한 편 시들에 활력이 돌았고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장점인 서정적 이미지들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써 매우 노련한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고 인상적인 시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섬진강 시인, 서정 시인이 아닌 김용택 시인으로서 이번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는 매우 성공적인 한 권의 시집이라 생각하며 무척 좋은 시집으로서 시인의 앞으로의 시들이 기대되도록 만든 매우 만족스러운 한 권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p*****9 2021.10.10. 신고 공감 0 댓글 0